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레이드 준비 (4)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설원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이놈의 특성.
그 때문에 사냥하기에 적합한 4인이나 6인 파티만으로는 필드 사냥을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냥 잡아버리면 그만 아닌가?
이름도 없는(no named) 필드 보스라면 1개 파티로 충분히 잡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걸 왜 안 잡는 건데?
라고, 이 노스랜드에서 사냥해 보지 않은 유저라면 쉽게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니 할 수 있는 의문이었다.
이놈을 잡을 수 없는 이유.
그건 이놈의 피가 절반 이하로 떨어지면 시작하는 ‘하울링’ 스킬 때문이었다.
녀석이 하울링을 하고 나면 주변에 있는 일반 화이트 울프 몹들이 마치 부하가 소환되는 것마냥 순식간에 몰려든다.
소환하는 몹도 아닌 주제에, 소환 스킬을 가지고 있는 보스 몹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만약 이곳이 유저들이 넘쳐 몹들이 리스폰되는 족족 정리되고 있었다면, 전혀 문제 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유저가 없어 필드에 몹들이 꽉 차 있는 상태에서는, 이 녀석의 하울링만큼이나 까다롭고 위협적인 스킬도 없었다.
그 외에도, 놈은 완전 이뮨은 아니지만 마법 공격을 확률 반사하는 갈기와 칠링(chilling)효과의 공격 등으로 악명(惡名)을 떨치고 있었다.
‘레드 드레이크가 유저들에게 상한가를 자랑하는 종목이라면, 이 프로스트 울프는 하한가만 기록 중인 종목인 거지.’
아무리 랭커나 최상위권이라도, 몇 명만으로는 딱 이놈만 빼먹으며 레이드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이놈만을 위해서 대규모로 모여 찾아다니기에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다.
덕분에 훼라리로 순찰을 시작한 지 10분도 채 지나기 전에 발견할 수 있었다.
4족 보행 주제에 3미터에 가까운 거대한 체고(體高)와 온몸이 하얀 갈기로 뒤덮여 빛나고 있는 저 프로스트 울프를!
다른 유저들이었다면 조금이라도 주변에 있는 화이트 울프들을 정리하고 레이드를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재빠른 몸놀림!]
[그림자 밟기!]
훼라리에서 뛰어내림과 동시에 곧바로 자버프를 걸고 녀석에게 붙었다.
난 화이트 울프들이 하울링을 듣고 몰려들기 전에, 이 녀석의 테이밍을 끝마칠 작정이었다.
“크엉!”
내 선공에 맞자마자 곧장 사나운 피어를 지르며 공격해오는 프로스트 울프.
마나 쉴드를 믿고 녀석의 물어뜯기 공격과 할퀴기 공격을 맞으며 딜을 넣었는데, 녀석의 악명 높은 상태 이상 효과가 바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프로스트 울프의 공격에 당하여 3초간 빙결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공속과 이속이 줄어드는 상태 이상 ‘빙결’.
물리적인 상태 이상 효과가 아니기에, 나의 자랑 마나 쉴드로도 저항할 수 없었다.
사실 마법으로 인한 빙결 효과였다면 마법 방어력으로 저항이 떴을 수도 있었지만, 이놈은 해당사항이 없었다.
이유는 녀석의 고유 특성, ‘냉기의 발톱’ 때문이었다.
이놈이 드랍하는 재료 아이템으로도 유명한 냉기의 발톱은, 할퀴기 공격에 적중당하는 대상에게 공격 속도와 이동 속도를 50% 감소시키는 빙결 특유의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이 효과야말로 내가 녀석을 테이밍하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였다.
마법 효과가 아니라 이 녀석 고유의 특성이었으니 말이다.
[마나 쉴드가 3,120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5,564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
휙! 휙!
올 레전더리 방어구와 액세서리 세트를 착용한 내게 이 정도 데미지가 들어오다니, 역시 필드 보스 몹답게 공격력이 상당히 매서웠다.
