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군단장 레이드 (2)
어쩌다 한 길드의 마스터까지 되긴 했지만, 뜬금없이 공격대장이라니…….
얼떨결에 맡았지만, 줄곧 솔플만 해왔던 내겐 정말로 안 어울리는 직책이었다.
“어그로가 유지되는 반피가 될 때까지는, 말씀드린 핑퐁 방식으로 탱킹하겠습니다. 아마 저희 둘이 어그로를 놓칠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하시고 딜은 팍팍 넣으셔도 될 겁니다. 후반 페이즈엔 거의 무조건 부하 몹을 소환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면 1팀인 지옥불 님과 2팀인 두바이 님께서 각각 어그로를 반씩 담당해 주시고 3팀은 계속해서 딜을 보태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라챤아! 넌 사정거리가 가장 기니깐 언덕 위에서 딜하면서, 누가 접근하는지 계속 확인하는 걸 잊지 말고!”
“네엡!”
매그넘03으로 플레이하던 시절.
그래도 가끔은 얻고 싶은 장비가 있어 즉석에서 모은 공격대, 즉 ‘막공격대’에 한 번씩 참여해본 경험이 있다.
장비와 실력이 검증되고 역할 분배가 철저한 길드 소속이나 정규 공격대가 아닌, 어중이떠중이들로 숫자만 채운 공격대.
48인 인던, ‘캘커라 도적단 소굴’의 레이드를 위해 참여했던 총 10여 번의 다양한 공격대를 겪어본 뒤, 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레벨과 장비보다 중요한 컨트롤의 중요성.
직업군 구성 비율에 따라 달라지는 클리어 난이도 등등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바로 진행자, 즉 공격대장의 리더쉽이었다.
‘괜찮은 장비와 멤버들을 데리고도 수십 번 전멸해 결국 포기한 적이 있는가 하면, 30명도 안 되는 즉흥 공격대로 클리어시켜버린 공대장도 있었지…….’
공격대장의 오더에 따라, 같은 놈인 게 분명한 보스 몹은 천차만별의 난이도를 보여주었다.
어떤 때는 진행 내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쉽게.
어떤 때는 죽어도 못 깰 것만 같은 지옥 같은 모습으로!
오늘 이 악마 군단장의 레이드는 태성이나 다른 유저들의 방해가 없이 이루어진다.
그러니 성패는 물론이고, 이 많은 유저들이 고생하느냐 안 하느냐는 오로지 내 오더 하나에 달려 있었다.
‘최소한의 죽음으로…… 놈의 퍼스트 킬을 가져가겠다!’
어제 그토록 많은 길드원들이 희생해 주었는데, 다시 피닉스의 최정예들마저 죽게 만들 순 없었다.
나를 믿고 맡긴 만큼, 결코 그들에게 최악의 공격대장으로 기억되고 싶진 않았다.
“이렇게 편성한 3개 팀으로 공략하겠습니다. 어그로 관리가 잘되면 각각 군단장을 중심으로 삼각 대형을 유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네, 그럼. 축굴아!”
“옥케이! 진작에 지탱의 오라로 바꿔놨다!”
현존하는 최고레벨 몬스터가 등장하는 시공의 틈새.
이곳의 필드 보스답게, 군단장 또한 최강의 난이도를 자랑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물론 투 메르타스처럼 ‘초월종’에 속할 만큼 거대한 보스는 아니었지만, 알 수 없는 패턴과 레벨 보정 효과로 더욱 까다로운 레이드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버닝스타와 피닉스.
이 두 길드 또한 타연 최강의 유저들인 건 마찬가지.
그중에서도 축복받은얼굴, 내 친구 현중이는 어느새 타연에서 손꼽히는 탱커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탱킹 시작하겠습니다! 버프 주세요!”
녀석이 심연이 소용돌이치는 분지(盆地) 아래, 시공의 나락으로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외쳤다.
8미터의 거대한 위용의 악마 몬스터.
관자놀이에는 두 개의 뿔이 단단히 솟아 있었고, 검은 광택을 자랑하는 중갑옷 사이로는 피처럼 붉은 피부가 번들대고 있었다.
<심연의 잠식된 군단장 베르몬>
시뻘건 네임 바마저 위협적으로 보이는 보스.
녀석에게 겁 없이 뛰어들던 현중이가 스킬을 시전했다.
[도발의 살기!]
이미 군단장은 멀리서부터 초록 안광을 번뜩이며 현중이를 돌아보았다.
한데 도발 스킬까지 맞아버리자, 곧바로 준비된 멘트를 외치며 전투의 포문을 열었다.
“너희 중간계 놈들은 진정 포기를 모르는구나! 이 지긋지긋한 족속들!”
녀석의 한 손에 머금은 푸른 불꽃이 주변을 휩쓸었다.
고유 공격기로 보이는 광역 스킬.
하지만 현중이를 제외한 누구도 다가서지 않았기에, 다른 맞은 이는 없었다.
