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불청객 (2)
이제 죽으면 무조건 마신검을 드랍할 수밖에 없는 녀석으로선, 이번 레이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큰 결단이었을 것이다.
로드급 타이탄은 그만큼 막강하고 유용한 존재라 빠지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한데 입구조차 들어가 보지 못하고 쫓겨나는 꼴이라니…….
팅! 팅!
숲으로 향하는 우리를 향해 얼음 화살과 둔화 마법 등이 날아왔지만, 램보의 은빛 갈기가 전부 튕겨버렸다.
“수고했다 램보, 이만 돌아가 봐!”
침묵의 숲 입구까지는 금방 도착했다.
난 램보의 체력을 아껴놓기 위해 돌려보낸 뒤,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갔다.
몬스터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곳곳에선 필드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여기까진 성공적이야.’
우리가 먼저 레어 안까지 NPC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리고 뒤쫓아오는 태성을 막으며, 놈들의 NPC들을 전멸시킨다.
그 후 입구를 막는 사이 드래곤을 레이드한다.
지옥불과 내가 세웠던 대략적인 계획.
예상 못 한 부분들로 인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달성해 냈다.
‘물론…… 너무 많은 카드를 써버리긴 했지만…….’
기습으로 우리 측 NPC 병사들의 숫자가 줄었고, 탱킹을 맡을 타이탄은 루이투스를 비롯해 절반이나 꺼내버렸다.
거기다 단테리오의 팔찌 또한 쿨타임에 걸려버렸고, 훼라리와 볼포마저 전투 불능이 됐다.
사실상 내가 위험에 빠지게 되면, 도주할 수 있는 수단들이 전부 봉쇄된 상태.
예전의 나였다면 절대 전장으로 되돌아가지 않았을 상황이었다.
[산드로: 임무 완수했습니다. 태성의 NPC들을 거의 다 죽였어요. 보너스로 다리우스의 타이탄도 얼떨결에 꺼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라스트챤스: 네? 제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죠?]
[축복받은파볼: 미춌다 증말! 오늘도 또 드로 혼자 다 해 먹는 거야?]
[축복받은무빙: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고도, 내심 혼자는 벅찰 거라 생각했는데.... 대단하다 드로야]
[축복받은얼굴: 이제 어떡할 거야? 루이투스도 써버렸는데, 레어로 오는 건 좀 위험하지 않겠어?]
타탓! 탓! 탓!
하지만 난 자이언트 트리의 가지들을 밟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산드로: 다음 임무가 남았잖아. 지금부터는 입구에 있는 놈들을 잡으며 피닉스 후발부대의 길을 뚫겠습니다. 다들 그다음은 아시죠?]
[축복받은얼굴: 너무 무리하진 마라. 사방이 태성 놈들로 깔렸는데 조심해야지.]
[산드로: 어쩔 수 없어. 내가 벌인 일이니까 내가 책임져야지.]
써먹을 카드가 부족해졌으니 내 역할은 더더욱 중요해진 탓.
이제 난 있으나 마나 한 그저 그런 유저가 아닌, 누구도 대체 불가능한 유저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여기서 내가 빠진다는 건, 곧바로 이번 레이드 경쟁의 패배를 자인하는 일이었다.
“역시 효과 하나는 확실하구나. 이것만큼은 확실히 영자가 태성의 뒤를 봐줬던 게 아니었어. 역시 생각보단 개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은 건가……?”
나와 당당검쯤 되니깐 잠깐 사이 3개나 얻은 것이지, 심연의 구슬은 상당히 얻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그래서 설명만 읽어보고 직접 사용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지상에는 노스랜드에서 봤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곳곳에서 전투 중인 유저들.
그들 사이를 침묵의 숲 몬스터들이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시한 채 전진하고 있었다.
내가 설치해둔 심연의 구슬이 있는 방향으로!
“광역만 쓰지 마! 치지만 않으면 돌아보지 않으니까!“
“이게 뭔 일이래? 이 숲에 하도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어그로에 문제가 생긴 건가?“
“혹시 이거 버그 아냐?“
운 좋게 숲까지 당도한 몇몇 일반 유저들도, 덕분에 아무런 위험 없이 레어까지 이동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렇게 조금 더 나아가자, 곧 내가 심어둔 구슬이 만들어 놓은 파급력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으아, 도대체 뭐 이리 몹이 많은 거야? 리스폰 속도가 미쳤어!”
“침묵의 숲이 원래 이런 곳이었어? 우리가 몹들이랑 필드전하러 온 건 아니잖아!”
“앞에선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데? 뒤에서 이렇게 개고생하는 걸 모르고 있는 거야?”
레어를 포위한 태성의 1천 부대.
그 후방은 계속해서 몰려오는 몬스터들로 인해 많이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병력이 뭉쳐있는 것과 포위하느라 펼쳐져 있는 것은, 당연히 밀집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밀집도가 높던 때는 다가오기도 전에 죽어버리던 몹들이, 지금은 다가와 몇 대 때리고 죽을 만큼 화력이 분산됐다.