하나 MP가 줄어들어도 반대로 차오르는 MP의 양 또한 만만치 않았다.
사실 그동안 올 마력 스탯만 찍었기에 내 공격력은 150레벨 당시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내 레벨은 랭커급에 다다랐고, 그에 따라 현재 필드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몹들에게 더는 헛방이 나지 않는 상태로 성장했다.
즉 다시 말해, 지금의 나는 예전과는 다르게 신검의 공격력을 최고 효율로 뽑아낼 수 있는 단계에 도달한 상태라는 얘기였다.
“아오! 아올!”
그 덕분에 레이드를 시작한 지 30초도 지나기도 전, 녀석이 주변의 화이트 울프들을 불러 모으는 하울링을 시전했다.
그 외침에 답하고자 이제 곧 수십 마리의 화이트 울프들이 몰려올 것이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틱!
검을 들고 있는 오른 손목과 왼 손목이 부딪히며 작은 마찰음이 발생했다.
‘스킬 가속’.
나를 잠시 동안 초사기 캐릭으로 만들어주는 단테리오의 팔찌의 발동을 알리는 소리였다.
[재빠른 몸놀림!]
[약점 포착!]
한순간 스킬 사용에 필요한 마나의 사용량이 많아져 MP가 훅하고 떨어졌지만, 몇 대 치자마자 곧바로 차올라 복구했다.
8성 약점 포착 스킬의 액티브 효과가 평타 데미지를 150%나 증가시켜 줬기 때문이었다.
“할 때마다 느끼지만, 이건 정말 미쳐버린 공격력이야.”
약점 포착 지속 시간이 떨어지면 다시 쿨타임이 돌아온 약점 포착을 사용했다.
그렇게 4번째 연속해서 사용한 약점 포착이 끝날 때쯤, 프로스트 울프의 HP는 금세 테이밍이 가능한 수준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대상을 향해 ‘구속의 숨결(3)’을 사용하여 테이밍을 시도합니다.]
이어진 10초간의 캐스팅.
하지만 첫 시도는 아쉽게도 테이밍이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필드 보스인 만큼, 어느 정도의 실패 확률은 존재하는 듯싶었다.
“아, 바빠 죽겠는데 너도 훼라리처럼 튕겨야겠냐?”
어느새 하울링을 들은 화이트 울프들이 근처까지 다가온 것이 보였다.
하지만 스킬 가속 상태라 쿨타임이 없다시피 테이밍을 재시도할 수 있었고, 이번엔 녀석이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띠링!
[‘프로스트 울프’의 테이밍에 성공했습니다!]
2번의 캐스팅 동안 계속 맞고만 있었기에 MP는 어느새 바닥.
게다가 아직 스킬 가속 상태인지라, 훼라리를 재소환하기에는 마나가 너무 많이 필요로 했다.
다가온 화이트 울프 떼거지는 어림잡아도 30여 마리.
놈들을 피하고자 내가 한 행동은, 방금 꼬셔진 상태로 서 있는 프로스트 울프 위로 올라타 그대로 냅다 달리는 것이었다.
“와! 이 자식 엄청 빠른데? 타연에 이렇게까지 빠른 탈 것이 있었나?”
벗어나며 몇 대 맞기는 했지만 그것도 잠시.
프로스트 울프는 순식간에 화이트 울프 떼거리를 뚫고 나와 거리를 벌렸다.
훼라리가 빠르긴 하다지만, 주로 하늘을 날아다녀서 속도감이 그다지 체감되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땅 위를 직접 달리는 탈것을 타 보니, 예전 내 애마였던 ‘피드’보다 적어도 3배 이상 빠른 수준으로 느껴졌다.
말이 쉬워 3배지, 실제로 다른 기마병이나 라이더들과 나란히 달릴 일이 생긴다면 절로 사기소리가 터져 나올 스피드였다.
