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시공의 틈새 (1)
[귀환석에 새겨진 좌표의 이상으로, 지정된 곳이 아닌 지역으로 이동됩니다.]
[금지, ‘시공의 틈새’에 도착했습니다.]
‘공기부터가 다르구나…….’
포탈을 통과하자마자 은은한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곳에 들어온 유저들에게 잠깐 맛만 보여주는 거였다는 듯, 매캐한 냄새는 금세 사라져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일단…… 귀환석으로 연 포탈이 놈과 같은 곳에서 열리는 건 아닌 모양이야.”
들어가자마자 공격당하진 않을까?
한껏 긴장한 채 들어왔는데 주변은 적막하기만 했다.
숲속의 작은 공터.
내가 도착한 공간이었는데, 나뭇잎들이 마치 단풍이라도 든 듯 울긋불긋 물들어있어 상당히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땅은 특이하게 보랏빛이 감돌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물에 물감을 푼 것처럼 초록의 오로라가 창공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만 제외하고 보면, 여느 타연의 다른 필드와 큰 차이점은 없어 보였다.
[라스트챤스: 형님, 어떻게 됐습니까? 다리우스는 안 보여요?]
[산드로: 잠깐 주변 좀 살펴보느라 깜빡했네. 다들 넘어오세요. 포탈 앞은 안전합니다.]
다리우스는커녕 몬스터도 한 마리 안 보였기에, 사인을 보내자 길드원들이 한꺼번에 훅하고 넘어왔다.
“이게 뭔 냄새지?”
“다행히 인던 형식은 아니네?”
“엄청 기대하고 왔는데 이게 뭐야! 마계와 비슷한 곳이랬으면서 웬 숲?”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한 눈치인 누님과 라챤이 등등.
하지만 우리가 신규 맵을 탐사하자고 온 건 아니었으니, 재빨리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조금만 소리 좀 낮춰 주세요. 근처엔 없더라도 혹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축복받은무빙: 그래. 놀러 온 거 아니니까 다들 긴장하고 집중하자. 오늘 같은 기회는 다신 또 없을지도 몰라.]
[축복받은얼굴: 생각보단 맵이 크네요? 얻기 힘든 귀환석으로만 이동 가능해서, 소수만 사냥할 수 있는 작은 사냥터일 줄 알았는데요.]
[산드로: 축굴이 말대로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사냥 중인 다리우스와 마주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꽤 큰 공간인 것 같아요.]
[라스트챤스: 근데 다들 그거 아세요? 여기선 귀환 주문서가 안 먹혀요! 혹시 몰라 넘어오자마자 써 봤는데 사용할 수 없는 구역이라고 뜨네요! 다들 체크해 두세요!]
응?
귀환 주문서가 사용 불가능한 필드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는데?
진짜인가 싶어 바로 사용해보자, 라챤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시공간이 불안정한 특수 지역에 있어 귀환 주문서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귀환 주문서조차 안 된다니! 대박이네요! 이런 필드 조건이라면, 놈과 마주치기만 하면 무조건 사생결단이 나겠어요!”
“어떡해…… 나 지금 완전 소름 돋았어. 오늘 다리우스가 죽는 날이 분명하다는 삘이 왔거든!”
“귀환이 안 되니까 아마 포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냥하고 있을 확률은 낮을 것 같네요. 일단은 녀석은 물론, 타고 온 포탈도 함께 찾는 걸 우선으로 하죠! 크기가 제법 크고 필드에 계속 남아있는 형태니 쉽게 찾을지도 몰라요.”
“어떤 식으로 찾을까?”
생각보다 넓은 맵 크기 때문에 계획을 수정해야 했다.
녀석이 로낙쏜의 NPC들이 부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금세 우리가 이곳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당장 사냥을 끝내고 귀환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일단 팀을 세 명씩 둘로 나눌게요. 은신 상태에서도 빠른 당당검 님과 제가 각 팀을 이끌면서 앞장서겠습니다. 각각 정반대로 이동하다가, 흔적을 발견하면 곧바로 그 팀이 있는 곳으로 모이기로 해요!”
