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마탑주 (1)
“네? 혹시 괜찮은 곳을 알고 계신가요, 형님?”
“이곳보다는 조금 어렵고 까다로울 수 있지만…… 그래도 제국군들이 몰려오지 않을 만한 곳을 하나 알고 있지. 바로 마탑이다. 그곳이면 어떤가?”
마탑?
귀족이 있는 곳을 알려주신다고 해놓고는, 갑자기 웬 마탑을 말하는 거지?
라는 반문이 떠오르던 찰나, 무슨 뜻인지 이해됐다.
“아! 그렇구나! 황궁의 NPC 마법사들도 대부분 귀족이었지!”
“맞구나! 그래서 탑을 지키는 병력도 거의 없지? 항상 마탑에 갈 때마다 한 번도 경비병 같은 애들을 본 적이 없었어!”
“거기다가 마탑주는 후작 위를 가진 고위 귀족이야. 카이저 님의 말씀대로 마탑이라면 딱이겠는데?”
마탑에 올 일이 많았을 축볼 누님까지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확실했다.
본래 원로원을 턴 다음, 괜찮은 것 같으면 다른 건물도 뒤져보려 했다.
한데 귀족들이 왕창 몰려있는 마탑을 떠올리게 된 이상, 굳이 다른 곳에 들를 필요는 없었다.
“오! 역시 카이저 형님은 우리와 생각하시는 게 다르시다니까요! 감사합니다, 바로 그쪽으로 가봐야겠어요! 아무래도 유저들이 곧 어마어마하게 몰려들 것 같거든요.”
“나야말로 부탁대로 원로원장을 포기해줘서 고맙군. 그런데 내가 말은 꺼냈지만 정말 괜찮겠나? 마탑의 NPC들은 이곳 귀족들과 달리 반격도 가능한 고레벨의 마법사들일 텐데?”
“더 좋아요! 여기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비전투형이라서 죽이면서도 찝찝했거든요. 그러고 보니 전투형이면 죽였을 때 보상이 더 좋을 수도 있겠네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카이저 님. 이래 봬도 저희는 드래곤도 잡아낸 무적의 파티 아닙니까? 그러니 종이 몸인 마법사들 정도야 쉽죠, 하하!”
“하긴 지금은 모든 면에서 드래곤을 잡을 때보다 더 강해진 상태이긴 하군요, 무빙 님.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함께 이동하시죠. 안전지대라 저희는 공격하지 못하겠지만, 힐이나 쉴드 정도는 얼마든지 드릴 수 있으니까요. 구경도 할 겸 괜찮겠습니까?”
“저희야 두 분의 도움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죠! 자, 어서 가자 드로야!”
흔쾌히 카이저와 라푼젤까지 합류시키고, 우리는 황궁 서쪽에 위치한 지혜의 마탑으로 이동했다.
카이저는 이 넓은 황궁을 훤히 꿰뚫고 있는지, 앞장선 걸음에 주저함이 없었다.
제국에는 총 3개의 마탑이 존재했다.
그중 제2 마탑인 지혜의 탑은, 이곳 오스타그 황궁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만 원로원과 마찬가지로 황제가 있는 궁전과는 다소 떨어진 외곽에 위치했는데, 여기에는 나름의 설정이 작용한 것 같았다.
어찌 됐건 우리로서는 행운이었다.
기계적으로 순회 도는 근위대 몇 명을 마주친 것 말고는, 내성 외곽이라 그런지 제국군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전쟁 시스템은 진작 구축해 놨지만, 일루전도 유저가 이렇게 황궁 한복판까지 들어와서 활개 칠 것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AI의 대응이 이렇게까지 미흡할 리 없었다.
어쨌든 마탑은 타 건물들보다 몇 배나 높게 우뚝 솟아 있어서, 비교적 짧은 시간 만에 수월히 도착할 수 있었다.
“확실히 마탑 주변에는 유저들이 많네요.”
“그러네. 뭐야, 좌판 깐 장사꾼까지도 있는데?”
“구경꾼들이 더 몰리기 전에 속전속결로 가죠! 형님들!”
한 층 한 층이 10미터는 넘을 듯한 높은 층고(層高)로 이루어진 8층 탑.
우리는 라챤이의 말을 신호 삼아, 눈앞에 있는 정문을 박차며 마탑 안으로 들어갔다.
“적국의 습격이다!”
“적국의 습격이다!”
뻥 뚫려 있는 넓은 홀과도 같은 1층의 풍경.
