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뉴 하우스 (2)
“태성 놈들이 투 메르타스를 먹는 꼴은 죽어도 못 보지!”
강해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일.
그건 내 적이 강해지는 걸 막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아직 타이탄으로 드래곤 레이드라는 걸 떠올리지 못한 사이, 난 재빠르게 도박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이란 무서운 법.
불가능할 거라고 지레 포기했던 일이 가능하다고 밝혀졌으니, 이제부턴 너도나도 달려들 게 명약관화였다.
하물며 레이드 성공 비법을 추적한 여러 유저들에 의해, 우리가 지웰 성의 NPC 병사들을 활용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러니 이제는 나로서도, 곧 리스폰될 드래곤을 누가 가져가게 될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뭐 어떻게든 점령만 하게 되면, 다음부터는 수가 생길 것도 같고…….’
향후 계획들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정리하다 보니 거래소에 금방 도착했다.
원하는 수준의 장비는 도통 올라오지 않다 보니, 오랜만에 찾은 거래소였다.
[검색하려는 아이템의 이름을 입력해 주세요.]
[빛나는 마력석]
[검색 결과, 현재 323건의 매물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빛나는 마력석(3): 개당 2,820골드]
……………………
[빛나는 마력석(2): 개당 3,001골드]
“뭐야? 벌써 또 이렇게나 비싸졌어?”
내가 신검으로 돈을 벌자마자 가장 먼저 진행했던 장기 프로젝트.
장장 4달에 걸쳤던 ‘빛마석’ 사재기가, 어느새 대박이 되어 있었다.
(나: 래빗님, 도대체 언제부터 빛마석 시세가 확 떠버렸어요?)
(핑크래빗: 와, 드로님~ 설마 이제야 거래소를 확인해 보신 거세요? 엄청 바쁘긴 바쁘신가 보다~ 그걸 모르고 계셨다뇨!)
(나: 예상은 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고 나니까 정말 놀랍네요)
(핑크래빗: 드로님께 들은 게 있어서, 제가 각별히 그 품목 시세만큼은 신경 좀 써왔죠~ 근데 이미 한 달 전부터 기미가 보였잖아요? 말씀드릴까 싶었는데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해서....)
(나: 좀 오른 것 같았지만 별로 신경 안 쓰고 구입해 왔는데, 그마저도 요 며칠은 깜빡했네요. 아무튼 간에 분명 태성 놈들이겠죠? 피닉스 측도 참여한 것 같고요?)
(핑크래빗: 그럴 거예요. 딱 타이탄이 공개될 때쯤부터 시세가 오르기 시작하다 요 며칠 갑자기 폭등한 거니까요.)
타이탄의 소환 재료가 빛마석이라는 사실.
태성과 피닉스도 이 정보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싶겠지만, 얼마 못 갈 거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함께 눈치를 보고 있다가 근래 들어 매입을 늘린 모양이었다.
유저들의 레벨이 꾸준히 높아지고 사냥터의 상향 평준화가 이뤄질수록 빛마석의 공급도 늘어날 건 당연지사.
하지만 이 소모품이 타이탄 소환에만 사용되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니 나중 가서는 최악의 경우, 빛마석이 모자라서 보유 중인 타이탄도 제대로 활용 못 하는 수준에 이를 수도 있었다.
‘앞으로 빛마석이 잘 나오는 사냥터라도 나오면, 대규모 필드 쟁탈전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구나…….’
어쨌든 그건 차후에나 걱정할 일.
아니, 나로선 얼마가 지나든 간에 걱정할 필요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다.
[빛나는 마력석(6,231)]
현재 창고에 보관 중인 빛마석의 총 개수!
그동안 최대한 시세가 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매입했는데도, 어마어마한 수량을 구매할 수 있었다.
빛마석의 시세가 생각보다 저렴한 것 같자 유저들이 묵히는 것보단 줍는 족족 판매를 선택한 모양.
덕분에 몇 달간 쏟아진 매물의 거의 대부분을, 내가 다 사 모은 느낌이었다.
