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격돌 (1)
도둑으로만 이루어진 정찰대를 물리친 이후, 태성 길드로부터 별 특별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자랑하는 그리폰 부대가 한 차례 방문했으나, 별 소득도 없이 돌아간 것을 제외하면.
-하핫! 이 자식들아, 맛이 어떠냐!
캐릭은 랭커급에 달할지라도, 펫인 그리폰 자체의 체력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무리 많은 그리폰을 달고 와서 와이번의 둥지를 어찌어찌 뚫었지만, 그 뒤에 기다리던 장애물은 뚫지 못한 이유였다.
그리폰보다 더 빠른 이속으로 날아다니면서 대포알 같은 화살을 쏘아대는 라챤이.
숲에 숨어서 이동하면 모를까, 녀석이 사냥까지 포기한 채 공중을 감시하는 한 그리폰으로 레어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소수에 불과했지만, 하늘과 땅으로 향하는 루트가 전부 막힌 셈.
놈들로선 어이없을지 몰라도, 우리 입장에서는 일당백을 목표로 무모한 도전을 계속해온 끝에 달성한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태성이 이대로 포기할 놈들은 또 아니지…….’
온종일 무살 형님과 사냥을 하면서 숲을 지킨 끝에.
놈들은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침묵의 숲을 다시 찾았다.
“드로야 저거 보이냐? 이 자식들! 이번엔 정찰이 아니라, 아주 정벌을 하러 와버렸네?”
“생각해 보니 이거야말로 태성답네요. 늘 물량으로 밀어붙이던 예전의 그 태성 길드를 잊어먹고 있었어요.”
상급 길드의 최대 정원인 500명이 꽉 채워진 1군, ‘태성’.
그 밑으로 같은 길드나 마찬가지지만 다소 권한이 떨어지면서 이름도 살짝씩 다른 2군 길드가, 역시나 500명씩 4개 더 존재했다.
바로 여기까지가 우리가 흔히 태성 길드라고 부르는 놈들로 구성된, 철저하고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길드원들이었다.
한데 태성의 진정한 물량은 3군이라고 부를 수 있는 하위 길드.
즉, ‘태성’과 ‘동맹'으로 맺어진 수십 개의 중소 길드로부터 비롯됐다.
각종 공성이나 필드전 등에서 태성의 1, 2군과 함께 싸우는 3군들.
명령 하달이나 발 빠른 대응들은 다소 부족할지라도, 이들의 머릿수만큼은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타연을 플레이하면서 ‘태성’이라는 이름하에 이들이 받는 혜택.
그건 결코 작은 게 아니었다.
독식 사냥터와 전용 인던 출입, 척살 대상 제외, 동맹들끼리 함께 벌이는 패악질까지…….
이런 혜택에 길들어진 3군 길드들은, 어지간하면 동맹에서 제외되지 않기 위해 태성이 시키는 대로 적극적으로 따르고 행동해왔다.
우리로 인해 소수로는 절대 레어까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자, 태성 놈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으로 3군을 소환한 모양이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대규모로!
“와! 여기 나무 뭐냐? 미친, 30층인 우리 집보다 더 높은 거 같은데?”
“300레벨로 침묵의 숲에 오게 되다니!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와 보겠어?”
“오늘 운 좋으면, 우리 드래곤 구경할 수 있는 거야?”
웅성웅성.
최소 공격대 단위의 유저들이 소란스럽게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상황을 살펴봤다.
내려다본 아래 풍경.
그곳은 금세, 적게 잡아도 천 명은 돼 보이는 유저들로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차 버렸다.
“형님, 보니깐 이건 도저히 못 막겠는데요?”
“크크, 넌 설마 저걸 보고도 막을 수 있을지 가늠해 본 거냐? 생각하는 클라스가 진짜 우리 같은 사람이랑은 완전 다르구나? 캬! 형이 넌 진짜 리스펙한다!”
