73화 타락 성기사 (1)
-뭐? 그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서?
-아무래도 전에 훼라리 테이밍할 때 함께 다녔던 걸 기억한 사람이 있나 봐. 다 알고 귓말 준 거고 충분히 보상도 할 테니까, 네 신상에 대해 순순히 말해 달라고 하더라…….
아직 아이디 변경을 밝히기 전이라 다소 방심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조사해서 알아냈다고?
-그래서 말했어? 모른다고 잡아뗐어야지!
-당연히 계속 모른다고 말했지. 그랬더니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결국 척살 걸어서 타연 접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협박하더라. 내가 알든 모르든 자기는 상관없고, 네 정보를 안 넘기면 무조건 척살하겠다고.
물론 누군가 센츄라 화산 지대에서 우릴 봤을 수도 있고, 내 정체가 밝혀진 다음에 그 사실을 기억해 낼 수도 있다.
하지만 명확한 증거도 없으면서, 심지어 그냥 게임 내에서 알게 된 지인 사이일 수도 있는데 척살부터 하겠다고 협박을 한단 말인가?
-개 같은 자식! 무슨 증거도 없으면서 척살하겠다는 말부터 나와! 괜찮아. 만약 잘못되면 내가 피닉스 통해서 전용 사냥터 출입이라도 시켜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알겠지?
-나 혼자라면 내가 이렇겠냐? 나뿐만이 아니야……. 다리우스 그 개새끼, 우리 세인트 길드 전원에게 척살령을 내렸어.
쿵.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솔플 위주로 게임을 하는 이유.
거기엔 남에게 피해를 보는 것도 싫어하지만, 그만큼 나도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꺼리는 성격인 영향이 컸다.
한데 나 때문에 현중이뿐만 아니라 세인트 길드 전체가 피해를 보게 생겼다니…….
물론 놈이 노린 건 아니었겠지만, 내가 극혐하는 부분을 기가 막히게 찔러온 공격이었다.
-안 되겠다. 일단 날 안다고 불어. 실제로는 모르지만, 예전 매그넘 시절에 파티하면서 친해진 사이라고. 한 번 꼬드겨서 정보 빼보겠다고 말해서 시간부터 버는 게 좋겠다.
-뭐라고 말해도 안 통할 거야. 마지막에는 길드 전원 척살을 바로 진행하겠다고 통보하더라. 그 말 듣고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와중에, 사냥 중이던 길드원 하나가 태성한테 뒤치기 당했다는 글이 길드 채팅창에 방금 올라왔어. 그거 보고 바로 로그아웃해서 전화하는 거야.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냐? 진짜 제대로 멘붕 상태다 나.
-미안하다 현중아. 이건 명백한 내 실수야. 내가 레드 드레이크를 테이밍하고 싶어서 너무 방심했던 거 같다. 어떻게든 처리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가 지금 바로 로그인해서 놈한테 귓말 넣어볼게.
-괜찮겠어? 그렇다고 네 신상을 밝히면 안 돼. 알아내면 뭘 어떻게 할지 모르는 놈들이잖아.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전화를 끊은 후, 난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잠시 생각해 봤다.
허나 시간이 없기에 빠르게 마음의 결정을 내린 후, 로그인해서 다리우스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상대방이 당신의 귓속말을 차단한 상태입니다.]
‘아! 저번에 내가 먼저 차단해서 이 자식도 차단한 상태구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그냥 일도양단에게 귓속말을 넣어보았다.
다행히 녀석은 날 차단하지 않은 상태였다.
(일도양단: 여~ 오랜만이네? 웬일?)
(나: 호구새끼야 잘 있었냐? 너희는 여전히 추잡하게 겜하고 있더라?)
(일도양단: 여전히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추잡한 건 우리 아이템 주워 먹고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 너 아니었냐?)
(나: 됐고, 내가 왜 귓말했는지 알고 있지? 다리우스한테 차단 풀라고 해. 원하는 대로 대화해 주겠다고)
(일도양단: ㅋㅋㅋ 하도 차단 박는다고 유명해서 아껴뒀더니, 지가 먼저 차단 풀어달라고 하는구나. 알겠다, 일단 형님께는 말씀드려보지)
나도 차단을 풀고 잠시 기다리니 결국 다리우스에게서 귓속말이 들어왔다.
(다리우스: 날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나: 게임 내에서 저를 어쩔 수 없으니 치졸한 방법을 쓰셨더군요? 그저 게임하다 알게 된 지인을, 그것도 아무 상관도 없는 길드 전체에게 척살령을 내리다니요?)
(다리우스: 치졸? 저급한 말투는 여전하군요. 지인이라는 성기사 분은 당신의 정보를 밝히지 않아서 그런 게 맞지만, 세인트 길드는 원래 조금 더 크기 전에 밟아 두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길드 간의 세력 다툼이라고 보는 편이 맞겠죠.)
