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타이탄의 시대 (1)
“안 돼! 살려 주세요!”
“하하! 요놈 봐라. 날 죽이려고 암살 대기 중이었던 놈이 이딴 헛소리를 하네?”
타연 사상 최초로, 타이탄의 연계기에 당해 본 유저가 아니었을까?
아니, 이제 막 3번째 타이탄이 등장했으니 분명 그랬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홍길동의 죽음은 그다지 초라한 죽음은 아니리라.
아무리 랭커라 해도 도둑은 도둑.
가뜩이나 강력한 공격력의 타이탄 2대가 상태 이상기를 연속으로 걸어가며 집중 딜을 먹이니, 힐이나 쉴드 하나 받아볼 새 없이 금방 죽어버리고 말았다.
도둑은 타연 최고 티어의 공격력을 갖춘 대신 몸빵이 약한지라, 이렇게 죽게 될까 봐 내가 상태 이상기를 그토록 경계해왔던 것이었다.
그렇게 홍길동이 죽어버리는 순간, 나는 정신을 집중해서 땅 위를 살폈다.
‘아! 역시 안 떨구는구나!’
홍길동은 현재 머더러 상태.
그래서 홍길동의 가장 유명한 아이템 중 하나인 ‘그것’이 혹시나 떨어질 줄 기대했는데, 패치로 인해 타이탄으로 PK를 하면 템 드랍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이었다.
도둑에게 있어서 더없이 좋은 아이템.
하지만 그걸 얻으려면 다른 방법으로 놈을 죽여야만 가능해 보였다.
“으악! 뭐야? 타이탄이 2대잖아?”
“새롭게 하나 더 얻은 거야? 그런 소식은 전혀 못 들었는데?”
“몰라! 일단 공격이나 해!”
타이탄을 두 대나 소환했지만, 아직 죽인 유저라고는 홍길동 하나였다.
때문에 200여 명의 태성 길드원들은 우리를 둘러싸며 총공격을 해왔다.
[광휘의 방패!]
방어 스킬을 쓸 시간에 평타 한 번을 더 휘둘러야 할 만큼 바쁘게 움직였던 터라, 인제야 마법 쉴드를 걸고 근처에 있는 원딜러들을 향해 이동했다.
그런 나를 뒤따라오는 현중이의 레벤다스.
빠른 이속 덕에 금세 도착해 선공을 날리는 내 공격 지점을 향해, 레벤다스의 후속타도 뒤따라 날아왔다.
쾅! 쾅!
타이탄의 공격력이 아무리 몇 대는 버틸 만하다고는 해도, 평타 공격만으로 이런 광역 데미지를 입힐 수 있다는 건 역시 큰 장점이었다.
현중이와 함께 평타 공격을 쉬지 않고 휘두르고 있자니, 비록 평타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광역 스킬처럼 한 번에 대여섯 명의 유저들에게 멀티 히트가 들어간 것이다.
원딜러들은 당연히 버티지 못하고 백스텝 등의 이동기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다시금 쿨이 돌아온 영광의 검이 더 빨랐다.
15초 쿨타임의 위엄이었고, 일부러 평타 공격을 몇 대 맞추고 날린 타이밍의 위력이었다.
“크아악!”
“타이탄 개사기야!”
도미노처럼 우수수 잿빛으로 산화하는 궁수들의 모습.
그 광경을 지켜볼 새 없이, 나는 근처의 태성 길드원들을 향해 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간만에 타이탄을 소환했으니, 뽕 뽑도록 잡아야지!’
필드전에서 백대일의 싸움을 이긴 전적은 있지만, 암습이 아닌 이렇게 무쌍으로 필드전을 할 기회는 사실 공성전 말고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그동안의 일인무쌍이 아닌 ‘이인무쌍(二人無雙)’이었다.
“하하하! 이 개자식들! 우리 길드 척살할 때는 날아다니더니, 지금은 아주 도망 다니기 바쁘구나!”
현중이 녀석…… 그동안 내색은 안 했지만 태성 놈들한테 맺힌 게 많았구나.
하긴 그토록 오래 몸담았던 길드가 해산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 쌓였던 스트레스가 있다면 앞으로 원 없이 풀어라. 바로 오늘부터!’
“안 되겠다! 저건 절대로 못 잡아!”
“다들 튀어! 그냥도 못 잡던 산드로인데 타이탄까지 탄 놈을 어떻게 잡아! 그것도 2대나 있는데!”
어느새 주변에 있던 태성 유저들은 덤벼들기보다는 도망치는 유저가 많아졌다.