“설마 모르고 계셨어요? 제가 태성 놈들을 백대일로도 다 잡아버린 적 있다는 걸? 하긴 태성이 극구 부인해서 많이 알려지지 않긴 했죠.”
“그 소문이 사실이었냐? 와, 우리 길마…… 진짜 태성한테만큼은 한결같은 남자였네!”
우리가 수다를 떠는 와중에도, 이 무지막지한 군단은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침묵의 숲 안쪽을 향해 전진했다.
천 명.
말이 쉬워 천 명이지, 이곳같이 좁은 필드 위를 이 많은 유저가 뭉쳐 다니면 사실상 무서울 게 없었다.
파파파팟!
거대한 나무 기둥 옆에서 나타난 흉폭한 싸이클롭스.
놈은 가장 선두에 선 탱커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온갖 화살과 마법 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꾸르륵!
체력이 많은 싸이클롭스도 그럴진대, 마법 계열 몬스터인 비홀더는 볼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스치듯 안녕.
공성전에서 타이탄이 나타나 내성문을 뚫을 때도, 저 정도 수준의 일점사가 쏟아지진 않았었다.
“드래곤 브레스 한방에 모조리 사그라질 병력이지만…… 침묵의 숲을 뚫기엔 무적이나 다름없네요.”
천명을 넘어 만 명이 모인다 하더라도, 투 메르타스의 브레스 한 방이면 숫자는 무의미했다.
우리가 드래곤을 잡기도 전부터 널리 알려졌던 사실이니, 놈들도 모르진 않을 터.
그러니 이곳에 온 천 명은, 오로지 레어에 도달해 리스폰되기만을 기다리기 위해 보낸 ‘정찰대’였다.
정말 태성이기에 가능한,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병력 운용이었다.
“길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할 수 없죠. 놈들이 저런 식으로 나온다는데 이만 양보해 줘야죠.”
“그럼 결국 전투는 리스폰이 된 후에야 벌어지는 건가?”
“기껏 준비했는데, 작전을 변경해야 할 것 같아요. 리스폰 정보를 선점하는 건 힘들겠네요. 어차피 드래곤의 피를 깎을 수 있는 건 고레벨의 NPC 병사들이 주가 될 테니까, 거기에 승부를 걸어야겠어요!”
“저런 대규모 병력 사이에서 NPC만 골라 빼먹기라……. 진짜 재밌는 일이 되겠는걸?”
“네. 아쉽지만 형님은 업적을 얻으셔야 해서 그 일엔 참여 못 하시겠지만요.”
“킁!”
죽이고자 든다면 1, 2백 명쯤은 거뜬히 죽일 수 있겠지만 돌아섰다.
어차피 오늘 드래곤이 리스폰이 될 확률은 낮았다.
온종일 빈 레어 안에서 허탕치기만을 바라며 우리 둘은 성으로 귀환했다.
* * *
[라스트챤스: 오늘도 이대로 끝나려나요?]
[축복받은얼굴: 내일이면 딱 한 달 되는 날이잖아. 설마 한 달을 넘기는 건가?]
[산드로: 그럴 리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잡으라고 만들어놓은 보스 몹인데, 몇 달에 한 번씩 뜨는 녀석으로 만들어놓았으려고? 오늘.... 적어도 내일 안에는 무조건 뜬다고 생각하고, 최대한 접속을 유지하자. 다들 아시겠죠?]
[축복받은무빙: 그나저나 드로는 퀘스트 잘 진행되고 있어?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바쁘겠지만... 그것도 중요한 일이란 건 알고 있지?]
[산드로: 네 형님. 최대한 서둘러서 깨고 있습니다. 조만간 다음으로 넘어갈 것 같아요!]
태성 길드의 대대적인 침투가 있은 지도 어느덧 3일.
처음에는 전세 낸 것마냥 레어 안을 차지하고 있던 놈들도, 하나둘씩 지루함과 저마다의 사정으로 로그아웃을 버티지 못했다.