이 조그만 차이는 대치가 길어지는 동안 무시할 수 없는 누적 피해를 쌓고 있었다.
유저의 마나와 쿨타임은 유한한데, 몹들과의 전투는 후방에 있는 유저들만 독박 쓰는 구조였으니 말이다.
‘그런 너희들이라 참 미안하네. 근데 어쩌겠어? 적한테 인정사정 봐줄 수는 없는 거잖아?’
쉭- 착!
나무줄기 중간까지 내려온 뒤, 길게 점프를 해서 지상에 착지했다.
목표는 당연히 하나.
계속 돌진해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후방에 있는 태성 유저들이었다.
펑!
“뭐야?”
“아 씨, 연막 뭔데? 누가 지금 이딴 장난을 쳐?”
이런 대규모 병력을 상대할 때는, 항상 연막 덫으로 시작하는 게 최고였다.
설마 내가 이곳에 나타났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지, 녀석들은 연막이 터졌어도 크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물론 처음에만!
[연속 베기!]
“크악! 어떤 새끼가 공격하잖아!”
“사, 산드로야!”
“거기 앞에 뭐 해! 여기 산드로 떴다고!!”
공격을 시작하자, 곧 녀석들은 난리법석이 나버렸다.
약간 어두운 숲 내부.
그것도 몹들을 상대하는 와중에 들어온 뒤치기라,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잠시 패닉이 온 듯한 반응이었다.
‘방금 전에 물량 지옥을 겪고 와서 그런가? 여긴 왜 이렇게 겁나는 게 없냐!’
쉭, 쉬익!
싸이클롭스의 거대한 몽둥이가 내려치는 유저를 우선으로 공격하다 보니, 2배는 더 빠르게 죽어버리는 느낌이었다.
기본적으로 쉴드나 힐이 계속 들어왔지만, 도무지 데미지를 커버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죽어 나갔다.
“야! 앞에 놈들! 이 새낄 이대로 놔둘 거냐고!”
죽어 나가는 유저들의 절규에도,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애초에 난 이런 다대일 전투를 대비해서 철저한 계산하에 만들어진 캐릭터.
완성되기 전에 어떻게든 날 잡으려 노력했어야지, 지금처럼 쌀이 밥이 돼버린 후에 후회해봤자 늦어버렸다.
솨아아- 솨아아-!
재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죽은 유저들의 회색빛 먼지가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야말로 숲속의 악몽.
유저들에게 ‘사신’이라 불리는 머덕도 지금 내 모습을 봤다면, 그 별명을 당장 반납해버릴 수준이었다.
[라스트챤스: 형님, 이 자식들 다가옵니다. 드디어 붙나 봐요!]
타탓! 탓!
이곳이 내게 정말 천혜(天惠)의 장소인 것이, 미친 듯이 살육을 벌이다가도 위험하거나 잠시 시간이 필요하면 아무 나무나 타고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대도 부츠가 없는 유저들 중에 쫓아올 수 있는 건 비행 탈 것을 보유한 유저나 마법사 정도였는데, 둘 다 내겐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존재라 그런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산드로: 알겠다! 뒤에서 계속 흔들고 있을 테니까 최대한 버텨봐!]
(지옥불: 산드로님. 놈들의 후발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데 공격이 시작됐습니다.)
(나: 조금만 어떻게든 버텨주세요. 지금 전투가 벌어진 건 어떻게 보면 더 이득입니다. 포위한 병력과 후발부대가 합쳐지지 않은 상태니까요!)
(지옥불: 버티기 힘들다는 게 문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태성 바로 뒤에 있는 저희 측 병력이 태성을 뚫고 도착할 수 있도록, 엄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떠버린 투 메르타스의 리스폰 소식.
그 탓에 뒤늦게 쫓아온 피닉스 측 병력의 수도 적지 않았다.
태성이 아무리 타연 최대 규모의 길드를 자랑한다지만, 피닉스 또한 이제는 견줄만한 길드.
보통 ‘성길’에 드는 유저들은, 모험이나 단순 플레이보다는 유저 간의 대립을 즐기는 ‘전투광’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지옥불의 명령 탓인지 순수히 재밌어서인지, 허겁지겁 이곳으로 달려온 피닉스의 후발대의 수도 얼추 3백 명 가까이 모인 상태였다.
소규모 국지전을 뚫고 이 정도까지 모인 건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숫자의 태성 부대가 와이번의 둥지를 지나고 있으니, 피닉스 측이 더 이상의 후발대를 추가하긴 힘들어 보였다.
‘즉, 이들이 레어를 지킬 마지막 병력인 셈이야. 내가 이들과 함께 입구를 지키게 되면, 멤버들이 NPC들로 레이드를 시도할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을 거야!’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
최대한 속전속결로 입구를 막고 있는 태성을 뚫고, 레어 안의 병력과 합류해야 했다.
더 이상 조금이라도 지체하거나 망설인다면, 오늘의 레이드는 그대로 실패일 테니까!
착!
“엇! 산드로 님?”
“지옥불 님께 들으셨죠? 지금부터 태성군을 뚫고 레어 안까지 진입하겠습니다!”
