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레이드 준비 (1)
티에스 나이츠의 소환이 해제되는 순간, 2백여 명으로 채워져 있던 전장은 짧게나마 시간이 멈춘 듯싶어 보였다.
아니, 이건 분명 시간이 멈춘 거나 다름없었다.
타이탄에서 빠져나온 성기사가 무적 스킬로 쓰고 뒤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모두가 그저 멍하니 지켜만 봤으니…….
[축복받은파볼: 뭐, 뭐야? 내가 지금 뭘 보고 만 건데?]
[축복받은얼굴: 드로야, 너 어떻게 스킬을 쿨타임도 없이 쓰고 있는 거냐? 버그야?]
[라스트챤스: 뭔데요 다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데요??? 아오 답답해!]
팔찌를 구매한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았기에, 우리 버닝 스타 길드원들까지도 충격에 휩싸인 모양이었다.
단테리오의 팔찌.
스킬 쿨타임을 없애주는 것이 아닌 10배만 줄여주는 것이기에, 막강한 스킬들은 오히려 연속으로 사용하지 못했다.
그런 스킬들의 쿨타임은 대부분 10분 이상이었기 때문.
하지만 원래 MP 소모가 크지 않고 쿨타임도 길지 않은 자잘한 직업 스킬만 가진 게 도둑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난 컨셉 자체가 스킬 공격을 거의 쓰지 않고 평타로 딜을 하는 ‘마쉴 도둑’이었기에, MP 소모량이 10배나 늘어났다고 해도 생각보단 버틸 만했다.
올 마력 스탯만 찍어 MP통 자체가 사기적인 수준으로 높았으니 더더욱!
그야말로 나를 위해 맞춤으로 만들어진 아이템이나 마찬가지인 템.
멀린이 이 템을 처음 얻을 때만 해도 난 한낱 쪼렙 도둑에 불과했을 테니, 이제 와서 일루전이 너프하거나 없애버리기도 힘들 아이템이었다.
[산드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일단 나머지 창 든 놈과 데이네스부터 정리합시다!]
현재 전장에 남은 타이탄은 4대.
하지만 아직 나의 루이투스 카드는 남겨 두고 있었다.
한데 그동안 데이네스는 피닉스 길드원들 정리보다는 나를 잡겠다고 시간 낭비했으니, 사실상 이번 공성전의 분위기는 거의 우리 측으로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팽팽하던 전투가…… 기울어졌다!’
하지만 실수는 용납할 수 없는 법.
나는 아직 30초 정도 남은 ‘스킬 가속’ 효과로 다시 그림자 밟기를 사용했다.
피슛!
다시 창병 타이탄의 뒤편에 나타난 나는, 곧바로 등 위로 올라타서 검을 쑤셔 넣었다.
“김지승! 산드로는 그냥 무시하고 일반 유저를 공격해라! 나도 정리부터 하겠다! 어차피 피닉스 길드원들이 전멸한다면 공성은 우리 태성이 가져간다! 그리폰 부대도 일점사로 차근차근 숫자를 줄여나가라!”
“네! 군주님!”
“네! 군주님!”
야심 차게 숨겨뒀던 타이탄.
그게 별 활약도 없이 허망하게 역소환되자 타개책을 내놓은 모양이었는데, 내가 보기엔 악수 중의 악수였다.
‘군주님이라니……. 저것들은 진짜 개오글거리는 짓들만 골라서 하는구나!’
쾅!
데이네스가 휘두르는 검은 현중이의 레벤다스가 집요하게 달라붙어 방패로 가로막기 시작했고…….
휘잉!
티에스 나이츠가 휘두른 창은, 피닉스 부대에게 제대로 명중되지 않고 허공만 갈랐다.
로드급이나 나이트급과는 달리 별 공격 스킬이 없어 보이는 솔저급은, 이렇게 작정하고 피하기만 하는 일반 유저를 잡기에는 다소 벅차 보였다.
하지만 반면에 내 평타 공격은 끊임없이 티에스 나이츠의 등 뒤로 들어갔다.
