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선전포고 (3)
“하하! 깜짝 놀랐죠? 저도 될 대로 되란 식으로 질렀지만, 정말 엄청 놀랐어요. 흐흐, 저한테도 이런 날이 올 줄이야!”
“와! 너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이게 얼마짜린데 몇 번을 지른 거야? 그리고 아무리 계속 떴다고 해도, 어떻게 이걸 6까지 강화할 생각을 해? 나라면 4만 됐어도 후덜덜해서 멈췄을 건데…….”
“형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원래 제가 피닉스 있을 때 별명이 러쉬왕이었어요. 제 아이디부터가 길드원들이 마지막으로 러쉬 부탁을 하도 많이 해서, 라스트챤스라고 바꿨던 건 줄 모르셨죠? 제가 히캬 형님 드레이크 갑옷도 5까지 띄워주고 했었는데……. 아니, 아무튼 간에 형님도 강화할 일 있으면 앞으로 저한테 맡겨 주세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봐도 인생은 불공평했다.
될 놈은 뭘 해도 되는 법.
이젠 나도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 강화 운은 역대급이었다.
레전더리급 중에서도 상위 스펙 무기가 무려 6강화나 됐다 보니, 디바인급도 부럽지 않게 된 것이다.
“형님. 그래서 말인데요, 전 사실 6강화면 타연 끝날 때까지 만족하고 쓸 것 같거든요? 여기서 또 강화했다가는 분명 날아갈 것 같고요.”
“응? 그래서, 나머지 하나는 팔려고?”
“아뇨. 이거 그냥 형님이 쓰시라고요. 아무리 도둑이라도 스왑용으로 활 하나 갖고 있으면 좋잖아요.”
“뭐? 또 뭔 소리야 그게?”
다들 단체로 최면이라도 걸렸나?
내게 드랍템을 몰아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가 고생하며 직접 제작한 템도 거저 주겠다니…….
아무리 봐도 이런 길드원들은 세상에 또 없을 것 같았다.
“형님도 잘 아시잖아요. 템빨은 좋은 거 하나 있는 거보다 여러 개 있을 때 더 시너지 효과가 난다는 걸요. 어차피 나머지 활은 강화해 봤자 3강화도 못 하고 날아갈 것 같아요. 그렇다고 길드 외부에 팔기엔 너무 좋은 무기고요. 형님께서 쓰시는 게 제일 좋을 것 같네요.”
“네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나 이거 못 차. 내가 스왑용 활 놔두고 괜히 무기 던지기 스킬을 배웠겠어? 활로 스왑하는 순간, 신검에 적용 중이던 옵션 효과가 전부 사라져 버려. 그러니까 난 이거 쓸 일이 없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형님은 잠깐이라도 무기를 바꿔 차시질 못하는구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사정거리도 길어서 도움 좀 되실 텐데, 혹시 몇 강화세요?”
“지금 2 강화야. 운이 좋았지.”
생각지도 못했던 라챤이의 강화 성공.
그로 인해 나 또한 견제 무기로는 한참이나 오버스펙인 템을 얻을 뻔했으나, 마음만 받기로 했다.
“그건 그냥 너 아는 사람 많으니까 지인한테 팔아서 너 필요한데 써. 태성한테만 안 흘러 들어가게만 하면 되지.”
“아…… 형님 드릴려고 했는데, 그럼 무기는 끝났으니까 방어구나 좀 더 맞춰봐야겠네요.”
“그리고 내가 지금 바쁘긴 하지만…… 너 테이밍 하는 거 내가 싹 다 에스코트해 줄 테니까 얼른 출발하자.”
“어허! 안 그러셔도 된다니까요.”
“잔말 말고 테이밍부터 빨리하자. 그런 다음 나머지 길드원들도 빨리 한 번씩 만나봐야겠어. 다들 아직 특별 스킬 안 배우셨지?”
“아마 그러실걸요? 형님처럼 주저 없이 찍을 사람은 많지 않으니깐요.”
“다들 원하시는 대로 키우도록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꼈어. 다들 조금이라도 좋은 선택을 하도록 코치해 드려야겠다.”
“옛썰! 마이 로드! 그럼 어서 이동하시죠!”
다행히 다들 신중히 고민 중이었던 터라, 이후 각자의 테크트리에 도움이 될 특별 스킬을 선택하는 데 조언해 줄 수 있었다.
제국군이 쳐들어오기 하루 전.
그렇게 우리는 놈들을 맞이할 준비를 끝마쳤다.
* * *
결전의 날이 밝았다.
난 유적지 인던에서 노가다나 다름없는 레벨업을 하다가, 제국군이 예고했던 시간이 다가와 로젠타스 성으로 이동했다.
