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길마의 자격 (2)
귀환 주문서의 캐스팅이 진행되는 동안, 멀리 입구 쪽을 한 번 훑어봤다.
뒤늦게 당도한 태성의 후발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모습.
하지만 녀석들도 드래곤이 죽는 모습을 목격해서 그런지, 뭔가 맥이 빠진 느낌이 확연히 전해졌다.
‘결국 우리가 승리했다, 다리우스. 그러니 이제, 시공의 틈새도 우리가 마저 가져가마!’
저 많은 수를 상대하면서, 최강의 필드 보스 몹까지 잡아내다니…….
스스로도 실감이 안 날 정도로 대단한 위업을 세워버렸다.
그렇게 귀환한 아베르 성.
갑작스러운 장소 변화로 적막한 이곳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아직 나는 쉴 틈이 없었다.
“다들 너무 수고가 많았습니다. 잠시 지옥불 님을 만나 뵙고 오면, 그때 다시 회포를 풀기로 하죠.”
“수고야 뭘…… 오늘도 네가 제일 많이 고생했지. 그래,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말고, 어서 다녀와라.”
“네, 축빙 형님.”
다행히도 이번 필드전 겸 레이드를 진행하면서, 우리 길드원은 아무도 죽지 않았다.
이 기적적인 일에 대한 공치사를 미루고 칼젠 성으로 향했다.
* * *
“오셨군요, 산드로 님.”
“어서 와라. 고생했다.”
지옥불이 초대한 칼젠 주성 안.
이곳에 먼저 와있던 제독이 마치 자신의 성에 온 것마냥 함께 반겨줬다.
“벌써 와 계셨네요?”
“그래, 정산할 게 남아있으니까.”
“정산이라고요?”
잠시 스친 인연도 인연이라고 형님 대접해줬더니만…….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미쳤나?
“아아, 말실수를 했군. 오해는 말고, 미리 루팅 방법은 정하고 시작했으니 불만은 없다. 다만 서로 간에 불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교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무슨 교환을 해요? 먹은 것도 얼마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지금부터 에누리를 얹어봐야지.”
오늘 그가 어떤 행동을 한 것인지.
그리고 나와 지옥불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친 건지.
전혀 개의치 않는 듯이, 하고픈 말을 태연하게 내뱉고 있었다.
과연 내가 알던 사람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제독 님. 그럼 하시던 말씀 계속하시지요. 원하시는 게 뭐라고 하셨지요?”
“드래곤 하트입니다. 제가 주운 미완성 스킬북과 페가수스의 깃털 20개. 이걸로 교환을 요청드립니다.”
페가수스 깃털이라고?
설마 이게 제독이 페가수스 부대를 갖게 된 비결?
“페가수스 깃털? 처음 들어 보는데…… 퀘템인가 보죠?”
“그래. 그리폰의 알처럼 퀘스트를 완료하면 페가수스를 펫으로 얻을 수 있는 템이다. 지금껏 테이밍으로밖에 얻지 못하던 걸 한 번에 20마리나 얻을 수 있다는 뜻이지.”
“흠…….”
“지옥불 님이시라면 이게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 당연히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참고로 이건 현재 저희 올림푸스만 얻을 수 있는 템이라고 장담할 수 있습니다.”
타연에 존재하는 모든 페가수스를 합한 것보다 많이 보유한 게 의문이었는데, 내심 짐작했던 그대로였다.
테이밍 몬스터는 특별 스킬.
아무나 얻을 수 없을뿐더러 원한다고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올림푸스의 대규모 페가수스 부대는, 템이나 퀘스트로 주어지는 펫으로 만들어졌다는 결론만이 도출됐다.
(나: 지옥불님. 설마 넘겨주실 건 아니시죠? 오늘 드랍템 중에서 이게 가장 알짜배기인데요?)
(지옥불: 그럴 리야 없지요. 그저 어떻게 나오는지 두고 보고 있었습니다.)
과연.
뜸을 들이길래 설마 했는데, 역시 지옥불은 만만찮은 내공을 지닌 유저였다.
“죄송합니다. 안타깝지만 그건 저도 양보해드릴 수 없는 템입니다. 오히려 제독 님께서도 타이탄 연구소를 만드셨으니, 투 메르타스의 심장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모를 실 리 없을 텐데…… 제게 그런 제안을 하시다니 의아하군요.”
드래곤 하트.
무려 최초로 등장한 디바인 급 영단이라 나야 그냥 혼자 먹고 끝내버렸지만.
이 템에 적혀 있는 설명만 읽어보더라도 이 템이 가진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각종 무기와 방어구 제작, 속성 부여 따위의 옵션도 무척 좋아 보였지만, 이것만큼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 타이탄의 동력 역할로 사용이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무려 타이탄 제작의 재료.
디바인 급 재료 템이 들어가는 데, 어느 수준의 타이탄이 완성될지는 직접 만들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로드급은 단 7기로 한정됐으니, 분명히 나이트급으로 제작될 터.
