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드래곤 슬레이어 (3)
“우와! 이게 바로 그 나무구나? 정말 거인들이 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무지막지하게 크다아!”
“누나, 촌스럽게 왜 그러세요? 겜 하면서 이런 거 처음 보세요?”
“또 또 시답잖은 농담할 거면 조용히 해라 축굴아. 너도 처음 와보는 거, 내가 다 알거든?”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길드원들이 놀라움을 감치 못 하는 것도 잠시, 뒤에서 카이저가 나오며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내게 맡겨라, 산드로. 이곳은 사냥하는 유저들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데다가, 길을 잘 알고 있다. 최대한 몹들의 어그로가 끌리지 않도록 안내해 주겠다.”
“네, 알겠습니다 형님. 그럼 레어까지 안전운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도 주로 훼라리를 타고 이동했던 터라 카이저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라푼젤과 함께 선두로 나온 카이저.
그의 몸에 돌연 배리어가 형성됐다.
한데 이번엔 처음 만났을 때 이글대던 화염 배리어 대신, 푸르스름하게 서리가 낀 얼음 배리어였다.
‘확실히 두 가지를 상황에 맞게 골라 가며 사용한다는 건 너무 괜찮은 메리트야. 봐도 봐도 저건 정말 좋아 보여.’
공격력을 극대화시키면서 주변에 광역 피해를 입히는 ‘화염’ 배리어.
방어력을 올려주면서 피격 시 상대에게 빙결 효과를 안겨주는 ‘얼음’ 배리어.
이 둘을 적절히 교차 사용하는 것이 핵심인 카이저가 개척한 ‘배리어’ 테크트리였다.
물론 스킬 포인트를 각각 찍느라 총 열 개의 스킬 포인트라는 많은 수치를 투자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전혀 아깝지 않다는 것 또한, 카이저가 이미 검증한 지 오래였다.
“잠시 정지!”
어디선가 흉폭한 오우거 한 마리가 나타나 앞장선 카이저에게 순식간에 달라붙었다.
쾅!
어지간한 대문 크기만큼 거대한 전투 도끼가 내려 찍혔지만, 놈은 오히려 빙결 디버프를 먹게 되어 푸르스름하게 변하며 느려졌다.
그런 대형 표적을 향해 우리 길드원들과 NPC 궁수병들의 공격이 가차 없이, 특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날아가 박혔다.
“쿠,쿠,쿠, 쿠웨엑!”
오우거.
그것도 무려 ‘흉폭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녀석답지 않게, 연속된 피격(被擊) 모션과 함께 비명만 내지르다 단 3초 만에 쓰러졌다.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폭딜이었다.
“어…… 이 자식이 이렇게 쉽게 잡히는 놈이 아닌데……. 버닝스타 여러분, 당신들 상당히 멋지군요……?”
몸빵을 나섰던 카이저조차 놀랐는지, 그를 만난 이후로 처음 보는 벙 찐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이곳에서 사냥을 오래 해왔으니, 지금 눈앞에서 본 딜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장 잘 알아봤을 것이다.
“뭘 이런 거 가지고 놀라십니까 형님. 이 정도는 되니깐 드래곤 잡을 생각을 했죠!”
“어? 그래, 그렇지. 흠흠…….”
내 말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앞장서는 카이저.
그 후에도 몇 차례 사이클롭스와 비홀더 같은 무리들을 상대하기는 했지만, 능숙한 길 안내 솜씨 덕에 예상보다 짧은 시간 만에 목표한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높게 솟구친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천연의 성(城).
바로 그린 드래곤 ‘투 메르타스’가 잠자고 있는 놈의 레어 앞에!
“마침내 이 앞에 도착했구나.”
“레어를 실제로 보니 정말 장난 아니게 멋지네요? 여기 나무는 다른 자이언트 트리보다 2배는 더 높아 보여요!”
“전 이미 한번 와 봤는데, 다시 봐도 지리네요.”
“응? 라챤이 너도 여기 와 봤다고? 언제?”
이곳에 도착한 길드원들은 감탄을 금치 못하고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하긴 이 광경을 보고도 아무 감흥이 없을 유저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요. 드로 형님과 궁수병 놓을 위치와 진형 좀 체크해 보러 같이 와 봤어요. 활 하면 또 제가 제일 전문가잖아요?”
“아하! 어쩐지 드로가 알려준 포지션이 디테일하다 싶었는데 그래서였구나?”
잠시 파티원들이 수다를 떨며 전투를 채비하는 동안, 혹여 누군가 따라온 유저가 있는지 혼자 은신을 쓰고 둘러봤다.
