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무한 필드전 (3)
“야! 빨리 움직여! 꼼지락대다가 또 놓칠라!”
“그렇게 크게 소리치면서 잡으러 가면, 산드로가 퍽이나 잘도 남아 있겠다?”
“야, 솔까 그 자식을 어떻게 잡냐? 와, 진짜 도둑 새끼가 오버 스펙을 갖추니깐 완전 개사기야. 하루 종일 구경도 못 하고 이게 뭐 하고 있는 건데?”
“그래도 결국 죽지 않는 놈은 없더라. 우리 길마님도 그렇고 지옥불도 그렇고, 죽긴 죽잖아? 산드로도 도망을 잘 가서 그렇지, 둘러싸이기만 하면 다이는 한순간이야!”
내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마주 걷는 것도 모른 채, 눈앞의 탱커진들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하긴 오래 쫓아다닌 놈은 내 뒤만 4시간 넘게 졸졸 쫓아다녔을 테니, 이렇게 수다라도 떨지 않으면 꽤나 지겨웠을 것이다.
적의 규모는 대략 100명에서 110명 정도.
한창 피크 때인 1시간 전에는 200명이 넘게 쫓아다녔는데, 반복된 허탕에 지쳐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인원이었다.
나 한 명만을 잡자고 모인 것치고는 어이없도록 많은 숫자…….
하지만 계획대로라면, 오늘 나는 100대1의 전설을 만들게 될 것이다.
‘이쪽으로 가면 덫 설치해 둔 곳과 비켜나가게 된다. 이제 나서야겠네.’
3분 동안 신나게 연막 덫 20개를 설치해 둔 곳은 바로 200미터 전방.
한데 선두에 있는 탱커들은 그쪽으로 잘 가다가 다른 늪지대 방향으로 살짝 틀었다.
하지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덫이란 것에 사냥감이 아무것도 없이 빠지길 기대하는 사냥꾼은 없는 법!
나는 처음부터 내가 미끼가 되어, 그곳으로 유도할 생각이었다.
재빠른 몸놀림, 약점 포착…….
탱커진이 지나갈 때까지 제자리에 선 채 대기하다가, 뒤따라오는 종이 몸들이 지나가는 순간 은신을 풀며 자버프를 걸었다.
[연속 베기!]
첫 목표는 궁수들이었다.
자버프 상태로 평캔을 넣는 내 데미지는 피가 적은 원딜러들이 견디기엔 말도 안 되는 오버 파워였다.
물론 마법사를 잡는 것도 좋은 선택이나, 마법사는 블링크가 까다롭기도 하고 높아진 마법 방어력 덕분에 전혀 위협도 되지 않는 상태라 서둘러 잡을 필요가 없었다.
“으악! 산드로다!”
“쉴드!”
“힐!”
워낙 한 방 한 방의 데미지가 강한 탓에, ‘예측 힐’을 주지 않는 이상 힐을 써도 힐을 받을 시간이 없었다.
그만큼이나 궁수는 순식간에 뒤로 나자빠졌다.
나는 죽어 사라지는 모습을 볼 틈도 없이, 곧바로 옆에 있는 궁수에게 마저 검을 날렸다.
8성 약점 포착의 액티브 지속 시간은 5초.
그동안 후방이 아닌 곳에도 확정 확률로 150%의 데미지를 주기 때문에, 나는 이 짧은 시간 만에 2명의 궁수를 잡아낼 수 있었다.
물론 궁수를 잡는 그 몇 초 사이, 기습을 눈치챈 태성 길드원들의 공격이 무더기로 날아왔다.
[윈트 커터 마법을 저항했습니다.]
[마나 쉴드가 124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1,553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
팅, 티팅, 팅!
내 뒤로 그림자 밟기를 써서 순식간에 몰려든 십여 명의 도둑들의 공격에 마나 쉴드가 소진되는 소리가 울렸다.
난 소진된 MP를 회전 베기 한 방으로 도로 채우면서, 동시에 뒤로 뒷걸음질 치던 궁수에게 그림자 밟기를 써서 다가갔다.
[은밀한 일격!]
도둑 고유 스킬 중 거의 유일한 액티브 딜링(dealing) 스킬, 은밀한 일격.
이렇게 대상의 후방에서밖에 시전이 안 된다는 페널티가 있으나, 넣기만 하면 한 방에 200%의 추가 데미지를 넣을 수 있는 최고의 폭딜 스킬이었다.
