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시공의 틈새 (2)
이렇게 넓은 필드와 마을까지 만들어놓은 곳을, 특정 업적과 이동 템을 소유한 극소수만 이용하도록 놔뒀을 리 없다.
심지어 ‘심연’이라는, 타연에 알려지지 않은 지역 출신 몬스터까지 처음 등장하는 곳인데 말이다.
귀환석을 통해 이곳에 온 선행 유저들.
즉 우리가 맡은 역할은, 타연 속 대륙과 이어지는 길을 뚫을 ‘선발대’로 보는 편이 타당했다.
“놈이 노리던 게 바로 그거였군요! 도대체 왜 드워프들한테 전쟁까지 걸면서 우리가 이곳에 오는 걸 늦추려고 무리했는지…… 이제야 의문이 풀리네요!”
“그 힘든 노스랜드 끝까지 가서 고르곤을 잡고, 귀환석을 얻어야만 이곳에 올 수 있다는 것부터 이상했어. 하긴 그렇게 힘든 과정과 시행착오가 겪을 테니, 혜택도 주어지는 셈인 건가?“
내 말에 축빙 형님이 맞장구치며 의견을 보탰다.
“들어보니 귀환 및 부활 포인트가 있는 안전지대에만 설치할 수 있는 모양이에요. 그러면 마을이나 성안 정도인데, 당연히 외성 마을 광장에 포탈을 뚫게 되겠죠?”
“조금만 생각해봐도 장난 아니네요. 신규 사냥터…… 그것도 인던이 아닌 필드 사냥터로 직통하는 이동 포탈이라고요. 이걸 퍼스트 클리어한 유저가 원하는 곳에 설치할 수 있다니!”
“축굴이 네 말대로 이뤄진다면 대박. 그것도 초대박 수준이야! 어지간한 메인 성 하나를 먹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날지도 모르겠다!”
애써 성 하나 수준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 이상이 분명했다.
지난 몇 달 사이에도 유저들의 평균 레벨은 꾸준히 상승해왔다.
그에 반해 새로운 필드에 관한 소식은, 일 년 전의 2.0 업데이트 이후 아직 이렇다 할 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따라서 앞으로도 유저들의 신규 사냥터에 대한 갈망은 계속될 예정.
최근 활성화된 데스라 사막의 지하도시 인던이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것만 봐도, 폭발적인 반응일 것이 뻔히 예상됐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그 퀘템을 준다는 보스 몹이 있는 곳부터 찾아봐야겠네요!”
“야야, 아서라. 당당 님이 벌써 그것도 다 알아내셨다.”
“뭐라고?”
도대체 잠깐 사이에 뭘 어떻게 돌아다녔길래 이 정도까지 정보 수집을 끝내 놓은 건지…….
다리우스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유저 간의 ‘격차’란 것이 무엇인지, 그가 제대로 가르쳐주는 느낌이었다.
“필드나 마을을 첫 방문 하다 보면 금방 요령을 터득하게 돼요. 이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몇몇 단어부터 알아낸 다음, 그걸 키워드로 다가가면 의외로 쉽게 알려주거든요. 물론 수많은 타연 유저 중에서도 극소수만 경험해본 거겠지만요!”
“이게 천재들이 흔히 말하던, ‘해보니까 그냥 되던데요’인가? 아무튼, 거기가 어딘지 가르쳐 주세요! 어서 출발해야겠습니다!”
무작정 흩어져 찾는 것보단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이렇게 장소를 특정 짓는데 시간을 투자한 건 옳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시간이 많이 허비된 것 또한 사실.
지금쯤이면 어느덧 다리우스도 눈치채고 본토로 귀환했는지도 몰랐다.
‘아마 필드에 남아있다면 바로 로그아웃하진 않았을 거야. 그편이 나중엔 더 위험할 테니까. 사냥 중이 아니라면 자신의 포탈로 복귀하는 동선에서 마주칠 수밖에 없다!’
당당검이 알려준 곳은 마을 동편 방향.
이곳의 몹인 심연의 파편들이 끝도 없이 흘러나온다는, ‘시공의 나락(那落)’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와 내가 앞장선 진형으로 그곳을 향해 달려갔다.