슝!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외성 마을에 도착해 보니, 놀랍게도 광장 안은 수많은 유저들로 인해 발 디딜 틈 없이 꽉 차 있었다.
“와! 이렇게 이동도 어려울 만큼 마을에 유저가 많은 건 업적 나눔 이벤트 후로 처음 보네. 아니, 확실히 요즘 타연에 유저가 늘었나? 어쩌면 그때보다도 많은 것 같은데? 훼라리 소환!”
수천 명이 모여 있는 광장 상공.
사람들의 머리 위 한복판에 마법진이 새겨지더니 훼라리가 튕기듯 튀어나왔다.
난 곧바로 호버링하듯 홰를 치고 있는 훼라리에게 점프해 올라탔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본 사람들 때문에 광장이 발칵 뒤집어졌다.
“뭐야? 훼라리 떴다! 산드로 대박!”
“와! 드레이크를 실제로 보니 간지 미쳤는데?!”
“꺄아아아! 산드로 오빠 팬이에요!!”
보통 사냥터로 이동할 때도 이런 식으로 마을에서 훼라리를 소환해 이동해 왔다.
한데 이번에는, 유저가 워낙 몰린 곳이다 보니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아, 괜히 관종 짓 한 거 같아서 민망하네. 도저히 걸어서 못 갈 것 같아서 그런 거였는데……. 근데 누가 분명 오빠라고 하지 않았나? 크크.’
근래 내가 타연에서 눈에 띄게 설친 적이 꽤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명세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는데, 그에 비례해 내 인기도 치솟았다.
가끔 사냥터에서 마주치는 유저들마저 나를 공격할 생각보다는,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는 유저가 훨씬 더 많을 정도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치 ‘동경’한다는 듯한 눈빛과 인사들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며 처음으로 겪어보는 반응과 대우.
이렇게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환호받는 것 또한 흔치는 않은 경험이었는데, 막상 닥쳐보니 쑥스럽기는 해도 상당히 기분 좋았다.
그렇게 잠시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다가 로젠타스 내성을 향해 날아올랐다.
“와! 사람들 엄청 많이 모였네? 역시 이번 계획도 성공이구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니, 이미 내성 안은 피닉스와 그 동맹 길드원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성벽과 첨탑은 마치 만원 버스라도 된 듯, 난간의 사람들이 떨어지지나 않을까 겁날 정도였다.
성을 둘러싼 절벽 너머도, 외성 마을에서 유저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며 필드를 조금씩 메우고 있었다.
“오! 오셨군요, 산드로 님!”
“안녕하세요 지옥불 님.”
훼라리가 날개를 펄럭이며 천천히 내성 광장 안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지옥불과 새롭게 부길마로 임명된 ‘두바이’ 등의 피닉스 간부진들이 다가와 반겨줬다.
주변에는 아틀란티스를 비롯한 다른 동맹 길드의 간부진들 모습도 볼 수 있었는데, 우리 버닝스타 멤버들의 모습도 보였다.
“야! 5분밖에 안 남았는데 이제 서야 오냐? 적어도 10분 전에는 와 있어야지!”
“미안 미안. 딱 인던 한 바퀴만 더 돈다는 것이 그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현중이의 타박을 들으며 사람들을 향해 양해를 구하자, 곧 지옥불이 말을 건네 왔다.
“하하! 늦지는 않았으니 괜찮습니다 산드로 님. 먼저 감사드립니다. 산드로 님 아이디어 덕분에 이렇게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뭘요. 전부 다 지옥불 님이 그동안 덕을 쌓아두셨으니 일반 유저들도 거부감 없이 참여한 거죠. 그나저나 축하드립니다. 오면서 보니까 길드원들과 동맹 길드가 며칠 만에 장난 아니게 많이 늘었을 것 같던데요.”
이러다가 조만간 타연 최고의 길드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주변 동맹 길드의 눈도 있어 이 말은 삼갔으나, 지옥불이라면 충분히 알아듣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뭐가 됐든 곧 있을 제국군의 습격을 제대로 방어해 냈을 때의 일이겠지요. 아무튼, 이번에도 산드로 님의 멋진 활약을 기대합니다. 곧 전투가 시작될 것 같으니, 전 이만 성벽 위로 올라가 봐야겠군요.”
“네. 건투를 빕니다!”
“건투를……!”
그 말과 함께 지옥불은 피닉스의 간부진과 함께 서둘러 성벽 위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조금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던 건,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른 동맹 길드들도 각자 자리를 잡기 위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하나 그중 두 명의 유저는 전투를 준비하는 대신,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틀란티스의 길드 마스터 ‘아리스토’와 부길마 ‘바라기’였다.