“널 이러려고 꼬신 게 아니었지만……. 이건 어쩔 수 없어. 네가 이렇게나 빠르니 다른 이름을 생각할 수가 없잖아?”
그렇게 녀석의 이름을 먼저 지어주고, 스펙 창을 확인해 봤다.
[램보(프로스트 울프), Lv. 381]
* HP: 148200/148200 * MP: 62550/62550
* 공격력: 2110 * 물리 방어력: 1950 * 마법 방어력: 3122
* 전용 스킬: 고귀한 은빛 갈기(!), 냉기의 발톱(!)
-고귀한 은빛 갈기(고유 스킬): 자신에게 적중된 마법 공격을 일정 확률로 반사시킵니다. passive.
-냉기의 발톱(고유 스킬): MP 1500을 소모하여 10초간 발톱 공격에 빙결 효과를 추가합니다. 사용 대기시간 20초.
“확실히 노 네임드라도 필드 보스는 필드 보스네. 훼라리에 못지않은 스펙이잖아?”
오히려 레벨 대가 더 높은 지역에서 테이밍한 녀석이었기에, 레벨을 비롯한 몇몇 스펙은 훼라리보다 우월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시나 비행 능력과 두 가지 스킬 전부 광역 스킬인 훼라리보다는, 범용성이나 실용성이 다소 떨어져 보였다.
“벌써 4마리를 다 채웠네? 이제 지옥불 님을 찾아뵙기 전에, 혼자 시동 한 번 걸어보는 일만 남은 건가?”
생각했던 것보다 테이밍이 쉽고 빠르게 끝났다.
이제 새 식구가 된 녀석들을 가지고 시동을 걸어 볼 차례였다.
본격적인 레이드에 앞서, 내가 구상한 공략법이 제대로 통할지 확인해 보기 위해!
그렇게 펫의 스펙 확인과 레이드 시동, 두 가지를 한꺼번에 확인해 위해 투 메르타스의 레어로 향했다.
* * *
‘테이밍 된 몬스터에 관한 고찰’.
예전에 올타의 ‘팁과 노하우’ 게시판에서 다소 주목받지 못하고 묻힌 글의 제목이었다.
테이밍 몬스터 자체가 특별 스킬이었던 탓에, 이 분석 글을 참고할 유저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저것 상상하기 좋아하는 나는 항상 팁과 노하우 게시판의 글을 빠짐없이 읽어보던 유저.
그래서 테이밍 몬스터 스킬을 익힐 때 요긴하게 참고했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이 게시글을 정독했다.
-테이밍된 몹은 자연 상태일 때 보다 보통 스펙이 절반 이하로 줄어듭니다. 물론 몹들마다 그 비율에 미세한 차이점이 있기는 한 것 같습니다.
-테이밍된 몹이 유저들을 공격할 때에는 방어력과 회피율에 따른 명중률 계수가 적용되나, 몹을 상대할 때에는 오직 레벨의 영향만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는 동 레벨과 20레벨 차이의 몹들을 대상으로 각각 1천 번씩 공격하면서 얻어낸 데이터이므로 틀림없어요.
어찌나 정성스러운 분석 글인지, 몬스터마다 각각 1천 번씩 공격하며 정리한 유효타와 헛방의 통계 및 오차 확률 등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사실 타연 속 유저들은 레벨만 높다고 장땡이 아니었다.
레벨에 걸맞은 장비와 효과적인 스킬 트리가 어찌 보면 더욱 중요했다.
특히 장비가 제대로 갖춰져야만 비로소 동레벨 이상 대의 몹을 수월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설령 랭커급의 레벨이라 해도, 장비가 허접하다면 몹들을 썰어버리기는커녕 몇 마리 잡고 휴식시간을 갖기 바쁘다는 얘기다.
반면 소환수나 펫 같은 경우는 달랐다.
레벨업 때마다 HP나 MP, 공격력과 방어력 등의 상승이 유저보다 훨씬 높아, 그 레벨 대에 걸맞은 스펙으로 알아서 따라갔다.
