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무한 필드전 (2)
다음 장소는 역시나 태성의 독식 사냥터 중 하나인 ‘벨루타 해안가’였다.
대략 서른 명 정도가 데르포 유적지에 나를 잡기 위해 몰려들었던 것을 확인하고 이동했으니, 이 벨루타 해안가에도 사냥 중이던 인원이 몇 명 빠졌을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 도착한 나는, 은신도 하지 않고 사냥 중인 태성의 길드원들이 보이는 대로 족족 습격했다.
“으악! 뭐야?”
“아, 뒤치기 개 같네!”
이곳의 몹은 지상으로 올라온 고대 수중 왕국의 머맨들.
머맨의 삼지창에 맞던 태성 유저의 뒤통수로 떨어진 내 뒤치기는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완성한 지금의 테크트리는 철저히 유저 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잠시 거리나 여유를 두기 위한 넉백이나 스턴 등등이 전혀 먹히지 않는 내 캐릭.
그러니 이렇게 하나둘씩 흩어져서 사냥 중인 유저들 중에서 날 감당할 수 있는 유저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타다다닷!
빠른 속도로 사냥터를 이동하며 태성의 유저가 남아있는지 훑었다.
가뜩이나 8성 재빠른 몸놀림 스킬의 패시브 덕분에 빨랐던 이속은 그동안 얻은 업적과 대도부츠 덕분에 더욱 재빨라진 상태였다.
그러니 내가 접근한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0명, 15명, 20명!
해안가 사냥터에서 사냥 중인 태성의 유저를 또다시 30명쯤 죽이고 나니, 사냥터가 금세 한적해졌다.
이번에는 내가 이곳에서 PK를 시작한 사실이 길드 채팅창에 빠르게 퍼져, 단독 사냥을 하던 길드원들이 귀환을 써 버린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내 전략도 마찬가지였다.
날 잡기 위해 추격대를 만들어서 쫓아온다 한들, 나 또한 굳이 여기에 남아 그들과 싸워 줄 필요가 없었다.
난 그저 각개격파로 사냥터를 순회하며 PK를 한다 해도, 이 넓은 타연 필드에는 잡을 수 있는 태성의 길드원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예전부터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 한번씩 정말 이해가 안 갔던 부분이 있었다.
주인공이 일당백의 대단한 힘을 가진 상태인데도, 꼭 굳이 한꺼번에 그보다 벅찬 적들과 싸우다가 지곤 했던 것이다.
만약 일당백의 힘을 가지고 천 명을 상대해야 한다면, 어떻게든 피하고 한 번에 100명씩 10번을 기습하면 되는 거 아냐?
뭐하러 목숨을 걸고 무리하게 한 번에 천 명과 싸워 이기려 하지?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플레이였다.
따라서 나는 다르게 싸울 것이다.
타연을 하루 이틀하고 접을 것이 아닌 이상, 철저히 게릴라전 위주의 필드전을 펼칠 생각이었다.
녀석들이 분통 터져서 열불이 날 만큼 얄미운 플레이로!
“다음 장소로 이동할 타이밍인가?”
사냥터는 순식간에 한적해졌고, 이곳에는 곧 데르포 유적지에서 허탕 친 추격대가 들이닥칠 것이 뻔했다.
그래서 훼라리를 소환해서 다시 이동하려는 순간, 멀리서 머맨들을 몰이 사냥하고 있는 유저 한 명의 실루엣이 보였다.
‘어라? 이 고렙 사냥터에서 몰이 사냥을 하는 태성 유저가 있다고? 설마 태성의 간부진?’
설사 간부진이라 하더라도 내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채팅으로 알게 됐을 터.
그런데도 배짱 좋게 몰이 사냥을 하는 유저가 있다고?
그게 누군지 궁금해졌기에, 나는 떠나는 것도 잊고 아이디를 확인해보려 가까이 다가갔다.
<카이저>
화염 배리어에 둘러싸인 채, 푸른 불꽃을 입힌 거대한 양손검을 휘두르고 있는 유저.
그는 다름 아닌 마검사 랭킹 1위, ‘카이저’였다.
사실 다리우스가 랭킹 1위의 자리에서 내려오면서, 반대급부로 주목받게 된 유저가 한 명 있다.
그 유저는 다름 아닌 카이저.
마검사 랭킹 1위였던 그가, 드디어 다리우스가 차지하고 있던 통합 랭킹 1위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한데 그 유저가 태성의 통제 사냥터인 이 벨루타 해안가에서 몰이 사냥 중이었다니….
몰랐다면 모를까 알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어 그에게 다가가 대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버닝스타’ 길드의 마스터, 산드로라고 합니다.”
“파이어 스톰! 회전 베기! 응? 이런 곳에서 그대를 만나게 되는군. 반갑다, 카이저다.”
둘러싼 5마리의 머맨을 광역기로 한순간에 삭제해버리며, 카이저는 내 인사를 받았다.
