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길드 창설 (1)
『오늘 정말 놀라운 소식을 전해드리게 됐습니다. 얼마 전 저희가 방송으로 대대적으로 보여드렸던 마신검과 데이네스라는 타이탄. 그 엄청난 위력의 디바인 템을, 피닉스의 지옥불 님이 어제저녁 드랍했다는 소식입니다.』
『현재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많으나, 워낙 피닉스 길드에서 함구하고 있는 탓에 정확한 경위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칼젠 성 인근에서 피닉스와 태성 길드 간에 벌어진 소규모 필드전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다수의 제보가 있네요. 』
태성도, 피닉스도 히든캬드의 어제 있었던 배신에 대해 말을 꺼낸 유저는 없었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진 폭포 인근에 레이드를 구경 중이던 몇몇 유저의 입까지는 막지 못했다.
덕분에 만 하루 만에, 전 서버의 타연 유저들은 지옥불이 태성에게 죽어 마신검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약 제보대로 태성 길드가 마신검을 먹었다면, 역시 다리우스 님에게 검이 전달됐겠죠?』
『확답드릴 순 없겠습니다만, 다리우스 님에게 뭔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오늘 새벽 0시를 기점으로, 랭킹 게시판에서 다리우스 님의 아이디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거든요.』
『며칠 전 지옥불 님에게 일어났던 일과 비슷한 일이군요! 아무래도 마신검을 얻게 되면 레벨 다운이란 페널티가 있다는 소문이 사실 아니었을까요? 그렇다면 역시 마신검은 다리우스 님에게로?』
『신검에 이어 마신검까지 손에 넣어본 유일한 사람. 역시 다리우스 님은 항상 타연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군요.』
“이런 씨발!”
덜컥!
차분히 보려 했지만 더는 못 참고 TV 리모컨을 던지려 들었으나, 끝내 던지진 못했다.
부서지면 뒤처리만 귀찮아질 거란 사실이 떠올라 분노를 억누른 탓이었다.
“이놈의 빌어먹을 성격……. 강지환, 네가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 그 짧은 순간에도 감정이 컨트롤 될 만큼? 그런 자식이 왜 역으로 다리우스가 판 함정일 거란 생각은 못 한 건데? 응? 이 등신 새끼야!”
TV속 아나운서와 인터넷 게시판의 유저들은 모른다.
다리우스가 마신검을 가져가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멀리서 구경하던 유저들도 정확히는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자세히 알진 못했다.
심지어는 드랍된 마신검을 주워간 것이 히든캬드란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가뜩이나 충격이 클 지옥불을 걱정한 피닉스 길드원들은, 친형제 같았던 부길마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져봤자 좋을 게 없기에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저따위 다리우스를 치켜세우는 TV 속 거지 같은 대화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내 어릴 적 트라우마를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박태후, 그 자식은 변한 게 하나도 없어. 항상 비열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득만 생각할 뿐……. 지 목표와 체면에 걸리적대는 사람은 거리낌 없이 짓밟아 버리는 쓰레기야!’
덕분에 어젯밤 이후로 타연에 한 번도 로그인하지 않고 온종일 방에만 처박혀 있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겠답시고 한 내 제의 때문에, 결국 피해는 지옥불 님이 봤다…….’
그 사실이 너무나 죄스럽게 느껴져 도무지 타연 속에서 지옥불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혼자 온종일 TV만 보고 있다고 타연 속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마신검을 손에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리우스의 분은 끝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띠리리리!
나를 찾는 현중이의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어. 나다. 어떻게 됐냐?
-지환아, 만나서 얘기하자. 지금 너네 집 앞 편의점 앞에 와있다.
-그래. 금방 나가마.
현중이의 침울한 목소리가, 만나기도 전에 무슨 얘기를 할 건지 이미 다 말해주는 것 같았다.
* * *
“변한 게 없다. 하루 동안 혹시나 하고 살펴봤는데 척살령을 거둘 기미가 안 보여. 귓말도 다 씹고…… 오늘만 벌써 길드원 절반이 당해서 다들 마을에만 계셔. 이대로는 답이 없는 것 같다.”
“역시 그러냐? 미안하다 정말. 내가 너한테 할 말이 없다…….”
“네가 뭔 잘못이라고 죽상이냐? 박태후…… 다 그 개자식이 문제인 거지.”
“내가 널 끌어들여서 그런 거잖아. 난 말야, 솔직히 네가 나 때문에 얽히는 일이 생기더라도 어느 정도는 챙겨 줄 자신이 있었어. 만약 그렇게 되면 검도 그냥 줘버릴 생각이었고……. 근데 박태후가 뜬금없이 너희 길드를 걸고넘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자식이 이렇게 악랄한 놈이라는 걸, 어느새 까먹고 있었나 보다.”
그저 해왔던 대로 쭉 솔플만 할 걸 그랬다.
