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격돌 (2)
(나: 곧바로 휴포드로 가겠습니다. 지옥불님께서도 전부 챙겨서 바로 모여 주세요!)
(지옥불: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무조건 오늘 아니면 내일 뜰 것 같았다.
곧바로 포탈을 찾아 아베르 성으로 귀환하자, 길드원들 전원이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길마가 제일 늦게 오면 어떡해!”
“죄송합니다. 다들 어서 기사단장에게 이동하시죠!”
보통 현재 오픈된 맵에서 가장 외곽에 위치한 성일수록, 고레벨 사냥터와 근접한 탓에 강한 NPC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이 성의 병사들은 잿빛 산맥과 맞닿은 칼젠 성의 NPC들보다 10레벨 정도 높았고, 이것이 내가 이 성을 점령하게 된 계기중 하나였다.
“마이 로드, 산드로 님이시여. 여기엔 어쩐 일로 찾아오셨나이까!”
“어, ‘호위’ 좀 차출해 갈게!”
검은 폭풍 기사단장, 롤랑.
녀석으로부터 부기사단장이면서 특이하게도 궁수인, 벤자민 1명만을 소환했다.
한 성에서 차출 가능한 궁수병의 정원은 제각각이지만 대략 50명 안팎.
그마저도 죽으면 소환 지속 시간인 4시간 정도의 쿨타임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난…… 이번 레이드에 처음부터 참여할 수 없으니까 한 명만 끄는 게 맞아.’
용살검을 비롯한 각종 업적과 로드급 타이탄까지 보유한 난, 어쩌면 어지간한 랭커 수십 명보다도 더 많은 딜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누구의 방해도 없이 레이드가 진행될 때 가능한 일.
당연하게도, 이번 레이드는 그렇게 치러질 수 없었다.
“다 됐습니까?”
먼저 NPC 병사들을 차출해 올 피닉스와 함께 진행시킨 후, 나는 점점 힘이 부칠 후반부터 레이드에 참여할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 난, 레어 밖에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나만의 전투를 벌여야 할 테니까!
“전부 완료했어!”
“좋습니다. 그럼 바로 출발합시다!”
“고고고!”
슝!
저마다 총 50여 명의 정예 궁수병과 일반 궁수병을 이끌고,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가트웰 산맥의 휴포드 마을로 이동했다.
다행히 이제 막 리스폰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는지 유저들이 아직 많이 눈에 띄진 않았다.
“버닝스타다! 버닝스타도 왔어!”
“대박! 오늘 제대로 꿀잼이겠구나!”
그래도 항상 한산한 마을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하던 이곳답지 않게, 많은 편이긴 했다.
[산드로: 역시 예상대로네요. 일단 더 몰리기 전에 빨리 마을에서 벗어납시다!]
[축복받은얼굴: 벌써부터 이리 많아서야 이거 도착이나 제대로 하려나....]
잠깐 상황을 살피는 그 짧은 와중에도, 공간이동술사를 통해 유저들이 쉴 새 없이 넘어왔다.
‘평소 드래곤은커녕 레어 구경도 못 하게 꽉 막혀 있던 루트가, 지금부터는 뻥 뚫리게 될 테니까……. 아마 레이드를 직관하고 싶은 마음에 100레벨도 안 되는 유저들도, 이곳으로 몰리는 중일 거야.’
한데 그중에는 평범한 구경꾼 유저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버닝스타 이 개자식들!”
“오늘! 날 제대로 잡은 줄 알아라!”
“네놈들 숫자로 드래곤이 가당키나 해?”
1, 2군을 포함한 3군까지…….
모일 수 있는 인원은 전부 모이고 있는 듯, 여기저기 태성의 길드 마크를 달고 있는 유저들이 순식간에 늘어났다.
“그렇게 말씀만 하시지 말고…… 필드 위에서 직접 보여주시는 건 어때요? 저희는 곧바로 마을 밖으로 나갈 테니깐요.”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나지막하게 입을 떼자,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욕하는 걸 멈췄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도 모르게 한마디씩 툭툭 내뱉는 버릇만큼은 허접할 때나 지금이나 도무지 고쳐지질 않았다.
짧은 반성을 하면서, 난 길드원들을 이끌고 마을 입구 방향으로 향했다.
“오셨군요!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빠르셨네요. 전부 다 모인 겁니까?”
“네. 놈들도 건너편에 모이고 있는데, NPC들은 아직 끌고 오지 못한 것 같으니 먼저 출발할 수 있겠군요!”
지옥불.
그가 이끄는 피닉스의 정예들도 NPC 병사들을 죄다 끌고 나와 입구 한편에서 대기 중이었다.
두바이, 슈바이쳐 등등…….
익숙한 이름 뒤에는 칼젠에서 차출해 온 호위병 50명이 함께 서 있었다.
