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격돌 (3)
“루이투스 소환!”
이것저것 잴 틈이 없었다.
그저 재빨리 타이탄을 소환해서 NPC들을 보호할 생각만 들었을 뿐!
동시에 현중이와 지옥불에게도 외쳤다.
“어서 타이탄부터 소환하세요! 블로킹!”
어떻게 이 많은 인원의 입을 전부 막을 수 있었던 건지…….
놈들이 한꺼번에 로그인해서 나타난 숫자는, 이제껏 타연을 하면서도 처음 보는 광경일 정도로 상식을 초월했다.
“파이어 볼!”
“토네이도!”
“멀티 샷!”
콰광! 쾅! 쾅!
접속하자마자 쏟아붓는 놈들의 물량 공격에, 고요하던 숲속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번쩍!
그 와중에, 폭격이 쏟아지는 NPC들 바로 한가운데서 방패를 든 거대한 타이탄이 아군을 보호하며 솟아났다.
나이트급 타이탄, 레벤다스였다.
“모두 레어를 향해 달리세요! 심판의 전진!”
그리고 난, 외침과 함께 앞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태성의 길드원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전진기에 맞아 우수수 쓰러지는 태성 길드원들.
하지만 넉백에서 회복되는 시간은 짧았고, 놈들의 수는 많아도 너무 많았다.
“공격보다는 전진부터 하세요! NPC는 방어태세로!”
괜히 어그로가 끌려 멈춰버릴까 봐, NPC를 차출한 인원들은 공격을 금지시켰다.
그를 제외하고도 피닉스의 정예군은 200여 명.
분명 적지 않은 숫자였지만, 이렇게 천 명이 넘는 인원에게 갑자기 둘러싸이자 도무지 힘 싸움이 성립되질 않았다.
[축복받은무빙: 이 자식들, 전부 다 최소 330레벨 이상은 되는 것 같아! 정예들만 모아놨어!]
[라스트챤스: 태성이 완전 사활을 건 모양이에요! 안보이던 랭커까지 싹 다 여기 나타났어요!]
스치듯 눈앞에 떠오른 길드 채팅창을 빠르게 읽고, 상황을 파악해 봤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그랬다간 놈들이 이 숲을 차지한 채, NPC를 끌고 온 후발대와 함께 드래곤을 잡아버릴 거야.’
어쩌면 이번 레이드는 드래곤 공략보다는 서로가 차출한 각 성의 병사들.
즉, 서로의 NPC들을 지키고 죽이는 ‘호위(escort)’ 모드를 플레이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NPC 궁병 한 명이면, 드래곤을 상대로 동급의 유저 10명 이상이 딜링하는 것보다 많은 데미지가 들어간다.
분명 패치가 필요해 보일 수 있는 시스템적 허점을 이용한 레이드.
하지만 어찌 됐건 지금까지 아무런 조치가 없었으니, 현재는 허용되는 상태로 보고 있었다.
‘최대한 NPC들을 많이 살려서 레어까지 도착해야 해! 그곳에서 버티다 보면, 레이드를 시도할 각이 나올 거야!’
하지만 이놈들을 뚫고 전진하더라도 이 숲에 도사린 수많은 몹들이 남아 있다.
뒤는 태성, 앞은 몬스터 밭인 셈.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는 이 진퇴양난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선, 언제나 그래 왔듯 위험한 도박이 필요했다.
“궁병들 절반 정도는 죽어도 되니깐, 선봉을 좀 부탁합니다!”
현중이와 지옥불이 소환한 타이탄을 향해 외치고는, 육중한 루이투스의 몸을 이끌고 뒤편으로 달렸다.
쿵, 쿵, 쿵, 쿵!
빙 둘러싼 놈들을 뚫고 전진했던 터라, 후방에는 태성 놈들이 우글대며 쫓아오고 있었고.
난 그 한가운데로 점프하듯이 파고들었다.
“니들이 그렇게나 바라던 산드로 님 행차시다!”
내가 시도한 도박.
그건 나를 미끼로 한 ‘시간벌기’였다.
