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길드 창설 (2)
“어허, 잘 모르시나 본데 힐러도 엄연히 전투용 스킬이 있거든?”
“아, 네 네…….”
그건 잘 알겠지만, 전 힐을 받을 필요가 없는 마쉴 도둑입니다 형님.
그 말이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진 못했다.
“앞으로 플레이하다 보면 힐러가 필요할 날이 올 거야. 우리끼리만 싸울 거였으면 대충 몇 개월 필드전만 줄창 하다 접을 생각이었지만…… 네가 함께라면 다르지. 이제 우리의 싸움은,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
“오 예! 그럼 타연 안 접어도 된다! 쨘!”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형님과 누님의 죽이 척척 잘 맞았다.
“그런 의도로 말씀드린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힐러시면 앞으로 필드전할 때 많이 죽으실 수도 있어요. 아마 각오하셔야 할 거예요.”
“현중이한테 말 못 들었어? 태성 놈들 좀 잡다가 겜 접을 생각이었다니까. 솔직히 우리가 필드전 해봐야 태성한테 기스라도 낼 거라곤 생각하지도 않았어. 근데 혼자서도 태성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는 사람과 함께 한다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응? 오빠? 뭐가 가능해요?”
“태성을…… 타연에서 없애버리는 거.”
멀끔한 30대 초반의 태규 형님.
그 샤프한 얼굴에서 순간 독기가 느껴졌다.
‘하긴 지금 내색하지 않고 말씀 중이니까 그렇지, 속으로는 열불이 터지실 테지. 나만큼……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태성이 싫으실지도…….’
“형님과 누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더 이상 빼지 않겠습니다. 저희 넷, 함께 길드를 만들어 태성을 무너뜨려 봅시다!”
“오 좋아 좋아! 그럼 다시 세인트란 이름을 되찾는 날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는 거다? 약속?”
“네! 약속할게요 누님. 그리고 형님!”
“응?”
“다른 건 몰라도 다리우스는 꼭 제가 잡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하하! 좋다. 그 말을 들으니 정말 다리우스를 잡을 날이 오겠다는 희망이 보인다? 자, 건배!”
나를 원망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다리우스와 태성을 잡으면 용서해 주겠다는 두 분 앞에, 결국 3년간의 솔플 생활을 청산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운명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리우스가 마신검과 로드급 타이탄을 갖게 되면서 더는 혼자서 잡을 각이 보이지 않는 순간, 함께할 전우가 생겼으니 말이다.
마신검과 타이탄까지 갖게 된 다리우스를, 여전히 나 혼자 상대하고 쓰러뜨리겠다고 고집하는 것은 지독한 오만이었다.
그러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녀석을, 그리고 태성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팀 단위의 인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오직 다리우스와 태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뭉친 사람들.
남은 게임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것이기에, 소수지만 막강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난 이 소수 정예의 인원들을 타연 최고 수준으로 성장시킬 것이다.
만약 이 중 몇 명이라도 타이탄 라이더라도 된다면,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누구도 무시 못 할 막강한 정예 길드 취급을 받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태성(太星)을 잡기 위한, 소수 정예 길드 ‘버닝스타(Burning Star)’가 창설되었다.
* * *
히든캬드의 배신이 있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고, 또 흘러갔다.
먼저 지옥불은 그 사건 이후로 3일간 접속을 끊고 두문불출했다.
마신검을 잃었다는 충격보다는 믿었던 부길마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던 일이었던 듯싶었다.
하지만 그는 예전부터 전설이라고 불리던 남자.
패배나 힘든 일이 찾아올 때마다 이겨내지 못하고 굴복했더라면, 정상이라는 타이틀을 그 긴 세월 동안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그이기에, 이번에도 상처를 이겨내고 오히려 눈빛이 더욱 깊어진 채로 모두 앞에 보란 듯이 나타났다.
-그저 아이템을 하나 잃어버렸을 뿐입니다. 한번 얻었던 만큼, 분명히 다시 또 얻을 수 있습니다. 이번이 아니었더라도 언젠가는 비슷한 일이 벌어졌겠지요. 배신자를 색출해 냈으니 차후에 더 큰 피해를 예방하게 되어 다행으로 여기기로 합시다.
그야말로 리버스, 피닉스, 그리고 지옥불이라는 이름 그대로…….
그는 그 무엇에도 꺾이지 않고, 다시금 의지를 불태우는 불꽃 같은 남자였다.
