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디바인급 방패 (2)
“저놈인가 봐! 이야, 멋지다 멋져!”
“방패 크기 좀 봐봐. 방어 특화형인가 본데?”
<악령에 잠식된 타이탄 레벤다스>
외형도 외형이지만 보스 몹인 것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 녀석의 머리 위에 다른 보스들처럼 붉게 번들거리는 몹 네임이 붙어있었다.
놈의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축볼 누님의 말에 현중이가 우려를 표했다.
“축볼 누나, 근데 저래 봬도 타이탄인데 정말 우리만으로 잡을 수 있을까요?”
“축굴이 너 또 약한 소리 할래? 우리가 인던 하루 이틀 깨 봐? 여기가 6인용 인던이라 한 명 모자라긴 해도, 대신에 타연 최고의 딜러가 껴 있잖아! 자고로 모든 인던은 결국 유저들이 깨라고 만들어진 거야!”
“그래. 축볼이 말대로 절대로 못 깨게 만들어진 인던은 결국 없더라. 그래도 몇 번이나 트라이할 여유 없이 이번 한 번만으로 깨야 하니깐, 절대 실수가 있으면 안 되겠다. 일단 축굴아, 네가 시동 좀 한번 걸어보자. 저놈 공격 패턴이랑 딜량 좀 먼저 살펴봐야 하지 않겠어?”
“네! 다들 입구 쪽으로 떨어져 계세요! 저와 축빙 형님 둘이서만 일단 시동 걸어 보겠습니다!”
‘시동’을 한번 걸어보다.
흔히 레이드에서 쓰이는 타연 속 은어로, 처음 보는 보스 몹의 레이드에 앞서 미리 정보를 얻기 위해 어그로를 끌었다가 리셋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보통 필드 보스 몹과 달리 인던의 보스 몹은, 대부분 던전의 마지막 장소인 보스 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인던의 보스는 보스 룸을 벗어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유저들이 보스 룸에서 벗어나면, 레이드하던 보스 몹의 어그로 및 체력과 마력, 스킬 쿨타임 등이 모두 초기화되는 일명 ‘리셋’ 현상이 벌어졌다.
유저들은 보스 몹의 첫 트라이를 할 때 정보를 얻고 싶거나, 중간에 실수로 파티원이 일찍 죽거나 하면, 일부러 어그로를 끊기 위해 이 리셋 현상을 이용했다.
인던에서 전멸만 피할 수 있다면 모든 빈사 파티원을 부활시킬 수 있기에, 첫 트라이는 따로 시동을 걸어보고 안전하게 도전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이 되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현중이는 마지막 말을 외치자마자 곧장 타이탄을 향해 뛰쳐 갔다.
그러자 동상같이 서 있던 타이탄의 두 눈이 붉게 일렁이며 온몸에서 검은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순식간에 짙은 어둠에 휩싸인 놈이, 자세를 고쳐잡으며 외쳤다.
“이 지겨운 천계의 졸개들! 나의 안식을 훼방 놓기 위해 기어코 이곳까지 찾아왔구나!”
마치 누군가가 타이탄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닌, 눈앞의 타이탄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쾅!
놈은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전투 망치로 땅을 내리찍었다.
현중이는 그 공격을 여유롭게 피해냈지만, 놈은 계속해서 전투 망치를 휘두르기보다 내리찍는 공격을 해왔다.
항상 나와 장난만 치던 현중이도, 오랜만에 집중한 듯 입을 꾹 다문 채 타이탄의 모션을 보고 정확히 피해냈다.
‘짜식, 제법이잖아? 역시 그동안 세인트의 메인 탱커를 맡아왔던 게, 인맥빨은 아니었구나?’
잘 피하고 있다 보니 얼핏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 보는 몹을 상대로 저렇게 피하는 건 막상 아무나 못 하는 일이었다.
역시 투닥거리긴 해도 내가 항상 인정해 온 녀석다운, 뛰어난 무빙 컨트롤이었다.
“평타 패턴은 멀티플보다는 단일 타겟팅 위주네요! 축빙이 형! 이제 맞아서 데미지 좀 봐볼 테니 힐 주세요!”
