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무한 필드전 (1)
“너 어제 그 글 읽어봤어?”
“뭐 말이야?”
“산드로가 어제 공홈 게시판에 글 올렸잖아. 오늘부터 우리 길드원들 대상으로 무차별 PK 하겠다고.”
“크크, 그 관종 자식 이번에도 또 관종짓 시작했네? 지가 타이탄 탔을 때나 날아다니는 거지, 필드에서 PK 짓거리하다가는 하루도 안 돼서 다굴 맞고 신검 떨굴 텐데?”
“흠…… 아무래도 그렇겠지?”
“당연하지! 정말 그렇게 글 올렸다면 제발 여기 좀 와서 PK 해줬으면 좋겠다! 나도 신검 한 번 운 좋게 먹어서 인생 좀 펴 보게!”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가 있다.
이 경우가 바로 그 정확한 예시라고 할 수 있었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제가 그것도 하나 못 들어 주겠어요?”
“누, 누구야?”
2인 파티로 스켈레톤 메이지를 잡고 있던 도둑과 성기사.
태성 길드 마크를 달고 있는 이들 앞에, 내가 대화를 걸며 은신을 풀며 스르륵 나타났다.
“헉!”
“사, 산드로다!!”
“네, 접니다, 산드로. 말씀하신 대로 나타나 드렸으니, 어디 제 검 한번 원 없이 뺏어 보세요!”
[연속 베기!]
PK를 할 때는 공격력이 강한 놈일수록, 그리고 HP가 적은 놈일수록 빨리 잡는 것이 상식!
도둑 캐릭을 향해 연속 베기를 넣고 도망가는 뒤통수에 평타 두, 세 방을 넣고 나니, 싱겁게도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바로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있는 성기사에게 그림자 밟기로 따라붙었다.
그러자 성기사는 천상의 방패를 사용해 무적 상태를 활성화한 뒤, 뒷걸음질 치며 도망쳤다.
“너, 너! 진짜 우리 태성을 상대로 필드전을 하려는 거야? 이거 완전히 돌은 놈이었네?”
“관종 놈에 이제는 돌은 놈까지 추가된 겁니까? 그냥 그딴 거는 다 집어치우고, 이제부터 사냥할 때는 하나만 기억하고 플레이하세요!”
“뭐? 뭐, 뭘 기억하라는 건데?”
“앞으로 태성 마크 달고 필드에 나올 때는, 죽을 각오 하고 나서라는 거요.”
10초간의 무적 상태가 끝나자, 곧바로 약점 포착을 써서 성기사도 순식간에 죽여 버렸다.
[당신은 방금 ‘무적태호’를 살해했습니다.]
[일반 유저를 살해하여 ‘머더러’ 상태로 전환됩니다.]
[당신은 방금 ‘태성의방패’를 살해했습니다.]
시스템창 로그 메시지를 살펴보니, 정말 오래간만에 머더러가 됐다는 기록이 떠올라있었다.
머더러(murderer).
이 산드로 아이디로는 처음 Player killer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언제쯤이 되어야 내 아이디의 붉은 기가 빠질 날이 다시 올까나? 그날이 오긴 하겠지? 설마 안 그렇겠어?’
오랜만에 붉어졌을 내 아이디를 상상하며 상태창을 열어 봤다.
[산드로(도둑), Lv. 335]
* HP: 11387/11387 * MP: 40444/40444
* 근력: 309 * 체력: 319 * 민첩: 310 * 지력: 373 * 마력: 1456
335레벨을 달성하며 나의 MP통은 마침내 4만을 넘어섰다.
이 레벨쯤 되면 점차 누적 효율이 높아져야 하는 체력이나 근력, 민첩 등은 아직 저레벨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마력 스탯만큼은 이 타연 내 누구도 달성하지 못한 독보적인 수치와 고효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한없이 비정상적인 스탯 구성이지만, 내 8성 마나 쉴드를 빛나게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스탯 구성이었다.
최정상의 랭커들 중에서 360레벨을 넘는 유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그걸 감안하면, 필드 싸움에서 레벨 차이로 아쉬움을 느낄 일은 거의 없었다.
원래라면 랭커를 달성한 다음 시작하려던 필드전이었지만, 다리우스가 마신검을 획득하면서 계획을 바꿨다.
이제는 타이탄을 가지고 있는 유저가 더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조만간 다른 솔저급 타이탄도 속속들이 등장하게 될 게 뻔한 이상, 내가 생각했던 필드전을 조금 일찍 당길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렇기에 어젯밤 나는,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한 올타의 자유게시판 등에 혼자만의 척살령을 선포했다.