사실 마을로 부르긴 했지만 웬만한 거점 도시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던 모습.
마을이 온통 마법 보호막으로 둘러싸였던 이유는, 그곳을 기점으로 서편과 동편이 완전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경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숲이 있고 몬스터도 거의 보이지 않았던 서편.
그와 달리, 동편은 들어서자마자 메마른 보랏빛 황야 위에 심연의 몬스터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산드로: 이곳부터는 필드가 뻥 뚫려있네요. 이래서야 우리가 숨어서 접근할 이유가 없죠. 라챤이와 제 펫에 나눠타서 날아가겠습니다!]
[축복받은무빙: 오히려 그게 더 좋을 수 있겠다. 발견해도 귀환이 안되는 곳이니까!]
도박에 가까웠지만, 이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
“훼라리 소환!”
곧바로 은신을 풀고, 라챤이의 와순이에 나눠 탄 뒤 다 함께 날아올랐다.
[시공간이 불안정한 특수 지역이라 비행이 크게 제한됩니다.]
[이동 불가 지역으로 진입하여 주기적인 데미지를 입습니다.]
한데 얼마 올라가기도 전에 곧바로 고도 제한 데미지가 들어왔다.
체감상 100미터도 채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산드로: 높이 날 수 없도록 제한이 있네요! 그래도 일단 이 상태로 전진해 보겠습니다. 라챤아, 넌 오른쪽을 집중적으로 훑어봐!]
[라스트챤스: 넵, 형님!]
호크 아이라는 궁수 고유 스킬을 가진 라챤이.
따라서 이런 트인 공간에서 놈이 빠져나가는 걸 놓칠 확률은 낮았다.
띠링! 띠링!
한데 얼마 이동하지도 못하고 문제가 생겼다.
“이런…… 이게 또 변수로구나!”
저공비행만 가능하다는 점.
심연의 몹은 말도 안 되는 어그로 감지 범위를 갖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놈들이 허공을 부유(浮遊)해서 비행도 가능한 놈들이란 점!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이 세 가지가 겹쳐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축복받은얼굴: 드로야! 몹들은 어떻게 하지? 무시하기엔 수가 너무 많아질 것 같은데?]
<심연의 파편 조각>
<심연의 파편 덩어리>
<심연의 흔적>
다소 추상적인 몹 네임과 별개로, 놈들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막강한 공격력을 자랑했다.
그에 반해 체력은 다소 약한 편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놈들을 무시한 채 끌고 다니다간 자칫 몹들에 둘러싸여 전멸할 수도 있었다.
[산드로: 할 수 없네요. 일단 라챤이만 빼고 전부 다 내려서 정리하죠! 라챤이는 이대로 어그로가 끌리든 말든, 포탈이나 다리우스가 보이는지 계속 찾아봐!]
[라스트챤스: 형님이 찾으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산드로: 몹들이 너무 많아. 쌓이기 전에 내가 탱딜 겸용으로 빨리 잡으면서 전진하는 게 나을 거야!]
비록 발목은 잡았지만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가는 길이 몹으로 막혀있다는 건, 돌아오는 길도 막혔다는 뜻.
어딘가에서 사냥 중일 다리우스가 귀환하기에는, 녀석에게도 다소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좋은 소식이기도 했다.
[도발의 살기!]
[재빠른 몸놀림!]
거대한 거인과도 같은 심연의 몹 넷이 다가와 둘러쌌지만, 현중이와 내가 둘씩 어그로를 먹고 탱킹하니 금세 안정적인 사냥으로 변해버렸다.
투 메르타스의 독니와 레벤다스를 든 현중이는, 환상적인 방어력뿐만 아니라 막강한 공격력도 보유한 상태.
그런 녀석에게 세계수 가지로 만든 레전더리 스태프로 힐링이 들어가고 있다 보니, 보스급도 아닌 놈들에게 위협을 느낄 순 없었다.
샤샥! 샥!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나와 함께 몹을 잡는 당당검의 딜링이 단연 독보적이었다.
쌍단검인지라 나보다 더 빠른 속도로 휘둘러지는 공격.