‘다행히 꼬리가 안 붙은 것 같다. 오면서 마주친 유저도 없었으니 도중에 뒤치기 당할 염려는 없겠어.’
필드 보스 레이드는 쟁탈전만큼이나 꼬장도 심했기에, 이렇게 우리끼리 조용히 트라이할 수 있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서둘러 도전하는 덕분에 얻게 된 기회!
이제 더 이상의 수다는 오히려 길드원들의 긴장이 풀어질 수도 있었기에, 파티원들을 다독였다.
“자 자, 모두 시뮬레이션 했던 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물론 첫 도전인 만큼, 페이즈가 진행될수록 예측하지 못한 패턴은 당연히 나오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절대 패닉에 빠지지 마시고, 침착히 제 지시를 따라주실 것만 기억해 주세요!”
“넵!”
“그래!”
“네. 모두 여기까지 잘 따라와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비정한 말이지만 죽더라도 퍼스트 킬에 성공하기만 하면 퀘스트는 성공이니, 절대 겁먹지 마세요! 혹여 전멸하더라도 드랍된 템은 제가 책임지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회수하겠습니다.”
“네네. 다들 진작부터 각오한 것 같으니 이제 드갑시다 길마님!”
“하하! 네 알겠습니다 축빙 형님. 여러분, 이제 들어가겠습니다!”
단일 길드원 7명과 NPC 궁수병 30명.
드래곤 레이드에 도전하는 공격대치고는 다소 조촐한 파티가 입구를 통과했다.
은은한 햇살이 들어오는 레어 안.
덕분에 전혀 어둡지 않고 오히려 환하다고 느껴지기까지 했다.
곧게 100미터 가까이 솟구친 나무 기둥들이 둥글게 얽혀, 천장은 마치 거대한 나뭇가지들로 만들어진 돔(dome)과도 같았다.
입구도 상당히 컸지만, 안은 오히려 천장이 더 높아 아주 넓고 쾌적했다.
그렇기에 어떻게 보면 난이도가 매우 높은 보스 룸이기도 했다.
지형적으로 엄폐할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흡사 커다란 빈 방 안에서 레이드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의 맵이니 대규모 타이탄 부대가 아니라면 레이드할 엄두조차 못 낼 거라고, 사람들이 지레 단정 지을 만했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그린 드래곤이 잠자고 있는 레어의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잠시 침묵의 전진이 이어졌고, 시야에 잠들어 있는 녀석의 실루엣이 슬그머니 보이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이번이 3번째 방문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긴장되고 짜릿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게임이긴 하지만, 가상현실인 탓에 놈의 외형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구현됐던 것이다.
웅크려 잠들어 있음에도 10미터가 넘어가는 높은 체고.
사람 하나 크기만큼 길게 뻗은 두 갈래의 뿔.
그리고 살짝살짝 빛을 반사하고 있는 짙은 녹색의 비늘까지…….
날개를 접은 채 잠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넓은 레어 안이 좁게 느껴질 정도로 녀석의 존재감은 거대하고 위압적이었다.
“여기, 이쪽 벽에 붙으세요. 자 이제 소환합니다! 볼포 소환!”
이미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녀석의 어그로가 끌리기 직전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일단 난 길드원들과 NPC 궁수병들을 나무 벽 쪽 가장자리에 뭉쳐 자리를 잡도록 지시했고, 그 앞에 볼포를 소환했다.
사실 보스 몹 레이드에서 이렇게 뭉쳐 있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진형이었다.
대부분의 보스 몹들이 가진 고유의 광역 공격에 굉장히 취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초보적인 걸 몰라 이런 지시를 내린 건 아니었다.
5미터가 넘어가는 펑퍼짐한 무쇠 몸을 자랑하는 볼포.
이 볼포를 옆으로 눕도록 지시하자, 30명이 넘는 일행이 전부 가려졌다.
모두의 앞에 길이 5미터에 높이 3미터가 넘어가는, 거대한 강철 벽이 생겨 버린 셈이었다.
“히야! 이거 진짜 딱 맞네? 조금만 키가 작았어도 몇 명은 맞았겠는데?”
“근데 이게 정말 될까? 막상 이대로 하려니까 불안한데……. 힝, 이거 실패하면 꼼짝없이 전부 전멸이잖아요?”
“축볼이 넌 꼭 시작도 전에 파투 내는 말부터 해야겠니?”
“아니 오빠. 막상 하려니 좀 무서워져서 그래요. 죄송해용…….”
