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디바인급 방패 (4)
“축굴아, 흥분 좀 그만하고 스펙 구경 좀 시켜 줘!”
“그래, 한번 봐 보자! 얼마만큼이나 좋은지?”
사람들의 재촉에 현중이는 곧바로 타이탄의 정보를 길드 채팅창에 링크 걸어 올렸다.
[레벤다스(나이트급, 전사형)]
* HP: 520000/520000 * MP: 135000/135000
* 공격력: 3570 * 물리 방어력: 4510 * 마법 방어력: 2760
* 마왕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마도 시대 인류가 제작한 근접 전사형 타이탄으로서, 고대 마도 왕국 페라루스의 국보 중 하나입니다.
* 소환 시간이 다하거나, HP를 전부 다 소진하면 소환이 해제됩니다. (소환 시간: 레벨×1초)
* 소환 해제 당시의 HP에 따라 재소환 시간이 변동됩니다. (소모된 HP 1%당 소환 대기 시간 1시간, 최소 대기 시간 24시간)
* 좁은 지형이거나 인스턴트 던전류의 공간에서는 소환이 제한됩니다.
* 소환 재료: 빛나는 마력석 2개
* 타이탄 전용 스킬 ‘방패 강타(!)’, ‘집중 방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쉴드 어택(고유 스킬): MP 5000을 소모하여 전방에 위치한 대상에게 공격력의 150%에 이르는 광역 피해와 스턴 효과를 입힙니다. 사용 대기시간 30초.
-집중 방어(고유 스킬): MP 3000을 소모하여 10초간 물리 및 마법 방어력을 200% 향상시킵니다. 사용 시 10초간 공격 불가. 사용 대기시간 10초.
조금 전에 슬쩍 봤지만, 다시 살펴봐도 나이트급은 확실히 로드급보다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일단 HP나 공격력, 방어력 같은 스펙 등이 절반 수준이었으며, 전용 스킬도 크게 좋아 보이지 않는데도 그마저도 2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타이탄은 타이탄이었다.
최상위권 유저들의 공격력과 방어력을 지녔으면서 랭커급 탱커 캐릭보다 10배는 많은 HP를 가졌기에, 여벌의 목숨 3, 4개를 갖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뜩이나 최상위권으로 갈수록 유저들이 잘 죽지 않는 타연이었는데, 이대로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훨씬 더 PK 하기가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랭커급 유저라면 누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솔저급 타이탄이라도 꼭 가지려 들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아까는 스치듯 봤기에 확인하지 못했던 설명 한 줄이 내 눈에 들어왔다.
“빙고.”
‘빛나는 마력석’.
꽤나 승산이 높은 확률의 도박이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타이탄의 유일한 소환 재료가 맞았다.
루이투스 소환에는 4개가 필요했지만 레벤다스는 2개를 필요로 하고 있으니, 추측건대 솔저급은 1개일 게 분명했다.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 마력석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는 것을 의미했고,
또한 나의 사재기가 완벽하게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벌써 3달이나 지났지? 여윳돈이 없을 때부터 꾸준히 사 온 보람이 있구나!’
근래 내가 벌어들이는 돈은, 가끔씩 나조차도 깜짝깜짝 놀랄 수준이었다.
당장에라도 현금화를 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도 많았지만, 나중을 꿈꾸며 꾸욱 참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 인벤토리 창의 골드는 썩어 넘칠 만큼 풍족한 상태였다.
나는 그 돈으로 레전더리 장비를 구입하고 장비들을 강화하는 한편, 핑크래빗의 도움을 받아 원래 하고 있던 사재기의 품목을 본격적으로 늘렸다.
그리고 그중 메인 품목은 역시나, 처음에 시작했던 이 ‘빛나는 마력석’이었다.
‘돈이라는 게, 자금 좀 있고 정보 좀 독식하니까 이렇게나 벌기 쉬운 거였어…….’