그렇게 태성은, 채 10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레어를 도로 비워주고 말았다.
하지만 놈들은 포기를 몰랐다.
곧바로 처음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천 명 단위로 뭉쳐서 찾아왔던 것!
3군 길드끼리 돌아가면서 정찰만 하는, 그야말로 인해전술이 이어졌다.
태성과 동맹인 터라 그들을 죽인다고 머더러가 되진 않지만, 우리와 피닉스는 굳이 나서서 그들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괜히 그들과 싸우다가 1군과 레이드 경쟁을 하기도 전에 힘이 빠질 필요는 없었기에.
‘참 웃긴 일이 벌어지게 됐으니까……. 하여간 타연은 도무지 예측이 안 된다니까!’
며칠에 이어 워낙 대규모 유저가 움직였기에, 이런 일이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장서서 그 험난하기로 악명높은 레어로 향하는 길까지 뚫어준다니?
곧 평소 침묵의 숲과 레어를 구경하고 싶어 하던 유저들이 따라붙게 되었고, 여기에 채집꾼과 채석꾼들까지 합류했다.
이렇게 수백 명의 유저들이 뒤따르게 되자, 태성의 3군에 불과한 길드원들로서는 손쓸 수 있는 게 없었다.
정리하자니 수가 너무 많았고, 근래 태성은 최대한 머더러가 되는 것을 피하라고 몇번이고 강조해왔기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유저들을 죽여서 머더러가 되면, 결국 자기들만 손해니까 어쩔 수 없었겠지.’
여하튼 이런 뜬금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굳이 드래곤의 리스폰 체크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뜨게 되면 단 1분 만에 모든 타연 유저가 알게 될 만큼, 수많은 유저들이 공짜로 레어를 방문하게 됐으니 말이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괜한 힘 빼는 대신 제각기 해야 할 일들에 집중했다.
“본토인들은 생각보다 강할 뿐 아니라 유능하군! 벌써 부탁을 완수한 것인가!”
또 한 번의 반복 퀘스트 사냥을 마치고 이곳의 촌장 NPC인 아드리안에게 말을 걸자, 보상을 주었다.
띠링!
[퀘스트 ‘다가오는 심연의 위협’을 클리어했습니다.]
‘이제 3번 남은 건가? 이 속도라면 내일이면 다음 퀘스트를 받을 수 있겠어.’
퀘스트 완료와 동시에 다시 말을 걸자, 방금 깬 것과 같은 사냥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다.
[다가오는 심연의 위협: 반복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B
* 호라이즌 마을을 주기적으로 위협하는 몬스터 ‘심연의 흔적’을 처치하라(0/10)
* 퀘스트 클리어 보상: 어비스 수치 30,000
* 총 20회 클리어 시 연계 퀘스트 획득(17/20)
시공의 틈새에 존재하는 마을, 호라이즌.
알고 보니 이곳은 고대 마도 시대 시절, 지금은 노스랜드라고 불리는 곳에 살던 사람들이 틈새에 빨려 들어와 만든 곳이었다.
당당검을 통해 이곳의 퀘스트들을 빠르게 진행하면서 알게 된 스토리.
이들은 자신들처럼 시공의 틈새로 잘못 들어온 마계의 몹들 뿐만 아니라, 이 땅의 경계에서 침입해오는 미지의 ‘심연’ 몬스터들과 싸워왔다고 전했다.
-마계와의 전쟁이 끝난 지 천 년이나 흘렀다고 했습니까? 그게 대체 무슨…… 저희가 이곳으로 넘어온 지는 이제 막 10년 정도밖에 흐르지 않았습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해 아드리안과 대화하면 들을 수 있는 대사.
시공의 틈새란 곳답게, 시공간이 뒤틀렸다는 흔한 설정이었다.
그 후 우리가 사용한 귀환석의 포탈 때문에 본토와의 시공간이 연결됐다는 설명까지 듣고 나면, 유저들은 비로소 이곳의 존재 의의를 알게 되었다.
