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득템왕-80화 (80/350)

80화 무한 필드전 (4)

다른 게임들과 달리 타연에서는 머더러라 해서 마을 이용에 불이익이 있거나 하진 않았다.

원래 PK범이라 하면 으레 있는 마을 경비병에게 선공을 당한다거나, 마을의 상점을 이용 못 한다거나, NPC로부터 퀘스트를 못 받는다거나 하는 불이익들 말이다.

NPC들을 죽이지 않는 이상 단순한 유저 간의 다툼이기에, 머더러라고 해봤자 아이디가 붉은 것 외에는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우습게 보일 만큼 강력한 페널티는 존재했다.

머더러들은 필드에서 죽게 되면 아이템 드랍 확률이 몇십 배로 치솟았다.

한데 유저들은 붉게 변해버린 아이디, 머더러들을 죽인다 하더라도 머더러가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머더러 상태가 되면 언제 누군가에게 맞아 죽을지 모를 불안함을 항상 가지고 플레이해야 했다.

또한 죽게 되면 거의 무조건 장비를 떨군다는 것을 각오한 채 필드에 나와, 머더러를 풀기 위해 몹들을 사냥해야 했다.

바로 이점 때문에 대부분의 유저들은 머더러가 되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

심지어 설문에 의하면 한 번도 머더러 상태가 돼본 적 없는 유저가 전체 유저의 75%가 넘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어쨌거나 혼자 태성과 무기한 필드전을 펼쳐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아주 괜찮은 조건이었다.

어차피 난 죽으면 바로 신검을 떨굴 수밖에 없는 몸.

그러니 나만 보면 죽이려 달려들 유저들이 타연에 넘쳐났기에, 머더러든 아니든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나: 정말 번스타인 성에 안 계시죠?)

(연우: 네. 정말로 성안으로 침입하시게요? 아무리 그래도 성안에는 길드원들이 쫌 많은 편인데요...)

(나: 산드로가 떴다 하면 치가 떨릴 정도가 돼야 하는데 그러려면 이 정도는 해줘야죠. 길드원들이 많긴 해도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잡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기도 하고요.)

(연우: 알겠어요. 어차피 번스타인 성은 랭커 길드원이 거의 등록하지 않는 중렙 성이니 크게 위험할 일이 없기는 하실 거예요.)

(나: 네, 정보 감사합니다!)

조금 전 벤토 숲에서 백여 명을 학살하며 먹은 장비는 총 6개.

유니크 무기 1개와 유니크 방어구 2개, 고강화 악세 3개였다.

불굴의 용맹함 효과를 위해 무게 게이지를 높게 채우고 다니는 내 특성상, 주운 장비들을 급히 창고에 맡기고 은신을 쓰고 번스타인 성으로 달려갔다.

어느덧 연막 덫 지대에서 첫 킬을 당한 유저가 부활한 지 6, 7분 정도 흘렀다.

하지만 성의 주성 안으로 빠르게 진입한다면, 부활 후유증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도 있었다.

‘와, 진짜 이게 있으니깐 너무 편하네!’

굳게 닫혀 있는 내성문을 통과하는 것.

그건 대도 부츠를 차고 있는 내게 식은 죽 먹기였다.

은신 상태 그대로 내성벽을 수직으로 내달려 올라선 후, 성벽을 따라 주성 건물까지 달렸다.

군데군데 궁수 NPC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지만, 8성 은신을 감지하는 NPC는 아직까지 전무했다.

이윽고 주성 건물에 다가섰고, 성벽에서 길게 점프를 해서 옥상에 내려앉은 뒤 계단을 통해 1층까지 내려갔다.

그렇게 익숙한 1층 메인 홀 주변까지 도착한 순간, 아니나 다를까 태성 길드원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신고해야 해! 유저 한 명이 백 명을 농락한다는 게 밸런스상 말이나 돼? 그것도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우리 대(大)태성 길드원들을 대상으로?”

“심지어 타이탄을 쓴 것도 아니었잖아? 이 자식 잡으려면 진짜 랭커 분들이 최소 몇 분 정도는 껴 주셔야 돼. 안 그러면 몇백 명이 가도 마찬가지일 거야!”

“지성아, 몇 분으로 되겠냐? 내가 보기엔 랭커 한 10명은 합류해야 잡을락 말락 하겠더라. 아, 진짜 우리 군주님 신검 주워 먹은 놈이 왜 우리 길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나서 그러는지 진짜.”

“그 자식이 신검만 먹은 줄 아냐? 방금 전에 떨군 내 유니크 도끼는 어떻고? 미치겠네, 내가 그걸 어떻게 장만한 건데! 아오!”

넓은 홀에 군데군데 있는 의자와 바닥에 앉아, 부활 후유증이 풀리기만을 기다리는 유저는 모두 40명 정도.

확실히 이 번스타인 성이 현재 태성의 캐쉬카우 성이기에, 부활 포인트로 등록하고 있는 길드원이 많은 듯싶었다.