다른 건 몰라도 근 3달간 타연의 거래소에 올라온 빛나는 마력석 매물은, 내가 거의 전부를 쓸어 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가 쓸 재료를 충분히 구해 놓으려고 시작했던 사재기가, 이제는 어지간한 레전더리 득템 몇 개보다 많은 시세 차익을 안겨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직도 당분간은 빛마석의 사재기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혼자만의 자축 시간을 갖고 있는 도중, 옆에 있는 현중이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축복받은얼굴: 지환아, 정말 괜찮겠냐? 막상 먹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디바인 템이다 보니 후덜덜하다. 이거 잘한 결정일까...?)
(나: 이 인던 다섯 명이서 깬 던전 아니었냐? 함께 깨 놓고는 왜 다들 내 눈치를 보는 거냐, 자꾸 부담되게?)
(축복받은얼굴: 아니, 그래도 네가 구해 온 정보로 온 던전이고 너 없었으면 턱도 없었을 퍼스트 클리어였잖아. 입구의 태성 놈들도 너 혼자 정리했고.)
(나: 야! 했던 말 자꾸 또 하게 만들래? 아무리 내가 알아냈고 나 없으면 안 됐다고 해도, 나 역시도 우리 길드원들 없었으면 이거 못 깼어. 애초에 힐주는 축빙 형님 없이는 반피까지도 못 갔을 거고, 같이 딜했던 너와 축볼 누님, 라챤이 중에 한 명이라도 없었으면 마쉴 깨지기 전에 절대 잡지 못했어. 내 말에 틀린 거 있어?)
(축복받은얼굴: ......)
(나: 다리우스도 타이탄 갖게 된 거 알잖아? 그러니 이제 루이투스 한 대로는 다리우스를 잡을 수가 없어. 어차피 누군가는 타이탄을 가져야만 했는데, 그게 너라서 얼마나 다행이냐? 최소한 너라면 절대로 배신하지 않을 놈일 테니 말야.)
(축복받은얼굴: 짜식이 듣다 보니 선 넘는다? 우리 세인트 형누님들을 내가 10년 동안 봐왔는데 의심하는 거냐? 10년 동안이나 스파이짓 하는 사람도 있어?)
(나: 그게 아니라, 멀린이나 히든캬드를 보다 보니 생각이 많아져서 그래. 돈 앞에 장사는 없는 거 같다는 생각이 요즘 부쩍 들어서... 아무튼 내가 실언했다. 그럼 네가 먹도록 한 게 잘한 결정인지 아닌지 확인시켜 줄까? 어때, 바로 한 번 써먹어 봐도 괜찮겠어?)
(축복받은얼굴: 뭐? 뭘 써먹어? 나를?)
(나: 아니, 너 말고 네 레벤다스.)
예전에 나도 그랬다.
루이투스를 소환하게 되자마자 곧바로 공성전에 참여해서 제대로 써먹어 봤던 것이다.
현중이 녀석도, 죽여주는 새 차를 얻게 됐으니 그때의 나처럼 풀악셀 한번 밟아 볼 차례였다.
* * *
“정말 괜찮겠어 너희들? 아무리 생각해도 둘이서만 나가는 건 위험할 것 같은데?”
신전에서 나온 우리는 귀환 주문서를 사용하는 대신, 다시 도시를 거슬러 이곳으로 왔다.
첫 출발을 했던 이 파란색 포탈 앞까지.
-인던이 노출된 걸 알았으니, 아마 죄다 몰려왔을 거예요. 저희가 들어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으니 일도양단 패밀리는 다시 재진입했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이 인던을 지키기 위해 저희의 먹잇감들은 필드에 충분히 남겨 뒀을 겁니다.
조용히 같은 길드원들도 모르게 이 인던을 클리어하려던 것이 나 때문에 무산됐으니, 태성 간부진의 마음은 급해졌을 것이다.
