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선전포고 (2)
그날 저녁, 드래곤 레이드 사건으로 한창 불이 붙은 공식 홈페이지에 기름을 붓는 글이 하나 더 올라왔다.
내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한 지옥불이, 자신의 ID로 올린 게시글이었다.
-[모집] 저희 피닉스 길드와 함께 제국군과 싸우게 될, 반(反)제국군을 모집합니다!
이 발제 글은 등록된 지 단 몇 시간 만에 수백만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초유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드래곤 토벌이 큰 사건이기는 했지만, 어찌 보면 일반 유저들과는 다소 동떨어져 있는 그들만의 리그 속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제국의 침공 사건은 직업 불문, 레벨 고저(高低)에 상관없이 모든 유저들이 참여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저 모집 글에 적힌 대로 피닉스 산하 길드에 가입하거나, 동맹을 맺기만 한다면 말이다.
최초의 전쟁이기도 했지만, 이런 이유로 많은 유저들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반응 또한 빠르게 나타났다.
-피닉스 산하 길드 중에 가장 가입 제한 없는 길드는 어딘가요? 알려주실 분?
-업적 획득용으로 길드 하나 만들었습니다. 함께 하실 분은 제 아이디로 귓말 주세요.
-저희 람세스 길드는 이번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피닉스 길드와 동맹을 맺기로 했습니다. 참전을 원하시는 분들은 저희 길드로 가입문의 주세요.
솔플 유저들마저 동맹 맺을 길드를 창설하기 위해 재빠르게 솔플러들을 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벌써부터 규모가 제법 큰 몇몇 중립 길드는 공개적으로 참전 의사를 내비쳤다.
-호구들이냐? 어차피 제국군한테 무너질 길드를 왜 도와줘? 지들이 못 막으니까 도움 요청하는 걸, 저렇게 포장한다고 누가 모를 줄 알아?
-맞는 말임ㅋㅋ 제국이 얼마나 쎈지 모르는 유저가 있냐? 보나 마나 제국군들 엄청 고레벨일 텐데, 괜히 참여했다가 렙따나 오지게 할걸?
-근데 정말 업적치는 주는 거 맞아? 이런 일은 처음인데 지옥불이 어떻게 알아? 이거 구라 아님?
태성이나 올림푸스, 고조선과 같은 대형 길드들은 이런 상황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간혹 비관적인 악플들도 달렸으나, 한번 불붙은 분위기는 되돌릴 수 없었다.
어차피 제국군과 접전을 벌일 메인 길드는 피닉스.
일반 유저들 입장에서는 안전한 후방에서 원딜로 간을 보다가, 제국군이 너무 강해서 밀리면 그냥 튀어버리면 될 일이었다.
피닉스가 패배해 성을 뺏긴다 한들,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기 때문이다.
죽을 염려도 없이 업적치를 먹을 수 있는 기회.
거기다가 방송에서도 보기 드문 거대한 게임 속 이벤트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그러니 참전을 원하는 사람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산드로: 아시겠죠?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업적치를 획득해야 합니다. 레벨업은 물론이고요!]
[축복받은무빙: 그래. 드로 말대로 이건 길드를 급성장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다들 제작 준비는 잘돼 가고 있지?]
[라스트챤스: 2개 분량 재료 템을 구매하느라 개고생했지만, 곧 끝나갑니다. 들어가는 것들만 봐도 아마 역대급 활이 만들어질 것 같아요 ㅎㅎ]
[축복받은파볼: 5인 길드, 그것도 만든 지 얼마 안 된 신생 주제에 벌써 상급 길드를 노리게 되다니... 정말 이러다가 우리 손으로 태성을 무너뜨리는 날도 오지 않을까?]
[축복받은얼굴: 에이, 그럼 누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태성을 못 잡을 거라고 생각하고 계셨던 거에요? 와, 실망이네 실망!]
[축복받은파볼: 아니 그게 아니라ㅎㅎ 사실 첨에 길드 만들 때만 해도 어차피 복수는 못 하겠지만 분풀이는 해보자는 심정으로 합류한 거거든. 근데 정말 점차 가능성이 보이니까 기분이 묘하자나~]
사냥 중에 단순히 파이팅하자고 적은 글이었다.