역시나 이 궁수도 은밀한 일격에 이어진 평타 2대에 그대로 리타이어 됐다.
이놈을 마지막으로, 나는 곧바로 근처에 있던 나무를 타고 수직으로 달려 올라갔다.
퍼버버벅!
내달리는 나무 위로 화살이 박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튀, 튄다! 잡아!”
“저놈 버프 다 빠졌어! 암만 신검 들었어도 스킬 빠지면 뭣도 아냐!”
‘후후, 과연 그럴까?’
나무들을 건너뛰어 이동하는 내 뒤를, 놈들은 정말 순진하게도 모두 열심히 쫓아왔다.
그렇게 추격전을 벌인 결과, 결국 녀석들을 이곳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다.
이 죽음의 안개 속으로!
펑!
누군가 설치해 둔 덫 하나를 건드렸는지 연막이 터졌다.
일부러 밟아서 터트리기 힘든 나무 기둥에만 설치했는데도, 인원이 인원이다 보니 건드릴 수밖에 없던 모양이다.
“연막 덫이다!”
“간파!”
“에어 밤!”
간파를 쓰든 에어 밤을 쓰든 연막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저 연막 속을 볼 수 있고, 연막을 밀어낼 수 있을 뿐.
사방이 연막으로 가득 차게 됐다면 별 소용없는 짓이었다.
쉬쉬쉭, 퍼버펑!
난 무기 던지기 스킬로 단검을 던져 나무 기둥마다 설치해 둔 덫을 맞춰 전부 발동시켰다.
“뭐, 뭐야? 이거 연막 덫 맞아?”
“무슨! 이런 건 본 적도 없어!”
과연 8성 덫 설치의 위엄은 대단했다.
덫 하나당 연막 범위가 20미터까지 늘어난 덕에, 반경 100여 미터가 온통 흰 연기에 둘러싸인 죽음의 공간이 돼버린 것이다.
타이탄 소환?
이 상황에서 고작 100여 명을 잡는 데, 굳이 타이탄까지는 필요 없었다.
이제부터 이곳은 내 세상이었다.
“에어 바…… 크악!”
“어허! 에어 밤 좀 그만 쓰라니까요?”
나는 다시금 쿨이 돌아온 자버프를 돌리며 마법사들부터 잡기 시작했다.
연막을 흩뜨려 놓기에 가장 좋은 스킬은 에어 밤(Air Bomb).
이걸 쓸 수 있는 마법사들부터 정리해 놔야 이 죽음의 전장을 조금 더 오래 쓸 수 있었다.
티티팅, 퍽!
간혹 마나 쉴드를 쓴 마법사도 있었다.
하지만 고강화 쌍 사파이어 반지 덕에 공격력의 6%씩 마나를 뺐었기에, 마쉴 상태에선 추가 타격치가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마쉴은 눈 깜짝할 사이에 깨져버렸고, 드러난 종이 몸은 잠시도 버티지 못했다.
[마나 쉴드가 1,220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상태 이상 ‘넉백’에 저항합니다.]
팅!
흐릿하게나마 내가 보였는지, 차징을 걸어오는 기사들도 있었으나 내 마나 쉴드에 막혀 그대로 저항이 떴다.
“몸빵분들은 기다리세요. 제가 맨 나중에 잡아 줄 테니!”
늘 유지 중인 간파 활성화 모드 덕분에 내게 연막은 아무 방해가 되지 않았다.
하나, 간파를 찍지 않은 태성의 탱딜러들이나 원딜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대고 있었다.
이렇게 대규모에다가 짙은 연막은 놈들로서도 처음 경험해 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셋, 넷, 다섯!
이 안을 헤집고 다니며, 차곡차곡 보이는 대로 놈들 숫자를 줄여나갔다.
“무, 뭉쳐! 이 자식 피 없는 캐릭들만 잡고 있다!”
“맞아, 뭉쳐야 해!”
정말 그럴까?
너희가 뭉치면 내가 더 좋을 텐데?
에어 밤으로 조금씩 시야가 걷힌 공간이 생기자, 허둥대던 길드원들이 전부 그곳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반면, 그곳과 조금 떨어져 있던 놈들은 내 각개격파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으악! 진짜 딜이 미쳤어!”