설마 나 혼자 왔던 것이 아니라 우리 길드 전원이 인던으로 들어가, 이렇게 레벤다스라는 최초 클리어 보상까지 이미 받았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인던에 다른 유저들이 꼬이는 것을 막기 위해, 길드원들을 긴급히 소집했다는 사실도 연우님을 통해 확인했다.
“저희도 위험할 것 같으면 이런 짓은 안 하죠. 한데 여기가 어디예요? 포탈 앞이잖아요? 정 위험하면 여기 들어와 버리면 끝인데요 뭘. 어떻게 보면 이 정도로 PK 하기에 안전한 장소도 없어요!”
인던은 한 파티 당, 한 개의 가상 던전이 주어진다.
그러니 실컷 필드에서 싸우다가 포탈로 도망쳐도, 다른 파티의 유저는 당연히 우리가 있는 인던으로 뒤쫓아 들어올 수 없었다.
이건 다시 말해, 안전지대인 마을 입구 앞에서 태성 놈들과 싸우는 꼴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만큼 안전한 PK였다.
“알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우리도 입구 앞에서 대기할게. 도움이 필요하면 곧바로 말해, 바로 뛰쳐나갈 테니!”
“네, 감사합니다 축빙 형님. 자, 축굴아. 그럼 내가 먼저 나가 볼 테니까 신호 주면 바로 튀어나와라?”
“오케이! 고고!”
그렇게 나는 타연 최고의 사기 스킬인 8성 은신을 쓴 채로 포탈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왔다.
포탈 앞과 유적지는 역시 예상했던 대로 어느새 태성의 유저들로 꽉 차 있었다.
“이 인던이 도대체 뭔데 난리인 걸까?”
“몰라. 나도 그냥 모이래서 모인 거지. 좀 전에 산드로가 여기에 떴었다니깐 그러는 거 아니겠어?”
“근데 아무리 간부진이라고 해도 진짜 너무하지 않냐? 산드로가 얼마나 이 필드 저 필드를 쑤시고 돌아다니는데……. 왔던 곳에 또 나타나겠냐고? 아, 정말 뭘 몰라도 너무 모른다.”
“야! 말조심해! 아까 군주님도 오셔서 인던에 들어간 거 못 봤어? 간만에 풀 멤버 다 모여서 들어가는 거 보니 아무래도 심상찮은 곳인 것 같긴 하다.”
대략 훑어봐도 200명은 거뜬히 넘어가는 모습.
짧은 소집 시간과 제법 멀리 위치한 생소한 장소라는 걸 고려해 볼 때, 잠깐만에 이렇게나 모인 건 아무리 적이라 할지라도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확실히 태성 놈들이 단합은 잘 돼. 그리고 역시, 다리우스는 인던에 이미 들어간 건가? 이크!’
잠시 자리에 머물러 이야기를 염탐하다가 급하게 몸을 움직여 포탈 부근에서 벗어났다.
바로 앞에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좋은 정보를 알아서 떠들고 있기에 잠시 머물렀는데, 갑자기 다른 마법사 유저가 맨땅에 아이스 포그를 시전했던 것이다.
‘와! 이 자식들, 이제 날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가르쳐준 모양이구나!’
사실 지금 정도면 진작 알아채고도 남았을 시점이었다.
내 은신이 5성 간파로는 디텍팅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무작위로 맨땅에 광역 마법이나 광역 스킬을 시전하며 날 경계하는 듯싶었다.
심지어는 검이나 창을 든 유저들이 갑자기 허공에 크게 휘두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런 유저들 틈새로 익숙한 아이디가 속해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반쯤 부서진 건물의 그림자.
그 안에 옹기종기 은신을 쓴 채 뭉쳐 있는, 바로 홍길동의 암살 부대였다.
‘버릇 한번 제대로 고쳐 주고 싶었는데, 딱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났구나! 하긴 6인 인던의 첫 트라이에 도둑이 낄 자리는 없었겠지. 아무리 랭커라도 도둑은 별수 없구나, 크크!’