“어! 어차피 리셋할 테니까 버프는 안 준다! 자, 재생의 빛! 힐!”
쾅!
축빙 형님이 10초간 지속해서 체력이 차오르는 도트 힐 ‘재생의 빛’을 써 주자마자, 현중이는 내리꽂히는 망치 공격을 방패를 들어 정면으로 맞아 보았다.
그와 동시에 현중이에게 들어오는 예측 힐!
하지만 두 종류의 힐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깎인 HP는 반의반도 차오르지 않았다.
“헉! 이 자식 무지하게 아프네요! 이 자식 딜량은 그냥 힐로는 절대 못 따라가겠어요!”
축빙 형님은 현중이의 말에 황급히 연달아서 ‘그레이터 힐’도 캐스팅했다.
힐 계통 스킬들은 오직 사제와 성기사들만 익힐 수 있는 고유 스킬.
여러 종류의 힐들이 쿨타임마다 원활히 잘 돌려 힐량을 극대화하면서, 어그로가 뒤지 않도록 거리 유지를 잘하는 것이 힐러의 실력을 판가름하는 척도였다.
그리고 축빙 형님은 아이디다운 환상적인 무빙으로, 힐의 사정거리 끝에서 쿨타임마다 들어갔다 나갔다를 반복하며 어그로 관리를 완벽하게 해냈다.
허나, 둘이 그 상태를 꽤 유지하나 싶었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쉴드 어택!”
타이탄의 피가 어느 정도 깎이자 갑작스럽게 거대한 방패를 휘두르는 스킬을 써서, 현중이가 그대로 맞고 스턴에 걸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스턴 때문에 무빙으로 평타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온전히 맞고만 있게 되자, 현중이의 HP는 힐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천상의 방패!”
HP가 10%까지 떨어진 상태에서 아슬아슬하게 스턴에서 깨어난 현중이는, 곧바로 무적 스킬을 써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그러자 무적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게 된 타이탄의 어그로가 축빙 형님에게 튀었고, 형님과 우리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냅다 신전 입구를 향해 도망쳤다.
“야이! 멍청아! 그냥 죽어서 빈사에 빠져 버려야지! 시동 거는 도중에 쿨타임이 긴 스킬을 낭비하면 어떡해!”
“아! 맞다!”
무적 상태로 마지막으로 입구 밖으로 튀어나온 현중이를 보고는, 축볼 누님이 갈굼을 시전했다.
타이탄은 현중이마저 밖으로 나오자 입구에서 잠시 우리를 쳐다보더니, 곧 리셋되어 원래의 자리로 쿵쿵 느린 걸음으로 되돌아갔다.
“타이탄의 몸집이 커서 평타 공격은 모션 보고 피할 만은 한데, 저 스턴 기술은 워낙 긴 리치로 빠르게 휘둘러서 피할 수가 없겠어요. 탱커나 근딜러라면 무조건 맞을 수밖에 없겠는데요? 정확한 발동 타이밍도 첫 트라이라서 짐작하기 힘들겠고요.”
“스턴에 맞으면 원 힐러로는 절대 데미지를 따라잡지 못하겠더라. 그나마 우리 중에서 가장 방어력이 높은 축굴인데도 말이야.”
“역시……. 태성 랭커 애들이 괜히 클리어에 실패한 게 아니네요. 후반부 페이즈는 어떤 스킬을 쓰는지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나 까다로운 걸 보니까요.”
확실히 레벨 차이도 나는 데다가 타이탄이라는 고스펙의 보스 몹이었기에, 패턴은 단조로워도 막강한 데미지 때문에 레이드가 까다로워 보였다.
“스턴이 걸릴 때 나와 드로가 쉴드를 걸어주는 건 어떨까요? 우리 둘 다 쉴드 레벨이 높으니까 데미지 분산이 조금은 될 거 아니에요?”
축볼 누님이 괜찮은 의견을 제시해 봤다.