연구소를 설립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제독은, 눈 가리고 아웅 하듯 터무니없는 거래를 요구하던 셈이었다.
“오히려 제가 제독 님께 부탁드리고 싶군요. 미완성 스킬북을 드셨지요? 그걸 저희 피닉스에 파실 생각은 없습니까?”
“허헛! 하나 먹은 것마저 가져가시려 합니까? 죄송합니다. 그럼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시만요, 제독 님. 이대로 가시게요?”
정말 바로 자리를 박차고 떠나려는 생각이었는지.
급하게 몸을 돌리는 그를 붙잡아 세웠다.
“응? 내게 남은 볼일이라도……?”
“오늘 일에 대해서 해명하고 가셔야죠. 지옥불 님께서는 덮어두시려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오늘 같은 짓을 벌인 겁니까?”
“무슨 생각이라니? 이미 다 말했잖아. 태성을 상대로 함께 싸우고, 그 후에 레이드도 함께 진행한 것뿐이라고. 설마 태성이 너희만의 적이고, 필드 보스도 너희만의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하필이면 우리가 태성의 NPC들도 잡아내고, 포위를 뚫어버리기 직전에야 찾아오셨죠. 레이드도 공략 세팅을 다 해놓으니까 속 편하게 딜만 보태셨고요. 그게 노리고 온 게 아니라면 뭔가요? 제독 님. 아니 제독 형님! 형님이 이렇게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변함없는 그의 뻔뻔한 태도에, 결국 핏대를 높여 소리치게 되었다.
‘도대체 형님이 왜? 아베르 성을 점령하기 위해 올림푸스 길드원들과 함께하기도 했는데…… 갑자기 이렇게나 돌변해버린 이유가 뭐야?’
가만히 우리 둘을 지켜보는 지옥불.
잠시 입을 닫고 있던 제독은 그런 우리를 마주하며 말을 건넸다.
“아무래도 드로 네가 아직 이 게임을 제대로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뭔가 착각한 모양이구나. 하긴 쭉 솔플만 해왔으니 아직 모르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네?”
“지옥불 님이나 너나, 지금은 엄연히 타연에서 손꼽히는 길드의 마스터들이다. 그건 우리의 적인 다리우스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지. 이게 의미하는 바를 아직도 모르고 있었던 거냐?”
“그거랑 오늘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씀이신 건데요!”
“지옥불 님. 님께서는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계시겠지요?”
내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자, 그가 지옥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결국,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지옥불이 입을 열었다.
“산드로 님. 제독 님께서 하신 행동과 말씀에는 사실 잘못된 게 없습니다. 어쩌면 제가 제독 님 입장이었더라도 똑같이 행동했을지 모르지요.”
“네? 지옥불 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독 님이 직접 말씀하시진 않았지만, 사실 지금 저희를 책망하고 있는 겁니다. 태성과 함께 싸우던 과거와 달리, 저희 피닉스가 버닝스타와만 뜻을 함께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지요.”
“……네?”
순간 지옥불의 설명이 말도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었지만, 곱씹어 생각하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전엔 4강 길드끼리 다 함께 다리우스 암살을 진행할 정도로 연합이 잘됐었는데, 피닉스의 약진이 두드러진 이후부터는 어느샌가 흐지부지됐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는 4강 길드가 점차 도태되거나 흡수되어, 피닉스와 올림푸스 2강 구도로 변하게 되었고.
나는 이런 길드 간 정세에 대해,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하고 간과해왔던 것이었다.
“그럼 저희끼리만 뭉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셨다는 말씀이신 거죠? 지옥불 님의 말씀이 맞나요, 제독 형님?”
“불만이라니…… 사람 일이란 게 내 뜻대로만 될 수는 없으니 그런 건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위기의식’을 느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
“오늘 우리의 행동이 노매너에 뻔뻔한 짓이었다는 건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이런다고 둘 다 내게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지 않나? 태성만으로도 벅찬 상태일 텐데, 우리 신화국까지 적으로 돌릴 수는 없을 테니!”
“그렇다고 이런 짓을요?”
“그렇기에 이런 짓을 벌인 거다, 산드로! 네가 나를 적대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와 함께할 생각은 없지 않나? 둘 사이에 우리 신화국이 함께 할 수 없는 건 기정사실인데, 내가 여기서 체면 차리겠다고 뻔히 보이는 이득을 내팽개칠 이유가 있을까?”
“저희가 타이탄을 넘겼던 것처럼, 얼마든지 함께할 방법이 있잖아요! 그런데도 굳이 척을 지는 선택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하하! 너에게 그런 마음이 정말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왜 이번 레이드를 준비하는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았지? 두 길드가 계속 막대한 보상을 공유하고 성장해 나갈수록, 우리 신화국은 제자리에서 점차 도태되어 갈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길드 마스터.
한 명의 유저가 아닌, 대형 길드를 이끌고 있는 그의 마음이 어떤 건지 조금은 헤아려 볼 필요가 있었다.