[재빠른 몸놀림!]
[은밀한 일격!]
후방 공격을 먹이고 있으니 굳이 약점 포착까지 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이 두 스킬을 번갈아 가며 쓰기만 해도, 일반 유저 수십 명이 붙어 딜하는 것보다 DPS가 높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내 데미지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었는지, 갑자기 타이탄이 태성 측 진영 방향으로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어라? 이거 설마……?’
틀림없었다.
이렇게 타이탄이 역소환될 때쯤 미리 튄다는 건, 다른 타이탄 라이더와 달리 이놈은 성기사가 아닐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누가 이놈 속박 걸어 줄 준비 좀 해 주세요!”
“이익! 군주님! 도와주십쇼!”
내 외침을 들은 타이탄에게서 다급한 도움 요청이 터져 나왔고, 마지막 외침이 끝나는 순간 역소환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레벤다스와 투덕거리고 있던 데이네스는, 도움 요청을 듣자마자 이쪽을 향해 절망의 울림을 시전하며 뛰어올랐다.
데이네스의 거대한 몸체를 따라 꼬리처럼 따라붙는 먼지의 궤적.
그 모습이 또다시 슬로우 모션이 걸린 듯 천천히 시야에 날아와 박혔다.
‘그림자 밟기로 이 자리를 피한다면 피할 수 있지만, 그러면 저 타이탄 라이더인 전사를 잡을 순 없겠지?’
그렇다고 데이네스의 스킬에 맞아주고 곧바로 이어질 연계기까지 맞아주기엔, 남아있는 전투가 너무 많았다.
그런 계산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번뜩이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리프 어택 스킬은…… 만약 땅 위에 있지 않다면 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훼라리 소환!”
나는 눈앞에 나타난 마법진에서 튕기듯 솟구쳐 나오는 훼라리에 몸을 던지듯 올라탔다.
그리고 그 상태로 떨어져 내리는 데이네스와 교차하며 날아올랐다.
“으악! 이 쥐새끼 같은 자식!”
벌써 오늘만 해도 몇 번째 와리가리란 말인가?
하지만 솟구치던 것도 잠시, 나는 생각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바로 방향을 지상으로 바꿨다.
목표는 타이탄에서 튀어나온 그 ‘전사’!
아직 내겐 스킬 가속 시간이 10초나 남아있었고, 내 애룡 훼라리는 유용한 스킬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날개 돌풍!]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던 전사는 갑작스런 훼라리의 스킬 한 방에 넉백 당해 넘어졌고, 난 그를 향해 그림자 밟기를 사용했다.
푹, 연속 베기! 푹, 은밀한 일격!, 푹, 연속 베기!
각각 평캔을 섞어 넣은 세 차례의 연속 스킬.
물 흐르듯이 이어진 스킬들의 향연으로 내 MP통은 순식간에 1/3이나 날아갔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비교적 피통이 많을 전사 캐릭이, 넉백 동안에 이어진 연계기에 물약 한번 먹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나는, 녀석이 죽은 자리를 향해 눈보다 빠르게 손을 뻗어 휘저었다.
[최상급 체력 회복 물약(12)을 획득했습니다.]
[타이탄의 정수를 획득했습니다.]
“헉!!”
설마 하며 기대를 하긴 했지만, 먹은 나조차도 놀라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뭐, 뭐냐? 설마 너……?”
“하, 하하! 이거 어쩌지? 분명 순간적으로 노렸던 건 맞지만, 정말 먹어버릴 거라곤 상상도 못 했네!”
아마 타연 최초로 유저가 제작했을 거라고 생각되는 이 타이탄의 정수.
티에스 나이츠라고 적혀 있을 그 타이탄을, 방금 내가 득템하고 만 것이다.
“말도 안 돼! 머더러도 아닌, 그것도 공성전에 참여 중인데 하필 그걸 드랍했다고? 또다시 날 기만하려고 수작 부리는구나!”