한데, 뒤이어 길드 채팅창에 올라온 축볼 누님의 글을 보니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현재 그들이 가족처럼 지내왔던 세인트 길드원들은 대부분 피닉스로 흡수된 상태였다.
몇몇 길드원은 해체되면서, 게임을 아예 접었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현중이를 포함한 세인트 길드 출신의 이 세 명은, 남은 타연에서의 삶을 모두 건 채 나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수없이 죽게 되어 애써 키운 캐릭과 아이템들을 전부 잃을 수도, 태성의 타겟팅이 되어 현실 보복을 당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나를 찾았던 이유.
태성의 횡포에 대해, 복수는 못 하더라도 나름의 작은 분풀이나마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런 형님과 누님의 바람을 알기에, 나로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완벽한 복수를 안겨드리기 위해!
[산드로: 어쨌든 상급 길드가 되면 전쟁 선포가 가능해지니까, 이번에 꼭 200만을 달성합시다! 아자아자!]
길드는 크게 상급, 중급, 하급, 그리고 신생 길드로 나누어진다.
각각 길드 업적치 달성 수준에 따라 구분됐기에, 그저 길드원의 숫자만 많다고 등급이 올라가는 구조는 아니었다.
즉, 길드원의 숫자가 적은 소수 길드라 할지라도 노력과 활약 여부에 따라 얼마든지 상급 길드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 조건은 누적 길드 업적치 200만 포인트.
등급의 고하에 따라 게임 내에서 주어지는 혜택들이 차등 됐는데, 상급 길드가 되면 제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를 상대로 무기한(無期限)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다.
다리우스가 항상 제국을 무너뜨리고 황제가 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던 이유.
그게 바로 여기 있었다.
그리고 난 당연히 티에스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 생각이었다.
‘전쟁 상태가 되면 PK를 해도 머더러가 되지 않아. 게다가 태성 놈들을 죽일 때마다 경험치 뿐만 아니라 업적치까지 받을 수 있게 된다. 완전 1석 3조인 거지.’
나야 어차피 한 번 죽으면 끝이기에 머더러가 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지만, 길드원들의 입장은 달랐다.
길드원들의 장비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기에, 혹여 머더러가 되면 여러모로 제약이 심했다.
머더러로 사망할 시 페널티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루빨리 상급 길드로 성장시키기 위해, 난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업적치를 얻을 계획이었다.
* * *
3일이란 시간은 짧진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 번에 퀀텀 점프를 한 우리 길드원들이 얻은 것들을 소화해내기에는 모자란 시간이었다.
-드로 형님, 죄송하지만 잠깐 상담 좀 가능하세요? 이거 아무래도 제 성장 방향에 대해서 수정을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여전히 꿀 사냥터인 지하 도시 인던에서 사냥 중이던 난, 조금 전 라챤이로부터 호출을 받아 마을로 귀환했다.
이래 봬도 라챤이는 우리 길드원 중에서 가장 인맥이 넓은 편이라, 가장 먼저 첫 드라코닉 무기 제작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이야, 진짜 축하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틀 만에 두 자루를 전부 제작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대단하네!”
“헤헤, 아는 사람들 총동원해서 재료를 싹싹 긁어모았죠. 이것 때문에 완전 빚쟁이가 다 됐어요.”
“엄살은. 아무튼 둘 다 레전더리로 떴고?”
“당연하죠! 혹시 크리티컬로 디바인급이 뜨나 기대해봤는데, 아무래도 제작으로는 아직 디바인을 못 만드는 것 같아요. 설정상 디바인 템은 서버에 하나씩밖에 없는 템이니깐요.”
“하긴 그런가? 암만 그래도 스펙은 레전더리 중에서도 좋은 편이겠지? 어디, 교환창에 올려봐 봐. 한번 옵션 좀 보자.”
“네. 안 그래도 이것 때문에 부탁드린 거예요. 좋긴 좋은데, 이 옵션에 맞추려면 제 테크트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서요.”
타연에 처음 등장하는 드라코닉 무기.
