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상인 연합 (1)
“10분이면 충분하다고 해서 허세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구나?”
“허세라뇨? 오히려 2분이나 단축해 드렸는걸요.”
“하하! 어쨌든 덕분에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겠다. 역시 지옥불 님이 괜히 널 신뢰하는 게 아니었구나.”
레디치 성 주성의 옥상.
올림푸스의 메인 성인 이곳은, 좀 전까지 있었던 아베르 성과는 180도 다른 상황이었다.
조금 떨어져 있는 내성문에서는 폭발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고,
주성에서는 후유증에 걸려 느릿한 부활자들이 끊임없이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확실히 알짜배기 성들의 공성은 더욱 치열해진 모양이야!’
훼라리 덕에 이곳까지 다이렉트로 올 수 있어 망정이었지, 까딱했으면 이번 공성전이 진행되는 동안 약속했던 타이탄을 건네주지도 못할 뻔했다.
그만큼이나 이 성의 내성문을 뺏고 지키려는 공방전은 악전고투였다.
[‘제독’ 님이 당신에게 거래를 요청합니다.]
[YES]
그는 말한 대로 길드원들을 빌려주었고, 한 치의 수작이나 욕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약속했던 대가를 그에게 줄 차례였다.
<타이탄의 정수>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푸른색의 원형 보석.
그 안에서 무언가가 신비스럽게 휘몰아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이 특별한 아이템이라는 것을 스스로 뽐내는 것 같았다.
[거래가 완료되었습니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 산드로.”
“저야말로 고레벨의 좋은 딜러들로만 편성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번 기회에 천하의 버닝스타에게 잘 보였어야지. 괜히 밉보였다가 필드에도 못 나갈 순 없잖아?”
“하하! 바쁘신 줄 알았는데 농담할 시간도 있으시네요?”
“바쁘긴 하지만 여유가 생겼지. 네가 준 이 타이탄의 정수 때문에.”
내게서 고개를 돌려 내성문 쪽을 바라보는 제독.
한결 안심이 된 듯한 표정을 보고는, 그에게도 이번 협상이 어쩌면 나름의 도박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닉스는 사이도 원만하고 6성을 지키내기 버거운 상태라 그럴 리 없지만…… 만약 태성이 타이탄을 필두로 이곳에 쳐들어온다면?
아무리 많은 인원이 이 성을 지키고 있더라도 내성문을 지키긴 어려웠을 것이다.
녀석들도 타이탄이라는 몇 장 안 되는 아까운 카드를, 승산 없는 곳에 낭비할 생각은 없을 테니까.
또한 태성의 번스타인 성을 빼앗았던 게 올림푸스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었다.
태성이 이번 공성전에서 다른 길드의 성을 욕심낸다면, 역시나 최우선 목표는 복수의 대상인 올림푸스가 될 확률이 높았다.
길드의 메인 성을 무사히 지켜내고 건국을 선포하기 위해선, 그에게 타이탄이란 방어 수단이 꼭 필요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실력 있는 라이더가 탄다면 혼자서 두 대, 잘하면 세 대까지도 커버할 수 있는 게 타이탄이니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타이탄의 등장 이후 공성전의 판도가 완전히 재편됐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타이탄이 소수인 지금도 이럴진대, 수백 대쯤 풀렸을 때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역시 한층 더 마음을 다잡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어물쩍거리다가는 다리우스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지난 피넬리 성 암습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다.
‘아베르 성을 괜히 무리해서 먹은 건 아니니까…… 이제 우리 성이 됐으니, 시공의 틈새를 제대로 조사해봐야겠어!’
마계의 침공으로 푸르고 비옥했던 땅이 데스라 사막으로 변하던 시네마틱 영상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아베르 성이 있는 노스랜드도 비슷한 케이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시공의 틈새가 아베르 성 인근에 있을 거란 내 추측은, 단지 악마 군단장의 단검을 통해서만 나온 건 아니었다.
“흠? 역시나 여기에 온 건가?”
“네? 아…… 타이탄이 나타났군요!”
“그래. 이만 가봐야겠다. 다행히 정수를 건네받은 타이밍이 딱 맞았군! 고마웠다, 드로야!”
“무슨 말씀을요. 수성에 꼭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짧은 인사말과 함께 그대로 옥상에서 뛰어내린 제독.
그리곤 차징을 써서 타이탄이 소환된 내성문을 향해 재빠르게 뛰어갔다.
그가 없는 주성에 혼자 남아있기는 그래, 나 또한 훼라리에 올라타 내성문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거대한 성벽과 내성문을 경계로, 수천 명의 유저들이 거친 힘 싸움을 벌이고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공성전이라 해도 1시간 내내 이렇게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진 않는다.
갑자기 이런 총력전이 벌어진 이유.
그건 내성문 바로 앞에 갑자기 나타난 2대의 타이탄 때문이었다.
<티에스 나이츠>
비록 힐링 스킬은 받을 수 없지만, 그걸 만회라도 해주겠다는 듯 타이탄 주변에 쉴드가 미친 듯이 생성됐다.
퍼퍼퍼펑!
