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격돌 (4)
정말 매력적인 게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딜 봐도 불리한 상황이 분명한데도, 이와 같은 설렘으로 입가의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릴 적 새로운 게임을 접할 때마다 느꼈던 감정.
이제는 마모되어 한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 감정이, 갑자기 되살아났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타연을 못 끊지! 너무 재밌어서 미칠 것 같잖아!’
어느 순간부터 타연은 내게, 단순한 게임이 아니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인생역전의 도구, 혹은 직업의 일종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흔하디 흔한 이야기이자 진부한 과정.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복수가 목적이었지만, 운 좋게 신검을 얻고 점점 급성장하게 되자 ‘돈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최대한 의식적으로 배제해왔지만, 흙수저 출신으로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웠다.
마치 타연을 처음 플레이할 때처럼, 게임 플레이 자체에 순수한 즐거움만을 느끼고 있었다.
[이곳에 ‘심연의 구슬’을 설치하겠습니까?]
[YES]
비싼 일회성 아이템이라 그런지, 보기 드물게 템을 드랍하는 것 하나에도 확인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드래곤 레어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다다른 곳.
태성의 길드원들이 빼곡히 자리 잡은 필드 위 나무에, 첫 번째 심연의 구슬을 설치했다.
8성 은신을 사용한 채 나무를 타고 내려온 터라, 밑부분이라 해도 지상에서 족히 10미터 이상 떨어진 높이였다.
‘놈들이 이곳의 로그인 시스템을 이용해서, 이런 식으로 대규모 기습을 해올 줄이야……. 이 심연의 구슬을 얻자마자 노스랜드에서 활용한 것만도 놀라운데 말야.’
세상엔 셀 수 없이 많은 게임들이 존재하지만, 어느 게임에나 공략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일명 ‘정석’이라고 불리는, 많은 유저들이 선택하고 대중화된 ‘최적화’된 방법이!
하지만 그것 또한 처음엔 유저가 만든 것.
나는 그런 정석법보다 나은, 조금 더 효율적이면서 새로운 루트를 찾는 것에 항상 재미를 느껴왔다.
새로운 빌드와 루트, 남들은 시도하지 않았던 기상천외한 방법 등등…….
게임마다 그런 것들을 추구해왔던 나였기에 순수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우스…… 혹은 태성의 누군가가 시도한 이런 새로운 플레이 방식에!
‘사실 생각했던 대로만 되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게임도 없지. 될 것 같은데 안되고, 깨질 것 같은데 안 깨지는 게 게임의 묘미 아니겠어?’
치트키(cheat key)를 쓴 채로 하는 게임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다.
이번처럼 태성 길드가 내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하고 까다로운 상대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자, 오히려 호승심이 샘솟았다.
더불어 놈들이 가르쳐준 방법으로 놈들을 상대하는 지금 상황이, 미치도록 재밌게 느껴졌다.
“그냥 쳐들어가지 않고 왜 기다리는 거지? 우리가 압도적이잖아!”
“길마님을 기다리는 거겠지. 워낙 귀한 몸이시라, 안전해지지 않으면 절대 나서질 않는 분이시잖냐?”
두 번째 심연의 구슬을 설치하느라 나무 밑까지 내려간 탓에, 지상에서 태성의 3군 길드원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1, 2군 길드원들은 다리우스를 ‘군주님’이라고 칭할 정도로 엄청 떠받들던데…… 아무래도 3군까지는 결속이 단단하지 않은 듯싶었다.
여하튼 나무 틈새에 잘 보이지 않게 잘 박아넣은 다음, 마지막 심연의 구슬을 설치하러 이동했다.
‘이제 슬슬 효과가 나올 때가 됐는데…….’
침묵의 숲 끝에 자리 잡은 드래곤 레어.
이곳을 부채꼴 모양으로 감싸도록 구슬을 설치하게 되면, 숲에서 리스폰되는 대부분의 몬스터들이 이곳을 향해 달려오게 된다.
마치 랠리 포인트(rally point)가 찍힌 병력처럼, 잡아도 잡아도 끝없이 몰려올 이곳의 몹들.
흉폭한 오우거와 싸이클롭스, 비홀더의 조합은 아무리 천 명 가까이 모인 태성의 병력이라도 결국 지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뒤에 왜 이리 시끄러?”
“몰라. 이틀간 접속 대기만 했는데, 접속하고도 하는 일은 순 대기밖에 없네!”
안쪽인 이곳에선 사람에 치여 보이지 않지만, 외곽은 이미 다가오는 몹들을 잡느라 제법 분주해진 상태였다.
[이곳에 ‘심연의 구슬’을 설치하겠습니까?]
“끝났다! 니들이 이걸 언제쯤 눈치채는지 한번 두고 봐 주마!”
마지막 세 번째 구슬의 설치까지 끝나자, 다시 나무 꼭대기로 올라갔다.
[산드로: 아직도 대치 중이에요?]
[축복받은무빙: 어. 입구를 둘러싸고는, 멀리서 쳐다만 보지 들어오진 않네.]