어떠한 방도 없는 이곳은 마법 물약과 스크롤, 연금 재료 등의 물품을 판매하는 NPC들이 각자 거리를 둔 채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어그로가 끌린 몹들 마냥 우리를 보자마자 고함을 지르며 마법을 캐스팅해 날려 댔다.
[마나 쉴드가 1,882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726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
가장 앞장서 들어왔기에 내게 쏟아진 마법들.
하나 난 MP가 풀로 차 있었기에 굳이 피하지 않고 전부 맞아주었다.
반면 우리 측에서도 곧바로 녀석들을 향해 반격하듯 날아가는 마법도 있었다.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특별 스킬, ‘이중 영창’으로 인해 동시에 날아가는 파이어 볼 세례.
이곳에 들어오기 전 미리 차징을 해둔 축볼 누님의 반격이었다.
[멀티 샷!]
이어서 궁수 라챤이의 고유 스킬마저 들어가자, 미처 내가 접근하기도 전에 전부 다 잡아버리고 말았다.
“아! 내가 얘한테 스크롤 많이 샀었는데…… 미안하당 로터스!”
“그런 거 치고는 누님께서 가장 먼저 파볼 날리시던데요……?”
“아…… 사실은 이놈이 다른 마탑보다는 살짝 좀 비싸게 파는 편이었거든. 호호!”
“…….”
둘 다 원거리 클래스라 그런지 부쩍 친해진 라챤이와 축볼 누님을 뒤로하고, 다시 앞장서서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층부터는 마법사들의 연구실이 따로 있네요. 그럼 원로원 때처럼 각자 흩어져서 후딱 깨기로 할까요?”
“아니, 지금부터 우리는 빠진다. 앞으로는 계속 네 서포트만 할 테니까, 잡는 건 너 혼자 다 잡도록 해 드로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한데 뜬금없는 축빙 형님의 말과 함께, 모두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안 한 채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맞아요 형님. 저희는 이미 업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잖아요. 형님도 여기까지 오신 김에 업적 좀 업그레이드하고 돌아가셔야 보람 있죠.”
“그래. 내가 먼저 학살자로 업그레이드해서 한 명 더 잡아봤는데, 1%도 안 오르더라. 여기는 네가 독식해서 다음 단계로 성장 좀 시켜봐. 그래야 업적이 어떻게 변하는지 미리 알고 참고 좀 하지.”
“맞아. 무엇보다 드로 네 공격력이 조금이라도 올라가는 게, 우리한테는 가장 급선무잖아?”
마치 나만 빼놓고 모두 말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보나 마나 이곳까지 이동해오면서 자기들끼리 나 몰래 귓속말로 합의한 것이 분명했다.
“에효……. 여기서 다 함께 잡자고 계속 얘기해봤자 시간 낭비일 것 같네요. 그럼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들!”
“감사는 무슨…… 덕분에 제국의 원로원과 마탑에서, 이렇게 깽판부리는 흔치 않은 경험을 하고 있는데?”
“맞아요! 저희처럼 타연을 스펙터클하게 플레이하는 유저도 없을걸요? 형님이 강해지셔야 앞으로도 더 재밌을 것 같으니까 어서 좀 잡아 봐요!”
“알겠다. 그럼 갑니다, 재빠른 몸놀림!”
이곳에도 언제 유저들이 몰려들지 모르니 더는 꾸물댈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층마다 있는 연구실의 마법사 NPC들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잡으며 탑을 등반했다.
* * *
중급 마법사들이 있던 저층은 원로원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아무런 문제 없이 수월했다.
하지만 상급 마법사가 등장하기 시작한 6층, 특히 조금 전 7층에서 상대한 백작급의 마법사 2명은 상당히 까다로운 패턴을 선보였다.
백작급의 상급 마법사답게 각종 소환물을 소환한다거나, 강력한 공격 마법들을 써댔던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NPC.
그것도 각개격파로 잡는 것이라 크게 어렵진 않았다.
길드원들과 카이저 듀오가 곁에서 끊임없이 쉴드와 버프들을 써 주었기에 더욱 수월했다.
“드디어 8층이네요! 잘하면 이놈을 끝으로 다 채울 것 같아요!”
그렇게 도달한 8층.
8층은 꼭대기 층이라 그런지 다른 층들보다 배는 높은 층고를 자랑했다.