현재 타연에 NPC 병사의 레벨이 330레벨이 넘어가는 성은 5곳밖에 없다.
우리를 제외하면 태성의 피넬리와 듀크, 그리고 올림푸스의 토레노.
그 이하의 병사들은 드래곤에게 공격이 들어가지 않을 테니 굳이 차출해 올 필요가 없었다.
우리 두 길드가 합치면 NPC 궁수병은 모두 100여 명.
지난번 30명의 병사만 끌고 레이드에 나선 것을 생각하면 비교할 수 없이 좋은 여건이지만, 이들을 무사히 레어까지 끌고 가는 게 관건이었다.
또한, 도착하더라도 드래곤의 피를 충분히 소진시킬 때까지 각종 공격과 브레스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모로 힘든 레이드가 될 거야…….’
드래곤을 상대하는 동안 레어 앞이 뚫리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충분히 시뮬레이션하고 준비한 작전이지만, 역시나 가볍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문을 나서겠습니다! 엄호 부탁드립니다!”
지옥불의 선창과 함께, 서둘러 모인 피닉스 길드원 200여 명이 앞장섰다.
오늘 레이드를 함께 진행할 피닉스의 엄선된 정예 멤버들이었다.
“우와! 뜨자마자 잡으러 가나 보다!”
“피닉스와 버닝스타의 합동 레이드라니…… 무조건 끝까지 따라가서 구경한다!”
더불어 입구 앞에서 대기 중이던 유저 수백 명도 우리의 뒤에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본 지옥불은 가장 뒤로 빠지더니 유저들에게 외쳤다.
“피닉스의 길드 마스터 지옥불입니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이제부터 중요한 레이드를 진행하려 하니, 뒤쫓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드문 안으로 들어가면 드래곤의 브레스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부터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
평소 지옥불의 성격과 인품을 아는 유저들은, 그가 이렇게 정중하게 부탁하자 꼬장 부릴 법도 한데 조용히 걸음을 멈추어 주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유저들이 전부 다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니었다.
[축복받은무빙: 그래도 계속 따라오는 유저가 제법 있는데? 이대로면 레어 안까지 쫓아올 기세 같은데 어떻게 하지?]
[산드로: 지옥불님과 진작 상의해 봤는데요. 그런 유저들은 그냥 두기로 했어요. 어차피 우리한테 위협이 될 만한 태성 유저들 아이디는 모를 수가 없으니까, 섞여 있진 못할 거예요.]
레어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
구경꾼들이 쫓아오다가 몹들에게 죽거나 도착하더라도 죽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굳이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머더러를 감수하면서 정리할 필요까진 없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와이번 둥지로 향하는 오르막 코스.
삥 돌아서 올라가야 할 오른쪽 암벽 꼭대기에서, 한 부대의 궁수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여어, 오랜만이네요, 산드로 님! 이제 오시나 봐요?”
“비, 비상구 님? 여긴 어쩐 일로……?”
아틀란티스의 부길마이자 궁수 랭커 비상구.
천인대전에서 마지막 상대로 만난 적 있던 그가, 이곳에서 앞서 출발한 구경꾼 유저들을 ‘학살’하던 중이었다.
“별 이유 있겠어요?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는 거죠.”
예전 4강이라 불리던 길드들.
그중 고조선은 올림푸스에 흡수됐고, 피닉스는 단일 길드로 태성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해 버렸다.
아틀란티스 입장에서는 크게 잘못한 것도 없건만, 어느새 혼자만 크게 뒤처진 모양새.
이런 급변한 정세 때문에, 그들에게 나름의 결단이 강요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어서들 지나가세요! 태성 놈들이 이곳을 지나게 되면, 바로 귓말 드리겠습니다!”
‘이미 나 몰래 얘기가 돼 있는 일이구나. 내가 혹시나 반대할까 봐, 지옥불 님이 미리 말씀 안 하신 모양이야.’
태성과 다른…… ‘매너 길드’를 표방하고 있는 피닉스 길드.
그리고 줄곧 친(親)유저적인 스탠스를 취해온 나로서는 그저 구경꾼인 유저들까지 PK하는 것은 부담이었다.
한데 사실 말은 구경꾼이라지만, 그들이 언제 ‘꼬장’ 유저나 ‘먹자’로 돌변할진 모르는 법.
굳이 경고했는데도 쫓아오는 유저들을 이렇게 타 길드에서 정리해주면, 솔직히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일이었다.
“정말 이번 레이드를 위해 많은 유저들이 참여했네요.”
“레어로 향하는 이 인원 말고도 훨씬 더 많은 길드원들이 실시간으로 휴포드로 넘어오고 있습니다. 많이들 죽게 되겠지만, 태성의 발목을 잡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감수할만한 일이지요.”
최근 급성장한 피닉스는 우리 버닝스타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길드원들을 이끌게 되었다.