거기에 추가로 원래 이 성의 전용 사냥터를 이용하느라 있던 30여 명 정도가, 방금 부활한 길드원들과 나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듣고 있다 보니 미안하기는 하네. 한데 어쩔 수 없다. 나도 하나뿐인 인생을 걸고 이 짓 하는 건데…… 시작한 이상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나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 한가운데 선 다음 작게 읊조렸다.

“루이투스 소환.”

[이곳은 지형이 협소하여 타이탄을 소환할 수 없습니다.]

‘이런. 여기서 안 될 줄은 예상 못 했는데.’

천장이 꽤 높아 보여서 시도해 봤는데 아깝게 안 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인 만큼, 빠르게 해치우고 빠지려 했는데 틀린 모양이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무슨 소환 어쩌고?”

“응? 못 들었는데?”

“아닌데, 분명히 들렸는데……?”

의아해하는 궁수 캐릭.

보아하니 처음 내게 은밀한 일격을 맞고 죽었던 바로 그 궁수였다.

“궁수님 제대로 들으신 거 맞아요.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뭐, 뭐야? 컥!”

[은밀한 일격!]

나는 궁수의 뒤에서 은신을 서서히 풀며 곧바로 뒤통수에 은밀한 일격을 먹여 주었다.

스탯이 어지간히 떨어져 있기에 만 HP도 어지간히 떨어져 있는 부활 후유증 시간.

이 부휴 중에 신검으로 은밀한 일격을 맞았으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찌른 데 또 찌르게 돼서요.”

곧바로 잿빛으로 산화하는 궁수.

그는 아마 이 성의 유일한 안전지대인 부활의 방에서 다시 부활하게 되겠지.

물론 내가 여기 왔으니 한 발자국도 못 나올 테지만!

“미, 미쳤다! 산드로가 여기 주성 안으로 들어왔어!”

“제정신이냐?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녀석들은 대꾸해 주고 싶은 감탄사(?)를 연신 외쳐댔지만 그러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꾸해줄 시간이 없었다.

죽여 달라고 굼벵이처럼 움직이는 부활 후유증 먹잇감들이 워낙 지천에 널려 있었으니!

[재빠른 몸놀림!]

[약점 포착!]

대화를 나눈답시고 끼리끼리 몰려있던 터라 더욱 좋았다.

그대로 풀 자버프를 쓴 뒤, 가까이 있는 놈들부터 딜하자 눈 녹듯이 썰려 나갔다.

초보존에 학살하러 온 고레벨.

마치 그것과 똑같은 기분이었다.

“제가! 조금 전! 분명히! 말씀드렸죠! 지금이라도! 태성에서! 탈퇴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입니다!”

검을 휘둘러 한 명씩 쓰러트리며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저 개악랄한 새끼!!”

“진짜 악몽이네……. 하필 주워도 저런 놈이 신검을 주웠냐?”

“우리 태성이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뭘 지켜만 보고 있냐? 부휴 없는 사람들은 전부 덮쳐!”

마지막 외침을 신호로 부휴가 없던 30명의 유저들이 사방에서 덮쳐왔다.

하지만 내 캐릭은 그걸 고대로 맞아줄 수밖에 없는 탱커가 아니었다.

[그림자 밟기!]

부휴 상태의 유저를 죽이는 건 벌레를 눌러 죽이는 것보다도 쉬운 일.

그러니 그걸 냅두고 멀쩡한 놈들부터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포위망 바깥에 있는 힐러에게 그림자 밟기로 이동해서 죽인 후, 빠른 이동 속도를 활용해 홀 안을 들쑤시듯 부휴 중인 유저만 골라 죽였다.

황급히 부활 장소인 안전지대 방으로 이동하려는 유저도 있었으나, 이동 속도 80% 저하의 부활 후유증은 그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페널티였다.

오히려 도망가느라 약점 포착의 패시브 효과인 후방 공격 판정이 터진 덕에, 남은 20명을 더 빨리 잡아버렸다.

“저게 도대체 무슨 캐릭이야! 도둑이 뭐 저렇게 몸빵이 세냐고!”

“피격 이펙트 보면 몰라? 마나 쉴드잖아!”

“어떤 마쉴이 저렇게 안 벗겨지는데? 도대체 MP가 몇이야!”

물론 그동안에 원거리 공격들이 내게 날아와 박혔으나, 내 마쉴은 20%도 깎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대인전(對人戰) 최강의 테크트리.

작정하고 새로키운 내 마쉴 도둑의 위력이, 드디어 시작된 필드전을 통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조만간 내 캐릭의 파훼법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의 전투로 증명되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몰라도, 그 전까지 난 대인전에 있어 ‘무적’에 가까운 캐릭이 됐다는 사실을!

이 무적의 몸으로, 나는 남아있는 30명의 유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회전 베기!]

[연속 베기!]

피 없는 캐릭부터 타겟팅해서 집중적으로 딜을 하면, 30명이 함께 공격 중이라는 사실도 그 유저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이런 집단 싸움에서 한 명만 집중적으로 팬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번쩍!

