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레이드 경쟁 (2)
“투 메르타스의 레이드를 말입니까?”
놀란 기색이 역력한 지옥불.
평소 미소로 일관하며,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저번엔 운 좋게 저희가 독식했지만, 이번에도 가능할 거라곤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분명 이번엔 이런저런 길드에서 레이드에 도전하게 되겠죠.”
“흠…….”
“그중에서도 다리우스는 무조건 도전할 겁니다. NPC 병사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고, 다수의 랭커와 타이탄까지 보유한 최강의 길드니까요. 무엇보다 길드원들이 업적을 얻어야 할 테니 안달이 나 있을 겁니다.”
어려운 S급 퀘스트 클리어 대신 드래곤 레이드를 택한다면, 금지로 입장 가능한 업적을 한 번에 수십 명이 얻을 수 있다.
이 사실을 놈들이 모르지 않는 한, 이번 드래곤 타임에 목매달 수밖에 없었다.
놈들의 포탈이 군단장이 뜨는 곳 가까이에 있다는 건, 우리에겐 페널티지만 녀석들에선 더없는 장점이었으니까!
“산드로 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군요. 만약 태성이 이번 드래곤을 잡게 된다면, 연달아서 이것저것 다 가져가게 될 테니 말이지요.”
“정확한 판단이십니다.”
“그렇다면 아마도 침묵의 숲에서 대규모 필드전이 벌어지게 되겠군요. 이번 드래곤의 중요성을 아는 놈들이니, 저희 측에서도 노릴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하고 있을 테니…….”
“제가 그곳에 자주 가 봐서 아는데, 제대로 붙게 되면 단 한 번의 전투로 모든 게 결정 날 겁니다. 마을에서 부활해서 다시 레어 앞까지 찾아가기엔, 너무나 먼 곳이거든요!”
성마다 소환할 수 있는 NPC 호위 병사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죽으면 일정 시간의 부활 시간이 존재한다.
게다가 투 메르타스의 레어는 와이번의 둥지와 침묵의 숲을 횡단한 다음에나 도착할 수 있는, 맵의 가장 끝에 위치해 있었다.
태성 놈들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는 모르지만, 드래곤을 두고 경쟁하게 된다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무조건 전투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도.
그동안 레이드는 소규모 전투의 꽃이라고 불리었지만,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더는 그렇게 부를 수 없게 될지도 몰랐다.
“혹시 조건에 대해서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이런 일은 추후 분배 문제가 껄끄러운 편이라서…….”
“사실 이미 레이드에 한 번 성공해본 터라 잡는 건 저희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하지만 드래곤이 드랍하는 템 대부분을 과감히 양보하겠습니다. 그저 비늘이나 발톱 같은 재료 템 몇 개만 주시면 충분합니다.”
물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호박마켓은 올타 및 각종 커뮤니티 게시판에 드라코닉 건틀릿을 독점 판매하겠다는 공고를 대대적으로 띄웠다.
그 장소는 당연히 아베르 성에 오픈한 호박마켓 상점.
이번 드래곤 레이드가 끝나더라도 피닉스가 가져갈 물량은 자체적으로 사용될 테니, 당분간 시중에 나올 드라코닉 매물은 호박마켓이 유일했다.
피닉스에게 전부를 양보해도 상관없었지만, 약간의 재료 템을 요청한 이유였다.
“대신 군단장이 드랍하는 템은 전부 버닝스타가 가져가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맞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무리 피닉스라도 첫 트라이에 투 메르타스를 잡는 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타이탄을 최소 10대 이상 갖고 계신 게 아니라면…….”
투 메르타스는 무지막지한 광역 데미지를 입히는 브레스를 난사하고, 강력한 부하 몹인 엔트를 계속해서 소환한다.
심지어 마지막 페이즈엔 공중을 날아다니기까지 하는데, 사전에 그런 정보를 모르는 상태에선 어떤 길드도 단번에 성공할거라고 장담하기 힘들었다.
이 모든 걸 걱정할 필요 없는 편안한 레이드가 되도록 도와주고, 심지어 드랍 템마저 몰아준다는 조건.
대부분의 참가 길드원들이 2개 이상의 고등급 업적을 획득할 수 있는 이득은 계산에서 빼더라도, 지옥불 측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는 달콤한 제안이었다.
“좋습니다. 태성을 견제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여러모로 좋은 조건인데, 굳이 하지 않을 이유가 없군요.”
역시나 시원하게 제안에 응해주는 지옥불.
의리 있고 통 큰 것도 좋았지만, 이렇게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 시원한 그의 성격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시공의 틈새에서 좋은 정보와 혜택이 생기면 피닉스와 꼭 공유하겠습니다.”
“이래서 제가 산드로 님을 좋아할 수밖에 없군요.”
“하하하!”
마음이 통했는지 비슷한 생각을 전하는 지옥불이었다.
