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디바인급 방패 (1)
켕! 켕! 끼잉, 끼잉.
체고 2미터가 넘어가는 크기답지 않게, 피격 시마다 녀석이 내뱉는 울음소리는 시골 똥개가 연상됐다.
덕분에 머리가 3개라 어지간한 여성 유저들은 두려움에 떨게 할 흉악한 외형도, 이제는 정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와! 드로야. 진짜 보면 볼수록 신검 데미지가 장난 아니다!”
“신검이 괜히 신검이겠어요? 악마 계열과 언데드 때려잡으라고 신검인 거죠! 아마 이대로 타연이 10년은 더 지난다 해도, 얘네들 상대로 데미지 더 잘 나오는 템은 나오지 않을걸요?”
디바인 무기 중에서도 7신기, 거기다가 빛의 속성력까지…….
이 2가지 조건에 필적하는 무기가 또 나올 수 있을까?
어찌하다 보면 나올 수야 있겠지만 ‘신검’이라는 이미지가 가진 상징성이 있기에, 요놈들에게 이렇게나 추가 데미지를 주는 옵션은 달려 나오기 힘들 것이다.
‘한 마디로 마계 몹 한정, 세계관 끝판왕 템을 들고 사냥 중이라는 거지!’
그런 만큼, 사냥 속도는 사기 수준이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한데 거기다, 현중이와 축빙 형님의 오라와 버프까지 사냥 속도를 한층 더 빠르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투쟁의 오라’.
5성을 찍으면 자신을 포함한 일정 범위 내 모든 아군의 공격력과 공격 속도를 15%나 올려주는, 성기사의 고유 스킬.
성기사는 ‘오라(aura)’라는 다인용(多人用) 특수 버프를 사용할 수 있는데, 한 번에 하나씩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대신 상황에 따라 적절히 교체해가며 쓸 수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성기사들은 여러 종류의 오라 중에서, 공격과 방어 등으로 최소 2가지 오라 정도는 스킬 포인트를 투자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힐러의 대표적인 버프 스킬, ‘수호의 빛’과 ‘활력의 빛’.
수호의 빛은 10초간 버프를 건 대상에게 모든 종류의 데미지를 20% 감소시키는 사기스러운 효과를 자랑했고, 활력의 빛은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를 각각 10%씩 높여줬다.
이렇게 성기사와 힐러까지 있는 파티에 타연 최고 데미지의 딜러까지 합세해 버렸더니, 고레벨 사냥터임에도 불구하고 사냥이 술술이었다.
“암만 봐도 몹들 레벨대가 300 후반에서 400 사이 같은데, 이렇게 쉽게 사냥하는 게 말이 되는 거예요? 가뜩이나 마계 몹들은 공격력이 센 거로 유명한데 말이죠.”
“응? 난 항상 70, 80레벨 높은 몹들만 사냥해 와서 잘 모르겠는데? 이게 이상한 거야?”
“헉! 저도 템 좀 돼서 레벨 대비 높은 몹들만 잡아 왔지만, 형님은 그 정도나 됐었어요? 암만 디바인 무기가 있다고 해도 진짜 클래스가 다르시네.”
“라챤아, 저놈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 남들 열심히 렙업 해온 거 허무하게 만드는, 생태계 교란종 같은 놈이니깐.”
“축굴아, 너 요새 나한테 삐진 거 있냐? 그새 내가 레벨 거의 다 따라잡아서 그런 거야?”
최근 현중이가 라챤이가 레벨업할 때 몹 몰이 좀 몇 번 도와줬다더니, 둘은 어느새 벌써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다들 잠깐만! 저거 또 나왔어! 집중!”
마법사인 축복받은파볼, 축볼 누님의 경고로 전진을 멈춘 우리 눈앞에 하급 마족인 ‘데몬의 추종자’가 보였다.
조금 전에도 몇 번 나타났던 정예 수준의 강력한 마계 몹이었는데, 꼴에 마족이랍시고 저놈이 쓰는 광역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소 특별한 사냥 패턴으로 협공을 연습해 보았다.
“신성한 가호! 연속 베기!”
“힐!”
일단 현중이의 선공으로 데몬의 추종자의 어그로는 오직 현중이만 가져갔다.
라챤이와 축볼 누님도 곧 조금 떨어진 채 원거리 딜을 도와줬지만, 나는 일체 한 대도 때리지 않는 상태에서 현중이가 폭풍 힐을 받으며 몸빵과 딜을 하는 것을 구경만 했다.
“건방진 인간 녀석들!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지옥의 불길!”