3군 길드가 따로 없는 그들로선 2군까지 합친 숫자가 태성보다 2배는 더 많을 정도.
그 인원들을 나름의 기준을 갖고 뽑은 것이기에, 특별 스킬인 ‘테이밍 몬스터’를 익힌 유저의 수도 제법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번 레이드를 위해 전부 ‘강화된 아이언 골렘’을 새롭게 펫으로 꼬시게 되었다.
타이탄이나 기타 중첩 쉴드 등을 활용하면 드래곤의 브레스를 버틸 수 있지만, 역시나 우리가 처음 발견한 이 방법보다 더 효과적인 수단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놈들이 레어 안으로 진입만 못 하도록 막으면…… 이번 레이드는 무조건 성공이다!’
[무적살라딘: 우리가 확실히 일찍 출발했나 보다. 병사들을 차출한 태성 길드원들은 이제야 막 마을로 넘어오고 있다고 하네.]
[산드로: 그래요? 조금 늦긴 했지만.... 어차피 한 방 싸움인 걸 놈들도 알고 있을 테니, 철저히 준비하고 오느라 늦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라스트챤스: 확실히 생각보다 무난히 전진하고 있긴 하네요. 마을 입구부터 엄청 치열할 줄 알았는데...]
무살 형님과 라챤이의 말이 아니더라도, 뭔가 우리가 예상했던 분위기는 아니었다.
리스폰 정찰에만 천 명씩 투입하는 태성이었는데, 우리가 침묵의 숲에 다다를 때까지 흔한 꼬장 한번 없다니……?
그저 그리폰으로 멀리서 우리의 이동 경로만 확인하는 유저 몇 놈만이, 와이번의 둥지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태성의 전부였다.
‘가만! 한 방 싸움을 준비하겠다고 느긋한 놈들이, 굳이 우리 이동 경로를 계속 감시하고 있다고? 어차피 레어로 향하는 게 뻔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뭔가 있다.
나와 지옥불, 그리고 여기 함께하는 모든 유저들이 놓친 무언가가……!
그게 무엇인지 급하게 생각에 빠진 사이, 우리는 밀려드는 와이번들을 전부 다 죽이고 마침내 침묵의 숲 입구에 도달했다.
여러 차례 방문해 익숙한 필드.
수백 명이 함께인지라 겁날 게 없는 우리 공격대는, 숲을 향해 거침없이 전진했다.
“잠깐만요!”
그 순간.
난 마침내 놈들의 속셈이 무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저와 축복받은얼굴, 그리고 지옥불 님이 앞장서겠습니다! 그 뒤로 NPC들을 배치해서 최대한 보호하는 진형으로 만들어 주세요!”
“응? 드로야, 굳이 왜 그러는 거야? 어서 이동해야지?”
“다들 긴장하세요! 곧 이 앞에서 태성 놈들이 나타날 겁니다!”
“산드로 님. 놈들이 뒤가 아니라 앞에서 나타난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늘 높이 솟은 거대한 자이언트 트리들.
둘레가 워낙 넓어 나무 뒤에 유저들이 숨는다면 충분히 감춰질 만했다.
하지만 거대한 크기만큼이나 나무들 간의 사이가 멀어, 도무지 대규모 병력이 숨어있을 공간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걸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었기에, 여기까지 이동하면서 다소 긴장이 풀어졌던 피닉스 길드원들이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NPC 병력들을 진영 한가운데로 몰아넣고는 침착하게 이동했다.
“……아무도 없잖아?”
그렇게 숲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오자, 이곳 특유의 그늘지고 적막한 분위기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앞에 있던 나무 뒤에서, 갑자기 유저 몇 명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하여간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른 놈이라니까?”
“제가 맞췄죠, 오빠? 그냥은 절대 안 들어올 거라고 말했잖아요!”
익숙한 실루엣과 목소리…….
바로 일도양단과 홍당무였다.
“다들 전투 준비!”
그걸 본 지옥불이 한 손을 들며 외쳤지만, 곧바로 내가 그의 말을 정정하며 외쳤다.
“아닙니다, 멈추지 마세요! 이대로 레어까지 전속력으로 전진하겠습니다!”
그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건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유저가, 그저 몇 명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슝! 슝! 슝! 슝!
우리 주변 비어있는 곳마다 순간이동하듯 나타나는 태성 유저들.
얼핏 봐도 수백 명을 넘어 천 명단 위에 가까운 유저들이 순식간에 우리를 둘러쌌다.
결코 마법이나 스킬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지금 상황.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맙소사! 이 많은 유저들이 전부 다 로그아웃한 채로 대기 중이었다고?”
로그아웃하면 숲 초입에서 로그인되는 이곳 필드만의 특징.
놈들은 그걸 활용하기 위해 그동안 레어까지 천 명 단위씩 이동했던 것이었다.
우리의 병력, 무엇보다 NPC 병사들을 몰살시킬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