“최대한 조심하겠지만…… 만약 녀석 쪽에서 먼저 발견하거나 우리를 눈치채게 되면 어쩌지?”
“어차피 귀환이 안 되는 곳이니 시간만 끌 수 있으면 됩니다. 녀석이 타이탄을 소환하더라도 버틸 수 있도록, 축굴이와 라챤이는 당당검 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저를 따라오세요. 자, 그럼 꾸물댈 것 없이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순식간에 결정 내리고 지시했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 가장 떨리는 사람은 나였다.
지금 내가 선택한 결과에 따라, 녀석을 오늘 잡느냐 못 잡느냐가 판가름 날 테니…….
‘하지만 신검을 주운 후부터, 언제는 안 그런 적이 있었냐? 뭐가 됐든 내가 내린 결정에 후회는 하지 말고 현재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숲 바깥쪽으로 방향을 정하고 이동했다.
그런 내 뒤를, 축빙 형님과 축볼 누님이 거리를 두고 조용히 뒤따랐다.
* * *
“다리우스는커녕, 몹조차 한 마리 안 보이네?”
묵묵히 뒤따르던 축볼 누님이 입을 열었다.
숲 밖으로 나온 뒤 너른 벌판을 한참 이동했지만, 정말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보통의 일반 필드는 조금만 나가도 몹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심지어는 마을 입구부터 어슬렁거리는 필드도 상당수 존재할 정도.
허나 이곳은 그런 타연의 메타와 많이 벗어난 맵인 듯싶었다.
“10레벨 다운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랭킹 1위를 금방 재탈환한 비결은, 이곳이 분명해요. 아무래도 우리가 알던 필드와는 많이 다른 곳 같은데, 그걸 적절히 활용한 게 아닌가 싶네요.”
“어? 드로야, 저거 봤어? 자세히 보니 위에 이름이 붙어있어!”
대화를 나누던 중, 뭔가 발견한 축빙 형님이 손짓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저 흔한 무채색 바위로만 여겼던 것.
그것의 상부엔, 단순한 오브젝트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몹 네임이 붙어있었다.
<심연의 파편 조각>
어림잡아도 15미터는 넘어 보이는 크기.
넓이도 그 정도 됐으니 정말 어마어마한 덩치를 갖고 있었다.
그런 놈이 웅크리고 있었으니, 다들 얼핏 커다란 바위로 착각하고 지나칠 만도 했다.
“일단 저걸 상대할 시간은 없으니까, 어그로가 끌리지 않도록 조심합…….”
띠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어그로 감지 효과음이 울렸다.
아직 놈과 거리는 무려 백 미터도 넘게 떨어져 있었는데!
“어머, 저 자식 감지 범위 뭐야?”
“이렇게 된 이상 이곳의 몹은 얼마나 강한가, 확인 좀 한번 해보고 갈까?”
“네, 형님!”
골렘보다는 슬라임에 더 가까운 외형.
하지만 놈의 표면이 불꽃처럼 일렁이고 있어, 멀리서 보면 거대한 회색 불꽃이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런 놈이 우리를 향해, 지면에서 1미터 정도 부유한 상태로 스르륵 다가왔다.
“온다!”
시공의 틈새에서의 첫 사냥!
하지만 시간 낭비가 신경 쓰일 뿐, 조금도 겁나진 않았다.
우리 길드원이 못 잡을 필드 몹이라면 타연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다는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버닝스타는 현존하는 최강의 보스 몹, ‘드래곤’도 잡은 무적의 레이드 팀이었으니!
[재빠른 몸놀림!]
챙!
이 팀의 탱커이자 메인 딜러였기에, 두 디바인 검을 뽑아 들고 녀석을 향해 앞장서서 달려들었다.
그리곤 검을 휘둘러 녀석의 회색 몸체를 가로 그었다.
[마나 쉴드가 6,020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1,226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쾅! 쾅!
어마어마한 물리 피해 데미지!
자그마치 줌바카나 고르곤 같은 필드 보스도 상회하는 공격력이었다.
허나 그에 반해 공격 속도는 거의 네다섯 배는 느릿해서, DPS는 크게 위협적이진 않았다.
