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군단장 레이드 (1)
[산드로: 다들 좋은 아침....이라고 하려 했는데, 많이들 없네요?]
[당근당근단검: 아직 새벽이니까요. 일찍 접속하셨네요?]
[산드로: 당당님이야말로 안 주무셨어요? 오늘 군단장 레이드 하려면 푹 쉬셨어야 할 텐데... 어제도 많이 힘들었잖아요.]
[당근당근단검: 원래 잠이 많지 않아요. 그게 제가 도둑 1위였던 비결이었죠ㅎㅎ]
겨우 잠들었다 설자고 일어나 보니, 유일하게 당당검만 접속해 있었다.
접속 목록에 둘만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제는 조금 더 우리 길드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예전과 달리 살갑게 반겨주는 그였다.
[산드로: 어디 계세요? 혹시 시공?]
[당근당근단검: 네. 지금 오시겠어요?]
[산드로: 당연히 가야죠! 퀘스트를 마저 깨려고 일찍 접속한 건데요!]
참 내가 생각해도 바쁘게 진행된 나날들이었다.
한시도 쉴 틈이 없이 진행된 전투와 레이드들.
한데, 오늘 있을 도전에 앞서 끝마쳐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반복 퀘스트였던 ‘다가오는 심연의 위협’.
20번을 먼저 완료한 당당검은, 이 퀘스트를 깨게 되면 마침내 환영의 마탑 입장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군단장 레이드에 앞서, 나머지 3번의 반복 퀘스트를 채우기 위해 시공의 틈새로 향했다.
[금지, ‘시공의 틈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로써…… 금지가 풀리게 되려나?’
드래곤 레이드를 준비하는 동안 조사하고 사냥해본 결과, 이곳은 많은 장점을 갖고 있는 필드였다.
그러니 본토 마을에 초대형 포탈이 설치되고 나면, 이곳에 수많은 유저들이 드나들게 될 게 분명했다.
먼저 이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어비스 수치(abyss point).
심연의 몬스터를 죽이거나 마을의 퀘스트를 완료하면 주어지는 이 수치는, 경험치나 장비들로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었다.
빠른 레벨업을 원하는 유저들에게는 골드나 템 대신 경험치를 드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이곳을 선호할 것이 당연했지만.
어비스 수치를 지불하고 원하는 장비와 교환한다는 것 또한 상당한 메리트가 있었다.
보통 사냥터에서 드랍하는 아이템은, 본인에게 필요 없거나 원하지 않는 것들이 드랍되는 경우가 상당히 잦았기 때문이다.
그런 유저들에게 원하는 장비를 ‘선택’할 수 있는 사냥터가 주어진다면,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현존하는 최고 레벨의 사냥터라, 새로운 고급 장비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라면!
“벌써 오셨네요!”
“네. 저에겐 훼라리가 있잖아요. 요놈 때문에 사냥터 이동만큼은 항상 편하게 하고 있습니다.”
“도둑이 테이밍 몬스터를 배운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선택이셨을 텐데……. 그래도 얼마나 좋은지 직접 증명해 주셨으니, 저도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배워보려고요.”
“꼭 그러세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선택일 겁니다. 어차피 당당검 님도 솔플 체질이시니까 더더욱이요!”
이미 혼자 사냥을 시작한 지 제법 지났는지.
몹이 잘 리스폰 되는 포인트에 도착했는데 심연의 몬스터들이 통 보이질 않았다.
“저기 있잖아요…… 길마 님?”
“네?”
“이제 저도 길드 가입한 지 시간이 꽤 흘렀는데…… 길마 님을 형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다른 분들처럼요.”
“그럼요! 얼마든지 편하신 대로 부르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형님께서도 앞으로는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동안 동생에게 존댓말 쓰시느라 불편하셨죠?”
“아니, 전혀! 언젠간 너도 우리 길드에 정 붙일 날이 올 거라고 기다리고 있었지. 그날이 오늘인가 보다?”
“하하…… 그런가요?”
어색하게 웃는 당당검.
이제껏 내가 만나본 모든 유저 중에서 가장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지만, 어딘가 사람 상대하는 게 어색해 보일 때가 종종 있었다.
본인 스스로도 그런 성격을 잘 알고 있는지, 일부러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 같았고.
하지만 다리우스 킬은 물론 이번 드래곤 레이드까지 함께 겪고 나자, 무언가 느낀 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 또한 길드를 창설하고 감동받은 적이 많았던 우리 길드원들.
그런 좋은 사람들과 함께 게임하다 보니 심정에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태성 놈들은 보이지 않았지?”
“네. 그때 이후로 전혀 얼씬도 안 하고 있어요. 아마 여기는 그냥 포기한 게 아닐까 싶네요.”
“하긴 드래곤도 우리가 잡아서 이젠 쪽수도 안될 테니까……. 그럼 이제 흔적이나 좀 잡아 볼까나? 어디에 있으려나? 여기에 잘 뜨는 놈인데 어째 하나도 안 보이네?”