자타공인 타연 최고의 행운을 가진 유저는 다리우스였는데, 틀린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운이 가장 좋은 유저는, 녀석의 행운을 계속 뺏어오는 ‘나’인 게 분명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한가하게 대화나 나눌 시간은 없어서! 루이투스 소환!”
내가 워낙 재빠르게 움직이느라 한 템포씩 늦게 따라왔지만, 다시 원거리 공격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 공격들을 맞아주며, 나는 소환된 루이투스와 한 몸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광휘의 방패를 두르고 심판의 전진을 써서 태성 부대의 한복판으로 기습적으로 쳐들어갔다.
바로 옆에 서 있던 데이네스는 무시한 채로!
[영광의 검!]
내가 다가간 곳은 지옥불의 리버스 나이츠가 혼자 깽판을 놓고 있던 힐러와 버퍼들 사이.
그곳에 넉백을 시전하며 다가간 후 광역 스킬을 날리자, 대여섯 명이 순식간에 잿빛으로 산화되어 버렸다.
이미 지옥불을 상대하면서 닳아 있던 HP가 나의 스킬 연계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소진된 것이다.
쾅!
그런 내 등 뒤로 데이네스의 검이 내리찍듯이 박혀 들어왔지만, 무시했다.
“안식의 검!”
쾅, 쾅, 쾅!
특유의 삼연격 스킬이 등 뒤에 내리꽂히고 계속 공격해왔지만, 무시했다.
루이투스의 풀 HP는 98만.
아무리 데이네스가 공격한다 하더라도, 짧은 시간 만에 이 많은 HP를 다 깎아 낼 순 없었다.
반면 나는 지옥불과 피닉스 길드원들이 공격하는 대상에게 추가타를 넣어줌으로써, 태성군의 숫자를 차곡차곡 줄여나갔다.
사실 다리우스는 처음 데이네스를 소환했을 때부터 잘못된 선택을 택한 것이었다.
최대한 늦게, 그게 힘들다면 최소한 나보다는 타이탄을 늦게 소환했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나를 잡는 것은 진작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피닉스 길드원들의 수를 줄이는 것에 집중해야만 했다.
‘타이탄을 만들 줄만 알았지, 전략적으로 어떻게 써먹을지 연구가 부족했구나? 즉, 넌 나는 물론이고 지옥불 님과의 수 싸움에서도 이미 지고 들어간 거였어!’
이 모든 게 공성전에서 타이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한 연구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
앞으로는 찾아오기 힘든, 어쩌면 이번 한 번만 통할 행운의 전략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이미 태성의 타이탄을 한 대 뺏어오는 데 성공했고, 피닉스는 잠시 후 지웰 성을 얻게 될 테니!
쿵.
열심히 나를 찍어대던 데이네스의 검이, 뜬금없이 지면 위로 내리꽂혔다.
나를 공격하는 것이 헛수고인 걸 깨닫고 결국 포기한 모양이었다.
“산드로 당신……. 처음에는 정말 운이 좋은 피라미 중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 겪어보고 나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나의 행보에, 그리고 우리 태성의 행보에! 이렇게까지 걸림돌이 되는 유저는 그동안 한 명도 없었으니까요. 오늘부로 당신이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자격? 갑자기 무슨 자격을 말하는 거죠?”
욕했다가 반말했다가, 다시 또 존댓말을 해오는 다리우스였다.
여하튼 녀석의 그러한 태도에 계속 태성 측을 향해 검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나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고, 루이투스의 몸체를 돌리며 물었다.
“나, 그리고 우리 태성이 전력을 쏟아부을 만한 상대로서의 자격을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 자격을 증명할 만큼의 실력을 이 정도면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하? 실력? 당신은 여전히 하나도 변한 게 없군요? 그건 누구 맘대로 판정내린 거죠? 애초에 당신에게 그 잘난 ‘실력’이란 게 있기는 해서 남을 평가하나요? 고작 훔친 타이탄 속에 숨어서 입만 나불대고 있는 것이 지금 당신이 처한 현실인 건 모르겠고요?”
