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실마리 (1)
공성전이 끝난 후.
잔잔하기만 했던 이번 달 공성전 뉴스는, 최근 워낙 많은 이슈들이 쏟아졌던 공성전과 대비되어 시청률이 상당히 저조하게 끝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저녁 방송 직후 알려진 2가지 이슈 덕분인지, 올타 게시판은 밤새 잠을 잊은 타연러들로 그 열기가 식지 않았다.
-신화국 탄생 실화?
└오 라임 맞춘거임?ㅋㅋㅋ
└└ㅋㅋㅋ벌써 국가가 3개! 이러다 좀만 지나면 제국도 더 이상 무섭지 않겠다!
-이제 타연의 정세가 대부분 정리됐네! 앞으로는 태성 피닉스 올림푸스 3강 체계로 굳혀질 듯
└ㄹㅇㅋㅋ 나머지 길드들은 연합해봤자 성이 모자라서 더는 건국하기 힘듦
└└보나 마나 앞으로는 저 3개 길드 밑으로 동맹을 빙자한 핫바리가 될 수밖에 없음
└└└타연 ㅈ망했네. 라인 고착화되는 순간부터 개노잼되는 거 시간문제인데
-3강 체계가 유지될 거라고 생각하냐? 난 절대 안 된다고 본다.
└후발주자가 선발주자를 따라잡기 힘든 타연에서 무슨 수로 타이탄까지 가진 국가들을 이겨 먹을 수 있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구나? 버닝스타 보면 모르냐? 왜 못 이기는데?
└└└맞다 버닝스타가 있었지! 걔들 이번에 성도 먹었던데ㅋㅋㅋ 진짜 변수는 변수일 듯!
세 번째 국가인 신화국의 탄생.
나조차도 신화국이 타연에 미치게 될 영향이 예상되지 않을 정도니, 유저들이 흥분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이슈도 올타 게시판을 달구는데 한몫했다.
바로 상인 연합 중 하나, ‘호박마켓’의 급작스러운 본점 이전 발표.
그곳이 우리 버닝스타가 이번에 점령한 아베르 성이라는 점과, 우리와 손잡은 게 분명하다는 추측이 나름 소소하게나마 꾸준히 언급된 것이다.
-아무리 도움받았더라도 길드원이 몇 명이나 된다고 성을 먹냐? 성 먹기가 이렇게 쉬웠으면 다른 길드들은 그동안 공성전을 왜 안 한 거야?
└버닝스타에만 타이탄이 4대 있는 거 모르냐? 아! 1대는 이번에 올림푸스 준 것 같으니까 이제 3대겠구나.
└└근데 3대만 해도 어마어마한 거임. 그 큰 태성이랑 엇비슷하게 갖고 있는 거니까
-그래서 장사꾼들 데리고 성을 지킬 거라는 예상인 거지? 근데 말이 되나 이게?
└안될 건 또 뭐임? 벌써부터 아베르 성에 생산 유저들이 몰려가고 있다던데
└└ㅇㅇ? 그건 또 왜?
└└└몰랐냐? 산드로가 성 먹자마자 세금 0%로 풀었잖아!
타연 최초로 등장한 제로 세금 지역.
제작에 필요한 재료 구입이나 여러 사소한 제작 의뢰를 할 때마다 가격이 저렴하다는 건, 헤비 생산자일수록 이득을 크게 보는 일이었다.
분명 전 성길들로부터 지탄과 원망을 받을만한 행동.
다른 막강한 길드들로부터 눈치 볼 게 전혀 없는, 우리 버닝스타라서 내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까닥 잘못될 뻔했지만…… 그래도 결국엔 잘됐다는 거네?”
“응. 호박이면 신생 브랜드긴 해도 엄연히 상인 연합 중 하나인 건 맞으니깐.”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
길고 길었던 하루를 마감하며 현중이와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근데 알바마스턴가 뭔가가 몇 명이나 데리고 올까?”