그랬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십 수년간 멀쩡히 잘 지내던 길드 하나가 박살 났다고 생각하니, 정말 쥐구멍이라고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탓이 아니라니까? 나도 놈을 겪어보니 알겠더라. 네가 그 자식을 왜 그렇게 싫어하고 복수하려고 드는지……. 놈은 그냥 이런 일을 벌이면서 지 기분이나 푸는 거야. 지 말 한마디로 길드 하나 날려버리면서, 지가 얼마나 대단한 놈인지 느껴보는 거지. 놈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돌을 던진 거고…… 우리 길드는 이번에 우연히 그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 차례가 된 거지…….”
“현중아……. 너희 길드,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 아무래도 이대로 버티는 건 힘들겠지?”
“순진한 유저들이라면 기대라도 할지 모르겠는데, 길마 형님을 비롯한 대부분의 길드원들은 이미 포기한 것 같아. 유저에게 건 척살령이라면 몰라도, 태성이 길드를 대상으로 내린 척살령을 거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유독 태성 길드만이 필드 곳곳에 자신들만의 통제 사냥터를 운영하는 이유.
그리고 거대 길드들이 그런 태성의 폭거에 제대로 반항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고 있는 이유.
그건 태성이 자신들과 척을 진 길드에게 조금의 자비도 없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타연 초창기에는 태성과 경쟁하는 길드들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다른 길드들과 달리 태성은, 한번 길드전이 벌어지면 마치 게임을 접게 만들고 말겠다는 듯이 철저히 짓밟고 무너뜨렸다.
그런 그들의 전략은 생각보다 효과적이어서, 지금에 이르러서는 태성의 길드 마크만 달고 있으면 어떤 시비에도 휘말리지 않을 만큼 독보적인 권위를 자랑하게 되었다.
티에스국의 건국식 날, 괜히 거대 길드들이 단합해서 다리우스 암살에 매달렸던 것이 아니었다.
“그럼…… 세인트라는 이름은 버리게 되는 거야?”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이름만 바꿔서 새로 만들면 계속 죽여댈 테니, 길드원들도 뿔뿔이 흩어져야겠지…….”
“현중아, 그러지 말고…… 그냥 너희 길드원들 모두 피닉스 길드로 넘어가는 건 어떠냐?”
“뭐? 피닉스?”
“응. 어차피 피닉스는 앞으로 태성과 전면적으로 싸우게 될 테니까 너희 길드가 합병하겠다면 환영일 거야. 이번에 당한 것도 그렇고 내가 주선도 하고 하면, 1군이나 2군으로 받아줄 테고 말야…….”
피닉스로 합병되는 건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 멍하니 캔맥주만 마시던 현중이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괜, 괜찮을 것도 같은데? 우리 길드가 모은 업적치가 생각보다 많으니 도움도 될 거야. 피닉스는 갖고 있는 성도 많으니까 전용 사냥터에서 사냥하면 태성 놈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테고!”
“그렇지? 내가 지옥불 님께 말씀드려볼게. 아, 근데 이런……,”
“응? 왜?”
“그러고 보니 지옥불 님이 괜찮으신지 모르겠다. 어제 사건 이후로 타연에 접속을 안 했거든……. 괜히 내가 다리우스를 잡자고 그런 것 같아서 너무 죄송스러워서…….”
“야 이 자식아, 지옥불 님이 검을 떨군 게 네 잘못이야? 히든캬드가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길마 뒤통수를 친 놈이니 내버려 뒀어도 언젠가는 배신때렸을 거야. 따지고 보면 오히려 너까지도 위험할 뻔했어! 근데 왜 네가 지옥불 님한테 미안해?”
“아 씨앙, 모르겠다! 뭔 놈의 게임이 이렇게 머리 아프고 마음 아프게 만드냐? 현중아, 그냥 주머니 노가다나 소소하게 했을 때가 좋았던 것 같다! 놈과의 싸움…… 내 주제에 괜히 시작한 걸까?”
현실에서는 ‘폭력’과 ‘익명성’이라는 수단이 사용되지 않기에, 어찌 보면 가상현실 세계에서의 인간관계는 놀랍도록 솔직하고 잔인할 때가 많았다.
타연 안에서의 원한, 그리고 거대 길드 간의 대립.
그 어떤 것에도 끼지 않은 채 순수히 게임을 즐기던 때가 갑자기 그립게 느껴졌다.
“이미 늦었다. 네가 신검을 사용하기로 시작한 날부터, 그리고 나 또한 박태후 그 자식이 우리 길드를 건든 순간부터! 이 싸움은 멈출 수 없게 된 거야. 지환아,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할 말이 있다.”
“어? 뭔데?”
“우리 세인트 길드원들 피닉스 길드로 흡수된다는 의견? 좋아. 좋긴 좋은데, 나 그리고 몇몇 길드원들은 넘어갈 생각 없다.”
“왜? 설마 이 일 때문에 게임 접으시겠다는 분이 계셔?”
“정반대야. 우리를 먼저 건든 태성 놈들에게 제대로 복수하시겠단다. 게임을 접을 때 접더라도, 때리는 시늉이라도 해보셔야 속이 시원하시겠대. 무한 필드전을 해서라도!”