“보아하니 길드 마크는 없으신데, 태성과는 무슨 관계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여긴 태성이 통제하는 사냥터인 걸로 알고 있어서요.”
“뭐? 태성? 갑자기 다가와 그것부터 물어보는 저의가 뭐지?”
“아실지 모르겠는데, 어제부로 전 태성과 무한 필드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니 태성 길드원이라면 그 누구라도 제 앞에서 사냥할 수 없습니다.”
“하하! 굉장히 건방진 발언이군. 그냥 내 귀에는 신검 먹은 김에 전문 PK꾼이 되겠다는 말을, 어렵게 돌려서 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말이지.”
여전히 화염 배리어를 켜고 있어 푸른 불길을 휘감고 있는 카이저의 모습.
그의 어투는 평소 이미지와는 달리 냉소적이면서, 또한 위협적이었다.
“뭐 그렇게 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어쨌든 제가 물어본 질문에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어떻게 여기서 사냥 중이신 거죠?”
“내가 태성 소속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날 어떻게 하려고?”
“그렇다면 쳐야겠죠. 어쩔 수 없이!”
잠시 말없이 노려보는 카이저의 모습 덕분에 이곳은 긴장감에 휩싸였다.
비록 내가 신검을 들고 있다 하더라도 상대는 현존하는 랭킹 1위의 유저.
괜히 시비에 휩싸여 시간이라도 끌게 된다면 태성의 추격대에 포위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도 허접한 각오로 태성과의 필드전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랭커든 태성 전부든 간에, 모두 다 썰어버릴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기에 설령 랭킹 1위가 아니라 그 누구와 싸우게 된다 해도 겁나지 않았다.
단지 적이 아니라면 싸울 필요가 없기에 이렇게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었다.
짧은 침묵이 끝나고, 이내 카이저가 말문을 열었다.
“어지간히도 태성이 미웠나 보군. 나에게도 스스럼없이 척지겠다고 덤비는 걸 보니……. 아무튼 난 태성과 아무 관계 없다. 같이 사냥하는 힐러가 오늘 접속하지 못해 혼자 이곳에 왔다. 이곳은 몰이 사냥하기에 제법 좋은 곳이거든.”
“이곳은 태성의 독식 사냥터인데요?”
“독식 사냥터? 훗! 아직 이쪽 세계에 발 담근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나 본데, 어느 길드도 중립 랭커는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눈에 거슬리기는 하겠지만 건드리기엔 막심한 손해가 너무도 뻔히 보이니깐 말이지. 아무리 태성이라 해도 날 건들 수는 없는데, 너는 감히 날 치겠다는 건방진 말을 쉽게도 입에 담는군.”
몰랐던 사실이지만 들어보니 납득이 갔다.
랭커들이란 존재는 타연 유저라면 누구나 아이디를 알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저력 또한 인지하고 있을테니 말이다.
“아니라면 됐습니다. 제가 시간이 없어서 그럼 이만, 다음에 바쁘지 않을 때 뵙기로 하죠!”
“잠깐!”
“네?”
굳이 적을 만들 필요가 없기에 뒤돌아 자리를 뜨려는 나를, 카이저가 붙잡아 세웠다.
“네가 가지고 있는 그 신검…… 아무리 생각해봐도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옵션이 붙어 있는 게 맞지?”
“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오호라…… 당황하는 걸 보니 맞는가 보군? 됐다. 확인했으니 이제 가 봐도 좋다.”
뜬금없이 내 신검의 옵션을 묻더니 곧바로 단정 짓는 카이저.
황당해하는 내 모습을 보던 그가 이어서 말했다.
“뭘 그렇게 서 있지?”
“어떻게 아신 거죠?”
“하하! 나 또한 마검사 테크트리를 수없이 연구해서 완성했기에 스킬 트리 연구에 누구보다 빠삭하다고 자부한다. 그런 내가 보기에도 너의 마쉴 도둑 테크트리는 참 독창적이면서 훌륭하더군. 혼자 활동하기에, 더군다나 지금같이 혼자 PK를 하기엔 더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렇게 많은 스킬을 찍었다는 건 조금 이상하더군. 아무리 물상 면역을 위해 그렇다고는 해도, 스킬 포인트를 10개나 낭비하며 마쉴을 풀로 찍은 것도 좀 이상했어. 한데 신검의 옵션에 스킬 레벨을 올려주는 옵션이 있다고 가정하면 전부 다 맞아 떨어지더군. 이제까지는 그런 옵션의 아이템이 나온 적이 없기에 확인 차 물어보았다.”
“그렇게까지 확신하시니 더는 드릴 말씀이 없군요……. 추측하신 게 맞습니다.”
“과연 디바인 템…… 다르긴 다르군. 서둘러 얻어야 할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됐다.”