하지만 고작 2명이 쓰는 쉴드로는 피가 깎이는 걸 줄여줄 순 있어도, 힐량이 막대한 데미지를 따라잡을 시간을 벌어줄 정도는 아니었다.
한두 번의 스턴은 그렇게 버틴다 하더라도, 그 이상의 스턴이 반복되면 결국 현중이는 저놈의 피를 절반도 깎기 전에 죽어버릴 게 분명해 보였다.
“작전을 바꿔야겠어요. 유일한 탱커가 탱킹이 안 되는 이상, 안정적으로 레이드를 공략하는 건 포기해야겠습니다. 후반부 페이즈가 어떨지 모르는데 이런 식으로 트라이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그럼 드로 네 생각은 어떤 건데?”
“놈의 피가 절반이 될 때까지는 제가 탱킹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후는 몇 명이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폭딜을 쏟아부어서 빠르게 잡는 식으로 가야 승산이 있겠어요.”
“드로야, 네가 탱킹이 되겠어? 넌 힐도 받지 못하는 몸인데?”
“네, 대충 가늠해봤는데 가능할 것 같아요. 아무튼 시간 없으니까, 저를 믿고 빠르게 한 번 시도해 봅시다!”
시동을 걸어보니 감이 왔다.
이번 코스에서도 운전대는, 역시나 내가 잡아야겠다는 것이!
* * *
“쉴드 어택!”
일단 현중이의 선(先) 탱킹으로 레이드가 재개됐다.
이번에는 전원 다 공격에 들어가서 그런지, 놈의 스턴 공격도 조금 더 빠른 타이밍에 나왔다.
“쉴드!”
“그레이터 힐!”
나와 축볼 누님의 쉴드 덕에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는 현중이가 수월하게 스턴 구간을 버텨낼 수 있었고, 그러는 사이 나는 타이탄의 뒤로 이동해 후방 공격을 시작했다.
‘악령에 잠식된’이라는 수식어답게, 녀석은 타이탄임에도 불구하고 악마 계열 몬스터로 분류됐는지 내 신검의 추가 데미지가 적용됐다.
거기다 약점 포착의 후방 공격 패시브 효과와 몇 가지 파티 버프 효과가 시너지를 일으켰더니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들어갔다.
그러니 어그로가 안 튀려야 안 튈 수 없었다.
웬만한 근접 딜러 10명의 데미지를 상회하는 폭딜이 들어오자, 현중이를 내버려 둔 채 타겟팅을 바로 나로 바꾼 것이다.
이대로 녀석이 쉴드 어택을 쓴다 하더라도 마쉴 덕분에 내가 스턴에 빠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무시무시한 평타 공격을 마저 피하려다 보면, 제대로 딜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녀석의 공격을 피하며 비장의 스킬을 사용했다.
“훼라리 소환!”
키에엑!
순식간에 마법진에서 튀어나오는 나의 애룡 훼라리.
이곳은 천장이 20미터 높이나 되는 넓은 공간이었기에, 펫인 훼라리를 소환하는 데 전혀 문제없었다.
나는 곧바로 내 애룡의 등 위에 올라탄 후.
평소와는 달리 날아오르지 않고, 그대로 타이탄의 정면에 찰싹 붙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업적 효과로 탑승 중일 때 입는 피해를 드래곤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업적 ‘드래곤 라이더’에 붙어 있는 특수 효과, ‘피해 공유’.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사실 나한테만큼은 사기 효과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이 탑승 상태가 된 상태에서 마쉴을 끄게 되면, 갑자기 힐을 받을 수 있는 상태가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훼라리의 물리 방어력은 고레벨 유저 수준이었고, HP는 어지간한 기사 랭커들보다 서너 배 많은 14만이란 수치를 자랑했다.
여기에 내가 타게 되면 HP는 15만.
이 정도에서 힐까지 들어온다면, HP가 다 닳기 전까지 충분히 오랜 시간을 탱킹할 수 있었다.
“쉴드 어택!”
“키에에엑!”
또다시 녀석의 스턴 스킬이 시전되었고, 나와 훼라리는 붙어 있던 터라 피할 수도 없이 그대로 스턴에 빠졌다.