따로 장비를 채워 줄 수 없기에 일견 당연한 일인 것 같았으나, 잘 생각해 보면 이건 그 소환수나 펫의 주인에게 아주 큰 메리트가 있는 설정이었다.
유저라면 장비빨 때문에 칼이 잘 박히지 않을 고레벨 몹이라 해도, 소환 몹이나 펫은 레벨만 엇비슷하다면 쑥쑥 잘 박혀 데미지를 괜찮게 먹일 수 있던 것이다.
따라서 보통 소환수를 사용하는 직업군들은 솔플을 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런 시스템적 특징 덕분에 굳이 파티 사냥을 하지 않더라도, 경험치를 많이 주는 고레벨 지역에서 솔로 플레잉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뭐가 됐건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이 설정이었다.
평소 이 부분을 눈여겨봤기에, 아직 이른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그린 드래곤 레이드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니 말이다.
‘고레벨의 펫이나 소환수로 고렙 몹을 잡을 때는, 웬만한 유저들보다 딜링 역할을 더 잘해 낸다는 거지.’
정말 내 생각대로 될 것인가?
설레는 마음으로 시뮬레이션하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했다.
고레벨 지역인 가트웰 산맥 맵에서도 가장 끝에 있는 침묵의 숲.
이곳은 마치 세쿼이아 나무와도 같이 70미터가 넘어가는 초거대(超巨大)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었다.
게임 내에서 일명 ‘자이언트 트리’라고 불리는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나무.
그것들이 끝없이 펼쳐진 놀라운 지역이었는데, 이에 걸맞게 각종 오우거나 사이클롭스 등의 대형 몬스터들이 우글대는 위험 지역이었다.
원래 땅으로 이동했다면 나도 꽤 조심했어야 할 곳이지만, 훼라리가 있기에 이렇게 드래곤의 레어 앞까지 손쉽게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중간에 각종 와이번들에게 종종 어그로가 끌렸으나, 훼라리의 빠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죄다 떨어져 나갔다.
그린 드래곤 ‘투 메르타스’의 레어.
보통 용암 동굴이나 산기슭에 위치한 동굴에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 투 메르타스의 레어는 자이언트 트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움집과도 같았다.
이 침묵의 숲에서도 가장 거대한, 무려 100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나무들이 서로 비스듬히 엉킨 채로 형성된 모습.
실제로 보니 웅장함을 넘어 그저 압도적이란 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우와! 여기 진짜 장관이구나 장관! 이렇게 쉽게 올 수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에 한번 와 볼걸!”
인던이 아닌 필드기에 이곳을 촬영할 수 있는 유저는 없다.
그 때문에 이곳의 풍경과 투 메르타스의 외형은 오직 눈으로 직접 본 유저들의 묘사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는 세상 어디를 가도 찾아보지 못할 비경(祕境).
평소 타연의 장엄하고 멋진 자연 풍경을 즐겨왔던 나에게, 이곳은 또 다른 감흥을 안겨주는 장소였다.
레어의 입구는 어지간한 대형 비행기가 통과하고도 남을 듯 컸다.
안은 은은한 빛이 나무 틈새를 뚫고 비치고 있는지, 살짝 어둡지만 오히려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듣기론 저 레어 안에는 어떠한 가디언도 없어, 조금만 들어가면 투 메르타스를 곧바로 볼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안타깝게도 녀석을 발견함과 동시에 어그로가 끌리는 탓에, 이제껏 녀석을 구경한 유저 중에 살아서 도망친 유저가 한 명도 없다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겐 훼라리와 루이투스가 있지.’
현재 내 MP는 5만이 넘었다.
그러니 마나 쉴드 상태라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절대로 나를 ‘순삭’할 순 없다.
이것저것 시험해 볼 것들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지, 내 성격에 조금이라도 죽을 염려가 있었다면 이렇게 혼자 찾아왔을 리 없었다.
잠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레어의 입구 안으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뒤에서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산드로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