“제가 심흔만 찾아서 몰고 와 드릴까요?”
“오! 그러면 나야 고맙지. 저녁까지 그놈을 60마리나 잡아야 하는데!”
이곳에서 솔플이 가능한 유저는 타연에 몇 명 되지 않겠지만, 공교롭게도 우리 둘은 그 몇 명에 속한 유저들이었다.
그래서 당당검은 겁 없이 혼자 심연의 흔적을 찾아 나섰고, 난 이곳에 남아 다른 놈이 리스폰되는지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이것이 여기가 사냥터로 좋은 두 번째 이유.
심연의 몹은 하나가 여럿과 비슷할만큼 많은 경험치를 줄 뿐만 아니라, 워낙 거대해 어그로 감지 범위도 무척이나 넓었다.
그래서 당당검이 서 있던 일명 ‘포인트’ 같은 이곳에 자리만 잡으면, 제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몹들이 알아서 몰려왔다.
거기다 원거리 공격 수단도 없는 놈들이다 보니까, 조만간 이곳이 어떤 곳으로 변할지 뻔히 예상됐다.
오직 마법사와 궁수들로만 이루어진 파티.
원딜러들의 최애 사냥터로 각광받게 될 것이!
* * *
“후아! 드디어 끝이다, 이 자식아!”
호라이즌 마을의 촌장, 아드리안.
녀석에게 드디어 반복 퀘스트의 20번째 보상을 받았다.
곁에서 끝까지 도와준 당당검 덕분에, 지겨웠지만 그래도 수월하게 완료할 수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그럼 어서 다음 키워드로 말을 걸어 보세요.”
“어, 그래. 아드리안, 그동안 ‘시공의 나락’에 있는 ‘군단장’이 골치였죠? 내가 그놈을 잡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시공의 벽을 넘어온 본토인이여. 그대들의 포탈로 이어진 시공간은 여전히 불안정하기 이를 데 없네. 허나 만약 그대들이 군단장이 지닌 카오스 스톤을 빼앗아 올 수만 있다면, 그대들 뿐만 아니라 우리도 마침내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르오!”
영구 포탈이 설치된다 한들, NPC인 당신들이 이 마을을 떠날 수 있을까?
분명 우리가 돌아갈 고향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어쩌고저쩌고 이곳에 남아있을 핑계를 대겠지.
“즉, 군단장을 죽이고 ‘카오스 스톤’이란 걸 주워오면 된다는 거죠?”
“그렇다네. 결국 그에게서 카오스 스톤을 뺏는 것을 포기한 ‘주나스’. 마을 북쪽에 위치한 환영의 마탑주에게 가져다 주면 그가 해답을 알려줄 걸세. 우리 마을을 심연의 몬스터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방어 마법진 또한 그가 설치해 주었으니…….”
띠링!
[시공의 너머를 향하여: 메인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S
* 시공의 나락에 자리 잡은 악마 군단장 베르몬을 토벌하라.
-‘카오스 스톤(!)’을 환영의 마탑주 주나스에게 전달
* 퀘스트 클리어 보상: ?
역시 선행했던 당당검의 말대로, 바로 메인 퀘스트를 획득할 수 있었다.
아직 설명은 물음표로 표시됐지만, 어떤 보상이 주어질지 모를 수가 없었다.
[산드로: 군단장 레이드 퀘스트, 방금 받았습니다!]
[축복받은얼굴: 오! 수고했다. 이제 놈만 잡으러 가면 되겠네!]
[산드로: 다들 준비되셨으면 성으로 모여주세요. 피닉스도 이제 부르겠습니다.]
퀘스트 없이 군단장을 잡았다가, 혹여나 카오스 스톤을 드랍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준비했다.
물론 군단장 레이드를 진행할 인원을 모으기 위해, 드래곤이라는 선행 과제도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긴 했었지만.
(나: 저희 쪽은 이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지옥불: 아! 저희 측도 전부 모여있었습니다. 그럼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곧 도착하겠습니다.)
어느덧 약속했던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곧바로 주성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기다리자, 곧 지옥불이 피닉스의 정예 30여 명을 이끌고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지옥불 님.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산드로 님. 버닝스타 덕분에 오랜만에 아베르 성을 찾게 됐군요. 오면서 봤는데 외성 마을이 많이 번화해졌더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보다야 호박 길드가 고생이 많았죠. 아무튼 일단 들어가시죠.”
두바이, 댜크홀스, 슈바이쳐 등등…….
그를 따라온 멤버들은 하나같이 랭커거나 랭커급에 이르는 쟁쟁한 유저들이었다.
그리고 모두, 어제 드래곤을 함께 레이드하며 금지 출입의 업적을 얻은 몸들이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하하! 잘 지내셨어요? 듀메인 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성도 나름 아늑하고 좋아보이죠?”
그런 그들이었기에, 원래 같은 길드원이었던 라챤이를 보자 서로 장난스럽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이게 그 포탈이군요. 시공의 틈새로 향하는…….”