무엇보다 녀석은 마법 공격도 번갈아 가며 공격해올뿐더러, 마나도 풍부한지 공격 시마다 MP가 쭉쭉 차올랐다.
[신성한 보호막!]
[쉴드!]
“방어막은 괜찮아요! 혼자서도 피 관리가 되는 수준이니 그냥 극딜 모드로 후딱 잡아버리죠!”
“아, 그래? 극딜은 또 내 전문이지!”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숙련도도 없어 많이 쓴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닌데, 주야장천 파볼만 애용하는 축볼 누님.
하지만 화염 극딜 템 세팅에 시전 속도를 줄여주는 투 메르타스의 보옥 착용.
거기에 이중 영창이라는 특별 스킬까지 익힌 누님의 파볼은, 타연 속 넘버원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콰쾅!
자잘한 파이어 애로우 사이로 파이어 볼이 빠른 주기로 계속 날아갔다.
축빙 형님 또한 공격 스킬뿐만 아니라 힐링 스킬도 데미지가 들어가는지,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치느라 정신없었다.
[그림자 밟기!]
타닷, 타닷!
정면에서 공격하던 나는, 약점 포착 버프가 끝나자마자 그밟을 써 녀석의 뒤편으로 이동해 후방 추가 데미지를 입혔다.
그러길 잠시, 결국 녀석은 금세 연기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2,328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어비스 수치는 뭐지? 심연 어쩌고저쩌고하는 게 이거랑 연관 있는 건가 봐?”
“근데 달랑 그거만 주고 아무것도 안 주네? 골드가 떨어질 것 같은 필드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이 정도 몹이면 잡템 정도는 줘야 정상인데…….”
“아마 기존 타연 필드와는 좀 다른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그래도 경험치는 꽤 짭짭하게 주네요. 역시 제게도 붉은 네임으로 떠서 그런가, 레벨은 높은 편인 것 같아요.”
딱 봐도 많은 수의 몬스터가 뜨지 않는 대신, 경험치를 많이 주는 몸빵 센 소수 몹이 뜨는 사냥터로 보였다.
‘물론 좋긴 하지만…… 몹 몰이도 안되는 이런 곳에서, 다리우스는 어떻게 그렇게나 폭렙업을 했던 거지?’
살짝 의문이 드는 순간, 라챤이로부터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라스트챤스: 형님, 뭐 특별히 발견하신 거 있으세요? 아무래도 이쪽으로 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산드로: 응? 왜?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축복받은얼굴: 마을을 발견했거든. NPC들도 다수 존재하는... 다들 어서 이리로 와보세요!]
여기 시공의 틈새에, ‘마을’이라고?
맵이 크다고는 느꼈어도, 스토리상 마을이 있을 곳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뭔가 내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곳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이쪽으로는 계속 가봤자 특별할 게 없어 보여요. 일단 저쪽 팀으로 이동해 볼까요?”
“그래. 다리우스 놈이 이곳을 진작 파악해 뒀더라면, 아마 마을 근처에 터를 잡아놨을 확률이 더 높겠지.”
고민할 시간도 모자란 시간.
결정을 내린 우린 서둘러 길을 돌려 당당검 팀이 간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우리가 떠나온 숲을 지나고 얼마 뒤, 작은 언덕을 넘은 우린 라챤이가 말한 작은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와…… 저건가 봐?”
“외관부터 특이하네요. 방어에 특화된 모습이긴 한데, 타연의 성들과는 전혀 달라 보여요.”
근래 공성전을 많이 다녀 성들의 특징을 거의 다 파악한 상태였는데, 제각각인 성들이 가진 공통점 중 하나는 전부 성벽이 있다는 것이었다.
한데 저 마을에는 성벽이 없었다.
그 대신, 중앙에 높이 솟은 기둥을 중심으로 반구형(半球形)의 푸른 보호막이 마을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근데 뭐야? 타연에 저렇게 큰 마법 보호막이 있다니?”
“저희 이미 저런 거 본 적 있지 않아요? 데스라 사막 유적지 인던을 공략할 때 나왔던, 그 시네마틱 영상에서……?”