그리고 역시나…… 태성 놈들을 상대로 이것만큼 효과적인 어그로는 없었다.
“죽여 죽여!”
“이 개드로! 내 장궁 도로 뱉어랏!”
“윈드 커터!”
피닉스의 바로 뒤까지 따라붙었던 탱커가 뒤돌았고, 광역 스킬을 난사하던 원딜러들도 돌연 단일 스킬로 바꿔 나를 타겟팅했다.
“야이 멍청한 자식들아! 일단 작전대로 NPC들부터 조져!”
“갑자기 타겟팅은 왜 바꿔, 새끼들아! 산드로는 그냥 무시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홍당무와 일도양단.
하지만 이런 난장판에서 빼앗긴 이목을 되돌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외침이었다.
[영광의 검!]
발밑에 우글대는 놈들 한가운데로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멀티 히트 도중에 캔슬하며 들어간 광역 스킬!
그간 놈들의 레벨이 높아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위협적인 연계기였다.
“으악! 뭐야!”
“이거 왜 이리 아픈데!”
“후, 후진!!”
타이탄이 꽤 흔해졌더라도, 아직까지는 솔저급에는 맞아 봤어도 로드급을 맛봐 본 유저는 드물었다.
마치 신검으로 때리는 것마냥 위력적인 루이투스의 공격력에, 사정거리에 있던 태성 유저들이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보다 못한 일도양단이 내 앞으로 달려왔고.
째앵!
거대한 검끼리 맞부딪히는 쨍한 공명음이, 숲 전체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오, 양단이 너네 형이 하나 챙겨준 거야? 스틸당한 레벤다스 대신에?”
“닥쳐, 이 개자식! 오늘 넌 무조건 내가 죽여버린다!”
긴 대검을 들고 있는 푸른빛의 강철 기사.
솔저급 타이탄 ‘티에스 나이츠’의 등장이었다.
“누가 너하고 놀아주긴 하겠대?”
하지만 로드급으로 솔저급을 상대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건 전적으로 나의 손해!
녀석이 뭔 짓을 하든 철저히 무시한 채로, 피닉스 길드원을 따라붙는 딜러들에게로 몸을 날렸다.
“잔챙이는 그만 치고 날 좀 보라니까!”
“너야말로 나 좀 무시하라고 부하들을 닦달하더만, 왜 그리 흥분했어?”
쾅! 쾅!
몸과 검을 써 블로킹하는 일도양단의 타이탄을 피하며, 눈앞의 태성 놈들을 향해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턱!
그러다 보니 검의 궤적에 자이언트 트리가 걸리는 줄도 몰랐다.
휘두른 검이 실수로 나무 밑동에 박혀버리고 만 것이다.
나무들의 간격이 워낙 넓었지만, 그래도 이곳이 숲이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탓이었다.
“어? 설마?”
하지만 실수를 통해 배운다고 했던가?
타이탄의 검이 나무에 박혀버렸단 사실은, 내게 또 다른 영감을 주었다.
‘자이언트 트리도 오브젝트 판정을 받고 있었다니!’
그저 산이나 흐르는 강과 같은 맵의 일부분과 같이…….
이 거대한 나무들도 절대 훼손할 수 없는 ‘무적’ 판정이 적용 중인 배경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여태 이곳에서 사냥해 온 동안 광역 스킬이나 마법 등이 나무에 수도 없이 튀겼어도 조금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오브젝트 판정을 받는 ‘타이탄’이 휘두른 검에, 나무 또한 ‘오브젝트’ 판정을 받아 훼손된다는 것이 새롭게 확인됐다.
그렇다면 이 불리한 상황을 그나마 손쉽게 타개할 방법이 존재했다.
[산드로: 축굴아, 나한테 빨리 좀 와봐!]
[축복받은얼굴: 왜? 나 빠지면 못 버틸 텐데?]
[산드로: 그냥 잠깐만 와봐! 나무 좀 쓰러트리게!]
[축복받은얼굴: 엥?]
돌격 진형의 최전방에서 몹들의 어그로와 날아오는 공격들을 블로킹하던 레벤다스.