“네. 들어가서도 한참을 걸어야 하니, 바로 가실까요?”
주성의 홀 한가운데 설치된 검붉은 포탈.
그곳을 통해 우리 버닝스타 전원과 피닉스의 공격대가 진입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오! 색감이 알록달록, 여기 완전 내 취향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런지, 필드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시끌벅적해졌다.
어떤 기분인지 충분히 알기에 제재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 조금은 긴장할 필요가 있었기에 지옥불에게 간단히 주의를 환기시켜주기를 부탁했다.
“들으셨겠지만 이곳은 귀환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레이드 도중 태성의 뒤치기가 들어온다면 상당히 위험할 수도 있죠. 이곳에 뜨는 심연의 몬스터들도 상당히 강력해서 난이도도 제법 있는 편이고요.”
“흠……. 제가 전달하기 보다는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겠군요.”
“네?”
“일단 초대를 받아보시지요.”
[‘지옥불’ 님이 공격대에 초대합니다. 수락하겠습니까?]
[YES]
[‘지옥불’ 님이 공격대장을 ‘산드로’ 님으로 변경했습니다.]
“이게 무슨……?”
“어차피 저희들로만 레이드에 도전하는 건데, 굳이 파티를 나눠서 공략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편하게 채팅과 전투 정보를 공유하고, 아이템 획득 권한도 공격대장 1인으로 한정해서 진행하도록 하지요.”
“아니, 이러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괜찮습니다. 레이드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기도 하니, 최소한의 안전을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하시고 부담 갖지 마시지요.”
우리 버닝스타의 전체 인원은 7명.
반면 피닉스는 30명이 넘어갔다.
인원으로 보나 지휘 능력으로 보나, 모두 지옥불이 공격대장을 하는 게 맞는데 그는 서슴없이 포기했다.
단순히 시스템적 권한만 넘긴 것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타연에서 이런 대규모 레이드, 그것도 퍼스트 킬을 시도하는 공격대의 유저들간에는 오래전부터 공유하고 있는 특별한 규칙이 있었다.
레이드 진행 중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공격대장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굳이 둘로 나눠서 진행하기보단 하나로 합치자는 제의를 못 하던 이유였는데, 지옥불은 흔쾌히 그 자리를 양보해 주었다.
자신의 정예 부하들 목숨을 내게 통째로 맡긴 것이나 다름없는 일.
그런 그의 마음 씀씀이와 속 깊은 배려에 다시 한 번 감동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도대체 뭐라고…….’
평생 누군가에게 이런 신뢰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지옥불이 가끔씩 이렇게 대할 때면 묘하게 울컥거렸다.
“저희 측이 현재 가져온 타이탄은 모두 3대입니다. 총 5대를 생산해서 갖고 있지만 소환 쿨타임 때문에 이게 전부이지요. 두바이, 댜크홀스, 에이전트. 이렇게 셋이 타이탄 라이더이니, 원하시는 타이밍에 적절히 투입하시면 될 겁니다.”
어제 드래곤 레이드와 필드전을 하면서 소진된 체력 때문에, 가용 가능한 타이탄의 수는 많지 않았다.
그건 내 루이투스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악마 계열 몹을 상대할 때는 타이탄보다 내 신검이 훨씬 위력적일 것이 뻔하기도 했고, 최대한 빠르게 레이드를 진행할 필요성이 생겼기에 서둘렀다.
아무래도 올림푸스의 페가수스 부대라는, 이곳에 입장가능한 새로운 변수가 추가되었으니 말이다.
“최대한 모든 전력을 이끌고 오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옥불 님. 그럼, 일단 놈이 있는 시공의 나락으로 출발해 볼까요?”
“네. 그러지요.”
워낙 넓은 필드라 우리 측 포탈에서 시공의 나락까지 가는 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하지만 이곳엔 오직 우리뿐이라 급할 게 없었기에, 여러 심연의 몬스터들을 되도록 깔끔하게 정리해나가며 안전하게 이동했다.
그렇게 조금씩 전진한 결과, 우리 공격대는 마침내 군단장의 모습이 보이는 언덕 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혹시나 태성이 수작질을 부려놓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멀쩡하네요!”
“라챤아. 걔들이 그럴 정신이나 있었겠냐? 길마와 간부들은 여기서 줘터졌고, 드래곤도 뺏어보겠답시고 엄청 투자했다가 쪽박만 찼는데?”
“흐흐,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방심하지는 마. 만약 우리가 놈들이라면 순순히 레이드 하도록 놔뒀겠어? 언제 도중에 난입해서 꼬장 부릴지도 모르니까 집중하자. 물론 그런 짓을 벌이려면, 놈들도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길드원들과 잠시 대화를 나눈 다음, 곧 나란히 서 있는 공격대 전원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부터 퍼스트 킬을 가져갈, 악마 군단장 레이드의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다들 주목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