그리폰을 타고 튀는 기사, 플라이 마법을 쓴 채로 날아오르는 마법사, 멀리서 활질을 하다 관두고 유적지 밖으로 나가는 유저까지…….
하지만 바깥으로 튀는 유저들보다, 오히려 포탈 안으로 향하는 유저가 더 많이 보였다.
홍당무처럼 포탈 안으로 피하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보고, 뒤따라서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축굴아! 포탈로 가자! 잠깐 비켜!”
“응? 아하!”
포탈과 내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현중이의 레벤다스.
하지만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은 탓에, 거대한 몸체를 움직여 살짝 옆으로 비켜줬다.
[심판의 전진!]
쿨타임이 돌아온 덕에, 다시금 루이투스의 간판 전진기가 펼쳐졌다.
아마 추측건대, 나이트급과 로드급 타이탄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는 이 광역 상태 이상기를 유발하는 전진기의 유무(有無)가 아닐까 싶었다.
데이네스의 리프 어택도 이런 류의 스킬이었는데, 레벤다스에게는 없어서 뭔가 아쉬웠다.
어쨌든 루이투스는 광역 상태 이상기가 있었기에, 이런 대규모 전투 속에서 유저들을 대상으로 제대로 ‘깽판’짓을 벌일 수 있었다.
쾅, 영광의 검! 쾅! 쾅!
이동 궤적을 따라 넘어진 수십 명의 유저들.
특히 포탈 근처에 몰려 있다 넘어진 10여 명의 유저들을 향해 평캔을 섞으며 광역 스킬을 날렸다.
그리고 넘어진 태성 놈들이 일어나는 순간, 빠르게 달려온 현중이가 다시금 쉴드 어택을 날려 광역 스턴을 먹였다.
“크하하하! 두더지! 두더지를 잡자!”
그리고는 큰소리로 두더지를 외치며, 연계 스턴이 걸린 태성 유저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전투 망치를 쉴 새 없이 내리찍었다.
“저 자식……. 타이탄은 처음 타보는 거면서, 완전 제대로 즐기고 있네?”
현중이의 광기 어린 모습을 보고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말 게임에 대한 열정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우리 둘이 포탈 근처의 유저를 잡는 동안, 나머지 태성 유저들은 우리와 100여 미터 이상의 거리를 벌리는 데 성공했다.
타이탄의 HP는 아직 1/3도 깎이지 않아 얼마든지 더 잡아낼 자신이 있었지만, 이렇게 유저들이 작정하고 도망치기만 한다면 생각보다 많이 잡아내긴 힘들 것 같았다.
역시 타이탄은 유저들이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공성전’이나 ‘필드 보스 레이드’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라는 생각을 하며, 멀리 떨어진 태성의 잔당들을 향해 외쳤다.
“여러분! 오늘은 맛보기로 보여드린 겁니다! 줄곧 말해왔듯이, 계속해서 PK 당하기 싫으시다면 태성 길드에서 어서 탈퇴하세요! 무슨 이유를 대시든지 하루빨리 거기서 나오시는 게, 앞으로의 정신 건강에도 좋을 겁니다!”
“닥쳐라 산드로! 타이탄과 신검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자식이!”
태성의 간부로 보이는 누군가가, 저 멀리 떨어진 건물에서 고개만 내밀며 대꾸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네요? 이제껏 쪼렙이었던 시절에도 못 잡았던 저를, 앞으로는 무슨 수로 잡을 수 있겠어요? 그래도 제 말이 우습게 들리신다면, 이 자리에서 두 가지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약속은 무슨 약속!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꺼져라!”
“첫째! 저는 태성의 길드 마크를 단 고레벨 유저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고 무조건 죽이겠습니다. 둘째! 타연이 종료하는 그날까지 저는 단 한 번도 죽지 않겠습니다. 이상 제가 약속을 지킬지, 지키지 못할지는 앞으로 두고 봐 주시기 바랍니다!”
광오(狂傲)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
하지만 놈들에게 그렇게 들릴지는 몰라도, 내용만큼은 진심이었다.
애초에 척살을 가장 많이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길드기에, 자신들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PK 당하는 처지가 됐어도 할 말 없을 것이다.
그동안 척살 당해서 게임을 접었던 유저들 입장에서는, 태성의 유저들이 신검과 타이탄을 보유한 나만큼이나 무서운 존재였을 테니 말이다.
“우리 길드를 척살할 때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그냥 했었지? 해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묘한 성취감이나 우월감 같은 것도 들었을 거고? 나도 너희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 앞으로 우리 ‘버닝 스타’ 길드가 너희 태성을 전부 불태워버리기 전에, 알아서 탈퇴하는 게 좋을 거다!”