이윽고 녀석이 피가 제법 깎였는지 광역 스킬을 쓰기 시작했는데, 파티원들은 모두 데몬의 추종자와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었기에 오직 현중이만 화염 공격에 적중당했다.
그리고 이 순간이, 내가 전투에 참여할 타이밍이었다.
피슛!
가지고 있는 자버프를 차례로 건 다음,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 녀석의 후방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곧장 녀석의 뒤통수에 가지고 있는 모든 즉발 스킬을 한 싸이클 쑤셔 넣었다.
“크아아! 그분께서 너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마족 몬스터라 할지라도 순식간에 잡아낼 수 있었다.
“캬아! 아무리 봐도 딜이 미쳤다 미쳤어. 이 자식 일반 몹이기는 해도 마족이라 거의 준 필드 보스급인데…… 그걸 순삭해 버리시네!”
“헤헤!”
사실 난 그동안 파티 사냥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경험치를 독식해 빠른 레벨업을 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내 테크트리 자체가 힐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부분이 컸다.
HP대신 MP로 데미지를 대신하는 내 캐릭은, 아무리 봐도 파티 사냥보다는 솔플 사냥이 몇 배는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방금처럼 이런 식으로 사냥한다면, 파티 사냥도 제법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사냥하면 MP 회복 타임을 전혀 갖지 않고, 연달아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첫 파티 사냥인데도 이 정도면, 이제 팀플은 어느 정도 맞춰진 것 같다. 확실히 다들 게임 좀 하던 가닥이 있어서 그런지, 척하면 척이로구나!”
물론 나 혼자서도 데몬의 추종자을 잡아낼 수 있었겠지만, 굳이 이런 식으로 데미지를 분산시키며 사냥한 이유.
그건 우리가 이 던전에서 최종적으로 싸워야 할 보스 몹인, 타이탄을 상대하기 위한 팀플레이를 미리 연습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렇게 신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데몬의 추종자를 몇 마리 잡아 본 건데, 확실히 처음 하는 파티 사냥임에도 불구하고 금방 폼이 갖춰졌다.
현중이를 비롯한 축복받은 패밀리는 오랜 기간 파티 사냥을 해봤던 사이였고, 여기에 딜러 2명만 새로 낀 것이나 마찬가지라 바로 익숙해진 것이다.
또한 생각보다 현중이의 맵 리딩 실력이 상당히 괜찮았다.
덕분에 우리는 차근차근, 하지만 재빠르게 몹들을 정리하며 신전의 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하얗게 빛났을 대리석의 기둥들.
하지만 지금은 검게 그을린 채 대부분 쓰러져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보기 위해 계단에 올라서고 입구를 지나치려는 순간, 갑자기 허공에 언데드인 리치(lich) 하나가 스르륵 나타났다.
“뭐지? 중간 보스인가?”
“아니야, 자세히 봐 봐! 몹이 아니라 NPC잖아?”
외형은 정말 영락없는 리치였는데, 머리 위에는 뜬금없이 ‘수호자 헤세드’라는 NPC들이나 갖고 있는 네임이 떠 있었다.
이런 인던을 공략하다 보면 서브 퀘스트나 스토리와 관련된 NPC가 나오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이렇게 몬스터의 외형을 가진 NPC는 처음 봤다.
어찌 됐든 선공을 해 오진 않았기에, 탱커인 현중이가 리치에게 다가가자 리치가 말문을 열었다.
“드디어…… 이 도시와 우리를…… 구원할 자가 방문한 것인가……. 천 년…… 정녕 오랜 기다림이었다…….”
“뭐지? 넌 ‘누구’야?”
“난 이 도시의 수호자였지만 그 책무를 지키지 못한 자……. 또한 어리석은 선택으로 천년의 세월을 이곳에 갇혀버린…… 저주받은…… 헤세드다…….”
그 말을 시작으로 우리 눈앞에는 오랜만에 ‘시네마틱’ 영상 모드가 펼쳐졌다.
영상은 푸르름을 간직한 초원 한복판에 활기찬 고대의 한 도시의 번영한 모습으로 시작했다.
그 규모와 배치를 볼 때, 바로 이 지하도시의 옛 모습이 분명했다.
허나 푸르른 모습도 잠시, 곧 거대하고 불길한 붉은 포탈이 지상 곳곳에 생성됐다.
그리고 곧이어 그곳에서 마계의 마물과 마족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 년 전 그날, 마왕의 중간계 침공이 시작된 순간의 모습이었다.
포탈 주위의 숲과 초원은 순식간에 메말라갔고 시들었다.