“여기야! 산드로는 여기 있단 말야!”
신검이 아니라 유니크 검만 들고 있어도, 마법사와 힐러는 이런 근접전에서 도둑의 일대일 상대가 절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신검을 들고 썰어대고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짧지만 길었던 1분여의 시간이 흘러, 연막은 대부분 흩어져 전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공터와 같이 넓은 늪지대 위, 어느새 태성 길드원들은 대략 70여 명이 뭉쳐 진형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외에 살아남은 유저는 한 명도 없었다.
얼핏 두어 명이 숲 밖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긴 했으나, 1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나 혼자 30명을 잡아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돼!”
“저게 말이 돼? 산드로는 타이탄빨 아니었어?”
“미쳤다 정말……. 저런 놈을 무슨 수로 잡는데?”
50여 미터 앞에 떨어진 채 놈들을 바라보는 내게, 여러 명의 한탄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죽기 싫다면 당장 태성 길드를 탈퇴하세요! 아무리 저를 죽이려고 해봤자, 전 타연이 끝나는 그 날까지 절대 죽어 드릴 생각이 없으니까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집어치워라! 네가 나중에도 그렇게 기고만장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은 몰라도 디바인 몇 개만 더 풀리면 넌 또다시 허접 시절로 돌아갈 텐데?”
“이분들 안 되겠네. 그럼 앞으로도 가능할지 못할지는 나중에 두고 보시고요, 오늘은 어떤지 지금 한번 겪어 보시죠!”
그 말을 끝으로 난 놈들의 진형을 향해 자버프를 쓰고 달려갔다.
아니, 10미터 정도만 달려가는 척하고 제자리에 멈춰섰다.
쉬쉬쉬쉭!
아니나 다를까 좀 전에 그림자 밟기를 썼던 도둑들 10여 명이 내 뒤로 또다시 그림자 밟기를 써서 이동해 왔다.
빠르게 줄어드는 MP.
하지만 이것 또한 내 노림수였다.
“훼라리 소환!”
순식간에 전장에 튀어나온 훼라리!
내 애룡은 나오자마자 내 명령에 따라 둘러싼 도둑들에게 날개 돌풍을 사용했다.
그러자 날 둘러싼 10여 명의 도둑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넉백 당했다.
그 위에 회전 베기부터 쓴 다음, 검을 넓게 휘둘러 자주 써먹는 멀티 히트 평타를 골고루 먹였다.
펑!
날개 돌풍에 이어 화염구 브레스까지 쏘아져 터졌다.
아무리 훼라리가 펫이된 상태라 해도, 원래 보스 몹이었던 놈이라 공격력은 동렙의 근접딜러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그런 보스 급 몹이 가진 고유 스킬이, 연달아 정통으로 들어갔기에 HP가 적은 도둑들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거기다 내 회전 베기에 이은 풀버프의 평타 공격 또한 함께 쏟아졌으니, 버티는 도둑이 있을 리 없었다.
솨아아, 솨아아…….
날 암살하기 위해 먼저 다가온 도둑들이 단 1, 2초 만에 순삭당해 산화해버렸다.
그 모습을 본 탱커들은 흥분해서 내게 달려 나왔고, 난 그들의 바람과 달리 그대로 훼라리를 타고 날아올랐다.
“튀, 튄다고?”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아직 먹을 게 이리 많이 남았는데요!”
날아오르는 척하던 나는, 탱커의 머리를 넘어선 다음 훼라리에서 점프하며 후방에 있는 궁수에게 그림자 밟기를 사용했다.
[백 스텝!]
황급히 회피 이동기를 써서 피하는 궁수.
하지만 녀석의 뒤로 쭉 이동하던 모션은 시작과 동시에 멈춰지고 말았다.
퍽퍽퍽퍽!
피할 걸 예상하고 미리 썼던 매직 미사일에 맞아, 그대로 경직 상태에 빠져 단 몇 걸음도 물러서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대로 달라붙어 녀석을 순삭해 버리고, 근처에 있는 아무 캐릭이나 보이는 족족 검을 휘둘러 공격했다.
“으아아아아! 다굴 쳐라!!”
“무조건 조져! 다굴 앞에 장사 없다!!”
하나를 쓰러뜨리면 둘이 달라붙었고, 둘을 쓰러뜨리면 넷이 둘러싸서 공격해왔다.