물론 처음 결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태성을 무너트릴 파트너로 피닉스를 선택한 것에 한 줌의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런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되고 난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점차 게임 체인저가 되고 거물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에 들떠있었을 뿐.
그게 어떤 파급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를 믿고 우리 길드에 들어온 길드원들. 난 그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 이미 누군가에게 이 게임은 단순한 게임을 넘어 직업이자, 꿈, 삶의 낙 등이 돼버린 지 오래. 그런 그들이 날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타 길드원들에게 욕 좀 얻어먹는 게 뭐 대수일까? 우리 길드원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난 그 누구와도 싸울 각오가 되어있다.”
“…….”
“기억해라, 드로. 너도 이제, 너 하나뿐만이 아닌 버닝스타 전체를 책임지는 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에 대한 네 책임감 또한 무거워진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제독은 잠시 멈췄던 발걸음을 떼고 성 밖으로 나갔다.
“지옥불 님은…… 진작 다 알고 계셨군요?”
“사실 모를 수가 없지요. 그가 감춰뒀던 페가수스 부대를 전부 끌고 나타난 걸 본 순간부터, 제게 무언(無言)의 시위를 하러 왔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끝없이 성장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것처럼.
타연을 하는 유저들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 수없이 많은 열망이 부딪히고 얽히는 장소가, 바로 이 게임 속 전장이었다는 사실도!
‘죄송하지만…… 형님의 그런 뜻을 알게 됐다 하더라도 변하는 건 없을 겁니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타연 속에서 가장 큰 열망을 가진 유저가 바로 저일 테니까요.’
현실적으로 모두와 함께하고 다 함께 잘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앞으로 플레이하는 동안 생길 충돌과 아쉬움들은, 안타깝지만 감수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치열한 필드전을 뚫고, 결국 피닉스와 버닝스타 길드가 그렇게 드래곤을 레이드하는 데 성공했군요! 이로 인해 각종 커뮤니티들이 지금도 뜨겁게 불타고 있는데요. 김석용 아나운서께서는 이번 사건을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드래곤, 그리고 산드로 님의 엄청난 활약. 이것들에 가려져 많은 유저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요. 사실 이번 필드전은 최초로 이루어진 삼국 간의 대립이기도 했습니다.』
『네? 아……하? 정말 그렇네요! 마지막에 올림푸스의 제독 님께서도 길드원들을 이끌고 합류하셨으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동안은 태성 길드와 적대 관계이기는 해도, 직접적으로 필드 위에서 대립한 길드들이 거의 없었죠. 한데 이번에는 무려 신화국과 리버스국, 두 국가가 티에스국을 함께 상대한 공식적인 첫 전투였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듣고는, 오늘 사건이 향후 타연 속 정세를 결정지을 중요한 분수령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볼 거냐? 시간 남았을 때 푹 자서, 좋은 컨디션으로 도전하는 게 낫지 않겠어?”
“좀만 더 보고.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런지, 지금은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네.”
제독이 떠나간 후.
약속했던 대로 용의 부산물만 건네받고 나머지 템들은 전부 지옥불에게 넘겨주었다.
그래도 이번에 워낙 내 활약이 두드러졌기에, 은신의 망토를 하나 건네받아 현중이에게 챙겨줄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시공의 나락에 있는 악마 군단장의 레이드.
지난 며칠간 시동을 몇 번 걸어봤기에, 이번에 ‘자격을 갖춘 자’ 업적을 얻은 피닉스 길드원들과 함께 내일 바로 레이드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 약속을 정하고 로그아웃을 했는데, 잠이 쉬이 오지 않아 현중이와 타이토닉TV를 시청 중이었다.
“뭔 생각이 그렇게 많아서 그래? 오늘 이 정도의 성과면, 계획했던 것보다 더 완벽하게 성공한 거 아냐?”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좋았지. 그거 말고. 제독 형님의 마지막 뒷모습이 자꾸 어른거리네.”
“그 양아치가 왜? 뭐가 어쨌길래?”
나도 제독이 뻔뻔한 양아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사정을 알게 된 후에는 도무지 그렇게 여길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남들로부터 욕먹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길드원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한 사람.
어찌 보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길드 마스터’의 모습일 수도 있었다.
‘남한테 욕먹기 싫어하는 내 성격으로는……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명예욕, 자부심, 긍지…….
이런 게 없는 사람이었다면 이 치열한 타연 판에서 국왕의 자리에 오르는 일이 가능했을 리 없다.
그런 그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길드원들을 생각한 결과.
템이야 적게 먹었을지 몰라도 정예 길드원 수십 명은 최상위급 업적 2개씩을 챙겨줄 수 있었다.
‘각자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과연 선악이나 명분이라는 게 의미가 있을까? 언젠가 내게도 그런 선택의 순간이 찾아온다면……?’
명분을 택할지, 아니면 사리(私利)를 챙길지.
마음속으로 제독의 선택을 곱씹으면서,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