내가 이 자식과 말을 섞지 않으려는 이유.
몇 번 나눈 적은 없지만, 그때마다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지난번에는 단 한 번도 승부에서 진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더니, 이제는 제 놈이 내 실력을 인정해 주겠단다.
네가 뭐길래?
도대체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까지 오만할 수 있단 말이냐?
“하하!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실컷 해 두십시오. 어차피 당신은 단 한 번만 죽으면 끝나는 몸. 나중에 추억할 거리라도 만들어 두려면 이렇게 건방 떨었던 것도 기념이 되겠죠. 아무튼 오늘은 이만 가 봐야겠군요. 피닉스만 왔다면 점령에 문제없었겠지만, 당신네 길드까지 합세했던 불리한 전투였으니 말이죠!”
“하하! 승부에서 져본 적 없다는 말이 이런 추잡한 변명으로 쌓은 기록이었나요, 다리우스? 그리고…… 누가 당신을 보내준다고 했습니까? 곧 소환이 풀릴 사람을 내가 왜 말입니까! 심판의 전진!”
녀석의 클래스는 기사.
무적 스킬이 있는 성기사나 나와 같은 8성 은신을 가진 도둑도 아닌지라, 타이탄이 해제된다면 이 집단 전투에서 생존 수단이 극히 부족한 직업이었다.
그렇기에 최대한 늦게 타이탄을 소환해야 했는데, 그마저도 먼저 소환해서 조만간 해제될 처지였다.
즉 다시 말해, 그토록 바라왔던 다리우스 킬의 순간이 바로 눈앞에까지 다가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절망의 울림!”
하나 심판의 전진을 사용해서 데이네스의 몸체와 부딪치려는 순간, 놈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녀석이 계속 공격 수단으로 써왔던 리프 어택.
하지만 이번에는 정반대의 수단이었다.
이번엔 회피 용도,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회피가 아닌 ‘도주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솟구친 녀석의 몸체가 20미터쯤 높이의 정점에 다다르던 순간, 다리우스는 데이네스를 역 소환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는 다리우스의 몸을, 누군가가 타이밍 좋게 낚아채듯이 자신의 펫 위로 태웠다.
바로 태성의 자랑, 그리폰 킹을 타고 있던 슈마허였다.
‘이런! 쫓아갈까? 아니면 포기?’
순간 빠른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뜬금없는 타이밍에 타이탄 스킬을 도주를 위해 사용한 것에 허를 찔린 건 맞다.
허나, 이속이 빠른 훼라리를 탄다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다른 20여 마리의 그리폰 무리가 있어 히든캬드의 도주 때처럼 블로킹을 당할 수 있었고, 따라잡는 사이에 이미 귀환 주문서를 사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무엇보다 훼라리를 타려면 이제 막 소환한 루이투스를 해제해야만 했는데, 그러면 태성의 지원군이 이곳 지웰 성에 도달하기 전에 오벨리스크를 점령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결국 나는, 녀석이 공중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축복받은파볼: 어머? 다리우스가 튄 거야? 뭐야! 그 자존심 강한 다리우스가 ㅌㅌㅌ? 이거 실화니?]
[축복받은얼굴: 드로야! 쫓아가서 족쳤어야지 뭐한 거냐? 너무 아껴먹으려다 간 똥 된다?]
전장에 태성의 타이탄들이 모두 사라졌기에 한결 여유가 생겼는지, 길드원들이 채팅창에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그런 길드원들에게, 나는 허세와도 같은 대답을 진심을 담아 적었다.
[산드로: 작정하고 도망치려고 합까지 맞춘 놈들이라 쫓아도 힘들었을 거예요. 그것도 현재 지존이나 마찬가지인 놈이니까 더욱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한번 상대해 보니 이젠 알겠습니다. 다음에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놈을 죽일 수 있을지!]
조금만 더 성장한다면…….
그리고 조금만 더 업적과 아이템을 갖춘다면!
분명 녀석을 죽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 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