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영웅의 전당 (2)
‘와…… 생각했던 것보다 멋진 곳인데?’
이곳에 들어온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인던 특유의 정갈하면서 깔끔한 입구는 다른 곳과 비슷해 보였지만, 퀄리티가 달랐다.
가로세로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높고 넓은 통로.
굳이 라이트 스크롤을 쓰지 않아도 환한 복도는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졌는데, 좌우 벽에는 벽화가 양각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얼핏 살펴보니 신화 속 신마전쟁을 묘사한 듯싶었다.
“까리한데요? 공 좀 들인 던전인가 봐요?”
“그러게? 나중에 평균 레벨 좀 높아지게 되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던이 되겠어.”
“이런 걸 찾아내다니…… 역시 카이저 님이시군요! 혹시 400레벨은 넘어야 열리는 인던을 활성화시킨 것 아닌가 싶은데요?”
“제국과 관련된 건 제가 꽉 잡는 편이라 운이 좋았습니다, 지옥불 님. 그나저나 다들 조심하십시오. 저도 입구만 잠깐 와봤던 거라, 처음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초입부터 상당히 센 몹이 등장합니다.”
인던의 종류와 난이도는 천차만별이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바로 입구에는, 유저들이 잠시 정비할 시간을 충분히 갖도록 몬스터가 없다는 것!
또한 보통 입구 주변에는, 유저들이 인던의 난이도를 가늠할 수 있도록 몬스터 한두 마리가 맛보기처럼 배치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곳 또한 예외는 아니라, 30미터쯤 떨어진 전방에 몹 하나가 덩그러니 서성이고 있었다.
<날개를 잃은 천사병>
뭔가 구름이 연상되는 회색 갑옷과 장창을 들고 있는 천사병(天使兵).
이 신규 몬스터는 날개가 없는 탓에 영락없는 인간 병사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키가 3미터에 이르는 ‘거인’이라는 점만 빼면.
“마계 몹들이 나올 줄 알았는데 설마 천계와 연관된 몬스터라니…….”
“그게 나도 의외였다. 아무래도 신마전쟁에 얽혀 있는 스토리가 제법 복잡한 모양이다.”
“일단 한 번 잡아볼까요?”
“괜히 16인 인던이 아닙니다. 모두 방심들 하지 마세요!”
카이저가 신중한 표정으로 주의를 환기했으나,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다들 알아서 진형을 펼치며 자버프를 넣고 있었다.
사실 타연을 전부 뒤진다 하더라도, 지금 모인 이 파티원들만 한 베테랑 유저는 찾기 힘들 테니 괜한 걱정이기는 했다.
[도발의 살기!]
다들 준비를 마친 듯하자, 현중이가 도발 스킬을 먹이며 천사병에게 접근했다.
마치 마네킹과 같이 무표정한 얼굴.
그 모습이 신비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었지만, 지금은 잡아야 할 한낱 몬스터에 불과했다.
“안식을 방해하는 자에게…… 영원한 죽음을……!”
무참히 잘린 채 등에 조금 붙어있는 날갯죽지를 펄럭이며, 녀석이 뒤돌아봤다.
그리고 밝게 빛나기 시작하는 장창.
놈은 잠시 풀차징의 모션을 취하더니, 다음 순간 현중이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피해!”
쾅!
하지만 거대한 체구만큼이나 긴 리치를 가진 데다, 워낙 빠르게 접근한 돌격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채 그대로 넉백당했다.
그런 현중이의 사정 따윈 상관없다는 듯, 녀석은 난도질과 비슷한 스킬을 쓴 것마냥 빠른 속도로 장창을 찔러 후속타를 먹였다.
“그레이터 힐!”
“쉴드!”
하지만 녀석의 상대는 다름 아닌 랭커 파티.
예측불허의 돌진을 보자마자 우리 팀 힐러와 마법사는, 현중이에게 예측 힐과 쉴드 마법을 쳐줘 녀석의 탱킹을 보조해주었다.
결국 현중이가 버티고 일어서자, 녀석은 변변찮은 반격도 못 한 채 포위 공격을 맞고는 금세 죽어버렸다.
“와…… 이 자식 뭐지? 일반 몹 맞아? 첫 넉백을 못 피해서 연계기를 다 맞았더니, 까닥하면 반피를 볼 뻔했는데?”
“공격력 최상, 스피드 최상, 거기다 HP도 상급은 되는 것 같아요. 카이저 님이 괜히 조심하라고 하신 게 아니었네요.”
“지금까지 나온 인던 중에 최고 난이도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한 탱딜힐 패턴으로 편히 잡을 몬스터가 아니에요. 매 순간 집중해서 공격을 직접 피하고 무빙과 범위 공격에 신경 써야 할 겁니다.”
첫 몬스터를 상대하자마자 각자 저마다의 분석을 쏟아냈다.
신규 인던을 공략하는 파티의 정석적인 모습이었다.
“일단 다음 놈들도 잡아보죠. 이런 놈들만 나오는지…… 아니면 파티를 꾸려서 나오는지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높아 보이는 난이도.