그래서 그런지, 여타 기존의 다른 무기들과는 조금 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드라코닉 보우(레전더리, 두 손 무기)>
* 공격력 : 1460
* 사정거리 +100%
* 적중 시 10%의 확률로 ‘관통’ 발동
* 드래곤 본과 드래곤의 힘줄로 만들어져 매우 강한 탄성을 자랑하는 활입니다.
* “선대 드워프들 격언 중에 진정한 대장장이는 재료와 장비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 오늘로써 자신 있게 말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뭐? 아니라고? 조상님들도 드래곤을 재료로 써 봤다면, 분명 생각이 바꿨을 테다.” -아이언해머 클랜 마스터 그락쏜-
간단하기 이를 데 없는 옵션 효과.
보통 레전더리 무기들은 옵션이 평균적으로 4개 정도는 붙었는데, 이 활은 단 2개밖에 붙지 않았다.
심지어 레어급에도 붙는 스텟이나 속성 증가 옵션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빠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사기 수준의 활이 등장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이야! 공격력이 미쳤는데? 거기다 사정거리 플러스 옵션이 100%라고? 그럼 강화 좀 하면 얼마나 늘어난다는 소리야?”
“쩔죠? 거기다가 ‘관통’ 효과는 물리뿐만 아니라 쉴드 마법도 무시하는 효과예요! 옵션이 2개뿐이지만 완전 최강들로만 붙어 있는 거죠.”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더니……. 단순해 보이지만 완전 활의 끝판왕 옵션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도무지 깔 게 없네…….”
양손 무기였던 줌바카의 전투 도끼의 공격력이 820이었다.
한데 같은 양손 무기면서 원거리 무기인 드라코닉 보우의 공격력이 1460이었다.
이건 조금만 강화가 잘 된다면 거의 디바인급 공격력을 보유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상담하고 싶다는 건 뭔데? 완전 대박이라서 고민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도무지 특수 스킬을 뭘 찍을지 정하질 못하겠어요. 원래 드래곤을 잡으면 ‘기억 분쇄’를 찍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활을 보고 나니깐 계속 저격 특화로 가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해서요.”
“아하! 스킬 테크트리가 문제구나? 잘 찾아왔다, 그건 또 내 전문 분야지.”
라챤이의 본래 직업은 기사였다.
그것도 이미 몇 달 전 300레벨 초중반을 달성했을 정도로 최상위권에 속했던 근접 딜러.
그런 라챤이가 ‘극데미지 원딜러’ 콘셉트의 궁수로 새롭게 재시작한 것은 우연히 특수 스킬과 용맹한 오크 로드의 증표를 얻었던 탓이 가장 컸다.
-사실은 그 이유만도 아니에요. 히캬 형님과 길마 형님, 두 분과 포지션이 겹쳤거든요. 어차피 앞으로 타연을 1, 2년 할 것도 아닌 것 같아서 과감하게 새로 키우기로 했던 거였죠.
인던이나 특수 퀘스트 등을 수행할 때는 인원수 제한이 있다.
그 때문에 라챤이는 새로 키울 직업으로 궁수를 택했는데, 사실 원래 최상위권 유저 출신이라 그런지 컨트롤은 물론 원딜러에 대한 이해도 또한 수준급이었다.
체력을 소모하는 대신 마나를 채워주는 특수 스킬, ‘마력 교환’을 얻은 후 궁수를 결정한 것도 그런 이해도가 밑바탕이 됐다.
-원래 궁수가 제대로 딜싸이클을 돌리려면 스킬을 남발해야 해서, 마력 스탯도 좀 찍어줘야 하거든요. 하지만 전 마력 스탯은 최소화하고 대신 근력에 몰빵해서 공격력과 사거리 증가에 집중하려고 콘셉트 잡았어요. 종이 몸이지만 무빙과 템빨만 믿고 성장시킨 테크트리였죠.
컨에 자신 있는 유저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캐릭은 키우고 싶어서 하지 않았다.
마치 본능과도 같이, 뭔가 하나에 특화되고 오직 자신만이 활용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캐릭을 갖고 싶어 했다.
길드원 중 가장 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라챤이.
녀석이 이런 선택을 한 이유였다.