룬 페이토나에 있는 패시브 속성 추가 데미지가 터지며, 연속 베기까지 연달아 맞은 힐러 하나가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난 곧바로 그림자 분신을 써서 타겟팅을 흩트린 다음, 은신을 썼다.

“뭐야? 갑자기 은신?”

“파이어 볼!”

“아이스 포그!”

태성의 정예들답게 곧바로 은신을 벗기기 위해 말보다 광역 스킬이 먼저 시전됐다.

내가 있던 부근에 연달아 터진 광역 마법.

분신은 단 3초 만에 삭제되듯 사라졌고, 나 또한 은신이 벗겨져 쪼그려 앉은 모습 그대로 노출됐다.

“뭐야? 튄 게 아니라 우리 발밑에 있었다고?”

그렇다.

나는 도망치기 위해 은신을 쓴 게 아니라, 여기 남은 30여 명의 길드원들을 모조리 잡기 위해 은신을 쓴 것이었다.

바로 덫 설치 캐스팅 시간을 벌기 위해서!

펑!

이 죽음의 연막이 벤토 숲에 이어 번스타인 성안에서 다시 또 터졌다.

“으악! 이게 뭐야? 안 보여!”

“연막 덫? 이거 아까랑 똑같은 상황이잖아!”

좀 전에 벤토 숲에서 살려 보내준 탱커도 귀환 주문서로 이곳에 와 있는지, 내 연막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간만에 자비를 베풀었건만…… 참 안됐네요.”

자비는 한 번으로 충분한 법.

두 번은 없었다.

이 연막 속에서 유저 한 명을 제대로 타겟팅해서 다굴놓는 건 불가능했다.

반면 내 검은, 정확히 한 명 한 명에게 집중되어 차곡차곡 킬을 따낼 수 있었다.

1분.

연막이 지속된 이 1분 동안 나는 절반 이상을 잡아냈고, 남은 절반을 잡아내는 데는 그 시간의 반도 소요되지 않았다.

100명에 이어 다시 이 번스타인 성에서 70명.

연이은 대규모 싸움에서 난 혼자 300레벨대의 태성 길드원들을 두 번이나 전멸시켰다.

적의 심장부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생겨버린 적막을 즐기던 순간.

주성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너 이 자식 산드로! 정말 후환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구나? 선을 넘어도 아주 미친 듯이 넘었어!”

태성의 부길마이자 서브 탱커로 유명한 동키호테였다.

앞장선 그의 뒤로 20여 명의 다양한 직업군이 보였고, 그중 연우님의 아이디도 눈에 띄었다.

(연우: 곧 있으면 이 번스타인 성은 죄다 포위당할 거예요. 홍길동의 암살 부대가 지금 2층으로 들어가 돌아서 오는 중이에요. 조심하세요!)

답장할 시간도 없는 급박한 귓속말이 시야에 떠올랐다.

이대로는 앞과 뒤가 동시에 막힌다는 경고.

이어서 싸울 생각도 없었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빠르게 퇴각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동안 난 이 캐릭을 키우면서 생존 수단을 가장 중요하게 염려해 왔기에, 이미 많은 것들을 이룩한 상태였다.

“선을 먼저 넘은 건, 그리고 최근에 더욱 세게 넘은 건 다리우스를 비롯한 당신네 태성 길드입니다. 아무튼, 누가 먼저 고꾸라지나 봅시다. 저야 잃어 봤자 저 하나겠지만, 당신들은 잃을 게 아주 많을 거라는 점이 차이겠지만요!”

그 말을 끝으로 난 벽을 밟고 홀의 천장을 향해 타올라갔다.

그리고 천장 근처에 있던 가장 높은 창문의 문을 열고 그대로 밖을 향해 점프하며 외쳤다.

“훼라리 소환!”

키에엑-!

항상 반가운 피어 소리와 함께 반갑게 튀어나오는 레드 드레이크.

난 나의 애룡을 타고 그대로 날아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돈키호테가 데려온 무리 중에서 그리폰을 소환하는 모습도 보였으나 상관없었다.

훼라리는 그리폰보다 최소 2배 이상 빨랐다.

따라서 내가 이렇게 훼라리에 올라탄 이상, 그 누구도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냥 떠나기는 아쉬워 성 위를 한 바퀴 맴돌다 훼라리에게 화염구 브레스를 명령했다.

목표는 번스타인 주성 지붕 위, 높게 꽂혀 있는 티에스 국의 깃발이었다.

펑!

쓸데없을 정도로 사소한 오브젝트의 물리 효과까지 구현해둔 타연답게, 화염구가 적중한 깃발에는 금세 불이 붙었다.

화르르륵!

하늘 위에서 그 모습이 내려다보니, 마치 번스타인 성의 지붕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이 보였다.

불타는 성(burning castle).

나는 그런 태성 길드의 성을 뒤로 한 채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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