다름 아닌 태성 길드원 전원을 대상으로 한!
-첫째, 300레벨 이하 사냥터에서는 아무리 태성 길드 마크를 달고 있다 하더라도 PK 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300레벨 이상 몹들이 출몰하는 필드에서만 PK를 진행할 테니, 죽고 싶지 않다면 300레벨 이상 필드에서 태성의 길드 마크를 달고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언제나 그래 왔듯이 여론을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양학’한다는 비난을 피하고자, 300레벨 이상 사냥터에서만 PK를 펼치겠다고 밑밥을 깔았다.
-둘째, 태성의 산하 길드, 그리고 동맹 길드라 하더라도 태성 길드 소속이 아니라면 치지 않겠습니다. 다만, 먼저 저를 친다면 당연히 반격할 것이니 신중하게 생각한 뒤에 공격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태성 전체와 싸운다는 것도 벅차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여기서 적을 더 늘려봤자, 혼자서 잡을 수 있는 유저의 숫자에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가 죽일 대상은 철저히 ‘태성’ 길드에 속해 있는 유저에 한정하기로 했다.
이러는 편이 앞으로의 무차별 PK에 대한 여론을,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 편으로 만드는 데 유리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셜 원,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한 번의 스페셜한 역사를 만들겠구나!
-말만 저렇지 제대로 뭘 할 수 있겠어? 혹여 신검 떨굴까 봐, 몇 명 잡고 몸 사리겠지
-응 아님. 산드로가 저렇게까지 나댄 적이 여태 있었음? 내 생각에 조만간 태성 애들 진짜 산드로한테 단단히 당해서, 필드에서 구경도 못 하게 될지 모름
-ㅋㅋㅋㅋㅋ 1위 길드가 유저 1명이 무서워서 필드를 못 나온다고? ㅋㅋㅋㅋ 망상 오지네 ㅋㅋㅋ
└ 태성 어서 오고~
내가 올린 게시글의 댓글란은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해 버렸다.
헛소리다, 아니다 산드로가 헛소리가 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느냐란 논쟁부터…….
아무리 태성 길드만 한정했다 하더라도 무한 PK를 벌이겠다는 건 노매너 플레이가 아니냐는 논쟁까지…….
하지만 내가 그동안 이미지 관리에 힘써 왔던 게 어느 정도 먹히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하겠다는 ‘일인 필드전’에 우호적인 시선을 보낸 것이다.
‘어쩌면 나 같은 사람이 등장하기를 은근히 바란 유저들이 꽤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동안 태성에게 억하심정이 있어도, 하는 수 없이 꾹 참고만 있던 유저가 제법 있었을 테니 말이야.’
나만 해도 내가 신검을 먹지 않았더라면, 산드로란 존재의 PK 선언에 환호성을 지르며 응원했을지 몰랐다.
과연 산드로란 놈이 태성을 상대로 혼자서 얼마만큼 싸워낼 수 있을지 기대하면서.
(연우: 산드로님. 방금 데르포 유적지에서 PK 하셨죠?)
(나: 네 맞아요. 방금 태성 길드원 2명을 죽인 것으로 PK 시작했습니다.)
(연우: 지금 길드창에 소집령 올라왔어요. 곧 그쪽으로 엄청 몰려갈 테니 조심하세요.)
(나: 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내가 PK 장소로 점찍은 곳은 태성이 먹고 있는 세르반 성 지역의 ‘데르포 유적지’였다.
언데드는 속성 공격에 취약하고 보통 공격력이 강한 대신 HP가 적어, 대부분의 유저들이 선호하는 몹.
이곳은 그런 언데드가 출몰하는 필드 사냥터인지라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둘러봐도 유저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몹들만 그득했다.
반년 전 태성 길드가 세르반 성을 차지한 이후부터, 일반 유저의 출입을 통제한 채 철저히 ‘독식 사냥터’로 통제 중인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이곳으로 찾아왔지. 이곳은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까!’
따라서 이곳에서 간간히 보이는 유저들은, 전부 태성 길드원들 뿐이었다.
[그림자 밟기!]
방금 PK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3인 파티를 발견한 나는, 곧바로 이동기를 써서 힐러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헉! 뭐야?”
“뒤, 뒤치기다!”
다급히 내 공격에서 벗어나려 무빙을 시도하는 힐러.
그리고 그런 힐러에게 쉴드를 걸어주는 마법사.
마지막으로 몹에 맞는 도중이었으면서도 내게 스턴을 걸기 위해 다가오는 탱커까지…….