또한 더는 상부로 통하는 계단도 없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책장만 아니었다면 마치 커다란 강당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이미 이 8층 한켠에는, 막 도착한 우리를 반기는 수십 명의 유저들이 진작부터 자리 잡고 있었다.
“왔구나! 드디어 마탑주와 산드로가 붙는다!”
“캬아! 이 쓰레기 퀘만 주던 NPC를 유저가 죽인다니! 산드로가 내 버킷 리스트를 대신 이뤄주는구나!”
“뷔잔드 죽이면 저희 법사들은 퀘스트 못 하는 거 아니에요? 산드로 님! 뷔잔드만큼은 제발 죽이지 말아 주세요!”
“에이! 이제 와서 무슨 그런 소리를 해요? 죽으면 영자가 대신 살려놓겠죠, 뭐! 괜한 소리 말고 우리는 그저 꿀잼 구경이나 합시다! 이런 걸 직관할 기회가 겜 하는 동안 흔할 것 같아요?”
소식 빠른 이런저런 유저들이 한데 뭉쳐, 곧 있을 특별이벤트의 관전 준비를 끝마쳤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저들 반대편에, 오늘의 마지막 목표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지혜의 마탑주 뷔잔드 피엘 후작>
7층의 백작급 마법사를 죽이고 달성한 업적 효과는 19%.
아마 마탑주를 죽이게 되면, 이 업적은 최대치를 달성해서 다음 업적으로 성장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친절하게도 녀석의 머리 위에는, 무려 후작이라는 작위(爵位)가 적혀 있었으니 말이다.
“어리석은 선택을 한 놈들이군. 너희에게 제국의 위대함을 몸소 가르쳐 주겠다!”
“지혜의 마탑주라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는데, 얘도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앉았네.”
익히 겪어왔듯이 적대 관계인 내가 다가가자, 놈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멘트를 뱉어냈다.
그래서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한마디 해줬더니, 뜻밖에 대꾸가 바로 튀어나왔다.
“그런 네놈은 얼마나 특별한 놈일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마!”
‘어? 뭐지? 우연인가?’
처음 겪어보는 NPC의 리얼한 반응.
잠깐이지만 마치 놈과 대화를 나눈듯한 생소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계속 당황해 있을 수도 없도록, 녀석의 공격이 곧바로 이어졌다.
“매직 미사일!”
익숙한 마법, 매직 미사일.
하지만 그 숫자만큼은 낯설기 이를 데 없었다.
10성 매직 미사일에다 이중 영창이라도 썼는지, 무려 20개 정도의 미사일이 허공을 뒤덮은 것이다.
[쉴드!], [쉴드!]
[쉴드!]
곁에 있던 길드원들이 쉴드를 걸어줘서 미사일들이 닿기 전에 터뜨려 주었지만, 그래도 옆으로 점프하듯 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 곧바로 파이어 블래스터가 날아와 터졌기 때문이다.
‘이놈이 매너 없게 연계기를 써? 이번엔 내 차례다 이 자식아!’
피하자마자 자버프부터 건 다음, 곧바로 그림자 밟기로 놈의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바로 녀석의 후방을 향해 공격을 날렸으나, 뜬금없게도 헛방이 나고 말았다.
어느새 상태 이상 빙결에 빠져버린 탓이었다.
[마나 쉴드가 2,322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2,322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2,322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
[3초간 빙결 상태 이상에 빠집니다.]
‘어라? 아이스 포그 데미지가 이렇게나 쎄다고?’
뷔잔드는 파이어 블래스터를 날리자마자, 마치 내가 접근할 걸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곧바로 자신이 있던 위치에 아이스 포그를 시전했다.
덕분에 난 아이스 포그 속에 스스로 뛰어든 셈이 돼버렸고, 도트 데미지와 함께 빙결 상태에 빠진 것이었다.
물상 면역인 마나 쉴드로는 모든 데미지를 흡수할 수 있지만, 마법 상태 이상은 저항하지 못한다는 약점이 제대로 발동된 탓이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역대급 반응의 보스 몹 못지않았으나, 녀석은 도무지 쉴 줄을 몰랐다.
펑! 펑! 펑!
빙결 상태에 빠진 내게, 연이어 파이어 볼을 고속 캐스팅해서 공격했던 것이다.
‘뭔가 좀 이상해. 아무리 마탑주라고 해도 다른 NPC 마법사들과 비교도 안 되게 강하잖아!’
아니, 강하다는 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이건 마치 노련한 유저와 PvP를 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이 가진 스킬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