옆에 함께 서 있던 현중이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소리쳤다.
물론 당장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말한다 해도, 탈퇴하는 태성 길드원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번 전투 때마다 우리가 이렇게 외친다면, 결국 동요하는 길드원들이 하나씩 나타날 게 분명했다.
우리 버닝 스타는 앞으로 이어질 태성과의 수많은 전투에서, 결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을 테니까!
결성되지 얼마 되지 않았고, 소수만으로 이루어진 작은 길드.
하지만 타이탄 2대로 수백 명의 유저들을 패퇴시킨 전투로, 그 존재감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그렇게 현중이와 나는, 수백의 태성 유저들 앞에서 여유롭게 타이탄의 소환을 해제하고는 포탈 안으로 사라졌다.
* * *
“지환아, 이것 좀 봐라. 벌써 올타에 우리 소식이 퍼졌는데?”
“응? 무슨 내용인데?”
급하게 이루어졌던 레이드와 필드전까지 끝내고, 우리는 각자 해산했다.
그래도 이런 커다란 경사를 자축하지 않을 순 없었기에, 현중이와 나는 간만에 집 근처 편의점 대신 오랜만에 치맥을 먹는 중이었다.
-[필독] 타연에 3번째 타이탄이 등장하다!
-버닝스타에서 세 번째로 등장한 타이탄을 획득했단다. 태성 길드원 지인한테 들은 얘기니까 확실해. 오늘 낮에 타이탄 두 대로 200:2 싸움을 했다더라.
현중이가 폰으로 보여 준 올타의 게시글에는, 우리가 몇 시간 전에 이룩한 새로운 역사가 벌써 소문나 있었다.
올라온 지 몇 분 안 된 글이었는데, 워낙에 핫했는지 벌써 그 밑으로 댓글 수십 개가 우르르 달려 있었다.
└ 버닝스타가 어디 길드임? 뭔 듣보잡 길드가 타이탄을 먹음?
└└ 아직 모름? 산드로가 만든 소수 정예 길드 있잖아. 산드로 한동안 길드 없었다가, 요즘 불타고 있는 오망성(pentagram) 길드 마크 달고 다닌 지도 꽤 됐는데 몰랐음?
-버닝 스타인지 부르스타인지 나발이고 말이 돼? 아무리 타이탄이 있더라도 200:2를 못 이긴다고? ㅋㅋㅋ 왜 1000:2라고 하지? 산드로 신격화 오지네.
└ 인던 포탈 끼고 싸워서 잡을 수가 없었다 카더라. 아무튼 타이탄을 2대 가진 길드라니... 산드로 클라스ㄷㄷㄷ 사실상 현 지존 아니냐?
└└ 지존은 카이저죠. 도둑은 마검사를 상대로 무슨 수를 써도 1:1론 절대 못 이김.
└└ 그 말대로면 200:2도 아니구만. 하여간 산드로가 도둑 캐릭일 때부터 알아봤는데 야비하게만 플레이하네ㅉㅉ
└└└ 태성, 오늘도 어서 오고~
“와, 우리 버닝 스타가 벌써 이만큼이나 유명해진 거야?”
“아무래도 네가 길드 마크만 달고 다녀도 이슈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거기다가 2대뿐이긴 해도 현재 타연 내에서 가장 많은 타이탄을 보유한 길드가 됐기도 하고.”
“지금은 2대지만…… 앞으로도 보유 대수는 계속 늘려야겠더라. 확실히, 타이탄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지겠어.”
“맞아. 타이탄 간의 스킬 연계가 아니었다면 홍길동도 결국 살아서 도망쳤겠지. 다리우스와 그 패밀리를 제대로 조지려면, 역시 길드 창설이 답이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제 다리우스만 죽이면 한 번씩 다 죽인 거 아니냐? 오늘로써 홍길동까지 죽였으니?”
“아…… 그렇네?”
정신없이 레이드와 PK를 하다 보니 놓치고 있었는데, 오늘 홍길동을 잡는 데 성공하면서 어느새 다리우스를 제외한 원한 멤버들을 전부 다 한 번씩 죽이게 되었다.
“그래도 아직 한참 멀었어. 죄다 9번씩은 더 죽여야 계산이 맞아. 다리우스는 10번.”
“잔인한 새끼. 진짜로 10배로 갚아 줄 생각이었냐? 크크크.”
뭔가 현중이가 착각한 것 같은데…….
사실 녀석들 때문에 단 한 번이라도 죽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내 계산법으로는 이게 맞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