그 때문에 놈들이 초반부터 몰려나오지 않기를 빌었지만,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로 파티를 이룬 천사병 무리가 나타났다.
한데 놈들은 이제껏 봐왔던 몬스터 파티와는 뭔가 달라 보였다.
“똑같은 놈 3마리? 파티가 맞는 거야?”
“보통 몹들이 파티를 이루면…… 법사, 전사, 원딜러……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아요?”
“저런 파티는 처음 보는 구성인데…… 아마 새로운 뭔가가 있겠지?”
삼각 대형의 천사병 3마리.
워낙 무표정한 얼굴이라 마치 아름다운 동상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 같았다.
달그락달그락!
놈들을 향해 다가가는 순간, 갑자기 뼈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기파랑이 소환한 언데드들이 나타나며 나온 효과음이었다.
<기파랑의 스켈레톤 메이지>
<기파랑의 스켈레톤 워리어>
<기파랑의 스켈레톤 아처>
각각 서너 마리씩 전부 12마리의 스켈레톤 병사들.
랭커급 네크로맨서답게 상당히 많은 수의 언데드를 소환했다.
“오! 네크 한 분이 계시니까 인원이 엄청 많아진 것 같네요. 완전 공격대 던전에 들어온 것 같은데요?”
“지금부터는 저도 전력을 다해야 할 것 같아서요. 비록 딜은 약하지만 수는 제법 되니까, 조금은 도움이 될걸요?”
겸손하게 말했지만, 어조만큼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소환물을 강화하는 패시브 스킬들에 투자도 많이 했는지, 스켈레톤들도 제법 뼈마디가 굵고 장비도 좋아 보였다.
소환물의 사냥 효용성이야 테이밍을 익힌 나도 많이 체감하는 바였기에, 솔플 사냥의 최강자라는 네크로맨서의 위력이 사뭇 기대됐다.
“시작합니다!”
“고고!”
하지만 나의 그런 기대감은 전투가 시작됨과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빛이 늘어날수록 더욱 밝게 빛나리라!”
“빛이 늘어날수록 더욱 밝게 빛나리라!”
놈들의 외침과 동시에 터져 나온 주황빛이 모든 파티원과 복도를 감쌌다.
[마나 쉴드가 2.777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2.777의 마법 피해를 흡수합니다.]
……………………
그리고 빛에 노출된 우리 팀 전원에게 도트 데미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세 놈 전부 같은 스킬을 사용했는데, 효과가 중첩이라도 되는지 체력이 떨어지는 수준이 어마무시하게 빨랐다.
“뭐, 뭐야?”
“일단 한 놈부터 먼저 잡아야 합니다!”
이대로는 HP가 적은 마법사나 원딜러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직감적으로 하나를 먼저 죽여 중첩 효과를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곧바로 오더를 외쳤다.
다행히 빠릿한 사람들만 모였던 터라, 금세 최강 스킬들을 쏟아내어 가장 앞에 있던 녀석을 죽여버렸다.
그러자 주변을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였던 빛이 절반 수준의 밝기로 뚝 떨어져 버렸다.
퍼석, 퍼서석.
하지만 이 짧은 시간에 십수 마리를 자랑하던 스켈레톤 부대는 전부 사그라져 역소환당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안타까운 탄식을 내쉬는 기파랑.
하지만 위로의 말도 건넬 새도 없이 나머지 2마리를 서둘러 잡아냈다.
“확실히 여기 몹들은 좀 특이하네요. 지금껏 타연에선 볼 수 없었던 스킬과 패턴이에요.”
“방금은 성기사의 오라와 비슷한 효과였던 것 같아요. 한 마리였을 때보다 좀 더 오래 버틴 걸 보니, 적에게는 데미지를 주고 자신들에게는 힐링 효과를 주는 스킬 같습니다.”
역시나 바로 분석을 쏟아내는 지옥불.
거기에 대탐험과 당당검, 카이저 또한 자신의 의견을 보태며 대화하는 사이, 난 조용히 풀이 죽은 기파랑의 곁에 다가가 말을 건넸다.
“기파랑 님……. 혹시 언데드는 스켈레톤밖에 소환하지 못하시나요? 수는 좀 적더라도 몸빵이 더 좋은 놈이 나을 것 같은데요.”
“사실 듀라한이라고 더 센 놈이 있긴 한데…… 그것도 공격력이 강한 거지 HP가 훨씬 더 많거나 하진 않아요. 확실히 몸빵은 데스 나이트가 최고긴 한데…….”
“맞네요? 왜 그건 안 쓰세요? 혹시 아직 데스 나이트를 안 찍으신 건 아니죠? 다른 네크 분들은 끌고 다니시는 걸 본 것 같은데.”
“그게…… 제가 스킬은 진작 배워뒀는데, 아직 각인은 하지 않아서요…….”
“각인이요?”
각인은 또 뭐지?
귀속이나 각인 아이템이 없기로 유명한 게 타연인데, 난데없이 여기서 각인이란 단어를 듣게 될 줄 몰랐다.