“각 마을이나 필드 사냥터에 자리잡은 장사꾼까진 데려오지 못할 거야. 하지만 일단 본점이 생기고 거래소 위주로 장사하는 꾼들부터 넘어오면…… 얼추 백 명 가까이는 될걸?”
“그 사람들이 자기 지인 생산 유저들도 하나 둘씩 데리고 올 거고?”
“응. 호박이란 눈덩이가 굴러가기 시작했으니, 한 달 후에 얼마나 큰 스노우볼이 돼 있을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장사꾼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메리트에 관한 소문을 내면, 그들과 거래하는 유저들과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 넘어오는 유저들도 차츰 늘어나게 될 것.
그들 중 믿을 만한 유저들과 함께 다음 공성전에서 수성한다는 것이 내 당초 계획이었다.
물론 동맹을 맺은 상태로 수성하겠지만, 점령 길드가 10여 명 안팎의 소수 길드인 상태로 지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발상이기는 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타이탄이 3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적들의 타이탄을 막을 무기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그건 사람들이 ‘타이탄 킬러’란 새로운 별명을 붙여준, 바로 ‘나’란 존재였다.
“그래. 언제 니가, 그리고 우리가 도박 아니었던 적이 있었냐? 기왕 성을 먹었으니, 적어도 한 달간은 잘 써먹을 일이 있겠지.”
“우리가 괜히 아베르를 먹은 건 아니잖아. 형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설마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지?”
“아참! 그러고 보니 올타 본다고 아직 말 안 했구나? 축볼 누나가 하나 발견하셨다. 자그마치 마계 떡밥을!”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어차피 로그아웃했으니까 자고 일어나서 가보든가 해야지. 게임 좀 쉬엄쉬엄해라. 그러다 탈 난다.”
“아…… 그럼 바로 잘 테니깐 너도 후딱 자라? 4시간 있다 깨울 거니까!”
“뭐? 겜에 미친놈은 하나로 족해 인마! 왜 나한테까지 강요해?”
“형이 누차 말하지만…… 니 레벨에 지금 잠이 오냐? 암튼 오늘 수고 많았다!”
한번 달리기 시작한 이상, 멈추긴커녕 속도를 줄일 수도 없다.
이런 내 텐션을 따라오려면 현중이도 이제부터 죽을 둥 살 둥 노력해야 할 것이다.
* * *
[산드로: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축복받은얼굴: 하이입니다.. 졸려 죽겠네요ㅠㅠ]
[축복받은파볼: 벌써 왔어? 새벽 늦게까지 게임했다고 하던데]
[산드로: 제가 뭐 하루 이틀 이러나요ㅎㅎ]
[무적살라딘: 근데 우리 길마, 뭐 띄운 거 있어? 좋은 일 있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자자하던데?]
[산드로: 벌써 소문났어요? 진짜 형님 안테나는 성능 하난 확실하네요ㅋㅋㅋ]
호박마켓의 협조를 얻기 위해 드라코닉 장비를 독점 공급하기로 한 건 아직 현중이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엉겁결에 최상급 레전더리 템인 달켄의 드라코닉 건틀릿을 제작했다는 사실은, 그곳에서 직접 목격한 소수의 유저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게 밤새 벌써 이렇게나 알려졌다니.
타연 속 입소문이 얼마나 빠르고 널리 퍼지는지…… 하지만 그래서 호박 길드의 홍보 또한 얼마나 효과 있을는지 충분히 예측되는 바였다.
[라스트챤스: 캬! 역시 인생은 될놈될! 역시 형님이십니다!]
[산드로: 어쭈! 지금 형한테 놈이라고 한 거냐? 그런 넌 6드라코닉 무기를 띄운 놈이면서,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축복받은파볼: ㅋㅋ아무튼 잘된 건 잘된 거고, 잠깐 성으로 귀환 좀 해봐. 가볼 데가 있으니까.]
[산드로: 아하! 축굴이가 말한 그거 말씀이시죠?]