“이 자식 뭐라냐? 우리는 처음 공격하는 건데?”
“냅둬라. 이곳 NPC들과 10년간 전투 중인 설정인가 보더라고.”
탱커가 어그로를 충분히 쌓는 초반 구간.
우리는 느긋하게 대화까지 나눠가며 현중이 혼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멀리서 구경했다.
“자, 이제 접근해서 삼각 대형으로 감싸겠습니다!”
디바인 방패와 드라코닉 풀 세트 착용.
거기다 사실상 최강의 탱커 직업인 성기사.
그 덕에 현중이에게 군단장의 단일 공격이 집중되고 있는데도, 전혀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
“와! 이 집 탱커 제대로네! 템도 템이지만 흘리는 무빙도 상당하신데?”
“페이즈만 바뀌지 않으면, 혼자 딜로도 잡으시겠다. 물론 하루 종일 걸리겠지만!”
“든든해 보이는 게, 딱 히캬가 생각나는 폼이네…….”
“조용히 안 하냐? 여기서 걔가 왜 나와?”
갑자기 튀어나온 그 이름.
확실히 피닉스와 레이드를 함께하다 보니, 나로선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인물이 갑자기 언급됐다.
‘하긴…… 성기사 랭킹 1위에다, 타연 최강의 탱커 중 하나로 날아다니던 놈이었으니까……. 그 자리를 그냥 갔던 건 아니겠지.’
이곳에 넘어와 레이드에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이 피닉스의 최정예라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었다.
따라서 분명 그들은 지난 세월 히든캬드와 함께 파티하고 사냥을 하며, 레이드도 수없이 성공했을 측근들.
같은 성기사이면서 탱커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내는 현중이의 활약을 보고, 그의 옛 모습이 떠오를 만도 했을 것이다.
“조금씩 패턴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공속도 좀 빨라진 것 같고요. 1팀 힐러분들은 2팀 힐러분들과 체인지해서 마나 관리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두 힘드시겠지만 집중해 주세요!”
하지만 지금 이 자리는 그런 추억을 되새기고 있을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직 미공개 상태인 고레벨의 필드 보스를 첫 트라이하는 순간.
잠시라도 방심하다가 덜컥 몇 명이 죽기라도 하면, 레이드는 순식간에 실패해 버릴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차분히 피닉스 길드원들을 다독이며 전황을 살폈다.
‘이거 참……. 확실히 인원이 많다 보니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니네. 나만 잘하면 됐던 시절이 편하긴 했는데.’
조 편성과 파티원 분배도 내가.
각자 위치할 장소 지정과 밸런스 체크도 내가.
레이드를 책임지고 이끌어나갈 우리 버닝스타 지휘만으로도 정신없을 일인데, 심지어 첫 트라이하는 보스라 공격 패턴 분석도 실시간으로 해야만 했다.
거기다 혹시 모를 태성의 뒤치기나 심연의 몬스터들 리스폰까지 체크해야 했으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 머리엔 과부하가 일어났고, 책임감으로 인해 부담도 극심했다.
하지만 그러는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마음 한쪽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은근히 즐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격대장’.
그간 솔플만 해왔기에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
마냥 귀찮기만 하고 쓸데없어 보였던 이 역할은, 직접 해보니까 생각보단 훨씬 ‘재미’있는 일이었다.
‘이래서 공대장들이 그렇게나 욕먹고 비난받으면서도…… 이 자리를 놓지 못했던 거구나.’
자신의 지휘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지는 수많은 유저들.
생각한 전략대로 척척 이루어지는 협력과 성취감!
“오늘 너희가…… 내 화를 단단히 돋우는구나!”
이 역시도 내가 모르고 있던, 타연을 즐기는 플레이 방식 중 하나였던 것이다.
“이제 75% 구간, 페이즈 변경입니다! 핑퐁 딜링으로 변경하겠습니다!”
안정적인 탱킹과 잘 통제된 원딜 때문에, 금세 2번째 페이즈로 접어들었다.
이 구간부터는 녀석의 공격력이 2배로 증가한다.
미리 시동을 걸어보며 파악해 두었던 구간.
따라서 여기서부터는, 현중이와 내가 어그로를 번갈아 가면서 탱킹을 하기로 택틱(tactic)을 세워두었다.
“8힐러 전원이 골고루 힐만 사용해서 마나 관리 부탁드립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그레이터 힐은 아직 아껴두세요!”
이 순간을 위해 현중이가 딜을 하는 와중에도, 난 근접 딜러로선 유일하게 군단장의 뒤에서 간간이 검을 쑤셔 넣고 있었다.
차곡차곡 현중이가 축적한 어그롤 수치를 따라가기 위해.
그 덕분인지, 쏟아지는 힐과 쉴드에도 현중이의 피가 반 피 가까이 빠지게 되자 재빠른 몸놀림 한 번의 사용으로 군단장이 나를 뒤돌아보게 만들 수 있었다.