우리 측 뒤에는 드래곤이 있으니 밀어붙이다 보면 뚫릴 수밖에 없는 모양새.
물론 내가 그렇다 놔두진 않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한데 태성은 레어 앞을 봉쇄만 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들은 드래곤을 레이드에 참가할 후발대를 기다리며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이었다.
‘다리우스 패거리……. 그리고 NPC 병사들!’
아마도 놈들 전부가 모이면, 한번에 밀고 들어가 곧바로 드래곤 레이드까지 해치울 작정인 듯싶었다.
이곳에서 죽은 유저들이 부활해서 다시 이곳에 찾기 전, 속전속결로 끝내기에 알맞은 작전.
하지만 늘 그래왔듯 놈들은 ‘나’란 변수를 가장 염두에 둬야 했는데, 오늘도 그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훼라리 소환!”
키에엑-!나무 꼭대기에 소환된 내 애룡에 건너 탄 뒤, 곧바로 레어 반대편을 향해 날갯짓했다.
웅성웅성.
내가 자신들의 머리 위에 있었던 걸 몰랐던 태성 측은, 내가 날아오른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떠들었다.
그러니 놈들 또한 모를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을 놔두고 어디로 향하는지!
[산드로: 최대한 버티고 계세요. 지금이 바로 놈들의 병사를 잡을 타이밍이니까,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축복받은무빙: 조심해라! 위험하면 절대 뛰어들지 말고!]
[산드로: 네, 형님!]
[축복받은얼굴: 우리에겐 아직 타이탄이 3대 남아있으니까 여차하면 버틸 순 있을 거야. 물론 그러면 타이탄 없이 드래곤을 잡아야 하니까 힘들어지겠지만... 심연의 구슬은 어떻게 됐어?]
[산드로: 3개 다 놈들 머리 위에 설치 끝났다. 아마 조금씩 효과가 나오기 시작할 겁니다. 지금은 이곳이 낯설어서 몹들이 많이 뜨는 줄 알겠지만, 끊임없이 몰려올 테니 부담이 계속 쌓일 거예요!]
워낙 빠른 속도라 금세 침묵의 숲 입구까지 도달했다.
오면서 훑어봤는데, 뒤따라온 태성 유저들과 피닉스 길드원들이 마주쳐 초입 부근 곳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직 여기까진 못 왔나 보네.’
허나 내가 노리는 대상은 없었다.
난 그대로 와이번의 둥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키익! 키익!
곧바로 공중에 날아다니던 와이번들이 어그로가 끌려 다가왔으나, 늘 있었던 일.
무시한 채 계속 둥지를 향해 날아가자 곧 태성의 후발 부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자식들 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무슨…… 오늘 여기로 다 모인 거야?”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것이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무려 2, 3천 명이 훌쩍 넘어가는 저 대규모 유저들의 이동 모습을!
레벨이 어중간한 길드원은 고레벨의 몬스터나 유저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하등 쓸모가 없다.
그 때문에 이곳까지 모이고 따라온 유저라면, 최소 ‘고레벨’ 소리는 들을 수준으로 판단하는 게 맞았다.
그걸 고려했을 때.
놈들의 저 비상식적으로 많이 모인 유저들의 숫자는, 최악을 가정했던 우리의 예상도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어쩐지 좀 늦는다 싶었다. 암만 이번 드래곤은 꼭 잡아야 한다 해도,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저 정도 인원이라면 NPC 병사들의 존재가 의미 있을까?
브레스를 피하기 위해서는 소규모 병력이 알맞을 테니 그래도 필요는 하려나?
순간 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는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다.
내가 상대하려는 태성 길드의 실체를 비로소 눈으로 직접 확인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하랴? 이랴!”
난 마치 말을 탄 것처럼, 훼라리의 고삐를 당겨 놈들 상공을 지나쳤다.
목표는 하나.
와이번의 둥지에서 최대한 많은 와이번들을 끌고 와 돌격하는 것이었다.
띠딩! 띠딩! 띠딩!
세는 걸 포기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그로 감지음이 미친듯이 울렸다.
와이번에게 원거리 공격 수단이 하나라도 있었다면 불가능할 일.
하지만 타연 최고 이속을 자랑하는 훼라리 덕분에 두려운 건 없었다.
그리고 루이투스 없이 놈들 한복판으로 뛰어드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겁나지 않았다.
휘이이잉!
워낙 많은 몹들이 끌린 터라 길게 선회하면서 꼬리를 문 와이번들을 바라봤다.
둥지 전체에 있던 놈들을 전부 다 깨운 터라, 족히 200마리는 따라오는 모양새.
이 많은 와이번들을 끌고 다른 곳으로 갈 수만 있다면!
이곳 둥지만 벗어나면 어그로가 풀려버리기 때문에, 그런 발칙한 상상은 이뤄질 수 없지만…….
불행히도 태성의 후발 부대는 지금 이 와이번의 둥지를 막 지나치고 있었다.
“온다!”