-산드로 님이 암습의 순간, 얼마나 애써 주셨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설마 히든캬드가 배신할 줄은 누구도 몰랐기에 벌어진 일이니, 괜히 저에게 그렇게까지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다리우스를 너무 우습게 생각했던 제 잘못이 큽니다. 이대로였다면 시간이 걸릴지라도 피닉스가 태성을 넘어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시점이었는데, 제가 드린 제의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 같아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산드로 님의 조언을 무시했던 건 다름 아닌 접니다. 욕심에 눈이 멀었던 제 잘못이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또한 새롭게 합류하게 된 세인트 길드 유저분들도 앞으로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다들 레벨과 실력이 우수한 분들이시더군요.
-제 부탁대로 받아 주셔서,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지옥불 님.
잠시 가입했던 피닉스 길드를 탈퇴하면서 나눈 대화에서도, 다시 만난 지옥불은 예전 그대로 배려심 많고 매너 좋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평생 외아들로 살아왔기에, 그리고 그동안 사회에서도 인연이 없었기에 모르고 살았던 ‘듬직한 형’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자꾸만 내게 가르쳐 주는 듯한 지옥불의 모습이었다.
사실 길드를 창설하기보다는, 이대로 피닉스 길드에 남아 지옥불에게 진 빚을 갚고 돕는 것이 낫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피닉스의 적이 태성인 건 맞지만, 놈들과의 전쟁을 위해서만 플레이하는 길드는 아니었다.
순전히 태성과의 전쟁만이 목적인 나와 새로 생긴 동료들은, 결국 피닉스에 폐만 끼치게 될 것이란 생각에 합류할 생각을 접었다.
하지만 이대로 떠나기만 하는 건 내가 너무도 싫어하는 염치없는 행동이기에, 나는 몇 가지 제의를 드렸다.
-앞으로 피닉스의, 그리고 지옥불 님의 부탁이 있다면 무조건 최대한 들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공성전, 레이드, 신규 던전 공략 등, 필요한 곳이 있다면 언제든지 요청해 주세요. 혹여 다른 디바인 무기를 얻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욕심내지 않고 최대한 협조해 드리겠습니다.
-듣기만 해도 참 든든해지는 고마운 제의군요. 감사합니다, 산드로 님.
-또한, 앞으로 제가 만들게 될 길드의 영구 동맹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먼저 저희를 배신하지 않는 이상, 절대 피닉스의 뒤통수를 치지 않는 든든한 우군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아, 새로 만들겠다는 그 버닝스타란 길드 말씀입니까?
-네. 제 성향과는 안 맞지만, 어쩌다 보니 길마를 맡기로 했습니다. 혼자 다리우스를 죽이는 일은 이제 완전히 불가능해진 것 같아서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라챤이가 그 소식을 듣고 고민을 많이 하더군요. 아끼는 동생이긴 하지만, 녀석이 무얼 선택하든지 녀석의 의견을 존중해 주도록 하겠습니다.
-네? 그게 무슨……?
-아마 곧 연락이 갈 겁니다. 그럼 앞으로 새로 만들 길드의 건투를 빌겠습니다.
지옥불의 말대로 길드를 창설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라스트챤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히캬 형님이 그렇게 우릴 배신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요. 평소 욕심은 있는 편이었어도 그건 그만큼 자존감이 높아서 그러셨던 거지, 절대 그런 짓을 할 분은 아니라고요……. 분명 피치 못할 사정이나 무슨 협박 같은 걸 받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현실에서도 이렇게 증발하듯이 사라졌을 리가 없어요!
히든캬드는 모든 연락망과 SNS 등을 탈퇴한 것뿐만 아니라, 살고 있던 곳도 황급히 이사가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그중 현실에서도 유독 친하고 자주 만났던 라스트챤스는 어떻게든 수소문해봤지만, 마치 해외나 오지로 숨은 것처럼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네 마음은 잘 알겠는데, 그렇다고 길드를 나오겠다는 건 너무 오바하는 거야. 네 생각과는 달리 히든캬드가 정말 돈 때문에 그랬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아니라니까요! 저만이라도 히캬 형님의 결백을 믿어드릴 거예요! 히캬 형님이 이렇게 배신자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게 만든 다리우스와 태성! 이놈들에게 히캬 형님과 지옥불 형님의 복수를 제대로 해 주려면, 제가 길드 밖에서 싸우는 수밖에 없어요. 피닉스의 간부로 남은 상태로는, 태성을 상대로 무차별 PK를 할 수 없을 테니깐 말이죠!