다리우스를 죽였지만, 태성 길드는 여전히 건재했다.
거대한 제국과도 같은 그들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우리 버닝스타의 내실을 다지는 것만큼이나 함께 싸울 아군이 계속 성장하는 것도 중요한 법.
지옥불.
그와 맺은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듀메인 성을 나섰다.
* * *
(김석용: 어떻게 정말로 안 되겠습니까? 자꾸 거절만 하시지 말고 다시 한 번만 고려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나: 죄송해요 아저씨. 지금은 인터뷰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요. 대신 조만간 뉴스거리가 생길 것 같은데, 그땐 꼭 말씀드릴게요!)
(김석용: 뉴스거리요? 혹시 정말 힘드시면 다리우스님을 어디서 어떻게 죽였는지, 그것만이라도 알려주실 순 없겠습니까?)
(나: 하하! 그것도 나중에 다 알려드릴게요! 놈이 먼저 떠벌일 일은 없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귓속말 수신 제한을 320레벨까지 올려놨는데도, 귓말을 켰더니 수많은 유저들이 대화를 걸어왔다.
대부분 가차 없이 차단했지만, 그중에는 차단하지 못하는 유저 ‘김석용’ 같은 분도 계셨다.
‘타연에 정말로 진심이신 아저씨였네. 물론 현금 투자도 하셨을 테고 도움을 준 유저도 많았겠지만…… 50대의 몸으로 320레벨이라니? 이 정도면 방송외 시간에도 거의 대부분 타연에 접속해 계셨겠어!’
센츄라 화산지역에서 드레이크 레이드를 뛰시는 걸 보고 진작부터 예상은 했지만…….
김석용 아재의 수준은 객관적으로 봐도 고레벨 취급을 받을 만했다.
어쨌든 간에, 답장을 줘야 하는 귓속말은 이 아재가 마지막이었다.
성안 중앙 홀.
길드원도 얼마 없지만, 다들 눈코 뗄 새 없이 바쁜 터라 휑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길드원들이 좀 더 늘었으면 좋겠는데…… 어디 영입할 만한 유저가 좀 없으려나?”
배신 걱정 없으면서 실력도 랭커급인 유저.
그런 사람이 아직 길드에 들지 않은 경우는 상당히 드물어, 생각보다 길드원들을 늘리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당당검이나 무살 형님께 또다시 추천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성 밖 외성 마을로 향했다.
“오! 성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언제 이렇게 사람들이 많아졌지?”
언덕을 내려와 마을에 들어서자 눈에 띄는 변화가 체감됐다.
첫 방문 당시 냉기만 가득했던 마을 광장.
그곳엔 여러 장사꾼들이 좌판을 깔아 놓아, 제법 많은 유저들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또한, 제법 고레벨로 보이는 유저들이 어디론가 바삐 이동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붐비는 수준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얼마 전까지 유저들 사이에서 ‘버려진 성’이라고까지 불렸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호박 마켓>
그중 광장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중앙 자리에 위치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호구 박멸, 호박입니다!”
“수고하십니다. 길마님은 2층에 계시죠?”
“앗 성주님? 네,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로 계단으로 올라가는 대신, 슬쩍 매장 안을 훑어봤다.
판매 상품 진열이 가능한 상점만의 특권.
그 덕분에 온갖 무기와 방어구들을 마음껏 구경하는 유저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실 이런 곳은 주기적으로, 혹은 한꺼번에 강화 러쉬를 하는 유저들이 주로 찾는다.
한번에 수수료 없는 싼 가격으로 장비를 왕창 산 다음, 강화라는 도박으로 대박을 꿈꾸는 유저들.
때문에 유저들이 많이 찾는 성에 상점을 여는 것이 중요했는데, 알바마스터는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성을 선택해 주었다.
‘오, 역시! 아직 유저들이 얼마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대로 저게 큰 역할을 하나 보네!’
스펙과 옵션 설명은 교환창이나 거래소에서도 제공되지만, 실제 외형이나 모의 착용 홀로그램은 오직 좌판과 상점에서만 제공된다.
일루전 측이 장사꾼 유저와 상점 개설에 메리트를 마련해둔 시스템적 배려.
이 때문에 드라코닉 건틀릿의 실제 외형과 착용 샷이 궁금한 유저들이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 구경 중인 모양이었다.
“와! 손가락 마디마디 디테일하게 구현해 놓은 것 좀 봐!”
“색깔 커스텀은 안 되려나? 암녹색보단 붉은 계통으로 칠하면 간지 쩔겠는데…….”
“제작템이니까 당연히 되지 않을까요?”
“진짜 너무너무 갖고 싶다! 누가 좀 사 줘어어어!”
얼추 스무 명은 넘어 보이는 인파.
물론 드라코닉 템만 보겠다고 온 건 아니겠지만, 아베르 성의 집객(集客)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똑똑!