“벼, 별거 아냐! 전부 침착하게 공격해!”
선회로 방향을 잡고 NPC 병사가 모여 있는 적진 한가운데로 강하하자, 놈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수많은 비행 물체들을 눈치 못 챘다는 것은 어불성설.
진작부터 놈들은 내가 덮치는 순간만을 준비하고 있었다.
분명 많은 숫자의 와이번이지만, 저 떼거지 유저들을 상대하기엔 적은 감이 있었다.
하지만 한 마리 한 마리가 중대형 몬스터이자 정예급인 와이번은 충분히 벌어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목적을 달성하고 치고 빠질 시간을!
[재빠른 몸놀림!]
[그림자 밟기!]
끔찍할 정도로 우글대는 태성 길드 마크의 향연.
공중에서 훼라리를 역소환시키며, NPC 병사 하나를 목표로 이동기를 사용해 지상에 내려왔다.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온갖 공격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콰광! 쾅! 쾅!
[마나 쉴드가 1,599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2,102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422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
순식간에 깎여나가는 내 MP 칸.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덫 설치 스킬부터 시전했다.
펑!
길었던 2초간의 캐스팅이 끝나자, 곧바로 덫의 효과로 선택한 ‘연막’이 놈들 한가운데서 터져버렸다.
“연막이다!”
“어림없지! 토네이도!”
“에어 밤!”
한데 침착하게 대응하는 태성의 마법사들.
덕분에 내 연막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가 싶더니만 금세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다시 보인다! 무조건 잡아!”
“제 발로 이 안에 뛰어들다니! 진짜 제대로 미친놈이었네!”
주변에서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지금부터 내 1초는, 1분과도 같이 소중히 쓰여야 했으니까!
[스킬 가속 상태가 되어 60초 동안 모든 스킬의 사용 대기시간이 10%로 줄어듭니다.]
푹, 연속 베기! 급소 찌르기!
평캔과 함께 단일 타겟 스킬 2방이 연속으로 박히자, 눈앞의 NPC 궁수병이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다음!’
놈들이 끌고 온 피넬리성의 궁수병들.
정예 기사단원과 일반 병사가 섞여 있었지만, 죄다 궁수병들인 탓에 HP와 방어력이 높지 않았다.
“여깄다!”
그런 나를 발견한 인근의 유저가 곧바로 다가와 공격해왔다.
하지만 난 방어 스킬을 하나 써버린 후, 유저는 무시한 채 옆에 있는 병사들을 마저 잡았다.
[집중 회피(고유 스킬): ★★★★★☆☆☆)]
* 마나 소비: 160
* 사용 대기시간: 60초
* (passive) 물리 공격에 피격 시, 12%의 확률로 회피합니다.
* (active) 8초간 회피 능력을 극대화해, 머리와 몸통을 제외한 곳에 피격 시 회피 판정을 받습니다.
휘휙! 휙! 휙!
둘러싼 근접 딜러들이 휘두른 공격과 날아온 화살이 등에 꽂혔지만, 피격되는 게 현저히 적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내가 겁 없이 이곳에 뛰어든 이유.
그건 단테리오의 팔찌를 발동시키면 이 집중 회피를 무한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내 마법방어력은 타연의 넘버원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어지간한 마법들은 저항이 떠버리거나 데미지가 얼마 들어오지도 않았다.
랭커에 들어서게 되면서, 웬만한 고레벨 유저들로부터도 보정 효과까지 들어오게 되어 더욱 그러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유저들에게 둘러싸였다 한들 마법 데미지는 두렵지 않았다.
걸리는 건 오직 물리 피해뿐.
하지만 다가와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인원은 한정돼 있었고, 이 많은 유저들의 틈바구니를 뚫고 들어올 화살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NPC를 데려온 놈들은 드래곤 레이드를 이끌 태성의 주요 병력.
마침 내가 잡던 병사의 주인이 홍길동이었는지, 녀석이 곧바로 튀어나오며 반격했다.
“객기를 부리다니! 이게 웬 땡큐야!”
그와 동시에 반경 20미터 안에 있던 모든 도둑 유저들이 내 뒤로 한꺼번에 집결해버렸다.
무려 수십 명의 도둑이 나 하나를 대상으로 전부 그림자 밟기를 사용한 것!
“형이 놀아줄 시간이 없구나!”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은, 내가 뛰어들기 전 예측했던 그대로였다.
[그림자 밟기!]
난 뭉쳐버린 도둑들을 뒤로한 채, 반대편에 있는 궁수병을 향해 또다시 그림자 밟기를 시전했다.
8성 그림자 밟기의 사용 대기시간은 45초.
궁병 몇 마리를 잡는 동안, 스킬 가속으로 인해 그밟의 쿨타임이 금세 채워졌던 것이다.
“어, 어디 갔어?”
무한 집중 회피.
그리고 4.5초마다 사용할 수 있는 그림자 밟기.
이 2가지가, 내가 이번 태성과의 필드전에서 NPC들을 혼자 잡아내겠다고 자신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