“진작부터 만나 뵙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는데, 드디어 뵙는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아틀란티스의 아리스토입니다.”
“제가 뭐라고요. 아무튼 반갑습니다, 산드로입니다.”
“전에 칼젠 성 매각 때 뵀었죠. 반갑습니다.”
“오랜만이네요, 바라기 님.”
최근 피닉스가 워낙 급성장한 탓에 존재감이 다소 옅어진 감은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틀란티스는 타연 최고의 길드 중 하나로 손꼽혔다.
특히 길마와 부길마, 이 둘은 길드 업무로 바쁠 텐데도 각각 성기사와 마검사 랭킹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만 봐도 아틀란티스의 포텐셜이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근데 곧 전쟁이 시작될 텐데 어쩐 일로……?”
“아! 저희 길마님께서 꼭 한번 직접 만나 뵙고 말씀을 나눠보고 싶다고 하셔서요.”
“사실 실력도 실력이지만, 산드로 님께서 보여주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들이 정말 대단하다고 평소에 생각해 왔습니다. 마치 플레이 자체가 타연에 최적화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혹시 나중에 저희 아틀란티스에서도 그런 활약을 구경할 기회를 한 번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는 당연히 만족스럽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바쁜 지금 굳이 왜 인사를 건네나 했다.
한데 역시나, 다른 속셈이 있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리스토 님. 제 최우선 목표는 이미 몇 번이나 밝혔다시피 태성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피닉스와는 그 뜻이 맞았고 도중에 많은 도움을 받았기에 함께하는 중이고요. 제게는 따로 다른 길드들의 이익 다툼에 끼어들 만큼의 관심이 없을뿐더러 시간도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마음만 받겠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기대했었는데…… 정말 안타깝군요.”
마치 뮤지컬 배우처럼 온몸을 통해 실망스럽다는 걸 표현하는 아리스토.
이 사람도 다리우스처럼 타연 속 역할 놀이에 심취한 사람 중 하나인 듯싶었다.
한데 그런 역할극에 심취한 사람이 이 자리에 한 명 더 남아있었다.
자신의 군주가 거절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그의 충실한 부하가.
“피닉스는 되고 저희는 안 된다는 말을 어렵게 돌려서 하시는군요? 어차피 다른 7신기나 타이탄들도 곧 있으면 속속들이 나오게 될 텐데, 너무 콧대가 높은 거 아닙니까? 하긴 지금 아니면 우리한테 이럴 수 있는 날도 없겠지만!”
“뭐라고요, 바라기 님?”
“따지고 보면 당신은 우리로부터 신검을 스틸한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다리우스를 죽일 때 저희 아틀란티스도 메인 길드로 참여했었습니다. 그러니 피닉스처럼 저희도 한번 도와주실 수 있는 거 아니냐고요!”
“바라기 님. 그 부분은 저도 충분히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리 알고 그 자리에 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만약 멀린이 먹었어도 신검은 연합에게 돌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괜한 걱정일 수도 있겠지만 잘 모르고 계신 것 같아서 충고 하나를 드리죠.”
“거절이면 거절이지, 충고는 또 무슨 충고입니까?”
“지금까지의 타연 판은 태성의 독주였지만, 앞으로는 많이 달라질 겁니다. 실제로 지난 몇 달 동안 태성이 많이 변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겠죠? 근데 이러다가 만약 태성이 왕좌에서 내려오게 되면, 과연 그 자리는 누가 차지하게 될까요?”
“…….”
같은 급이라 생각했었던 피닉스의 급작스러운 부상이, 그들 입장에서는 못마땅했을지도 모른다.
두 길드 간에는, 오직 ‘나’라는 존재의 조력을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란 차이밖에는 없어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28년을 살아오는 동안 느낀 건데…… 인생이란 원래 그랬다.
멘토와의 만남, 은인과의 만남, 원수와의 만남 등, 모든 만남은 전부 우연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인연을 어떤 관계로 발전시키는가는, ‘운’의 영역이 아닌 당사자의 ‘역량’ 문제였다.
다리우스는 나와의 만남을 항상 최악으로 보답했다.
반대로 지옥불이란 사람은 내게 항상 충분한 보상과 넘치는 신뢰를 안겨주었기에, 우리의 관계는 지금과 같이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사소한 이익 때문에, 내가 먼저 지옥불을 배신할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괜한 딴생각을 하고 계신다면 접어 두시기 바랍니다. 정말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잘못된 결정을 내리게 되신다면, 길드의 존속이 위태로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나와 내 편을 건드리게 된다면, 그 즉시 전쟁은 시작될 것이다.
지금 내가 그들에게 내뱉은 이 말은, 즉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