녀석이 군소리 없이 즉각 뒤돌아 뛰어왔다.
그리고 난, 막 피닉스 길드원들이 지나친 후방에 서서 바로 옆에 있는 자이언트 트리를 미친 듯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치 도끼로 나무를 패듯이!
“이 미친 자식! 갑자기 뭐 하는 거냐?”
“하하! 나무 두께 안 보이냐? 그게 팬다고 쓰러지겠…… 어라!”
비웃으며 나를 공격하던 태성의 딜러들.
하지만 나는 뚝심 있게 나무를 팼고 달려온 레벤다스도 전투 망치를 휘두르며 도왔다.
그러자 곧…….
우지끈!
두 타이탄의 강력한 공격력 덕분인지, 거대한 자이언트 트리가 금세 모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피, 피해!”
“깔리면 죽을 수도 있어!”
쿠웅!
이런 게 가능할지는 전혀 예상도 못 했었지만, 즉흥적인 시도가 먹혀들었다.
높이만도 100미터에 가까운 자이언트 트리가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이 한방으로, 태성 놈들의 병력을 2/3 이상을 가로막을 수 있었다.
“됐다! 다시 빨리 앞으로 가 봐!”
“넌?”
“혼자서 시간 좀 더 끌어봐야지. 아 참, 그리고!”
“응?”
“몹들은 일단 레어까지 쭉 끌고 가! 안까지 들어가면 어그로 초기화되는 거 알고 있지?”
“형님이 누군데 그걸 몰라! 아무튼 간다!”
잠시 주춤하던 레벤다스가 또다시 선봉을 향해 뛰어갔다.
자이언트 트리의 두께는 최소 7미터 이상.
이게 쓰러졌으니 유저 입장에서는 갑자기 7미터 높이의 방벽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옆으로 빙 둘러서 이동하면 그만이었지만,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차 있던 놈들의 전진은 한순간 막히게 되었다.
그리고 난, 나무 옆으로 돌아오는 녀석들을 향해 다시 한번 심판의 전진을 사용했다.
콰과과광!
“으악!”
“미친! 고작 한 명한테 도대체 몇 명이 휘둘리는 거야! 무시하고 지나가라고 쫌!”
뒤따라온 일도양단의 타이탄이 소리쳤지만, 아비규환인 이곳에서 그의 뜻대로 움직이는 유저는 찾아볼 수 없었다.
“너부터 좀 잘하고 밑에 애들 갈구든가 해라!”
“뭐라고?”
“하여간 실력도 없는 게 입만 살아 가지고!”
일도양단을 무시하면서 최대한 놈들의 진형을 무너뜨렸지만, 그래도 역시나 타이탄은 무적이 아니었다.
[겨울바다로부터 1,32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광휘의 방패가 2,510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사부님1로부터 2,882의 물리 피해를 입었습니다.]
……………………
[루이투스의 체력이 전부 소진되어 소환이 해제됩니다.]
잘 버티고 활약했다.
하지만 98만이라는 놀라운 HP는, 소환 유지 시간의 절반을 채 버티지 못하고 전부 소진되고 말았다.
위험한 소환 해제의 순간.
난 먼저 재빠른 몸놀림 버프를 사용해 이속을 높인 다음, 가까이에 있는 자이언트 트리를 향해 점프했다.
그리고는 벽을 달리듯, 나무 기둥 꼭대기까지 순식간에 타고 올라갔다.
“다 잡은 걸 이렇게 놓친다고?”
“쫓아갈 수 있는 사람 없어? 그리폰이라도!”
타연에 몇 개 없는 대도 부츠.
덕분에 굳이 은신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포위를 뚫을 수 있었다.
오히려 꼭대기에 올라오니 나무들끼리 가지가 얽혀 있어, 지상 못지않게 이동하는데 제약이 없었다.
‘분명 타이탄을 더 가지고 있을 텐데…… 일도양단 한 명밖에 쓰질 않았어. 한데 우리 측은 이 한 번의 공격에 3대나 허무하게 써버렸지……. 그것도 내 소중한 루이투스를!’