수십, 수백 개의 쉴드가 원거리 공격과 부딪혀 터져나가는 덕분에, 2대의 타이탄은 마치 화염에 휩싸인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성문을 공격했다.
‘그래 봤자 솔저급이라 1분도 못 버텨. 하지만 1대면 몰라도 2대나 왔으니까, 내성문을 뚫은 시간 정도는 충분히 벌 수 있겠지.’
확실히 정확한 계산이었다.
태성이 현시점에 타이탄을 몇 대나 보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레디치 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투자를 한 셈.
하지만 미처 계산에 포함해 두지 않은 변수가 존재했다는 게, 놈들의 실수였다.
콰쾅-!
내성문을 두들기는 두 검사형 타이탄 사이로, 비슷하게 생긴 창병 형 타이탄이 나타났다.
녀석의 이름 또한 ‘티에스 나이츠’.
태성이 힘들게 만들었던 타이탄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의 적으로 나타나 가로막았다.
“와아아!”
“우리에게도 타이탄이 있다고!”
비록 솔저급 타이탄.
그것도 방금 건네받아 첫 개시를 시작한 놈이었지만, 제독의 컨트롤은 흠잡을 데 없었다.
창대로 좌우에서 공격해오는 타이탄의 검을 튕겨내는 것은 물론,
틈틈이 섬광 같은 공격을 찔러넣어 피해를 가중시켰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축볼 누님이 쓰실 때랑 완전 딴판이구나! 역시 랭커들이 괜히 랭커가 된 건 아니라니까!’
고작 타이탄 한 대에 가로막혀 답답해하던 태성의 타이탄들은, 생각을 바꿨는지 반격을 포기하고 성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허나 제독의 기나긴 창은, 놈들의 그런 시도를 일절 허용하지 않았다.
챙! 챙!
격전의 한복판에서 공격이 가로막히길 수차례.
불과 몇십 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만에, 결국 두 타이탄은 한 것도 없이 체력을 전부 소진해 역소환당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제독의 타이탄은, 곧바로 내성문을 잠시 열고는 안으로 피신했다.
(나: 대단하시네요! 분명 처음 타시는 걸 텐데도 혼자서 2대나 상대하시다니!)
(제독: 뭐야, 위에서 보고 있었어? 사실 막기만 하면 되는 거라 크게 어렵진 않았다.)
쉬운 듯 말하는 제독이었지만,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신체 능력보다는 수 싸움에 더 가까운 유저들 간의 전투와는 달리, 타이탄 간의 전투는 격투기에 가까웠다.
현실에서 검도나 무기술을 익힌 사람일수록 메리트가 있는 전투.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제독은 혼자서 둘을 유유히 상대하고는 성안으로 무사히 후퇴까지 했다.
앞으로 각 길드에서 타이탄 라이더만을 염두에 둔, 새로운 인재 영입 바람이 불게 될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부분이었다.
(나: 남은 시간 동안 다시 타이탄을 투입하기에도, 내성문을 뚫고 진격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네요. 별일 없으면 오늘도 무사히 수성에 성공하시겠어요.)
(제독: 그래. 방금 타이탄이 없었다면 꽤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나: 덕분에 멋진 전투를 구경할 수 있었네요. 다만 한 가지 좀 말씀드리자면, 타이탄 이름을 좀 바꾸는 기능이 꼭 필요할 것 같아요ㅎㅎㅎ)
(제독: 당장 방법은 없지만, 훗날 타이탄 제작 연구소를 만들게 된다면 뭔가 수라도 생기겠지.)
역시 내가 눈치채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 서슴없이 건국을 염두에 둔 대답이 돌아왔다.
여하튼 이곳에서 볼일은 모두 끝났기에, 귀환 주문서를 사용해 아베르 성으로 돌아갔다.
* * *
“컴백! 다녀왔습니다!”
“오! 우리 길마님! 금방 왔네?”
“역시 길드 전용 거점이 있으니까 편하네요.”
아직 공성전이 끝나지 않은 시간.
전쟁터나 다름없는 다른 성들과 달리, 아베르 성 중앙 홀은 조용하고 쾌적하기만 했다.
분명 번스타인이나 듀메인, 심지어 혼자 먹었던 칼젠 성보다는 규모가 작아 아담했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거대한 샤벨타이거의 가죽 카펫과 한쪽에 있는 벽난로에서 타오르는 불길은, 이 성만의 독특하면서도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확실히 작긴 작은 성이네요. 그동안 왜 다른 길드들이 점령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아요.”
“고레벨 지역에 있는 성은 대형 길드밖에 시도할 수 없는데, 아무래도 그들은 지켜야 할 우선순위가 있으니까 병력을 분산시키기 어려웠겠지.”
축빙 형님의 말씀대로 어지간한 길드들은 고레벨 NPC들의 집중공격을 버티기는커녕 내성문에 다가가지도 못했다.
괜히 미점령이었던 지난 지웰 성 공성전에, 다리우스까지 직접 행차했던 게 아닌 것이다.