“다들 진정하세요. 이거 제가 몇 번을 시동 걸면서 확인했던 거라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공성전에서 바리케이드 쳐서 뒷사람 보호하던 탱커들 기억나시죠? 딱 그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요 아이언 골렘이 엄폐물 역할을 하는 거예요.”
드래곤 레이드를 구상하면서 내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
그건 바로 녀석의 ‘브레스’였다.
드래곤의 상징과도 같은 브레스 공격은, 어지간한 유저들은 한 방에 죽일 만큼 미친 데미지를 자랑했으며 무려 ‘광역’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먼저 이 브레스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에 대한 나의 해답은 이 ‘강화된 아이언 골렘’이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투 메르타스는 그린 드래곤이었다.
유저들이 알아낸 게임 내 정보에 따르면, 그린 드래곤의 ‘포이즌 브레스’는 모든 드래곤들의 브레스 중에서도 가장 약한 데미지라고 알려졌다.
거기에 브레스는 마법 공격의 일종.
그러니 어쩌면 강화된 아이언 골렘이라면 브레스 공격을 버텨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시험해 봤던 것인데…… 통했다.
볼포가 포이즌 브레스를 의외로 잘 버텨낸 것이다.
마침 포이즌 브레스가, 집중형이 아닌 방사형 브레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한번 리마인드 드립니다. 녀석이 브레스를 쓰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쉬는데, 그 모션이 나오면 무조건 하던 걸 즉시 멈추고 골렘 뒤로 숨으세요! 병사들까지 세세히 컨트롤해서 절대 한 명이라도 골렘 밖으로 노출돼선 안 됩니다! 축굴이 넌 그때마다 지탱의 오라로 바꿔 주는 거 잊지 말고!”
“오케이!”
“축빙 형님과 라푼젤 님은 광역 정화를 번갈아 써서 쿨타임이 겹치지 않도록 잘 조절하셔야 합니다. 다들 아시겠죠?”
“그래. 알겠다.”
“네!”
“모두 작전대로 잘 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저희는 타연 최고의 유저들로만 구성된 최강의 레이드 팀이니까요. 자, 시작하겠습니다!”
“아자아자! 화이팅!”
“오늘, 타연의 새 역사를 남겨 보즈아!!”
파티원들의 기합을 뒤로하고, 나는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시동을 걸어보며 발견한 꼼수를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이 레어의 천장 높이는 얼추 100미터가량.
2번째 방문 때 재미 삼아 대도 부츠로 벽을 타서 천장으로 접근해 보았더니, 지상으로 접근했을 때와 다르게 어그로가 상당히 늦게 끌렸다.
그 덕분에 먼저 맞으면서 시작해야 하는 이 레이드를, 선공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태초의 숨결을 머금은 투 메르타스>
새빨갛기 이를 데 없는 색으로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이름.
다른 보스 몹들보다도 한층 더 화려하게 장식된 네임바 테두리가, 녀석의 높은 위상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시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한숨을 크게 들이킨 뒤 자버프를 시전하며 뛰어내렸다.
“자! 오늘 누가 이기나 한번 붙어보자 이 도마뱀 새끼야!”
휘이이잉, 쿵!
그렇게 온통 녹색 비늘로 뒤덮인 등 위로 떨어지자, 녀석은 곧바로 웅크린 날개를 펼치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나는 그런 녀석의 등 비늘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쑤셔 넣었다.
푹! 푹!
한데 몇 대 찌르기도 전에 검이, 정확히 말하자면 검을 든 내 손과 온몸이 덜컥 멈춰버리고 말았다.
“누가 감히 나의 곤한 잠을 깨우는가!”
“캬오오오!”
[드래곤 피어에 당하여 3초간 경직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드래곤 특유의 고유 스킬, ‘드래곤 피어’였다.
데미지는 크게 특별할 게 없지만 마법 공격인 탓에, 마쉴을 뚫고 그대로 3초간 경직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머리 위로 드래곤의 거대한 꼬리가 접히듯이 공격해 왔다.
[마나 쉴드가 23,215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24,466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쾅, 쾅!
경직 상태 동안 고작 2번의 공격을 맞았을 뿐인데, 5만5천을 자랑하는 내 MP의 20% 가까이가 숨풍 깎여 나갔다.
일반 유저로 치면 22만 수준의 HP였으니, 랭커급 탱커라 할지라도 힐 없이는 목숨이 간당간당했을 엄청난 데미지였다.
“확실히 벌써부터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놈은 절대 아니구나? 만약 타이탄이 없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