“헐? 정말? 역시 네가 있는 길드답구나……. 아무나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할 텐데 대단하시네……. 그런 분이 몇 분이나 되셔?”
“많지는 않아. 아무래도 힘든 일이니까. 길마 형님과 친한 누님, 이렇게 두 분. 그래서 말인데…… 너 혹시 길드 만들어볼 생각 없냐?”
“뭐? 길드? 내가?”
“그래. 여기 오기 전에 형님 누님과 통화해봤는데, 이미 마음 정하신 것 같더라고. 어때? 그 두 사람…… 지금 한번 만나볼래?”
* * *
“축굴이가 산드로 님과 아는 사이라는 건 이번에 들었지만, 설마 현실 친구인 줄은 몰랐네요.”
“예전에 내 장비를 빌려 갔던 게 산드로 님이셨어요? 와, 어쩐지 현중이가 그런 부탁은 전혀 하지 않던 앤데, 친한 친구분이셔서 그랬던 거네요?
세인트 길드의 길드 마스터이신, 축복받은무빙.
그리고 길드의 메인 딜러였던, 축복받은파볼.
각각 최태규와 이서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은, 이미 따로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난 고민 끝에 현중이와 함께 이 둘을 찾아와 합석했다.
-내가 먼저 만나 뵙자고 말은 꺼냈지만,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괜찮아 정말. 어차피 평생 숨고 살 생각도 없었고, 레벨업도 하고 방송도 몇 번 탔으니 조만간 노출될 거로 생각하고 있었어. 뭣보다 나 때문에 태성한테 당하신 분들이 날 팔아먹기야 하시겠냐? 두 분 다 금수저시라며?
-하긴 나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저들이시긴 하지. 좋아, 바로 가자 그럼!
갑자기 길드를 창설하라니……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제의였다.
타고난 솔플러 성향에 길드 생활 자체를 극혐했던 나였기에, 상상조차 못 해봤던 일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공성전에 참여하기 위해 몇 번 길드를 만들어보긴 했지만, 정식으로 길드원들과 함께 길드를 창설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하지만 현중이의 말을 듣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세인트 길드의 불행은 나로 인해 일어난 일.
그러니 어떻게든 내가 책임지는 게 맞았다.
엉겁결에 원한을 맺고 게임을 접을 때까지 복수하겠다는 두 사람을 알게 된 이상, 그 두 사람이 정말로 게임을 접도록 만들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그동안 신상 노출을 꺼려 왔던 나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내가 직접 찾아봬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했던 탓에, 이렇게 형님과 누님네 길드에 폐를 끼치게 될 줄 몰랐네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산드로 님이 우리 길드를 팔아먹은 것도 아닌데요. 안 그래도 다리우스가 평소에 우리 길드를 탐탁지 않게 여겨 와서 그랬던 거니 신경 쓰지 마세요.”
“맞아요. 예전에 미노타우르스 킹 잡을 때 시비가 붙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놈들보다 먼저 잡아버려서…….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역시 쪼잔한 새끼가 맞다니까!”
“아, 예전에 그거요? 그게 벌써 1년도 넘은 일인데 설마 그것 때문에 그랬겠어요?”
“아냐. 이번에 그 자식이 한 짓을 생각해 보면 그러고도 남아. 마신검까지 처먹은 자식이 우리 길드를 왜 끝까지 잡아 족치겠어? 명분이 없잖아? 그냥 평소에 마음에 담아뒀던 거지.”
오랜 시간 함께 한 길드원들이라 그런지, 두 사람과 현중이는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이게 옳은 선택일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제 나 또한 이 사람들과 함께 할 생각이었다.
“두 분 다 저보다 나이 많으신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아 그럴까? 하긴 앞으로 함께 태성과 싸우려면 말을 놓는 게 편하겠구나.”
오면서 들었는데 태규 형님네 아버님은 3선 국회의원이고, 서진 누님네 집안에서는 장관만 2명이나 배출됐다고 했다.
말 그대로 ‘세인트’라는 이름이 어울릴만한 대단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
하지만 박태후와 달리 이 두 사람은, 그런 티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네. 그런데 현중이에게 듣긴 했지만, 두 분 정말 태성과 끝까지 싸우실 작정이세요?”
“그래. 피닉스에 가입한다는 의견도 좋지만, 난 세인트의 길드 마스터였잖아? 11년을 함께한 이름을 버리게 한 놈에게, 나라도 복수를 해야 속이 편할 것 같아. 앞으로 태성 놈들을 상대로 무제한 PK를 하려면, 피닉스에 들어가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아.”
“아 네……. 그러고 보니 직업을 모르고 있었네요. 서진 누님이 마법사신 건 알고 있는데…… 형님은 어떤 거세요? 아무래도 길마셨으니 탱커시겠죠?”
“뭐야? 지환이 너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구나? 형님 힐러시잖아.”
“뭐? 힐러?”
하도 자신만만하게 필드전을 벌이시겠다고 하셔서 몰랐다.
무려 힐러로 PK를 하실 계획이신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