투 메르타스가 공중을 날아다니기 시작하는 후반 페이즈.
그것을 제지하려면 루이투스의 활약이 반드시 필요했다.
계획상 내가 중반까지는 레이드 대신 레어 디펜스에 몰두하더라도, 후반부만큼은 참여를 가정했던 결정적 이유였다.
한데 그런 카드를 이런 곳에서 낭비했으니, 이번 레이드의 성공 확률은 현저히 낮아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산드로: 어떻게 됐습니까? NPC들은 몇 명이나 살아남았어요?]
[축복받은파볼: 제법 괜찮아, 드로야! 한 80명은 남아있는 것 같아!]
[산드로: 오! 기습당한 것 치곤 괜찮은 편이네요!]
[라스트챤스: 타이탄들이 블로킹을 잘해줬고, 길드원들이 힐이랑 쉴드를 잘 써 줘서 많이 살아남았어요.]
나뭇가지 위를 성큼성큼 이동하면서도 전황(戰況)부터 체크했다.
이제 침묵의 숲을 관통한 지도 어느덧 절반.
시간을 잘 끈 덕분에 태성과 피닉스 간의 거리는 벌어졌지만, 여전히 규모는 네다섯 배 이상 차이 났다.
도착해서 레어 입구에 진을 친다 하더라도, 후발대가 도착할 때까지 과연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인 상황.
하지만 기습은 예상 못 했어도, 이런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은 애초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이제 이걸 쓸 타이밍이구나!”
인벤토리창, 꺼내기 좋은 자리에 위치해 있는 소모템을 힐끗 살펴보았다.
<심연의 구슬(유니크, 재료 아이템)>
* 구슬 속 심연의 파동이 몬스터들의 본능을 자극해 유혹합니다.
* 필드에 이 아이템을 설치하면 인근의 몬스터들이 구슬을 차지하기 위해 몰려듭니다.(지속 시간: 24시간)
시공의 틈새에 위치한 마을.
여러 NPC들에게 다양한 퀘스트와 아이템을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아이템은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타연에 처음 등장하는 종류의 특수 아이템.
무려 50만 어비스 수치라는 포인트와 맞바꿔야만 얻을 수 있는 이것은, 놀랍게도 일회용 소모템이었다.
‘노스랜드의 몹들이 죄다 크레바스 쪽에 몰려가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지!’
마치 먹잇감에 몰려드는 하이에나들처럼…….
이 심연의 구슬을 필드에 드랍해 놓으면 몬스터들이 몰려오게 된다.
아마도 필드 사냥터의 명당 싸움은 역사 속 옛이야기로 만들어버리게 될 아이템.
비록 몬스터가 이 구슬과 닿게 되면 그즉시 사라진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필드 곳곳에는 몬스터들이 다가가지 못하는 장소들이 존재했다.
빙하 계곡의 크레바스 틈 사이라든지, 높게 솟은 자이언트 트리의 기둥 한가운데라든지 말이다.
다리우스는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는, 노스랜드의 몹들을 한곳에 몰아넣는 데 줄곧 사용해 왔다.
(지옥불: 오고 계십니까 산드로님? 저희는 이제 막 레어 앞에 도착했습니다.)
(나: 안에는 아무도 없었나요?)
(지옥불: 네. 곧 태성이 들이닥치겠지만 다행히 이곳에 놈들은 없었습니다.)
그곳에서 죽치던 꿈틀이로부터 미리 확인했던 내용이지만, 그래도 천만다행이었다.
서둘러 레어 안으로 향하는 게 맞았지만, 그곳은 피닉스와 우리 길드원들을 믿고 맡기기로 했다.
내겐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으니.
‘더 많았으면 좋았겠지만…… 이거면 충분할 거야. 우리가 이걸 활용할 줄은, 아직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있을 테니까.’
당당검의 어비스 수치까지 전부 바쳐 구해온 심연의 구슬 3개.
이것들을 레어 인근에 몰래 풀어놔야 했다.
태성 놈들이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침묵의 숲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려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