-아무리 그래도 너마저 피닉스를 떠나면 지옥불 님에게 너무 죄송한데…….
-지옥불 형님이 다 허락하신 일이에요. 어차피 태성과의 싸움이 마무리되면 결국 피닉스로 다시 돌아갈 테니 말이죠. 그러니 받아 주세요, 제발. 산드로 형님 말고는 타연 내에서 태성과 다리우스를 제대로 잡을만한 인물이 없어요!
동기는 다르지만 추구하는 바는 같았다.
결국 난, 라스트챤스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우리 버닝 스타 길드는, 총 5명의 소수 정예로 타연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산드로: 드디어 오늘로써 지겨운 렙업이 끝난다!]
[라스트챤스: 와! 벌써 2주가 다 끝난 거예요? 부럽다... 난 경험치 추가 업적 효과가 고작 10%라서 아직도 한참이나 레벨업해야 하는데...]
[산드로: 형님 먼저 태성 조지고 있을 테니깐, 넌 잠잘 시간도 아껴서 사냥하고 있어. 나중에 다리우스 킬할 때 혼자서만 빠지기 싫으면 말야.]
[라스트챤스: 아, 이거 정말 너무하시네~]
[축복받은얼굴: 예고했던 대로 오늘부터 시작인 거냐?]
[산드로: ㅇㅇ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그 날이 시작되는 거지. 으흐흐흐!]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지만, 이제는 길드 채팅창으로 대화하는 것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앞으로 나와 같이 혈투를 펼쳐나갈 든든한 전우들.
하지만 나와는 달리, 나머지 사람들은 아직 준비가 많이 모자란 상태였다.
물론 나 또한 본격적으로 태성과 싸우기에 준비가 다 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레벨이 조금 낮은 편이라는 것.
그게 내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이었는데, 그것도 오늘로써 어느 정도 끝나게 되었다.
휴포드 산악 마을, 그리고 가트웰 산맥 지역.
현존하는 최고 레벨의 사냥터라 사람들이 찾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2주간 폐관수련과 다름없는 사냥을 반복했다.
심지어 간간이 타이탄을 소환해서 몹몰이 사냥까지 하며 레벨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생각했던 일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했다.
335레벨 달성.
이 정도면 유저들을 상대로 명중률이나 회피율에서 손해를 보는 구간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필드 사냥, 경험치 추가 업적, 운영자가 준 경험치 추가 버프.
이 세가지 조합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엄청난 폭업이었다.
[축복받은파볼: 드로야, 그럼 어디서부터 PK 시작할 거야? 우리가 구경하러 가도 될까? 대리만족이라도 하게~]
[축복받은무빙: 축볼아, 괜히 걸리적거리지 말고 넌 얌전히 레벨업에나 전념하고 있어. 얼른 더 커야지 앞으로 같이 제대로 싸우지!]
[축복받은파볼: 힝~ 같은 인던만 돌다 보니 죽겠단 말이에요. 아, 이놈의 오크 새끼들 귀엽기라도 하면 모르겠는데 징그럽기만 하고!]
[축복받은얼굴: 아 누나! 채팅 좀 그만해요 쫌! 기껏 몹 몰아 왔는데 공격을 안 하면 어떡해요!]
[축복받은파볼: 앗 쏘리~]
길드원들도 제대로 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레벨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세인트 길드가 사라진 후에도 태성의 척살 명단에 남았지만, 다행히 피닉스의 도움으로 칼젠 성의 전용 사냥터를 이용할 수 있어 레벨업에는 문제없었다.
화기애애해 보이는 길드 채팅창의 분위기와는 달리 길드원들은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매일같이 근 10시간이 넘는 시간을 오직 사냥에만 몰두했으니, 확실히 모두들 평범한 유저는 아니었다.
[산드로: 다들 죄송합니다. 일단 저부터 시작할 테니 서둘러서 따라오세요! 전 오늘부터 머더러 인생 시작합니다!]
이제까지 타연 속 유저들은, ‘척살’이란 것이 몇몇 대형 길드만의 전유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로서 그 고정관념은 무참히 깨지게 될 것이다.
바로 오늘부터 내가 진행할 태성 길드원들에 대한 무차별 PK.
혼자만의 ‘필드전(Field戰)’이 곧 개시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