[축복받은파볼: 그새 벌써 말한 거야? 아무튼 다리우스를 찾을 실마리.... 내가 찾은 듯!ㅋㅋ]
[산드로: 역시 누님이십니다! 축굴이와 함께 바로 가보겠습니다! 슈슝!]
몸이 하나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빠진 요즘.
허나 내가 직접 해야 할 일이 늘어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접속하자마자 들려온 듣기 좋은 소식에, 기분 좋게 귀환 주문서를 사용했다.
* * *
“오! 그게 달켄의 머시기 템이여? 내가 차고 있는 거랑은 외형이 약간 다른데?”
“진작에 드라코닉 풀세트를 롱코트로 외변한 놈이 무슨 외형 타령이냐? 암튼 간지가 좀 더 나긴 하지?”
팔뚝까지 감싸고 있는 암녹색의 건틀릿.
용의 비늘로 만들어져 은은한 광택이 흐르면서 군데군데 날카롭게 마감된 것이, 누가 봐도 비싼 템을 찬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멋져도 순정 템을 그대로 착용하는 건, 나 같은 유저한텐 절대 용납 안 되지.”
“됐다. 내가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아무튼 역시나 얘였나 봐?”
“응. 혹시 몰라 다른 곳도 다 살펴봤지만, 결국 이놈이더라고.”
다른 성엔 서너 개씩도 있는 기사단.
한데 규모가 작은 아베르 성엔 오직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바로 ‘검은 폭풍 기사단’.
악마 군단장의 암살검을 획득한 테이런 파울이 초대 기사단장으로 몸담은 곳이었다.
그리고 눈앞에는 근 천년이 넘도록 이 성을 지켜온, 당대의 기사단장이 서 있었다.
“마이 로드, 산드로 님이시여. 여기엔 어쩐 일로 찾아오셨나이까!”
“요놈 봐라? 성주한테는 나한테 말하던 거랑 멘트가 다르네?”
“것보다 말투는 왜 이러냐? 기사단장들은 다들 같은 사람이 만든 건가? 어딜 가나 말하는 게 비슷하네?”
가까이 다가가자 부복하며 경례하는 롤랑.
녀석에게 현중이에게 전해 들은 키워드를 말해보았다.
“최근 ‘노스랜드’ 북부에 ‘마계’와 관련된 몬스터가 출몰했다고 들었다. 그와 관련된 것들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주겠어?”
“마이 로드, 산드로 님이시여. 안 그래도 북풍이 몰아치는 한파에 묻혀, 불길한 조짐이 큰 화로 되돌아오는 게 아닌가 걱정이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텐우드 마을에 들른 한 야만 용사로부터 불길한 소식을 전해 받은 게 있었지만, 수성에 급급한 나머지 애써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아…… 그러니깐 그게 뭐냐고?”
“얀마! 스킵하려고 재촉 좀 하지 마라. 누님이 키워드 건넸을 때보다 훨씬 자세히 설명해줘서 좋기만 하고만…….”
“으휴, 둘이 죽이 착착 맞네 맞아.”
그냥 스킵하다가 퀘스트창 뜨면 그것만 읽어보면 될 텐데.
하긴 현중이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개발사들도 신나서 게임을 만드는 거겠지.
“그가 전해온 것은 북부의 끝에 위치한 길고 깊은 크레바스(crevasse), ‘돌아올 수 없는 골짜기’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최근 그 근방에서 마계의 괴수, ‘고르곤’의 모습을 언뜻 본 것 같다고 전했습니다.”
[검은 폭풍 기사단장 롤랑의 경고: 토벌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A
* 노스랜드의 끝자락에 출몰한다는 마계의 괴수 ‘고르곤’을 토벌하라.
-‘고르곤의 뿔(!)’을 롤랑에게 전달
* 퀘스트 클리어 보상: 롤랑의 상자
곧바로 자동으로 퀘스트를 습득 받았다.
롤랑의 말이 사실이라면 크레바스가 있다는 그곳은 마계와 연관된 곳이 확실해 보였다.
예전 PC 버전인 타이탄 에이지에도, 고르곤이라는 보스 몹이 마계에서 출몰하곤 했었으니까.