확실히 태성 길드원들, 그것도 300레벨이 넘어가는 정예 길드원들다운 군더더기 없는 대응이었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대응이 아쉽게도, 녀석들은 운이 없었다.
뒤치기를 온 유저가 하필 나, 산드로였기 때문이다.
팅!
탱커의 방패 후려치기는 마나 쉴드에 막혀 스턴이 그대로 무시가 돼버렸고,
펑!
마법사가 급히 걸어준 쉴드는 재빠른 몸놀림을 쓴 내 공격에 1초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윽! 뭐야, 딜이 미쳤잖아!”
“산드로, 이 개자식!”
PK를 할 때 우선순위가 HP가 없는 캐릭이라고 했지만, 역시 최우선 순위는 언제나 힐러였다.
물론 신검을 들고 있는 내 폭딜로는 마법사를 먼저 잡는 게 유리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3인의 소수 파티를 상대로는 누굴 먼저 잡든지 별 상관없었다.
그래서 그냥 난, 내키는 대로 잡아버렸다.
“넌 조만간 우리 길드한테 반드시 뒤진다.”
“네 네. 화이팅입니다!”
마지막 탱커의 저주와 함께 3인 파티는 금세 전멸당했다.
[상급 마력 회복 물약(11)을 획득했습니다.]
[+4 제국 근위 기사단의 흉갑(유니크)을 획득했습니다.]
“오! 유니크? 득템이네!”
간만에 유저를 잡고 아이템을 먹었다.
역시 필드 PK의 묘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이런 드랍 아이템을 먹는 일이었다.
머더러가 아닌 이상 죽는다고 아이템을 잘 드랍하진 않지만, 내가 사냥하는 놈들은 죄다 고레벨의 태성 길드원이었다.
그러니 어쩌다 한번 드랍했다 해도, 먹게 되는 아이템의 수준이 일반 유저와는 급이 달랐다.
유니크 아이템은 물론이고 최소가 고강화 레어 아이템!
녀석들을 사냥하면 할수록, 나는 그만큼 계속 강해지는 것이라고 간주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친김에 나는 오랜만에 착용하고 있는 장비창도 한번 훑어봤다.
<+2 룬 페이토나(디바인, 한손무기)>
<+4 제사장의 신묘한 머리 장식(레전더리, 투구)>
<+10 칠흑 마탑 마도사의 로브 상의(유니크, 흉갑)>
<+9 칠흑 마탑 마도사의 로브 하의(유니크, 하의)>
<+9 칠흑 마탑 마도사의 로브 어깨 보호구(유니크, 견갑)>
<+3 대마법사 레인젤의 실크 장갑 (레전더리, 장갑)>
<+3 대도적 윌리펑의 괴상한 부츠(레전더리, 신발)>
<+3 그리폰 킹의 깃털 망토(레전더리, 망토)>
<+4 용맹한 오크 로드의 증표(레전더리, 목걸이)>
<+2 대마법사 레인젤의 실크 허리띠(레전더리, 허리띠)>
<+9 테팔로 공방의 마력 팔찌(유니크, 팔찌)>
<+5 고대 뱀파이어 귀족의 사파이어 반지(레전더리, 반지)>
<+5 고대 뱀파이어 귀족의 사파이어 반지(레전더리, 반지)>
그동안 핑크래빗의 도움으로, 유니크급이었던 몇몇 아이템은 일단 급한 대로 전부 마력 위주의 레전더리 템으로 교체해 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칠흑 마탑의 마도사 방어구 세트 3 피스와 몇 가지 액세서리를 제외하고는, 유니크 템 자체가 몇 개 남아있지도 않았다.
또한 +3과 +4로 마무리됐었던 사파이어 쌍가락지는 한 개 더 얻은 여유분으로 운 좋게 둘 다 +5로 강화하는 데 성공했고, 오크 로드의 증표와 제사장의 머리 장식도 각각 +4까지 강화했다.
+2로 도배해도 대단할 레전더리 템들인데, 심지어 전부 그 이상의 수치로 강화된 세팅이었다.
그야말로 황홀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현재 내 장비창은 타연 0.01%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이 정도 템에, 이 정도 스킬과 스탯 구성. 그리고 내 컨을 가지고 태성을 상대하겠다는데…… 그게 망상이라고?’
그 댓글을 적은 놈은 오늘 밤, 어제 적은 자신의 글을 급히 삭제해야만 할 것이다.
망상이라고 치부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버린 걸,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데르포 유적지에서만 30여 명의 태성 길드원들을 죽인 뒤, 몰려드는 태성 놈들을 따돌리려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