본래 익숙한 던전이나 레이드에서 최고의 딜을 뽑아내는 캐릭으로는, 누구나 도둑 캐릭을 원탑으로 손꼽았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인던의, 특히나 첫 트라이에서는 도둑이 합류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딜량이 잘 나오지만 HP와 방어력이 약한 탓에, 어그로를 자주 튀게 하고 그때마다 레이드를 망치는 경우가 워낙 잦았기 때문이었다.
홍길동은 그래서 그런지, 그늘에 숨어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나를 뒤치기하기 위해 대기 중인 듯싶었다.
하지만 내게는 제사장의 머리 장식이 있다.
그래서 오히려 녀석들이야말로, 나의 뒤치기로부터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 녀석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산드로: 일단 포탈 근처에서 나를 노리고 있는 홍길동과 도둑 10명 정도를 먼저 칠 거다. 작전대로 내가 먼저 시선을 끌 테니 너는 나오자마자 타이탄을 소환해. 그런 다음은 말한 대로만 하면 된다. 준비됐냐?)
(축복받은얼굴: 부릉부릉!)
(나: ㅇㅋ 지금 친다! 셋 세고 나와라!)
인던 안에서는 타이탄 소환이 안 되기에 나와서 해야 했는데, 그러면 나오자마자 대기 중이던 기사들로부터 스턴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나타나 시선을 끌어줄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렇게, 그것도 홍길동의 눈앞에서!
“루이투스 소환!”
나의 외침과 함께 이 폐허에 강림한 거대한 루이투스.
내 시야가 높아지고 타이탄과 일체화되는 걸 느끼자마자, 나는 지체 없이 발밑에 있는 홍길동을 향해 평캔 공격을 날렸다.
[영광의 검!]
홍길동을 포함한 10여 명의 도둑은 방심하고 있었는지, 갑자기 나타난 내 타이탄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전원 그대로 맞아버렸다.
“그림자 밟기!”
그래도 역시 랭커진과 도둑 캐릭의 최상위 유저들답게, 곧바로 멀리 떨어져 있는 길드원들을 타겟팅해서 그림자 밟기로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이건 나 또한 도둑 캐릭을 키우는 유저라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
나는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뒤돌며 홍길동의 흔적을 쫓았다.
나였다면 뜬금없이 불시의 공격을 당했다 하더라도, 근처의 길드원보다는 침착하게 정면 가장 멀리에 위치한 아군을 향해 그림자 밟기를 썼을 것이다.
놈의 정면은 바로 내 타이탄의 사각지대인 후방이었으니 말이다.
휙!
옆이나 뒤로 흩어진 도둑들이 시야에 들어왔으나 그대로 무시하고 뒤돌고 나니, 역시나 홍길동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 내 180도 뒤편에 자리 잡고 있던, 한 길드원의 곁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일부러 처음에 쓰지 않고 아껴 두고 있던 심판의 전진을 사용했다.
콰과과광!
어느새 내게 날아와 꽂히는 수많은 마법과 원거리 공격들을 맞으며, 나는 홍길동의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돌진해 그대로 부딪혔다.
“뭐야! 왜 나만 쫓아와! 으악!”
쾅!
단말마와 함께 그대로 넉백 당해 넘어지는 홍길동.
연달아 평타 공격을 먹이는 그 순간, 바로 인근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벤다스 소환!”
그사이 포탈에서 나온 현중이가, 내가 건네준 빛마석으로 타이탄을 개시하는 소리였다.
조금 전까지 싸웠던 그 모습 그대로의 타이탄이, 이번엔 우리 편이 된 채로 필드에 나타났다.
그리고 현중이는 레벤다스와 한 몸이 되자마자 곧바로 나를 향해 뛰어왔다.
“이놈이야!”
“옥! 케이!”
[쉴드 어택!]
이제 막 넉백이 풀려 일어나려는 홍길동의 머리 위로, 성문만큼이나 거대한 방패가 날아와 찍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