그 사이사이에 절묘하게 평캔으로 들어가는 즉발 스킬의 모습에,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최고의 DPS를 뽑아내는 중이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나로부터 어그로를 뺏을 리 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난도질’ 스킬까지 마음 놓고 써가며 폭딜을 넣은 결과 우리 둘은 금세 2마리를 순삭할 수 있었다.
“펠루 아넨…….”
“쥬이 아넨…….”
뭐라 중얼대며 흩어지는 심연의 몹들.
마침 축복받은 패밀리가 잡던 놈도 쓰러져, 다 함께 나머지 한 놈을 공격해 마무리 지었다.
쉬이익-
첫 사냥 때는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놈들의 시체가 사라지며 발생하는 연기 중 일부가 나를 포함한 전원에게 흡수되듯 스며들었다.
[2,118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3,470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1,225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와, 빠른데요? 확실히 이 정도면 타연에서도 한 손안에 드는 레이드 파티겠어요.”
“당당 님이 계시니까 그런 거죠. 님도 이제는 그 파티를 구성하고 있는 같은 길드원이기도 하고요.”
함께 테오시스를 상대하며 맹공을 펼친 사이였지만, 여전히 언제라도 떠날 여지를 남겨두는 듯한 당당검.
하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 유저이자 우리 길드에 필요한 존재인지는, 굳이 이번 시공의 틈새 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는 틈틈이, 그가 우리 길드에 정을 붙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근데 이놈들 또 빈털터리양? 넷이나 잡았는데 뭐야? 물론 사냥하러 온 건 아녔지만…….”
“축볼아, 심연의 몹들은 뭔가 다른 보상 체계가 있는 모양이야. 어비스 수치라는 건 딜링한 만큼 칼같이 나눠주고 있잖아?”
앞장선 내 뒤에서 축복받은 남매가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현중이도 그 소릴 들었는지, 뜻밖의 정보를 알려주었다.
“누나. 마을 안에 들어가 보셨으면 바로 만나보셨을 텐데, 이 어비스 수치라는 것을 장비와 교환해주는 NPC가 있더라고요? 그중에는 신기하게도 경험치랑도 교환해주는 NPC도 있는 것 같았어요.”
“뭐? 이 수치를 경험치와도 바꿀 수 있다고?”
순간 너무 놀라 달리던 걸 멈춰설 뻔했다.
이곳 몹들이 주는 어비스 수치로 경험치를 바꿀 수 있다는 게 사실이라면, 한 마리의 몹으로 2배의 레벨업 효과를 내는 셈이었다.
물론 현재로선 얼마나 줄진 모르지만, 뭐가 됐든 ‘경험치’를 ‘교환’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이 필드만이 가진 메리트는 충분하고도 넘쳤다.
“다리우스가 어떻게 그렇게나 빨리 렙업했는지…… 이제야 알겠구나!”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축빙 형님의 감탄사가 이어졌다.
보나마나였다.
녀석의 장비는 현존하는 최고 강화등급의 올 레전더리 템들.
이곳에서 어비스 수치로 교환 가능한 템들이 얼마나 좋을진 모르지만, 디바인 급이 아닌 이상 녀석이 굳이 얻고 싶은 템은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그러니 놈은 사냥하면서 얻은 어비스 수치를, 전부 다 족족 경험치로 바꿔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놈한테만 해당하는 사항이 아니지.’
이곳의 장비가 필요 없다고?
그건 디바인 무기를 2개나 찬 채 온갖 특별한 옵션의 레전더리 장비들로 도배한 나도 마찬가지였다.
침묵의 숲에서 사냥하는 것도 질리던 참이었는데, 역시나 이곳이 최고의 레벨업 사냥터였다는 게 확인되자 기분이 좋아졌다.
[라스트챤스: 다들 주목! 발견했습니다! 놈이 넘어온 거로 보이는 포탈을요!]
마침내 기다리는 반가운 소식이 채팅창에 올라왔다.
곧 와순이가 우리를 향해 되돌아 왔고, 우리는 뒤따라온 심연의 몹을 정리하며 빠르게 이동했다.