‘총 500만 골드도 안 쓴 것 같은데……. 아무튼 이건 우리 길드원들이 함께 써도, 접을 때까지도 다 못 쓴다!’
매입 초창기 300골드 안팎으로 건진 물량들이 많아 투자한 돈이 많진 않았다.
평균 매입가로 치면 개당 800골드가량.
현 시세로 계산하면, 이미 2배 이상의 수익이 보장된 셈이었다.
(나: 분명히 앞으로 더 오를 겁니다. 이제부턴 시세 조작한답시고 갖고 계신 빛마석을 싸게 올리지 마세요. 오히려 매물을 뺏길 뿐이에요. 그러고 보니 래빗님께서도 충분히 매물은 확보해두셨죠?)
(핑크래빗: 네. 드로님 덕분에 영끌해서 300개 정도 사뒀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드로님! 이건 제 든든한 장사 밑천이 돼줄 거에요!)
(나: 도와주신 게 훨씬 많은데 그 정도야 별거 아니죠~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고요^^)
부모님 집을 급매로 사느라 시세보다 비싼 값도 각오했다.
하지만 의외로 적당한 가격으로 수월하게 살 수 있었다.
신축 아파트라 인기가 없진 않았을 텐데, 운이 좋았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중, 공인중개사 아저씨의 지나가는 한 마디에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최대한 비싼 값에만 팔아먹으려고 들면 거래가 안 이뤄지는 거여. 살 사람도 먹을 게 있어야 매수세가 붙는 거지! 팔려는 사람이 이득을 전부 다 먹으려고만 들면, 거래가 이루어지겠어?
생각해 보니 거래가 이뤄지는 모든 곳에서 통용될 이치였다.
사는 사람조차 이게 최고점이란 생각이 들 정도면, 거래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분명 오를 게 더 남아 있다고 판단했으니 구매를 하게 되는 것.
줄곧 파는 사람의 입장이라 생각지 못했던 건데, 부동산 아저씨의 말씀이 백번 옳았다.
핑크래빗과의 관계 또한 마찬가지.
서로 주고받는 게 있는 비즈니스적인 관계라 할지라도, 그녀에게 계속해서 인센티브를 제공해 줄 필요성이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도 내게서 얻을 게 있다고 느끼게 해주어야만, 우리가 계속 도움이 되는 관계를 유지하며 발전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
‘기존의 길드원들과 달리 새로 들어오는 길드원들에게도 같은 마인드로 대해야 한다는 걸…… 항상 명심하고 있자.’
한마음 한뜻으로 복수를 위해 뭉친 기존 멤버와, 각기 다른 이유로 가입한 신규 멤버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길드 마스터로서 앞으로 어떻게 길드를 꾸려나가야 할지, 계속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핑크래빗: 그나저나 갖고 계신 물량은 조금씩 정리하실 생각이세요?)
(나: 아니요. 지금 팔기엔 아깝죠. 물론 언제 업데이트로 매물이 쏟아질지 모르니까, 래빗님은 불안하시면 절반 정도는 정리하시든가 하세요.)
(핑크래빗: 어차피 떨어져도 본전 이상인데, 드로님만 믿고 버텨볼게요^^)
(나: 하하! 전 미리 경고했습니다~ 근데, 혹시 래빗님께서 알고 계신 장사꾼들이 좀 계신가요? 이른바 ‘큰손’으로 불리는 사람도요?)
(핑크래빗: 저야 그런 큰손이 되고 싶은 하꼬에 불과해서.... 혹시 왜 그러세요?)
(나: 아니에요~ 조만간 그들을 만나볼까 싶은 일이 있어서요. 아무튼 감사했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이만하면 오늘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 볼일은 다 끝마쳤다.
‘확연히 앞서 있던 카이저 형님의 레벨이 정체된 지도 벌써 일주일 째…….’
그사이 다리우스가 어느덧 같은 레벨까지 빠르게 쫓아온 상황.
녀석의 통합 랭킹 1위 재탈환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나도 랭커가 됐기에 레벨차이로 인한 보정은 더는 문제 되지 않는다.