하지만 곧바로 축볼 형님의 쉴드와 축빙 형님과 현중이의 힐이 들어왔기에, 제법 버틸 만은 했다.
“이 정도라면 훼라리의 역소환까지 스턴 10번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모두 맘 놓고 극딜 모드로 공격하세요!”
초반에는 현중이의 어그로 관리를 위해 모두가 딜을 아꼈다.
하지만 내가 조금 전부터 본격적으로 딜을 시작한 이상, 이제 모두는 딜을 아낄 필요가 없었다.
타연 속 그 어디에도, 내가 작정하고 딜하는 것보다 많은 DPS를 뽑아낼 수 있는 유저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깡! 까깡, 깡!
타이탄의 몸체로 검과 화살, 마법들이 날아가 금속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 그 속에는 훼라리를 탄 채로 녀석에게 검을 휘두르는, 내 신검의 쇳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폰 라이더들이 하늘에서 화살 공격을 날릴 수 있는 것처럼, 나도 훼라리를 탄 채로 몹에 가까이 붙을 수만 있다면 이렇게 근접 공격을 먹일 수 있었다.
다행히도 타이탄은 어그로가 무작위로 튀는 유형의 보스 몹은 아니었다.
덕분에 나와 훼라리의 안정적인 콜라보 탱킹 속에서 놈의 HP는 빠르게 깎여 나갔다.
그렇게 놈의 HP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는 순간.
공격과 몸놀림이 빨라짐과 동시에 새로운 스킬이 시전되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페이즈로 돌입한 것이다.
“제법이구나 천계의 졸개들아! 이제부터 내가, 너희의 그 보잘것없는 신념을 시험해 보리라!”
“혼돈의 전장!”
갑자기 타이탄답지 않은 마법 스킬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무려 다중 제어 스킬로 악명높은, ‘혼란’이었다.
유저가 쓰는 혼란 스킬과는 비교도 안 되게 넓은 범위인지, 우리 파티원 전원은 순식간에 혼란 상태로 빠져들었다.
모두가 무빙과 스킬 사용 등을 중단하고, 그저 가까이 있는 파티원들을 향해 평타 공격을 넣기 시작한 것이다.
“와! 이 자식 미쳤네? 타이탄이 무슨 혼란 마법을 써?”
“뭐야? 6인 던전인데 광역 혼란? 일루전은 이걸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거야?”
몸은 불가항력적으로 서로를 공격해 댔지만, 정신은 다들 멀쩡하기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난이도이기는 했다.
미친 몸빵에 현존하는 최고 수준의 공격력…… 거기에 스턴 기술과 혼란 마법까지 쓰는 보스 몹이라니?
도전하기 전까지는 몰랐지만, 이놈은 현시점에서 잡으라고 만들어 둔 수준이 결단코 아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일도양단 패밀리가 몇 번을 도전한다 해도, 당분간은 절대로 깰 수 없는 난이도였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보상은 더욱 달콤한 법!
이미 타이탄 획득이라는 보상이 제시된 이상,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이놈을 퍼스트 킬을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나에겐 그것이, 정말 불가능한 일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확실히 내가 캐릭을 특이하게 키우기는 했나 봐.”
보스 몹이 쓴 혼란 스킬임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으로 높은 마법 방어력 덕분에 오직 나만은!
혼란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신의 펫 훼라리(레드 드레이크)의 HP가 전부 소진되어 소환이 강제로 해제됩니다.]
거의 다 닳아 가던 훼라리의 HP가, 혼란으로 힐이 잠시 멈추자 바로 역소환됐다.
만약 나도 다른 이들처럼 혼란에 걸렸다면, 워낙에 낮은 HP 때문에 순식간에 죽어 빈사 상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난 혼란을 저항했기에, 소환이 해제되기 직전 마쉴을 켠 채로 훼라리에서 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모든 자버프를 돌리며 파티원들에게 외쳤다.
“이제부터 극딜 모드로 킬까지 한번에 가겠습니다! 모두 저한테 버프를 집중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