하지만 날아오는 화살은 빠른 움직임 덕에 몇 발 적중되지 않았고, 단일 타게팅 마법은 높은 마법 방어력 때문에 대부분 저항이 떠버렸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달라붙는 탱딜러들의 수가 무시 못 할 만큼 많았기에, 내 MP는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갔다.
그렇게 절반 이하로 MP가 떨어지는 순간, 나는 300레벨을 넘기면서 새롭게 배운 고유 스킬을 사용했다.
[그림자 분신!]
[그림자 분신(고유 스킬): ★★☆☆☆)]
* 마나 소비: 600
* 사용 대기시간: 300초
* 그림자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가진 분신을 생성합니다. (10초 후 자동 소멸)
* 분신은 본체와 똑같은 HP를 갖게 되나, 모든 공격에 4배의 피해를 입습니다.
* 분신은 본체 공격력의 20%의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 그림자 분신을 사용 시, 일순간 무적 상태가 되며 적용된 모든 버프와 마법이 해제됩니다.
“뭐, 뭐야! 그림자 분신을 익혔어?”
“빨리 아무거나 점사 해서 분신을 없애!”
장점보다는 단점이 명확한 탓에, 도둑 유저들에게 ‘쓰레기’로 취급당해 아무도 익히지 않는 스킬.
하지만 내게는 버프 해제나 약한 공격력 등의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돋보였기에 스킬 포인트를 투자해서 익혔다.
물론 8성까지 찍으면 티가 많이 나는 스킬이라 딱 5성에 맞춰 포인트 2개만 투자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그동안 실전에서 써먹을 일이 없어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배우기로 한 건 정확한 판단이었다.
한순간 몸이 나누어지자, 당황한 탱딜러들의 타겟팅이 흐트러져 들어오는 딜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잠시 몇 초간 다른 분신과 비슷한 모션으로 앞에 있는 전사에게 평타 공격을 하며 MP를 흡수하다, 자버프를 쓰며 뒤편에 보이는 힐러에게 그림자 밟기를 써서 이동했다.
“저, 저놈이 진짜다!”
당황한 힐러는 무빙도 못하고 자힐만 하다 그대로 고꾸라졌고, 내 MP는 순식간에 역주행하며 차올랐다.
연속 베기, 은밀한 일격, 회전 베기!
모든 즉발 스킬을 쓸 때마다 MP가 줄어들기는커녕 쭉쭉 차올랐다.
쿨타임이 돌아오는 대로 상급 마력 회복 물약도 함께 들이켜니 더욱 효과가 좋았다.
‘도무지 자신이 없구나……. 죽을 자신이 말이야!’
전투 개시 3분여.
이 전장에는 오직 탱커 몇 명만이 남게 되었다.
다른 모든 딜러와 궁수, 마법사와 힐러들은 그사이 모조리 죽어버린 것이다.
“이건 진짜 개사기거나 버그를 사용하는 걸 거야. 그게 아니라면 백 명이 한 명한테 진다는 게 말이 돼?”
“아 몰라! 어차피 죽이는 건 텄다! 어차피 상대도 안 되는 거, 괜히 개죽음당하지 말고 튀련다!”
잠시 대치하다 먼저 도망친 탱커 하나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전진기를 써서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모든 직업들 중에서 도둑이, 그리고 그 도둑들 중에서도 이속이 가장 빠른 나라면 충분히 따라가 잡아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다.
‘지금 너희를 잡겠다고 다른 월척들을 놓칠 필욘 없지.’
이곳에서 죽은 유저들은 대부분 번스타인 성에서 부활할 터였다.
보통 자신이 속한 길드가 소유한 성이 있다면 그곳을 부활 포인트로 등록해 두니 말이다.
부활 후유증의 지속 시간은 부활 후 10분까지.
그동안 모든 스탯과 이동 속도는 80%나 감소된 상태기에, 녀석들은 늘 그래 왔듯 대화나 채팅을 하며 부휴가 풀리기만 기다릴 게 뻔했다.
그걸 뻔히 알고 있는데, 내가 이 꿀 같은 페널티를 그냥 두고 보고 있을 이유가 있을까?
가뜩이나 안전지대인 외성 마을과 가까운 번스타인 성인데?
난 놈들이 드랍한 템들을 수거한 뒤, 곧바로 귀환 주문서를 사용해 번스타인 외성 마을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