(나: 닥치시지! 사람들이 그따위 말을 믿을 거 같아? 하여간 너희는 더러운 짓만 골라가며 다 하는구나?)
(다리우스: 뭘 그리 발끈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들이 그리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역시 실제 오프라인에서도 알고 지내는 사이가 맞는 것 같군요?)
(나: 매그넘 시절 내가 쭉 솔플 겜만 했던 거 이미 다 조사 끝났을 텐데 그런 소리를 해? 축복받은얼굴님은 파티 사냥하다가 우연히 알게 됐을 뿐, 다른 세인트 길드원은 한 명도 만났거나 아는 사람도 없다. 그저 너희가 하는 짓들이 게임 내에서 하는 행동치고는 너무 악질이라서... 그래서 빡친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지?)
(다리우스: 하하! 당신은 확실히 특이한 사람이군요. 나라면 상관도 없는 길드라면 어찌 되든 신경도 안 쓸 텐데 말이죠. 아무튼 저도 무리한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조사하고 분석한 결과, 당신은 상당히 이기적이면서 조심성이 많은 사람. 쉽게 자신의 정보를 넘기거나 신검을 포기할 거라고는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검을 포기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이 시점에 뜬금없이 현중이에게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어쩌면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말투를 바꿔 되물었다.
(나: 원하는 바가 뭡니까? 본론을 말해 보세요.)
(다리우스: 당신이 신검을 포기하지 않아도 서로가 만족할만한 방법을 제안하죠. 지옥불의 마신검을 뺏을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 간의 원한도 잊고, 연관된 사람들에게 척살령 내리는 것도 바로 그만두겠습니다. 성공한다면 보상으로 5천만 골드를 드리죠.)
‘…….’
상상조차 못 해본 다리우스의 제안에 한순간 할 말을 잃었다.
놈이 원하는 게 내 신검이 아니라, 지옥불의 마신검이라고?
(다리우스: 애초에 내가 신검을 드랍하도록 연합했던 주축은 피닉스와 아틀란티스, 그리고 올림푸스였습니다. 사실 주운 당신은 그저 운이 좋았던 거지, 제 직접적인 원한의 대상이라고 하기엔 어폐가 있죠. 피닉스의 지옥불, 그 새끼의 마신검을 뺏는다면 제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을 것 같군요.)
(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뭘 어떻게 협조한다는 말입니까? 전 피닉스 길드원도 아닌데 말이죠?)
(다리우스: 요즘 지옥불과의 신뢰가 두터워진 거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방송을 보아하니 더욱 잘 알겠더군요. 밝혔던 정보대로라면 지금은 타이탄의 소환이 쿨타임 중이겠죠? 타이탄 소환이 불가능한 기간 동안, 당신이 미끼가 되어 어떻게든 지옥불을 필드로 나오게 해주십시오.)
(나: 나보고 배신자가 돼라 이 말입니까?)
(다리우스: 어차피 지옥불은 모를 겁니다. 당신도 같이 함정에 빠진 척하다가 펫인 드레이크를 타고 도망가면 의심하지 못하겠죠. 어떻습니까? 협조할 마음이 듭니까? 아니면 앞으로도 이렇게 당신과 연관된 모든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며 게임을 계속할 겁니까?)
당연히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곧바로 헛소리하지 말라는 답변을 보내려다가, 잠시 내 머릿속을 스쳐 가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나: ....분명 5천만 골드라고 했죠?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
(다리우스: 오! 당신도 드디어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 시작하는군요. 일단 먼저 피닉스에 가입하세요. 그리고 최대한 빨리 필드로 끌고 나오십시오. 당신과 함께라면 타이탄 소환이 안 되는 중이더라도, 지옥불도 어느 정도 안심하고 나올 수 있겠죠.)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에 녀석과의 대화를 끝마쳤다.
녀석은 오늘 방송을 통해 타이탄의 정보를 듣고, 즉흥적으로 이런 치졸한 계획을 세운 것이 분명했다.
타이탄의 재(再)소환 대기 시간.
결투와 히드라 레이드로 HP가 80% 이상 닳아버린 우리는, 현재 3일이 넘는 기간 동안 소환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원래라면 이 상태에서 필드로 나가는 위험한 짓은 당연히 하지 않을 것.
하지만 반대로 적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떻게든 이 3일 안에 필드로 나오게 하기만 한다면 마신검을 뺏을 수도 있는 절호의 찬스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같은 상황이었지만, 난 신검에 맞춰 리빌딩한 마쉴 캐릭에다가 은신과 레드 드레이크 펫까지 있어 타이탄 없이도 죽이는 게 상당히 힘들었다.
그러니 다리우스는 일단 신검 대신, 마신검으로 목표를 바꾼 듯싶었다.