“아…… 이렇게 말하면 모르시겠구나. 스킬 ‘데스 나이트 소환’은 고렙 네크만 익힐 수 있는 거라,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고유의 설정이 있어요. 네크는 상위 가디언으로 데스 나이트와 리치, 둘 중 하나의 테크트리만 선택할 수 있는데…… 이놈들부터는 고위급 소환물에 속해서 ‘매개체’라는 재료 템을 따로 요구하거든요.”
“매개체요?”
“네. 쉽게 설명하면, 각인할 매개체에 따라 소환되는 데스 나이트의 종류와 급이 정해진다고 보시면 돼요. 물론 각인을 취소하고 바꿀 수 있지만, 그러면 재료 템도 날아가고 애써 레벨업 시켜놓은 데스 나이트도 없어지거든요. 데스 나이트나 리치는 각자 하나밖에는 소환할 수 없으니까, 첫 각인부터 신중히 결정하는 편이 나아요.”
“오호라…… 살아생전 강했던 몬스터를 매개체로 사용하면, 그에 걸맞은 데스 나이트가 소환된다는 뜻이군요. 그럴싸한데요?”
“오우거의 뼈, 미노타우르스의 두개골, 트롤 족장의 송곳니 등등…… 애써 구해놓은 매개체는 많은데 망설이고 있었어요. 전부 다 유니크급 재료 템이거든요.”
“…….”
“근데 어쩔 수 없죠. 급한 김에 이것들 중 하나로 데스 나이트를 각인해야겠어요. 스켈레톤이 이렇게 금방 죽어버리면, 제가 이 인던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요.”
‘유니크급이 아쉽단 얘기는 레전더리급은 구하지 못했다는 뜻인데…… 가만있자! 방금 들은 템들과 비슷한 이름의 재료 템을 봤던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들은 게 아니라 직접 먹은 적이 있었다.
워낙 가벼워서 아직도 내 인벤토리창에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녀석을!
<오크 로드의 어금니(레전더리, 재료 아이템)>
‘2개는 팔고 딱 1개 남겨뒀던 템! 쓸데는 없어도 레전더리급이라…… 혹시 죽으면 장비 대신 떨구라고 들고 다녔던 놈인데!’
‘나이트’라는 고유의 특징 때문인지…….
소환에 사용될 매개체는 이족 보행이 가능한 몬스터로 한정되어 있었다.
한데 그런 아인종(亞人種) 몬스터 중에서 레전더리급을 떨굴만한 놈은, 당연히 필드 보스급밖에는 없었다.
한데 오크 로드만 해도 잡히기 시작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놈이 드랍하는 템들은 죄다 태성 아니면 우리 측이 먹었으니, ‘오크 로드의 어금니’라는 템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었다.
“기파랑 님…… 저희 길드에 진짜 잘 들어오셨네요. 어딜 가서 이런 템을 구할 수 있겠어요? 상점에도 거의 올라오지 않을 희귀 템일 텐데.”
“네?”
“이거 드릴 테니까 바로 각인해서 소환해 보세요. 저도 궁금하네요, 어떤 녀석이 나오게 될지.”
“무슨 말씀인지…… 헉!!”
어느새 다른 파티원들도 조용히 우리 곁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기에, 곧바로 교환을 걸어 아이템을 넘겨줬다.
“아니, 오크 로드라니! 이런 템이 어떻게 아직도 알려지지 않았던 거죠?”
“아마 먹어본 유저가 드물어서 알려지지 않았을 거예요. 잿빛 산맥의 줌바카가 드랍하는 템입니다. 데스 나이트 소환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템 맞나요?”
“맞아요 맞아! 아니, 무슨 먹기도 힘들다는 템이라면서 그걸 인벤에 들고 다니세요? 와! 저 정말로 이거 가져도 되는 거죠? 각인되면 돌려드리지도 못해요!”
“물론입니다. 어차피 그걸로 장비 만들어봤자 별 쓸모도 없을 텐데, 꼭 필요로 하는 길드원이 계신다면 당연히 드려야죠. 절 믿고 들어오신 분한테 길마로서 이 정도는 해드릴 수 있답니다.”
“저한테 이런 날이 오다니…… 레전더리를 그냥…… 정말 감사합니다, 길마님!”
무기나 방어구의 재료로도 사용되는 터라 수천만 원을 호가할 템이지만,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걸 매개체로 쓰면 어떤 데스나이트가 튀어나올지가 더 궁금했다.
“어서 각인해 보세요! 다들 기대하고 있잖아요?”
“네? 아, 알겠습니다!”
워낙 정신이 없었는지 이제야 주변을 둘러본 기파랑은 바로 허공을 두드리며 각인 과정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대망의 시동어를 외쳤다.
“데스 나이트 소환!”
네크로맨서답게 펫을 소환할 때처럼 요란한 마법진이 생성되진 않았다.
그저 지면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솟구쳐 튀어 올랐을 뿐!
<기파랑의 데스 나이트>
데스 나이트란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나이트’란 이름이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살아생전 줌바카의 모습을 쏙 빼닮은 2미터 크기의 해골 오크.
검은 중갑옷을 착용한 채 거대한 배틀 액스를 들고 있는 녀석은, ‘광전사’란 이름이 훨씬 더 어울릴 만큼 위협적인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