2층에 오른 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들어섰다.
그러자 바쁘게 무언가를 적고 있던 알바마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줬다.
“오! 다리우스를 잡아버린 타연 지존께서 오셨습니까!”
“하하! 그건 또 무슨 인사법이래요?”
”차기 랭킹 1위를 맞는 인사법이랄까요? 하하! 축하드립니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이 성에 생각보다 많은 유저들이 많이 방문하고 좋은 소식까지 들리자 기분이 업된 모양이었다.
누가 뭐래도 태성은 타연의 톱이자 상징과도 같은 거대 길드.
그곳의 수장을 자신의 동업자로 선택한 내가 잡았다는 것은, 마치 고액의 역배당이 터진 것처럼 대박이라 평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어휴, 아직 갈 길이 먼 걸요. 그나저나 손님이 많이 보이던데…… 원하셨던 대로 브랜드 파워가 올라간 느낌은 좀 드세요?”
“토레노 성에 있을 때보다는 손님이 적지만, 기대했던 것 이상입니다. 세금이 없다는 점과 드라코닉 장비 독점 판매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이슈가 됐거든요.”
“이 정도까진 최소 보름은 걸릴 거로 예상했는데 초반 반응이 좋아 보여 다행이네요. 이대로라면 다음 공성전까지 다른 길드들이 이성에 터를 잡기에 충분하겠습니다.”
“하긴, 방문한 김에 노스랜드로 사냥터를 옮긴 유저들도 제법 있는 모양이더군요. 무엇보다 계속 늘어나고 있고요!”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공성 인원 없이, 일반 유저들과 힘을 합쳐 수성하겠다.
타연의 공성전을 조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코웃음을 칠 정도로 허무맹랑한 구상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장사꾼 길드라는 잇속이 관련된 길드가 구심점이 되어, 지인 생산 유저들과 사냥 유저들까지 합세하게 된다면?
생각보다 무시 못 할 병력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지금부터 바람을 좀 잡아주셨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하실 수 있는 최대한으로요.”
“벌써요?”
“네. 가뜩이나 신경 쓰실 게 많아 바쁠 텐데,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다음 수성이 치열해질 것 같아서요. 물론 그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사실 혼자 게임 할 때와 달리 요즘은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길드를 만들고 타연의 여러 세력들과 얽매이다 보니, 일거수일투족마다 고려해야 할 것들이 비교할 수 없이 많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조치를 해두지 않기에는, 나중에 되돌아올 손해와 후환들이 뻔히 보여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시공의 틈새와 연결될 포탈……. 그걸 우리 성에 설치하게 된다면, 다음 공성전에서 가장 혈투가 벌어질 성은 바로 여기가 될 게 당연해.’
아베르 성은 먹어 봤자 별 이득이 없을 테니, 그저 적당한 수준으로 수성을 대비하면 충분했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시련으로 찾아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어떤 보상이 더 있을 거라는 건지…… 이미 세금 0%를 비롯해 많은 편의를 주고 계시는데요?”
“지금은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없지만, 조만간 저희 성은 타연에서 가장 돈 많고 고레벨인 유저들이 찾는 성이 될 겁니다. 어쩌면 장사꾼 분들이 가장 선호하게 될 성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네? 그게 무슨……?”
“여하튼 그러니 저희 성에서 아직 매물로 내놓지 않은 빈 상점과 빈 하우스들도 금방 인기가 치솟아 비싸게 팔리게 되겠죠. 그중 가장 좋은 자리 3개를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무상으로, 저희가 성이 뺏기는 그날까지 계속요.”
“…….”
성마다 존재하는 관공소.
유저들은 그곳 NPC를 통해 성에 존재하는 상점 건물과 빈집인 '하우스'를 낙찰받아 임차할 수 있다.
일인 길드였던 시절엔 길드 레벨이 낮아 사용할 수 없던 시스템.
하지만 상급 길드인 지금은, 특정 유저에게 수혜를 베풀어 주기에 전혀 문제 될 부분이 없었다.
“아직 공성까지는 3주 넘게 남았으니 두고 보시면 곧 알게 되실 겁니다. 제가 얼마나 좋은 제안을 드린 것인지……. 그걸 알게 되신 후부터 노력해 주셔도 좋습니다. 되도록 빨리 활성화해서 이곳에 자리를 제대로 잡으시는 걸 추천드리지만요.”
“뭔지 모르겠지만 산드로 님의 말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이왕 믿기로 한 거, 끝까지 제대로 믿어봐야죠. 무려 다리우스를 죽인 최초의 유저시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가 군단장을 잡은 것으로 가정하고 있었지만, 그에 앞서 선행과제가 있었다.
바로 드래곤 레이드.
이제 대부분의 준비는 끝마쳤으니, 놈이 리스폰 되는 걸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