“하지만 그 얘기는…… 너도 마신검을 먹으려면 필드에 나올 수밖에 없다는 소리지!”
녀석의 생각대로 일이 잘 풀려 지옥불이 마신검을 드랍한다 하더라도, 그걸 다른 유저가 줍게 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그러다가 마신검을 주운 부하가 멀린처럼 먹고 튈 놈이면 어쩐단 말인가?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다리우스라면, 지옥불을 죽이는 순간 마신검을 직접 줍기 위해 그 자리에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건 역으로 다리우스를 죽일 수 있는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녀석과의 대화 도중 난, 지옥불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대신 오히려 이중 함정으로 다리우스를 몰아넣을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생각을 정리되자, 곧바로 지옥불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나: 지옥불님, 산드로입니다. 생각보다 이르지만.... 어쩌다 보니 다리우스를 잡을 좋은 기회가 생겼습니다.)
* * *
[수석 행정관 홀테인의 전언 : 오크 로드의 출몰]
* 붉은 갈기 오크족의 로드 줌바카(!)가 영지 부근 쉬폰 숲에 출몰했다는 사냥꾼들의 제보가 있습니다.
* 줌바카(!)를 토벌하여 영지의 주민들을 수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이탄 쇼를 마치고 만 하루가 지난 지금, 피닉스의 길드 채팅창에 익숙한 알림 창이 하나 링크됐다.
[롤래스: 와! 드디어 떴구나! 잡자 잡어!]
[가디언즈9: 오, 사냥 접고 바로 참여합니다 ㄱㄱㄱㄱ]
[울산작은애기: 이번엔 도끼 떨구려나ㅋㅋㅋ 저도 참석합니다!]
히든캬드가 받자마자 공유한 칼젠 성의 필드 보스, 오크 로드의 리스폰 알림이었다.
그걸 본 나는 곧바로 다리우스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나: 오크 로드가 리스폰 됐습니다. 위치 정보 링크 드리니 이쪽으로 오시면 지옥불을 볼 수 있을 겁니다. 줌바카(!))
(다리우스: 협조해 줘서 고맙군요.)
어제 나는 지옥불과의 대화 끝에, 결국 피닉스 길드에 가입했다.
-리스크는 있지만 시도해 볼 만합니다. 대관식 때 한 번 죽었지만, 사실 다리우스는 그 외에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죽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 저희에게 죽게 된다면 단일 길드에게 최초로 죽는 것이 되겠죠. 그건 타연 내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사건이 될 겁니다. 제게 떠 있는 국왕 암살 퀘스트는 별개로 하더라도…….
-감사합니다. 저도 지금이 아니라면 다리우스를 죽이는 게 앞으로 더더욱 힘들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태성 측이 먼저 비겁하게 나온 이상, 저희 측에서도 거리낌 없이 함정을 준비할 수 있으니 한편으론 잘된 일이죠.
-그 준비…… 단단히 해야겠군요. 어마어마한 월척이 될 테니 말이지요.
그렇게 결정된 장소가 바로 이 오크 로드 레이드 현장이었다.
칼젠 성 지역은 여전히 일반 유저들이 거의 없는 곳.
따라서 혼전을 피한 채로 다리우스의 뒤치기 부대와 부담 없이 싸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오크 로드가 리스폰되면, 지옥불도 레이드에 참여하는 척하며 필드에 나선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다리우스 패거리가 도착하면, 나를 포함한 숨어 있던 피닉스의 도둑 부대가 역습을 가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피닉스에도 타 길드와 마찬가지로 태성의 스파이가 가입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번 역습 작전은 절대로 새어나가선 안 되는 극비였다.
따라서 지금 채팅창에 참여하겠다고 글을 올리는 길드원들은, 대다수가 아무것도 모른 채 정말 순수히 레이드에 참여하는 유저들이었다.
오직 라스트챤스가 이끄는 궁수 부대와 길드 내 최고 레벨 수준의 도둑 유저 10여 명, 그리고 소수의 간부진을 제외하고는 이번 다리우스 사냥 작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무했다.
‘디바인 무기가 괜히 디바인 무기인 줄 알아? 타이탄이 없더라도 템빨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지옥불이 네 생각처럼 그리 쉽게 죽어 줄 사람인 것 같아?’
다리우스가 어떤 식으로 암습할런지는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보스 몹 뒤치기라는 유리한 상황으로 공격해온다 해도, 지옥불 또한 얼마 전까지 랭커의 몸이었던 타연 톱급의 유저였다.
길드원들에게 뒤덮여 보호받으면서 마신검까지 착용한 지옥불을 잡기 위해서는, 다리우스도 만만치 않은 숫자의 태성 랭커진을 대동한 채로 직접 올 것이다.
허나 그렇다 하더라도 다리우스는 이번 일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바로 내가, 지옥불의 곁에 있을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