허나 녀석이 스킬 포인트를 하나씩 추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신경이 좀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일정 레벨에 도달할 때마다 해금(解禁)되는 스킬들이 있으니까…….’
당당검이 쓴 ‘난도질’ 스킬 같은 경우도, 370레벨에 익힐 수 있는 도둑 직업의 고유 스킬이었다.
이외에도 공통 스킬이나 심화 스킬까지 고려한다면, 녀석이 어떤 스킬을 익히며 변하게 될지는 미지수.
분명 호되게 당한 게 있으니, 나를 염두에 둔 테크트리로 맞춰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타임 어택으로 얻은 S급 업적이 있는 한, 아무리 녀석이 앞서가고 있다 해도 내게 따라잡히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바쁜 마음으로 훼라리에 올라탄 순간, 줄곧 연락을 기다려온 인물로부터 귓속말이 들어왔다.
(카이저: 산드로, 잠시 대화 좀 나눌 수 있을까?)
(나: 그럼요 형님! 그동안 귓속말을 꺼 두셔서 얼마나 답답했는데요!)
(카이저: 좋아. 지금 당장 오스타그 북부 광장, 아! 넌 이곳으로 오지 못하는 상태지? 그럼 지웰 성에서 보자.)
(나: 알겠습니다 형님!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날개를 펼친 훼라리를 도로 집어넣고는, 곧바로 공간이동술사에게 몸을 맡겼다.
* * *
“그렇군.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 다리우스와 운영자가…….”
“놈이 순간적으로 엄청 당황했던 걸 보면…… 아무래도 확실합니다.”
“물론이다. 녀석의 비상식적인 행운들을 종합해 보면 놈의 실언이 거짓일 리 없지. 문제는 이걸 어떻게 공론화시켜 해결하느냐가 되겠군.”
“그나저나 저만큼이나 형님께서도…… 제게 해주실 말씀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데요?”
지웰성 여관방.
간만에 다시 만난 카이저 형님의 모습은 크게 변한 게 없어 보였다.
차고 있던 장비들이 그대로였기 때문.
허나 갑옷이 통째로 바뀐 것보다 더한 변화가 하나 눈에 띄었다.
<제국 8군단 사령관>
<카이저>
카이저 형님의 아이디.
그 위에 NPC들에게나 붙는 칭호가 새롭게 붙어 있었다.
“하하! 내 머리 위에 생긴 것 말이지? 그래, 이것 때문에 보자고 한 게 맞다. 황제가 내준 퀘스트. 그걸 최초로 클리어한 결과, 통 크게도 바로 ‘백작’위와 군단장 직책을 주더구나.”
한 나라의 국왕이 되어도 이렇게 따로 칭호가 붙는 건 없었다.
유저지만 뭔가 유저 같지 않아 보이는 이질감.
간만에 만난 카이저 형님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데 성공해 결국 초유의 성과를 달성한 뒤였다.
“그것 때문에 한동안 귓속말도 꺼 두셨던 거세요?”
“그래. 단 한 순간도 방해받지 않고 몰두하고 싶었다. 그럴 만큼 어려운 퀘스트였기도 하고. 몇십 번을 다시 도전한다고 해도 또 성공할 것 같지가 않구나. 정말 운이 좋았다.”
무려 ‘드래곤 토벌’이 선행이었던 연계 퀘스트.
제국 원로원장의 의뢰에 이어 황제까지 이어지던, 난이도 ‘SS급’이 분명할 그 퀘스트를 깼다니…….
당장 8군단장이라는 직책뿐만 아니라 어떤 보상을 받게 됐을지 궁금했다.
“전체 알림창에 뜨지 않아서 정말 모르고 있었네요. 그래도 엄청 튀게 변하셨으니, 소문은 금방 나겠어요.”
“번거롭고 귀찮지 않아 나로선 좋았다. 여튼, 자랑하려고 너를 만나자고 한 건 아니다.”
“하하! 그렇죠. 워낙 바쁘신 형님이시니 그럴 리 없으시죠. 어떤 일 때문에 그러세요? 혹시 뭐 부탁하실 거라도 있으세요?”