-이곳 NPC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전부 마도 시대의 사람들이에요. 현재로선 만나볼 수 없는 NPC들인데, 시공간이 뒤틀렸다는 설정으로 유저들이 게임 속에서 직접 만날 수 있게 된 거죠.
-당당 님. 그럼 이곳은 평범한 신규 사냥터중 하나가 아니라, 앞으로 타연 스토리상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겠군요?
-그럴 거예요. 지금까지의 메인 퀘스트는 마계의 침공과 연관된 것으로 진행되어왔으니까, 이곳에선 그 스토리의 연장선이 진행될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아직 접근 루트가 밝혀지지 않은 수중왕국이 다음 업데이트와 연관된 곳일 거라 생각해왔는데, 이곳이었나 봐요!
금지 ‘시공의 틈새’는 그저 흔한 보너스 필드 사냥터가 아니었다.
신검이 뽑히자마자 준비됐던 타이탄 시스템이 업데이트된 것처럼, 이곳은 다음 ‘대규모 업데이트’를 위해 준비된 필드였다.
-일루전이 모두 죽고 없어진, 천 년 전 마도 시대의 NPC들을 이런 식으로 등장시킨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건 아마 이것 때문일걸요?
-그게 뭐죠?
-현 시대에는 사라진 천계와의 연결점. 마계는 지들이 알아서 침공해 올 테니 상관없겠지만, 스토리상 유저들이 천계로 이동할 루트가 필요했거든요. 어떤 식으로 연결될까 줄곧 궁금했었는데…… 천계와 교류하던 마도 시대의 NPC가 나타나게 됐으니, 분명 이놈들을 통해 해결될 거예요!
당당검을 우리 길드로 영입했던 게 얼마나 큰 행운이고 다행이었는지…….
그는 발 빠르게 퀘스트와 정보를 수집해주는 것을 넘어, 향후 진행될 스토리 방향까지 전부 예측해서 공유해주었다.
한데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아귀가 딱딱 맞고 신빙성 있는 추측으로 들렸다.
가히 카이저와 맞먹을 것으로 보이는, ‘콘텐츠 킬러’의 위엄이었다.
(당근당근단검: 드로님, 아직 반복 퀘 완료 못 하셨어요?)
(나: 네. 이제 3번만 더 하면 깹니다. 좀만 기다려 주세요.)
(당근당근단검: 다리우스는 진작 깼을 테니까, 저희도 얼른 완료해야 할 거예요. 저희가 놈보다 먼저 환영의 마탑에 입장하려면 빠듯하겠어요.)
호라이즌 마을에 대형 보호막을 설치해, 이곳에서도 사람들이 생존할 수 있게 만들어 준 NPC.
아드리안은 그가 이곳에서 떨어진 마을 북쪽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환영의 마탑’을 세우고는 잠적해 있다고 알려줬다.
그래서 당당검과 나는 최대한 빨리 이 마을의 퀘스트들을 완료해 그곳으로 향하는 다음 퀘스트를 얻기 위해, 지난 3일간 고군분투했다.
“아이고 죽겠다. 진짜 정신없네……. 선두로 앞서나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구나. 이것저것 신경 쓸 거 다 쓰는 와중에, 신규 콘텐츠도 깨야 하니까.”
솔직히 그간 애써 무시해왔지만…….
거대 길드를 운영하며 5성을 점령해 건국하는 와중에, 각종 퍼스트 클리어와 퍼스트 킬을 완수했던 다리우스의 수완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그와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아무리 서포터들이 있다 하더라도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체감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지. 우리가 안 깨면 녀석이 스틸할 수도 있으…… 어? 이건?”
다시 힘내서 마을 밖으로 나서는 순간, 길드 채팅창에 기다렸던 소식이 올라왔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유저로부터 같은 소식이 다급히 전해졌다.
(지옥불: 산드로님, 어디 계시죠? 투 메르타스가 조금 전 리스폰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