[마나 쉴드가 18,772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19,886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군단장 베르몬의 공격을 회피했습니다.]
쾅! 쾅!
군단장이 휘두른 장검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데미지가 들어왔다.
레벨과 업적, 장비 등이 좋아졌는데도 이 정도 피해라면 얼추 투 메르타스의 평타와 비슷한 수준.
하지만 드래곤과 달리 이족 보행을 하는 녀석의 특성상, 집중 회피를 쓰니 보고 피할 만한 공격들이 제법 있었다.
‘그간 용살검의 활약에 빛을 못 봤는데…… 오늘 군단장한테 원 한 번 제대로 풀어 보자!’
* 암 속성 몬스터 및 악마 계열, 언데드 몬스터에게 물리 데미지 +4840(+968)
* 타격 시 25% 확률로 빛 속성의 마법 데미지 +2420(+484)
마계 몬스터들을 잘 볼 수 없어서 그렇지, 어쩌다 한 번씩 마주치면 이 신검의 위력에 나조차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아무리 놈의 공격력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이 신검으로 공격하게 되면?
말 그대로 MP가 쭉쭉 흡수돼 버려서, 힐러의 도움 하나 없이도 피 관리가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축굴아, 다시 네가!”
[도발의 살기!]
그래도 역시나 공격대급 필드 보스는 필드 보스.
내 레벨이 더 높다면 모를까, 이대로 녀석을 상대로 무한정 탱킹을 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공격을 멈춰 현중이에게로 어그로를 넘겨줬다.
“첫 트라이가 맞는 거야? 이거 너무 스무스하지 않아?”
“생각보다 쉬운 놈일지도……?”
탱킹과 딜러 역할에 투입됐지만, 공격대장의 역할은 여전히 내 몫이었다.
정교한 딜 계산과 피 관리로 생각보다 쉽게 군단장의 피를 절반 가까이 날려버리자, 피닉스 길드원 중 몇몇이 조금씩 방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딜러와 힐러만 바쁠 뿐, 피닉스의 탱커와 근접 딜러들은 별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태성도 고작 10명 정도로 반 피까지 몰아붙였었습니다! 다음 페이즈부터는 확실히 달라질 테니까 긴장을 풀지 말아 주세요!”
“다들 산드로 님 말씀 들었지?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라!”
“넵!”
지옥불도 내 염려가 무엇인지 잘 알았는지, 적절한 개입으로 부공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모습이었다.
“나의 애마, 쿨라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마침내, 녀석의 HP가 절반으로 떨어지며 새로운 페이즈로 접어들었다.
“3팀의 8힐러 전원이 축굴이에게 집중하세요! 나머지는 광역 스킬에 맞더라도 성기사들이 힐을 하고요! 지금부터는 그레이터 힐도 아낄 필요 없습니다!”
전에 다리우스를 뒤치기하며 지켜봤던 바로는, 이 구간부터 공속과 광역 스킬 사용빈도가 2배로 늘어났다.
확실히 드래곤의 브레스같은 사기급 광역 스킬이 없던 터라 여기까지 수월하게 왔지만, 대신 지금부터는 단일 타겟이 버티기는 더 어려워지는 구간인 셈.
현중이가 최대한 버티면서 군단장의 HP를 소진시키다, 결국 버티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타이탄이 탱킹하는 것이 우리가 구상한 택틱이었다.
콰쾅! 쾅! 쾅!
녀석을 둘러싼 3개의 팀.
그 세 방향에서 아껴뒀던 강력한 스킬들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물론 워낙 강력한 녀석인지라 HP가 팍팍 줄어들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실히 지금까지 공략해온 속도는 계속 유지됐다.
‘이대로면…… 곧 25%! 설마 소환은 하지 않는 건가? 이렇게 쉽게 킬한다고?’
필드 보스들로부터 흔하게 볼 수 있는 어그로 초기화 패턴.
녀석은 그런 모습조차 보이지 않아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는 있지만 현중이의 원 탱킹 하나로 3번째 페이즈도 무사히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순간.
역시 녀석은 쉽지 않은 보스라는 걸 우리에게 증명해 보였다.
“그분의 흔적은 찾을 수 없더라도, 부여받은 권능은 영원할지니!”
쉬익- 핏!
초록의 오로라가 드리워진 하늘에서 내리꽂힌 검은 번개.
녀석의 갑작스런 외침과 함께 떨어진 그 공격에, 현중이가 피할 새도 없이 적중당했다.
“처, 천상의 방…… 으악!”
그리고는 현중이가 서 있던 자리에.
익숙한 모양의 디바인 방패가 덩그러니 드랍된 모습이 보였다.
<레벤다스>
어이없게도…….
지금껏 막강한 탱킹력으로 잘 버텨오던 현중이가, 군단장의 새로운 스킬 한 방에 죽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