사실 내가 초반부터 매직 미사일 스킬을 찍은 이유에는 이 마검사 카이저의 토너먼트 방송을 보고 영감 받은 이유가 컸다.
최고 수준의 유저답게 항상 타연에서 무엇이든 앞서나간 선구자 같은 유저.
그가 지금은 나를 인정하고, 동시에 견제하고 있었다.
“좋은 정보를 준 김에 충고 하나만 하자면, 이렇게 PK에 열 올리는 것도 좋지만 당분간은 레벨업에 더 집중하는 편이 좋을 거다. 최근 메인 퀘스트를 앞서가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인데, 최고 레벨 대의 유저들이라면 조만간 타이탄을 얻을 수도 있다는 단서가 조금씩 보이더군. 너라면 물량으로 쏟아붓는 다리우스 따위보다 훨씬 재미있는 상대로 커 줄 것 같아서 해주는 얘기다.”
“타이탄이요?”
“그래, 숨겨진 던전이나 퀘스트 등의 최초 클리어 보상으로 주어질 것 같더군. 물론 너에게는 필요 없겠지만, 한 길드의 마스터라면 얘기는 다르겠지.”
정말 타이탄 연대기가 급변의 시기에 접어든 모양이었다.
사실 타이탄 시스템이 업데이트된다고 서버 점검을 하던 그 순간부터, 변화는 진작에 시작됐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이렇게 된다면 내 계획은 또다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키에엑!
어느새 태성 유저들이 몰려드는 것이 보여, 나는 훼라리를 소환해 올라탔다.
“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다음에 만나면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죠. 그동안 정상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어 주세요. 제 아이디가 카이저 님 위로 올라서게 될 때까지 말이죠!”
“훗, 기대하고 있지.”
나는 그대로 날아 다음 장소인 데스라 사막 북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몇 군데를 훑으며 PK를 진행하고, 계속해서 여러 사냥터를 순회하듯 돌며 태성 길드원들을 정리했다.
양민 학살.
레벨은 다들 엇비슷할지 몰라도, 현재 내 검을 받아낼 수 있는 유저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현재 8성 은신을 감지할 수 있는 유저 또한 전무했으니, 그야말로 PK가 아니라 ‘양학’이라고 일컬어도 할 말 없을 지경이었다.
내가 사냥터에 뜨면 순식간에 몰려오는 태성 길드원들도 100명이 넘어버렸다.
1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오직 나만을 위해 모든 할 일을 접고 온 맵을 쫓아다니는 셈이었다.
‘일주일이고…… 아니 몇 달이고 간에 이렇게 놀아줄 수 있겠지만, 카이저 님이 한 말이 마음에 걸리네.’
7신기 획득, 그리고 국가 단위로 연구해서 생산하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으로도 타이탄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됐다.
앞의 두 가지는 내가 쉽사리 시도할 수 없었지만, 이번 정보는 달랐다.
던전이건 퀘스트건 간에, 지금이라도 레벨업을 서두른다면 얼마든지 최초 클리어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필드전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상, 쉽게 그만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또다시 계획을 조금 수정해야만 했다.
‘원래는 게릴라전만 하려고 했는데……. 이거 참, 소설 속 주인공들이 멍청하다고 욕할 게 아니었네. 나도 결국 이런 짓을 하게 됐으니 말야.’
장장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된 오늘 PK의 마지막 장소로 결정한 곳.
그곳은 ‘벤토 숲 늪지대’였다.
이곳은 숲이 울창해서 다소 어두웠으며, 늪지대인 탓에 이동 속도가 저하되는 지형적 특성이 있다.
하지만 그 유명한 히드라가 리스폰되는 곳인 만큼, 평소 사냥하는 유저들이 많진 않았다.
그나마도 태성이 차지한 번스타인 성 지역이라 태성의 길드원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조금 전 10여 명을 죽였더니 금세 싹 다 사라졌다.
‘이곳에 행적을 드러냈으니, 추격대가 몇 분 내로 도착하겠지?’
오늘 했던 패턴대로였다면 서둘러 떠나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순간을 위해 5성까지 찍어 둔 덫 설치를, 마나 회복 물약까지 먹으며 쉴 새 없이 여기저기 깔았다.
[덫 설치(고유 스킬): ★★★★★☆☆☆]
* 마나 소비: 300
* 사용 대기시간: 10초
* 밟는 순간 특수 효과가 발생하는 덫을 설치합니다.(지속 시간: 480초)
* 설치하는 재료에 따라 효과가 다르게 발생합니다.
8성을 달성하여 한 번 설치하면 8분간이나 지속되는 덫.
이 덫을 오직 ‘연막’ 재료만을 사용해 설치했다.
제사장의 머리 장식 탓에 항상 간파가 활성화된 상태인 내게, 이 연막만큼 효과적인 상태 이상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망타진(一網打盡).
굳이 하지는 않으려 했던 ‘일대백’의 싸움이, 이 벤토 숲에서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