숲 한쪽 구석에 모여 있던 피닉스의 후발대.
그들 앞에 착지하면서 말을 건넸다.
5분대기조처럼 리스폰만을 기다리다 즉시 출발한 선발대만큼은 아니었지만, 이들 또한 공성전에서 자주 마주쳤던 낯익은 아이디들로 이루어진 정예였다.
“무리해서 뚫으려 하기 보단, 차츰차츰 줄여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지금 저희 뒤로 태성 놈들 수천 명이 달려오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이제는 레어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입구를 방어하는 게 최선입니다.”
“이런…… 알겠습니다! 그럼 산드로 님의 지휘를 따르겠습니다! 저에게 타이탄이 있는데, 지금 소환할까요?”
“아닙니다. 적이 소환하더라도 아끼시고, 레어를 방어할 때 쓰세요. 길은 제가 트겠으니, 길드원들이 좀 죽더라도 절대 멈추지 마세요!”
“네!”
피닉스의 간부이자 탱커인 ‘댜크홀스’.
랭커는 아니지만 상당히 실력 있는 유저라고 들었는데, 벌써 타이탄 라이더가 된 것을 보면 역시나 피닉스에서 인정받는 길드원인 것 같았다.
“간드아아!”
“다 쓸어버려!”
“와아아!!”
태성의 기습부대 1천 명.
레어를 지키는 우리 측 2백과 뒤에서 공격하는 피닉스군 3백.
이런저런 유저까지 합치면 2천 명이 이곳에서 대규모 필드전을 벌이고 있었기에, 사방이 시끄럽고 치열해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적 또한 마찬가지.
나와 댜크홀스가 이끄는 피닉스군은 놈들의 후방을 차분히 뚫어나가기 시작했다.
“피닉스의 후발대다! 여기 좀 막아줘!”
“레어로 들어가려는 속셈이야!”
“절대 못 지나간다! 티에스 나이츠 소환!”
번쩍!
순식간에 십수 명을 죽이며 전진하던 중, 바로 앞에 타이탄이 나타났다.
아무리 솔저급이어도 이런 대규모 전장 한복판에서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했다.
워낙 긴 리치를 자랑하는 타이탄인지라, 평타만 휘둘러도 한 번에 열댓 명이 넘는 유저에게 강력한 데미지를 안겨줬다.
그러니 놈이 우리를 계속 공격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재빠른 몸놀림!]
타탓!
이럴 때를 위해 아껴둔 자버프를 걸자마자, 곧바로 타이탄의 무릎을 박차고 몸 위로 껑충껑충 뛰어올랐다.
그리곤 등 위에 두 발을 밀착시킨 뒤, 비장의 스킬을 사용했다.
[난도질!]
원래 10분의 대기시간이 있어 자주 쓸 수 없는 스킬이지만, 스킬 가속화 도중에 사용했던 터라 쿨타임이 금방 돌아온 상태였다.
고작 솔저급에게 사용하기엔 아까웠지만, 지금은 뭘 아낄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빠르게 이곳을 통과한다.
오직 그 목표만을 생각하며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른 결과!
번쩍!
방금 소환됐떤 티에스 나이츠는 나타난 지 10여 초 만에, 도로 역소환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말도 안 돼!”
“미친! 타이탄이 이렇게 허무하게 당한다고?”
“개사기 아냐!!”
태성 측 유저들의 벙찐 표정과 반응.
사라진 타이탄 때문에 지상에 착지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그들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예전 내가 매그넘 시절, 랭커였던 일도양단과 처음 마주쳤을 때 느꼈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미안하지만…… 타연은 원래 그런 게임이야.’
템 착용이나 스킬 습득 제한이 거의 없는 것처럼, 이 게임에는 따로 리미트가 존재하지 않았다.
조합과 템빨에 따라 이론상 얼마든지 강해질 수 있는 시스템.
이것이 극대화된 결과물이 바로 지금의 내 캐릭터였다.
“계속 전진하세요! 걸리적거리는 건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넵!”
잠시 주춤했던 피닉스군을 독려하며, 또다시 앞으로 나섰다.
전방은 레어를 뚫겠다고 집중하고 있는지, 타이탄 한 놈을 해치우자 의외로 전진은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렇게 놈들을 해치우며 거대한 레어의 윤곽이 보일 때쯤, 머리 위에서 갑작스럽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딱 맞게 왔군! 이제 저희가 왔으니, 함께 태성을 물리칩시다!”
순간 자이언트 트리에 새하얀 열매가 흐드러지게 열린 것으로 착각할 만큼, 수많은 페가수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대략 살펴봐도 백여 기가 넘어 보이는 엄청난 숫자.
마치 타연에 존재하는 페가수스 펫들이 전부 다 이 자리에 모인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산드로! 레어로 가고 있었지? 우리가 길을 뚫는 걸 돕겠다!”
그중 한 페가수스가 우리가 서 있는 곳으로 활공하며 다가왔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얼마 전 신화국을 건국한 올림푸스의 수장 ‘제독’이 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