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퀀텀 점프 (1)
멍 때리던 것도 잠시, 난 땅 위에 떨어져 있는 드랍 템들을 서둘러 주웠다.
10초 우선권과는 별개로, 우리 파티에서는 오직 파티장인 나만이 드랍된 템을 획득할 수 있도록 설정했기 때문이다.
‘미친…….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는 거 실화냐? 이건 또 뭐야? 타연에 진짜 별 게 다 있구나?’
한데 어찌나 양이 많은지 한 번에 전부 주울 수 없었다.
결국 평소 무게 게이지를 무겁게 유지하기 위해 들고 다니던 잡템들을 모두 버리고 나서야, 겨우 내 인벤토리 창에 전부 채울 수 있었다.
“와! 레이드 한 번만으로 길드 업적치가 150만이나 들어왔어!”
“진짜 제대로 미쳤네요. 네임드 필드 보스 중에도 30만 넘게 주는 놈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150만이라니……. 것도 우리 길드가 혼자 고스란히 다 먹었잖아요?”
무지막지한 드랍 템, 업적, 그리고 길드 업적치까지…….
리스크가 컸던 만큼, 정말 어마어마한 것들을 반대급부로 얻게 됐다는 게 조금씩 실감 났다.
“봐도 봐도 믿어지지가 않아요. 정말 저희가 드래곤을 잡아낸 게 맞는 거예요?”
“축굴아, 지금 여기서 그런 뻔한 소리나 하고 있을래? 전체 알림창에도 떴으니까 아이템도 다 주웠으면 얼른 다 같이 귀환부터 하자. 회포는 마을에서 풀자고.”
“넵!”
조금 전까지 치열했던 전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했다.
축빙 형님의 지시대로 우리는 텅 빈 레어 안에서 하나둘씩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다.
[가트웰 산맥의 휴포드 산악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휑하기만 했던 마을.
한데 이곳 광장에 유저들이 제법 눈에 띄었다.
전체 알림창을 보자마자 호기심 많은 몇몇 유저들이 황급히 순간 이동해온 모양이었다.
일단 유저들이 더 몰리기 전에 마을 여관을 찾아가 방부터 빌렸다.
“햐! 사람들 진짜 빠르긴 빠르구나! 텔 타고 온 사람들 레어 안에 정말 드래곤이 있나 확인하려고 온 거 맞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아마 채집 스킬을 찍은 유저들일 수도 있어. 드래곤의 레어 안에 특별한 채취물들이 있을 거란 분석글을 본 적 있거든.”
“아! 정말요? 그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씀해 주셨어야죠! 저도 채집 숙달치가 제법 높은데, 좀 캐고 올걸!”
“축굴아, 너 계속 정신 못 차리는 거 같은데, 지금 그딴 걸 못 먹었다고 아쉬워하는 거야? 방금 드래곤이 떨군 템 보고도? 호호!”
길드원들이 기쁨의 회포를 나누는 와중에도 난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마치 처음 아이디 변경을 공개했을 때와 같이,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무수히 많은 귓속말 테러가 쏟아진 것이다.
떠벌이기를 좋아하는, 혹은 태성 측과 연관된 유저들이 드래곤을 최초로 토벌한 유저로 나를 지목한 모양이었다.
(무한매입2: 님! 님이 드래곤 잡은 거 맞죠? 뭐 떨궜나요? 드랍 템 링크 좀 걸어주심 안돼요??)
(레벨업도사: 설마 아니죠? 랭커도 아니면서 드래곤을 무슨 수로 잡겠어요?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 좀 해 주시죠?)
(퍽퍽퍽퍽: 산드로 님! 혹시 드래곤 잡은 거라면 드랍한 재료템 비싸게 사겠습니다! 제시만 해주세요, 골드라면 얼마든지 환전해 오겠습니다!)
……………………
도무지 정신 사나워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결국 귓속말 기능을 껐다.
그리고는 파티원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기적……. 그리고, 역전(歷戰)의 용사들…….’
그저 이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한 개 파티 수준으로 말도 안 되게 드래곤 레이드를, 그것도 처음 트라이하면서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
결국 솔플만을 고집했던 과거의 난, 완벽히 틀렸다는 게 증명됐다.
하지만 지금의 난, 뒤늦게나마 옳게 됐다.
이 사람들을 동료로 맞이해 함께하게 되었으니…….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성공할 거란 자신이 있어 도전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내고 나니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네요. 특별히 합류해 주신 카이저 님과 라푼젤 님께도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산드로, 우리가 그냥 참여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소리를 하지?”
“맞아요, 산드로 오빠. 오빠 덕분에 이런 특별한 추억과 엄청난 업적까지 얻었는걸요? 저희야말로 레이드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카이저는 별거 아닌 듯이 말했지만, 만약 둘이 이번 레이드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아찔했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중간에 위험한 순간들이 더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 두 사람이 묵묵히 제 역할을 200% 발휘하며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하긴 세상에 멀린이나 히든캬드 같은 놈들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무튼 정말 다행이었다.’