“어때? 맞는 것 같지? 바로 한번 가볼까?”
“아직은 확인만 해보는 거니까 다 부른 긴 그렇고…… 라챤이한테 호크 아이가 있으니깐 셋이 한번 가보자.”
곧바로 라챤이에게 연락하고 소모품들을 챙긴 뒤, 공간이동술사를 찾았다.
[아베르 성 북부, 텐우드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데스라 사막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노스랜드.
이 얼어붙은 땅은 데스라 사막과 마찬가지로 그 누구의 영역도 아니었다.
그저 이곳과 맞닿아 있는 도시와 마을이 몇 개 존재할 뿐이었는데, 그중 텐우드 마을은 가장 가까운 지역 중 하나였다.
“아따, 쌀쌀하네요!”
“그러게. 성엔 벽난로가 있어서 몰랐는데, 역시 조금 더 올라왔다고 썰렁하구나.”
사실 가상현실이라 추울 리는 없다.
하지만 타연에 워낙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는 필드가 많은 터라, 이곳의 날씨 적용을 처음 겪게 되면 낯설게 느껴지는 면이 있었다.
여기 텐우드 마을에 유저들이 없는 이유기도 했는데, 감도를 ‘하’로 맞춰놓으면 상주할 장사꾼이나 생산 유저들에게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였다.
“바로 가자. 얼른 타!”
항상 볼 때마다 테이밍 몬스터 스킬을 익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훼라리.
녀석을 불러 날아올랐다.
쉭- 쉭-.
고도가 높아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북풍을 뚫고 눈 덮인 설원을 가로질렀다.
마을과 가까운 곳엔 그나마 사냥 중이던 유저들이 몇몇 보였으나, 조금 더 날아가자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화이트 울프와 아이스 트롤들이 뭉텅이로 배회하고 있었는데, 이곳의 필드 보스 몹이자 나만의 램보가 되기도 했던 프로스트 울프의 모습은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여기도 프로스트 울프만 빼먹는 유저들이 있나 보다?”
“그새 레벨이 오르고 사냥하는 유저도 늘었으니까……. 나날이 레이드 경쟁도 심해지니까 여길 찾는 유저도 생긴 거겠지.”
“어? 뭐지? 형님들, 저기 사냥 중인 유저들이 있는데요?”
“응? 여기서?”
돌아올 수 없는 골짜기라 불리기도 하는 설원의 끝이 멀지 않은 곳.
마지막으로 유저를 구경한 지도 한참이 지난 이 근방에서 사냥 중인 유저라고?
호크 아이 스킬의 패시브 효과 덕분인지, 라스트챤스가 가리킨 곳을 보니 정말 몇 명이 사냥 중이었다.
혹시 몰라 고도를 낮추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그쪽을 향해 다가가 보았다.
“뭐야? 태성 놈들인데?”
“쉿! 조용해 봐. 간만에 보는 랭커 놈도 있으니까.”
죄다 선공 몹투성인 이곳.
덕분에 네다섯 마리의 화이트 울프들과 힘 싸움 중인 5명의 소수 파티는 전부 태성의 길드 마크를 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전에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힐러 랭커, ‘힐보따리’의 모습도 보였다.
‘아쉽지만 머더러는 없네. 그래도 태성 놈들을 그냥 지나칠 순 없지.’
태성과 무기한 전쟁을 선포한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덕분에 우리 버닝스타 길드원들은 태성 길드 1군에 속한 유저라면, 설사 머더러가 아니더라도 선공에 아무런 부담이 없었다.
“축굴아, 라챤아. 조사 전에 애피타이저부터 먹고 시작하자. 바로 내려간다?”
“넵, 형님! 바로 풀 차징 준비하겠습니다!”
“옥케이!”
혼자서도 백 명씩 쓸고 다녔는데 고작 다섯을 상대로 머뭇거릴 이윤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는 세 명.
그것도 각각이 랭커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타연 최고 수준의 전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