“맞네! 사이즈가 많이 작긴 한데 딱 그 모양이네!”
평화롭고 풍요롭던 필드를 한순간에 사막화했던 마족의 ‘마계화’ 공격.
그걸 마법진을 펼쳐 막던 것이 인던에서 보았던 지하도시의 옛 모습이었다.
또한 현 타연의 시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천 년 전 ‘마도 시대’의 방어 수단 중 하나이기도 했다.
“보아하니 이곳은 스토리상 마도 시대와 연관 있는 필드인가 보네요. 일단 어서 빨리 들어가 보죠!”
서둘러 발길을 재촉해서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NPC 병사 둘이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 보는 녀석들이군! 정체를 밝혀라!”
“아…… 이런 데서 노닥거리면서 퀘할 시간은 없는데……”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NPC들이 마을 입장 퀘스트를 주려 다가온 순간, 마을 안에서 당당검을 비롯한 나머지 팀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워 워! 굳이 들어오지 마세요! 이미 저희가 마을 안에서 할 일은 거의 파악해 뒀으니까요!”
“뭐? 벌써?”
“당당 님이 마을도 발견하고 입장퀘도 금방 깨버리시더니, 벌써 중요한 정보들은 NPC들로부터 거의 다 뽑아낸 것 같아요! 와, 진짜 대단하시더라고요!”
“맞아. 미리 알고 오신 것처럼 키워드를 기가 막히게 외치시더라. 말로만 들었지, 이런 걸 옆에서 다 지켜보고 나니 진짜 신기하네.”
우리가 뒤늦게 왔다지만, 시공의 틈새에 넘어온 시간은 아직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한데 마을을 발견한 것도 모자라 벌써 이곳에 대한 전반적인 파악을 끝내놓았다니…….
과연 신규 콘텐츠 킬러에, 타고난 재능러다운 놀라운 활약이었다.
‘퀘스트마다 최초로 키워드를 발견해내서 퍼뜨린 유저들이, 아마 당당검 같은 부류의 유저들이었겠지?’
여하튼 놀라운 건 놀라운 거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기에 당당검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되셨어요? 도대체 이 마을은 뭔지? 아니, 혹시 마을 안에서 다리우스의 흔적은 찾으셨나요?”
“다리우스가 이곳에 터를 두고 사냥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어요. 근데 놈이 왜 그토록 우리가 넘어오는 걸 미루고 싶어 했는지는 대충 감 잡았습니다.”
“네? 그게 뭐죠?”
“이곳 시공의 틈새는 일회성으로 쓰이고 버려지는 흔한 사냥터가 아니었네요. 아마도 스토리상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중요한 필드인 것 같아요.”
테오시스로부터 ‘마계’ 업데이트에 대해 들은 지도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한데 아직 그와 관련된 어떠한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기에, 무슨 선행 퀘스트나 단계가 아직 클리어되지 않아서 그런 건가라고 짐작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가 바로 그곳이었던 모양이었다.
“놈이 시간을 끌었다는 이유는요?”
“방금 이 마을의 수장에게 키워드 단어인 ‘포탈’을 건네서 알아낸 게 있어요. 이곳에 있는 특수한 몬스터를 잡게 되면 ‘귀환석’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더라고요. 추측이긴 한데, 아마 그놈을 퍼스트 킬 하려고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귀환석이라면…… 뭐 별다른 게 없지 않나요? 이미 귀환석으로 이곳에 넘어왔으니 쓸모없기도 하고요.”
“NPC가 말한 뉘앙스로 보아 그 몹이 주는 귀환석이란 게, 우리가 썼던 것과 다른 것 같더라고요. 퀘스트 템이 거의 확실한 것 같아요.”
“어라? 그럼 설마!”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축빙 형님조차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순 없었는지 탄성을 외쳤다.
“이곳의 메인 퀘스트 중 첫 번째가, 바로 그 귀환석과 연관된 것 같아요. 아마도 이곳 시공의 틈새와 타연 본토를 연결하는, 영구적인 포탈을 뚫는 용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