“기억 분쇄 좋지……. 네 테크트리와도 잘 맞을 것 같고. 한데 네 말대로 난 네가 계속 저격 특화로 가는 게 맞다고 본다. 어차피 네 캐릭은 근딜러가 붙으면 끝이야. 그럴 거면 콘셉트를 더 강화하는 게 좋아 보여. 장거리 저격에서 초장거리 저격 궁수로!”
상대방을 상태 이상 ‘혼란’에 빠뜨리는 즉발 스킬, 기억 분쇄.
이 스킬은 특이하게도 지력 스탯 대신 근력 스탯에 영향을 받는 스킬이라 마법사 류를 제외한 모든 직업군에서 각광받는 좋은 스킬이었다.
아무래도 생존력이 부족한 라챤이 입장에서도 목숨 한번을 살려줄 수 있는 히든 스킬로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는 스킬.
하지만 직접 무기를 휘두르는, 근접 스킬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 그냥 ‘환영화’나 ‘연쇄 파편’, 둘 중 하나를 하는 게 좋을까요? 막상 고를 수 있으니깐 뭘 골라야 좋을지 통 정하질 못하겠네요.”
“아니지, 아니라니까. 네 테크트리가 빛을 발하려면 그런 스킬은 너무 뻔해. 답은 나왔어. 너도 나처럼 테이밍 몬스터를 배워라.”
“네? 테이밍이요?”
“그래. 초장거리 극딜 궁수가 날아다니기까지 해봐. 그럼 완전 전투기 아니겠냐?”
사실 이건 천인대전에서 만났던 랭커 궁수, 비상구로부터 영감을 받은 아이디어다.
사실 이미 그리폰 라이더 중에는 궁수도 제법 많고 파훼법도 많이 연구됐다.
하지만 비상구만큼 강력한 궁수가 막강한 템까지 조합해서 날아다니게 됐더니,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하다는 것은 직접 상대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그러니 만약 라챤이가 이속이 빠른 공중 탈 것을 꼬시게 된다면, 그보다 몇 배는 더 무서운 캐릭이 될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폰이요? 그놈은 좀 느려서 일점사 당하기 일쑤지 않아요? 형님처럼 레드 드레이크급은 돼야 좋을 것 같은데, 제가 혼자 꼬실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뭘 그렇게 욕심 부리려고 그래? 혼자서 꼬실 만한 애 중에서 좋은 놈 있어. 왜 우리가 용 잡으러 갈 때 지나쳤던 와이번 둥지에.”
“어? 어라? 맞네요? 400렙짜리 일반 몹! 그거라면 충분히 빠르고 제가 꼬실 수도 있겠어요!”
“크크, 이제 정해졌지? 일반 몹이지만 레벨업 좀 꾸준히 시켜주면 쓸 만할걸? 그런데 이러다가 나중에 우리 길드에 공중 탈 것이 넘쳐나는 거 아냐? 축굴이도 페가수스를 엄청 타고 싶어 하던데.”
“아, 그래요? 아무튼 형님 말씀 들으니 딱 좋은 것 같아요. 그럼 바로 테이밍 찍으러 오스타그로 가 볼게요.”
“같이 가자. 어차피 바로 테이밍하러 갈 거면 내가 좀 도와줄게.”
“안 그러셔도 돼요. 와이번 정도야 충분히 혼자서 하고도 남죠.”
“엉? 거기가 몹이 뭉쳐 다니진 않지만, 그래도 상당히 강한데……. 정말 혼자 할 수 있겠어?”
“형님……. 언제까지 절 한 사람 몫도 못 하는 길드원으로만 보실 거예요? 힘숨찐이란 말 아시죠? 나중에 보여 드리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이리 좀 와 보세요.”
그 말과 함께, 라챤이는 다짜고짜 교환을 다시 걸었다.
차례로 올라오는 두 자루의 드라코닉 보우.
첫 번째는 조금 전 내가 봤던 노강화 활이었지만, 두 번째는 강화를 마친 상태였다.
그것도 이미 몇 차례나……!
<+6 드라코닉 보우(레전더리, 두 손 무기)>
“이런 미친놈아!! 암만 두 자루라고 해도 이걸 6강까지 강화했어? 근데 그걸 또 성공했고?”
갑자기 디바인 활이 등장하지 않는 한, 당분간 타연 최강으로 군림할 활이 라챤이의 손에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