“산드로, 이번에 제국의 군단장이 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넌 나를 따라 제국군에 들어올 생각이 없나?”
“네? 제가 제국군을요?”
여관방 쇼파에 편히 앉아 있다가 자세를 고쳐 앉고 말았다.
뜬금없는 제의를 꺼낸 카이저의 표정이 심상찮았기 때문.
또한 갑자기 실없는 농담이나 할 사람은 아니었다.
“네가 제국의 공적으로 수배 중이란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게임인 이상 그걸 말소시킬 방법도 존재하겠지. 그 후에 내가 이끌어 준다면, 너도 충분히 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아 제국의 귀족이 될 수 있다. 노력한다면 나처럼 5만 군병을 이끄는 군단의 사령관 자리에 오를 수도 있겠지.”
“5, 5만이요? 와! 엄청나시네요, 형님!”
“내가 괜히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다. 이건 기존의 유저들 간의 세력 싸움을 흔들 수 있는 새로운 힘이 등장한 것. 이른바 타연에 등장한 ‘제3의 세력’이라고 칭할 수 있겠지.”
“제3의 세력이요?”
“이번에 리버스국을 선공한 제국군을 겪어 보니 어떠했지?”
“사령관까지 잡아버린 게 저라서 뭐라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사실 타이탄이 12대나 나온 걸 보고 깜짝 놀라기는 했습니다. 솔직히 피닉스 길드 혼자 막으라고 했으면 절대 못 막을 것 같긴 해요.”
“제국에는 총 8개 군단이 존재한다. 그중 7군단은 우리 8군단 다음으로 약한 편이지. 한데도 그 정도 위용을 자랑할 만큼, 현존하는 제국의 힘은 모든 타연 유저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막강하다.”
여덟 군단과 다섯 기사단.
제국을 지키는 이 검과 방패들은, 타연을 어느 정도 한 유저라면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형님께서 이렇게까지 제안하시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제국군의 소속이 되어 고위급에 올라가게 되면, 유저에게 새로운 시스템이 열리게 된다. 이른바 ‘통솔’ 시스템. 내가 직접 확인하게 된 미공개 콘텐츠의 이름이다.”
통솔 시스템?
카이저 형님의 뉘앙스 그대로 해석하자면 유저가 NPC들을 직접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인가?
이런 MMORPG 게임에서 갑자기 혼자 콘솔 게임을 하듯이?
“사, 사실이라면 정말 엄청난 시스템이 그동안 숨겨져 있던 거네요. 하긴 타임 어택부터가 제국 기사단 입단 시험이었으니, 고위급 제국군으로 성장하는 루트가 분명 존재한다는 유저들이 있긴 했지만요……. 형님은 그걸 훌쩍 뛰어넘어버린 거군요!”
“지금 가장 앞선 유저라고 해봐야 고작 부기사단장에 이르렀다지? 내가 클리어한 ‘제국의 구원자’ 퀘스트는 그 과정을 한순간에 추월할 만큼,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했다. 지금 이 시점에 깬 게 기적에 가까울 만큼……. 여튼, 너에게 내가 선택한 이 루트를 추천하는 건 다름이 아니다. 너의 복수와도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지.”
“저의 복수요?”
“태성 길드와 다리우스를 향한 복수심은 여전하겠지? 너 혼자……. 아니, 너희 버닝스타 길드가 아무리 뛰어나고 성장한다 해도 놈들을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울 테다. 알다시피 너희가 성장하는 동안 놈들 또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제국군을 이끄는 입장이 되어 티에스국과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생각보다 손쉽게 티에스국을 무너뜨려 태성을 몰락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나하나 내 손으로 직접 죽이며, 그들이 나만 보면 진저리칠 정도로 괴롭혀 주려 했다.
꿈에서라도 내 아이디를 보게 되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하지만 카이저 형님은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었다.
굳이 내가 그런 수고를 할 필요 없이, 어쩌면 놈들과의 전쟁을 손쉽게 종결지을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