그렇게 몇 개의 언덕을 지나고 계곡과도 같은 바위산 인근에 도착했을 무렵, 라챤이가 말한 포탈이 모습을 드러냈다.
웅, 웅.
마치 작은 은하계가 돌아가고 있는 듯한 외형.
익숙하고 친근한 파란색이 아닌 검붉은 빛을 내뿜는 포탈은, 우리가 넘어온 것과 완벽하게 똑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런 곳에 있었구나! 진짜 생성되는 장소는 랜덤인가 보네?”
“아직 포탈이 남아있는 걸 보면 귀환하지 않았다는 뜻 아닐까요?”
“그건 아닌 것 같다. 귀환석에 따로 그런 제약사항이 있는 것 같진 않았거든. 하지만 확인해볼 필요성은 있겠지. 은신!”
“어랏! 형님! 위험합니다!”
“위험하긴 뭐가? 포탈 앞만큼이나 안전한 곳이 또 어딨다고?”
녀석이 귀환했는지 아닌지 확인해보려면, 직접 이 포탈 너머로 넘어가서 살펴보는 편이 가장 확실했다.
8성 은신이 들킬 염려도 적을뿐더러 마나 쉴드 덕에 상태 이상도 면역이니, 위험하면 다시 넘어오면 그만.
머뭇거리고 고민해봤자 아까운 시간만 날아가는 셈이라 과감하게 포탈 안으로 진입했다.
[시공의 틈새에서 빠져나왔습니다.]
“…….”
작은 저택 안.
인기척은커녕, 적막한 공기만이 나를 반겼다.
‘여긴…… 외성 마을에 있는 유저 전용 집인 건가?’
가까이 있는 창가로 다가가 보니, 몇몇 유저들이 길을 걷고 있는 평범한 마을 풍경이 보였다.
내게도 익숙한 곳인지라, 한눈에 어딘지 알아볼 수 있었다.
‘또 번스타인이야? 이 자식…… 어지간히도 이 성을 좋아하는 놈이었구나.’
시공의 틈새로 이어지는 이 포탈의 존재는 태성 길드 내에서도 극비에 속한 일.
배신자나 스파이들이 난무하는 대형 길드 특성상, 녀석은 자신의 성에 있는 집 하나를 빌린 뒤 포탈 전용 공간으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성이 크고 마을이 많을수록, 유저가 골드를 지불하고 임대할 수 있는 이런 ‘하우스’가 많이 존재했다.
안전지대 안에 있는 이런 하우스를 허락 없이 침투하는 건 시스템상 불가능했기에, 나름 괜찮은 판단으로 보였다.
나는 빈집을 잠시 둘러보다가 다시 포탈을 통해 시공의 틈새로 넘어왔다.
“어때? 있었어?”
“없네요. 나오자마자 바로 귀환한 게 아니라면 아직 놈은 여기에 남아있을 것 같아요.”
“뭐가 됐든 전진하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포탈이 여기에 있는데 마을에는 없었으니, 분명 전방에 있는 나락인가 하는 곳에 가 있을 거야.”
“넵, 형님. 어서 이동하시죠.”
축빙 형님의 의견이 타당했기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바위 계곡으로 바뀐 필드는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졌는데, 갈수록 땅이 온통 갈라지고 험난해졌다.
심지어는 바닥에서 이따금 노란 스파크가 튀기기도 하는 요상한 필드로 변해버렸다.
“왠지 시공의 나락이란 곳에 거의 다 온 것 같지 않아요?”
“그래. 생각보다 맵이 넓긴 하다만…… 이 정도면 올 만큼 온 게 분명해. 보스가 뜨는 지역에 들어섰다 해도 이상할 건 없어.”
금방 마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다리우스.
하지만 어느덧 수십 마리의 심연의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는 동안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이곳에 없으면 정말 허무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일 때쯤, 언덕 너머에서 낯익은 무언가가 솟구치는 게 보였다.
바람으로 이루어진 회색빛 기둥.
유달리 강력해 보이는 심화 스킬, ‘토네이도’의 모습이었다.
[산드로: 다들 정지! 눈앞에 토네이도 보셨죠! 놈들이 앞에서 사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