길드원 누구에게도 내색하진 않았지만, 레이드가 진행되는 내내 혼자 우려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혹여 레이드가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면 카이저가 신검을 노리고 뒤치기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마검사인 그도 장검을 사용하니, 충분히 욕심이 날 수도 있을 텐데?
내가 그 위급한 순간에도, 훼라리만큼은 절대로 소환하지 않고, 끝까지 아껴뒀던 이유였다.
하지만 내 염려와는 달리, 그는 위험한 순간이 닥치자 주저 없이 몹들의 어그로를 끌었다.
심지어 죽을 수도 있었지만, 오직 레이드의 성공만을 위해서.
그런 그가 고맙지 않다면, 나 또한 다리우스와 다를 게 없는 놈일 것이다.
“처음부터 드랍 템은 요구하지 않기로 했으니 우린 여기서 인사를 하지. 버닝스타 여러분, 저도 배울 점이 많았던 정말 잊지 못할 레이드였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제대로 잘 놀아보고 갑니다.”
“다음에 또 좋은 인연으로 만나 뵙기로 해요. 버닝스타 분들, 화이팅이예용!”
“종종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카이저 님. 괜찮겠습니까?”
“그래. 너라면 얼마든지.”
카이저와 라푼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시간의 짧았던 버닝스타의 길드원 생활을 청산하고 여관을 빠져나갔다.
“정말 순수하게 타연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 같아요. 길드나 다른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얽매이지 않고, 그저 타연 그 자체를 즐기고 이 게임의 끝을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랄까요?”
“뭐 그럴지도 모르지……. 사실 그렇게 게임 하기에도 충분히 바쁠 만큼, 타연의 콘텐츠는 풍부하기도 하고……. 오히려 그들 입장에서는 공성전과 길드전에만 몰두하는 유저들이 이해가 안 갈지도 몰라.”
떠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라스트챤스는 잠시 잊고 있었던 히든캬드가 생각났는지 감흥에 젖은 듯싶었다.
어쩌면 타연 초창기 때는 라챤이와 히든캬드도 저렇게 함께, 타연 속 모험을 순수하게 즐기던 시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다들 고생들 했다. 성공한 것도 성공한 것이지만, 더 고무적인 사실은 우리 중 어느 한 사람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지. 만약 전부 죽더라도 드로 너만 살아남아 잡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던 레이드였는데 말야.”
이어진 축빙 형님의 말씀을 들으니, 길드원들이 어떠한 마음으로 이번 레이드에 참여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드래곤을 잡자는 내 제의가 허무맹랑해 보여 반대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을 수도 있다.
하나 여러모로 부족한 놈이지만 길드 마스터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기에, 다들 군말 없이 믿고 따라 주었던 것이었다.
“죽긴 왜 죽습니까? 제가 우리 길드원들을 죽음으로 내몰 사람이에요? 저 그렇게 매정한 놈 아닙니다.”
“호호, 뭐가 됐든지 간에 대박, 그것도 초대박이야! 도마뱀 자식이 마지막 페이즈에서 공중으로 날아올랐을 때 난 진짜 레이드 쫑났다고 생각했잖아! 근데 그걸 드로가 바로 짜부해서 낙하시킬 줄 누가 알았겠어? 난 진짜 눈앞에서 재난영화 보는 줄 알았잖아!”
“맞아요! 무작위 타겟팅으로 바뀌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마지막 페이즈는, 정말 지금 돌이켜 봐도 쌍욕이 나오는 난이도였어요. 사실 딴 건 다른 길드들도 시간이 지나면 다 할 만했을 것 같긴 한데, 첫 트라이 때 공략법을 발견해 낸 건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 아니에요?”
축볼 누님의 선창에 이어 라챤이까지, 나를 제대로 비행기 태우고 있었다.
“기적은 무슨? 다 드로의 실력이었던 거지. 그런 드로가 우리의 리더인 거고. 이번 레이드도 다소 이른 듯싶어 보였지만 결국엔 옳은 결정이었다. 지금 우리가 얻은 것들을 다리우스와 태성이 얻었다고 생각해 봐. 우리의 복수가 아마 반년은 넘게 늦춰졌을걸?”
“그러고 보니 다들 업적 확인하셨어요? 난 보고 입이 안 다물어지던데 다들 딴 얘기들만 하시네…….”
“뭐 업적이 좋아 봤자 얼마나 좋다고 재촉을 하…… 헉!!”
축빙 형님까지 칭찬에 합류해 머쓱해지던 찰나, 현중이의 말을 들은 축볼 누님이 깜짝 놀란 시늉을 했다.