“어찌 됐든 간에 계획했던 대로 우리가 무사히 성을 먹는 데 성공했네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우리 길마가 하자고 했던 것 중에 못해냈던 게 있었나?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
“하하! 다 형님 누님들께서 잘해주신 덕분이죠. 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잘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 뭐야, 성을 먹어본 건 처음인데…… 이렇게 쉬운 줄 알았으면 진작 좀 해볼걸 그랬잖아!”
내가 대단한 것처럼 추켜세우고 있었지만, 나야말로 그들이 고마웠다.
이들 없이 여전히 혼자서 게임 하고 있었다면, 오늘 같은 일은 생각조차 못 떠올렸을 터.
어쩌면 내가 했던 득템 중에 가장 큰 것은, ‘신검’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어? 우리 길마 벌써 왔네?”
“무살 형님, 벌써 성안을 둘러보셨어요?”
“어. 성길이 된 건 처음이라, 뭐가 있는지 좀 살펴봤지. 이곳의 호위기사는 레벨이 높아 보이던데? 최소 380은 돼 보여!”
“오! 지웰 성 애들보다 높으면 잘됐네요! 조만간 써먹어야 했는데!”
홀과 이어진 복도에서 무살 형님이 걸어오며 말했다.
그러자 축빙 형님도 이미 중앙 홀의 여러 NPC들과 대화해봤는지, 새로운 정보를 알려주었다.
“드로야, 그것뿐만이 아냐. 보니까 골드만 투자하면 NPC들이 특수 무장을 찰 수도 있는 것 같더라.”
“예? 특수 무장이요?”
“보니깐 노스 랜드답게 냉기 화살 업그레이드가 있더라고. 궁수병들이 냉기 화살을 쏜다니…… 생각만 해도 수성에 최적화된 것 같지 않니?”
“오! 그건 반드시 업그레이드해야겠네요! 돈이 얼마가 들든지 간에요!”
확실히 길드원들이 있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신경 써야 했던 과거와는 달랐다.
나만큼이나……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훌륭한 실력자들이라 그런지 알아서 척척이었다.
“근데 저도 혹시나 해서 살펴봤는데, 역시나 아베르 성은 외성마을을 제외하곤 단 하나밖에 지역 마을이 없더라고요. 이래서야 성을 먹은 메리트가 있겠어요? 가뜩이나 유저들도 오지 않는 지역이라 세금이 걷힐 곳도 얼마 없는데요.”
“라챤아. 설마 형이 그걸 몰라서 여길 먹자고 했겠니? 세금? 형은 처음부터 세금 걷어서 돈 벌 생각은 하나도 없었단다.”
또한, 그렇기에 날카로운 지적도 이어졌다.
역시나 성길 출신인 라챤이답게, 성을 먹자마자 살펴본 구석이 다른 길드원들과는 차이가 있었다.
“응? 그게 무슨 소리니, 드로야? 굳이 타이탄까지 줘가면서 어렵사리 성을 먹었는데, 조금이라도 세금으로 손해를 메꿔야 하지 않아?”
“축빙 형님. 전에 제가 일반 유저들로 성을 지킬 거라고 말씀드렸었죠? 그 방법으로 제가 생각했던 게 바로 이겁니다. 바로 세금요. 만약 저희 성만 세금을 0%로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다양한 분야의 유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지 않을까요?”
현재 모든 성의 세금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최고 세율인 2%로 통일되어 있다.
어렵게 성을 먹고 지키는 이유가 세금인 걸 감안하면 당연한 결과.
덕분에 모든 상점이나 편의 제공 NPC, 부동산, 거래소의 수수료 등은 이 세율이 적용된 금액이 정가처럼 여겨지는 상태였다.
한데 갑자기 그 모든 가격이 2%가 낮춰진 지역이 타연에 등장한다?
얼마가 될지는 가늠이 안 되지만, 분명 생산 기반 유저들과 장사꾼들이 적잖이 넘어올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0%? 그럼 완전 적자 아니야? 그리고…… 유저들이 이 성에 넘어오는 것과 성을 지키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 그들이 이곳을 지켜줄 이유는 없지 않아?”
“자발적으로 지키고 싶어지도록 만들어야죠. 세금 제로라는 이 혜택을 계속 누리고 싶다면 말이죠.”
“형님. 들어보니 좋은 생각 같긴 한데, 너무 이상적인 거 아닐까요? 그 사람들 입장에선 그냥 한 달간 꿀만 빨다 떠나면 그만일 것 같은데, 굳이 죽음을 무릅쓰며 수성을 도와줄 것 같지가 않아요. 그리고 어중이떠중이들까지 전부 수성 병력으로 받다 보면, 분명 스파이가 들어와서 훼방 놓을 것도 같고요.”
“그래. 라챤이 말대로 좀 위험한 생각인 것 같다. 내가 태성 놈들을 잘 아는데, 그런 수성 전략을 세우면 분명히 몇십 명 단위로 들어와 있을 거야.”
어느새 라챤이와 친해진 무살 형님까지 부정적인 의견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걸 예상하지 못하고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만나봐야겠죠. 제대로 되고 믿을 만한, 우리의 파트너가 될 만한 사람들을요.”
“그게 누군데요, 형님?”
“일명 큰손이라 불리는 사람들. ‘상인 연합’을 만나보러 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