그러자 이 도시를 포함한 주변의 도시들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마법진을 발동시켜 지상에 불 번지듯 퍼지는 ‘마계화’에 가까스로 대응해 나갔다.
‘이게 데스라 사막의 탄생 비화(祕話)구나! 마왕의 최초 강림과 마계화의 폐해가 가장 심하게 남아 있는 곳……. 그래서 이 데스라 사막이 이렇게나 거대했고, 곳곳에 폐 유적지가 남아 있던 거였어!’
그러나 마법진으로 도시가 마계화에 침식되는 걸 막을 수 있었는지는 몰라도, 마왕군의 침략까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금세 성벽 곳곳이 무너졌고, 마왕군이 쳐들어와 도시를 무너뜨리고 불태웠다.
시민들은 지금 우리가 위치한 이 거대한 신전으로 황급히 대피했고, 이 도시 전체를 폐허로 만들며 전진해 온 마왕군은 결국 이 신전 앞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던 마족이 그 첫발을 디디려는 순간, 마족의 머리 위로 거대한 해머가 무자비하게 내리꽂혔다.
흰색과 회색 갑옷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강철 기사, 타이탄이었다.
그 육중한 타이탄의 모습이 포커싱되면서, 시네마틱 영상은 끝이 났다.
“마왕군의 침략으로부터 이 도시를 지키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나의 자랑스러운 아들 페이드는…… 타이탄과 함께 끝까지 이 도시를 지켰다……. 하지만 지원군은 오지 않았고……, 우리만으로는 버틸 수 없었다……. 결국 내 아들은 숭고한 전투 끝에 명예롭게 전사했지만…… 고위 마족의 저주로 인해…… 악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공중에 뜬 채로 붉은 안광을 번들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몬스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사연을 들은 후에 보고 있자니, 뻔히 AI인 줄 알면서도 왠지 안타까운 부성애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뻔히 픽션인 줄 알면서도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이 나는 것처럼, 이 상황이 조금도 우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난 내 아들의 저주를 풀어주기 위해 리치가 되는 걸 택했지만…… 정녕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나의 역량으로는 무엇을 하더라도 아들의 저주를 풀어 줄 수 없었다……. 그러니 부탁한다……. 부디 타이탄에 갇혀 있는 내 아들의 영혼을,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다오……. 그렇다면 나도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으리라…….”
[퀘스트 ‘저주받은 타이탄의 해방’을 획득했습니다.]
긴 스토리텔링이 끝남과 동시에, 드디어 기다리던 퀘스트 창이 하나 떴다.
[저주받은 타이탄의 해방: 일회성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A
* 잊혀진 마도 시대에는 도시마다 도시를 수호하는 타이탄이 존재했습니다.
* 이 도시를 지키던 타이탄, 그리고 그 라이더였던 페이드(!)를 악령화(!)로부터 구원하십시오.
* 퀘스트 클리어 조건: 저주받은 타이탄의 패퇴
* 퀘스트 클리어 보상: 타이탄의 소유권 획득(최초 보상)
“떠, 떴다!”
“와! 대박! 드로 말이 진짜였구나?”
동시에 파티원들로부터 환호성이 튀어나왔다.
“최초 보상템이 나오는 인던은 희귀한데, 진짜 제대로 걸렸어!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네!”
“나도 이런 던전은 처음이에요 오빠!”
항상 침착한 모습을 보이는 축빙 형님도, 약간 긴장이 늦춰졌던 축볼 누님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방금 이 퀘스트 창을 통해 공식적으로 미리 확답을 받았다.
이 안에 있을 보스 몹을 잡게 되면, 타이탄을 얻게 된다고!
“아직 ‘최초’라는 글이 붙어 있는 거 보면 태성 애들이 클리어하지 못한 건 확실해졌습니다. 태성의 정예 멤버도 클리어하지 못했으니, 아무리 제가 있다 하더라도 쉽지는 않을 거예요. 다들 마지막까지 집중해서 꼭 좋은 결과를 얻어 봅시다!”
“그래! 다들 흥분은 가라앉히고 집중하자! 아자 아자 화이팅!”
다소 긴 스토리도 들었고 퀘스트도 받았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었기에, 우리는 신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20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은 천장.
지붕이 남아 있어 어두울 것 같았으나, 막상 들어와 보니 라이트 마법이 걸려있는 기둥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어 괜찮았다.
그리고 우리들의 정면, 신전의 끝에는 거대한 동상 하나가 서 있었다.
거대한 방패와 전투 망치를 들고 있는 강철의 기사.
영락없는 타이탄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