하지만 곧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업적들이 하나같이, 미친 수치를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업적 : 자격을 갖춘 자(A)]
* 초월종 몬스터의 레이드, 혹은 S등급 퀘스트에 도전하여 성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모든 능력치 +20)
* 업적 효과로 타이탄 연대기에 존재하는 각종 금지(禁地)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업적 : 소수 정예(A)]
* 공격대로 도전해야만 하는 레이드를, 소수(1개 파티)로 클리어한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모든 능력치 +10)
* 같은 업적을 가진 사람과 파티를 형성할 시, 원래보다 더욱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됩니다. (파티 시 공격력 +10%)
[업적 : 드래곤 학살자(S)]
* 드래곤 레이드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되는 업적입니다. (모든 능력치 +30)
* 업적 효과로 드래곤 계열 몬스터에게 더욱 강력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데미지 +25%)
* 드래곤을 추가로 학살할수록, 이 업적은 더욱 뛰어난 효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런저런 부가 효과들이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스탯 상승효과였다.
기존의 자잘한 업적들이 ‘단일 스탯’을 10개 안팎으로 올려주는 것에 그쳤던 반면, 한번에 3개나 얻은 이번 업적들은 전부 ‘올 스탯’을 증가시키는 최상위 효과들이었다.
거기다 올려주는 수치도 역대급이라서, 전부 합치면 레벨업을 무려 100 가까이 한 것과 비슷할 정도로 스탯을 상승시켜 줬다.
공격력과 명중률의 보정이 없는 비슷한 레벨 간에는, 스탯 차이가 어마어마한 격차를 만들어 준다.
한 마디로 우리 길드원 모두는 이번에 얻은 업적만으로도 몇 십 레벨 차이는 단숨에 메꿀 만큼 엄청난 스펙 업을 하고 만 것이었다.
“와! 어쩐지 HP하고 MP 수치가 이상해진 것 같더니만 업적들이 초A급이네? 이 정도 효과가 붙은 업적들은 나조차도 처음 본다.”
“형님! 제가 가진 업적 20개를 합친 것 보다, 어쩌면 이번에 얻은 업적 3개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와! 진짜 이래서 랭커들이 항상 고등급 업적 타령을 했던 거구나!”
확실히 현중이의 말대로, 이번에 얻은 업적들은 어지간한 업적들 수십 개보다 훨씬 더 가치 있어 보였다.
그랬기에 언제나 침착한 모습만 보이셨던 축빙 형님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짜식, 업적이 20개나 있었어? 나는 이제야 겨우 10개를 넘겼는데…… 확실히 그동안 허투루 겜한 건 아니었네.’
워낙 친한 녀석이라 항상 농담조로 평가 절하했지만, 역시 현중이는 탑 길드에서도 탐낼 만큼 수준 높은 실력자였다.
이번 레이드에서도 레벤다스가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면 성공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파티원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설명에 적힌 대로 나 혼자만 드래곤 학살자를 얻었다.
하지만 다른 모두도 ‘드래곤 토벌자’라는 A급 업적을 대신 받아 다행이었다.
하긴 원래라면 수백 명의 공격대가 참여할 레이드인데, 토벌 때마다 이런 S급 업적을 수백 명씩 얻게 된다면 그것 또한 문제였다.
“자. 이제 드디어 기다리던 드랍 템 확인의 시간인가요? 드로야, 어서 얘기해줘 봐. 궁금해 죽겠으니깐!”
업적까지 살펴봤으니 대망의 드랍 아이템을 살펴볼 차례였다.
줍는 나조차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수많은 아이템을 드랍했던 투 메르타스.
설정 상 어린 용이었다곤 하지만,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었다.
[산드로: 드랍 아이템 목록 링크 걸어볼 테니, 잘 읽어보시고 필요하신 분 계시면 말씀하세요.]
[산드로: 먼저 재료 아이템입니다. <투 메르타스의 심장(디바인)>, <용의 비늘(레전더리)>, <용의 뼈(레전더리)>, <용의 힘줄(레전더리)>, <세계수 가지(레전더리)>]
무려 장비들을 제작할 수 있는 드래곤의 부산물들이 4개 부위에서 각각 여러 개씩 드랍됐다.
그중 오직 투 메르타스의 심장만 단 하나뿐이었으나, 그 때문인지 유일하게 디바인 등급에 이르는 놀라운 재료템이었다.
사실 유니크 재료템인 드레이크의 비늘로도 제작 시에 가끔씩 레전더리 방어구가 뜨지 않았던가?
그러니 같은 레전더리라 하더라도, 이것들로 제작하면 최상위급 레전더리 장비가 탄생할 것임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거 실화냐? 한 번에 이렇게나 많은 레전더리를 드랍했다고?”
“최초의 디바인급 재료 아이템은 어떻고! 역시 드래곤 하트라 이건가?”
[산드로 :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이제부터는 장비예요. <샤크 투 메르타스(디바인)>, <투 메르타스의 독니(레전더리)>, <투 메르타스의 눈동자(레전더리)>, <은신의 망토(레전더리)>. 참고로 은신의 망토는 2벌입니다. 이제 정말 끗!]
하지만 드랍된 완성템은 더더욱 놀라운 것들뿐이었다.
심지어 아직 타연에 둘밖에 존재하지 않는 디바인 템, 그것도 무려 무기가 나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