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득템왕-175화 (175/350)

175화 영웅의 전당 (3)

“캬! 간지 봐라! 작살난다!”

“방금 전까지 헐벗은 해골바가지에 둘러싸였던 분 맞냐? 무슨 갑자기 필드 보스가 돼버리셨는데?”

현중이의 말 그대로, 기파랑은 변한 게 없건만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그의 곁에 녹색 안광을 밝히며 서 있는 데스 나이트.

덩치도 덩치지만, 소환몹답지 않은 고급스러운 장비의 가디언 덕분에 그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레알…… 진짜 진짜 너무너무 맘에 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길마님!”

연신 감사 인사를 건네면서도 황홀한 눈으로 자신의 소환 몹을 살피는 기파랑.

훼라리를 처음 얻었을 때의 감격을 아직 기억하는 나로선,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다.

“레벨과 HP는 어떻게 돼요?”

“360으로 원래 필드 보스였을 때보단 낮은 것 같긴 한데…… 몸빵이 미쳤네요! 무슨 언데드 HP가 10만이 넘어가요!”

“네? 10만요? 그럼 좀 적은 거 아니에요?”

현재 355레벨까지 성장한 훼라리의 체력만 해도 14만이 훌쩍 넘었다.

물론 10만이란 수치도 일반 랭커의 HP보다는 높으니 상당한 수준이긴 하지만, 단 하나밖에 소환할 수 없는 데스 나이트치고는 다소 부족한 감이 느껴졌다.

“네크를 안 키워봤으니 그런 소리 하시는 거예요. 이 정도면 사기 수준이에요. 제 해골들 피가 1만 정도씩 밖에 안 됐으니까요.”

“맞아요, 형님. 보통 네크 분들은 본인 소환물한테 쓸 수 있는 자체적인 회복과 버프 스킬을 꾸준히 사용해요. 마나가 많이 소모되긴 하지만, 어지간한 힐러들보다 두세 배는 더 빨리 피를 채워 주더라고요.”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자, 라챤이가 설명을 거들었다.

사실 타연에서의 네크로맨서는 가장 인기 없는…… 듣기론 픽률 0.5% 미만의 극소수만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솔플에 특화됐다는 장점.

그건 반대로, 파티 사냥에는 가장 부적합하다는 단점이기도 해서 다수와의 협력이 중요한 이곳에서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막대한 골드를 투자해서 부유하게 시작하지 않는 이상, 네크로맨서는 일정 레벨 구간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생과 설움은 다 겪어야만 했다.

설사 운좋게 템과 레벨을 상위급까지 갖추게 되더라도, 파티에서 동급의 타 직업군들의 역할을 대신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니 초보일 때건 랭커가 돼서건.

게임 내내 솔로 플레이만 주야장천 해야 하는 것이 네크로맨서를 택한 유저들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런 평가는 끝이 나게 되었다.

“와! 저 오크 자식, 언데드로 부활하고 나니 더 설쳐대는데요?”

퍽! 퍽! 퍽!

내 옆에서 천사병을 향해 자루가 부서져라 도끼를 휘두르는 데스 나이트.

그 모습이 분명 소환물임에도 불구하고 소환물 같지가 않았다.

어지간한 탱커 유저보다 더 탱커다웠고, 공격 세팅에 올인한 전사 유저만큼이나 공격 속도도 재빨랐다.

“본 스피어!”

줄곧 많은 스켈레톤들을 유지하느라 공격 스킬도 못 쓰던 기파랑도, 이제 여유가 생겼는지 못 보던 고유 공격 스킬을 날리기 시작했다.

천사병 특유의 주황빛 공격에도, 전혀 끄떡없이 놈이 죽을 때까지 공격한 오크 로드.

잿빛 산맥을 주름잡던 녀석의 위용이, 비록 덩치는 작고 해골 신세에 불과할지라도 그대로 재현된 느낌이었다.

“유니크급으로 소환한 녀석도 몇 번 봤는데, 완전 비교가 안 되네요! 현존하는 최강의 데스 나이트 재료가 오크 로드의 드랍템이었다니……!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운이 좋았죠. 템 제작에만 쓰이는 줄 알고 2개는 팔고 하나 남았던 건데요. 다 기파랑 님의 종이 되려고 그랬나 봅니다.”

“흐흐. 다 버닝스타에 들어온 덕이에요. 아무튼 펫처럼 이름을 못 지어주는 게 아쉬울 뿐이네요.”

아쉬울 게 있을까?

오크 로드의 모습을 간직한 채, ‘데스 나이트’란 이름을 달고 있는 것부터가 간지가 철철 넘치는데?

이대로 마을에 가면, 못해도 구경꾼 수백 명은 족히 끌고 다닐 외형이였다.

“근데 이놈들 죄다 거지 놈들이네요?”

“그러게……. 천계 놈들이 골드를 주는 거야 말이 안 된다 쳐도, 뭔 잡템 하나를 안 떨구냐?”

“이래서 제가 어지간하면 인던에 안 오잖아요. 드랍률 최악이라 파티 사냥까지 하면 적자예요, 항상!”

라챤이의 말대로 벌써 열 마리 가까이 잡았는데 아무것도 드랍하지 않았다.

다만 경험치는 16인 파티인 걸 감안하더라도 제법 짭짤하게 올랐는데, 워낙 고레벨 인던이라는 걸 고려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단 계속 전진해보죠?”

“넵! 대충 파악됐으니 속도 좀 높여 보겠습니다!”

데스 나이트라는 또 한 명의 멤버를 추가한 우리는, 계속해서 이 새롭고 미지로 가득 찬 인던을 탐험해나갔다.

* * *

영웅 도네타의 ‘안식처’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이곳은, 얼핏 도시에 있는 여느 신전과도 같은 느낌의 공간이었다.

실제로 몇 개의 갈림길을 지나쳐 왔는데, 전부 비슷한 대리석 방에 입구에서부터 보이던 조각벽화가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근데 도대체 여긴 정체가 뭘까요? 보통 인던에 들어오면 보스 몹이 뭘지 예상이 되는데, 아직도 전혀 감이 잡히지 않네요?”

이미 천사병들을 때려잡은 지도 30분여.

‘천사의 눈물’이란 용도를 알 수 없는 템만 몇 개 얻었을 뿐, 그 외에 특별한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름 서둘러 진행했는데도 별 진척이 된 것 같지 않자, 간만에 축빙 형님이 답답함을 토로했다.

“아마 조금만 더 들어가면 NPC라도 나타날 겁니다.”

“네? NPC요?”

“네. 이렇게 돌발적으로 발견된 인던에는 사전 정보가 너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보통 중간쯤에 NPC를 배치해 나름의 배경 설명 등을 해주더군요. 유저들을 위한 일루전의 배려라고나 할까요?”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옥불의 말은 사실이었다.

또 한 번의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홀이 나왔고, 그 중앙에 웬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던 것이다.

<고통받는 자 에랄루실>

“드디어 나왔나?”

“어라?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요?”

“엘프다! 엘프예요, 엘프!”

눈이 좋은 라챤이의 외침대로 여성 NPC에게 다가가자, 귀가 위를 향해 솟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백 년을 살아간다는 신비한 숲의 종족, 엘프.

도시에서 드워프들을 종종 만나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유저들은 엘프라는 존재는 인식하고 있었지만 쉽게 만나볼 수 없었다.

그들이 사는 세계수가 있는 숲, ‘생명의 숲’이 지금까지는 유저들에게 미오픈 지역이었던 탓.

한데 이런 곳에서 이 생소한 종족을 마주할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말을 걸어보시죠, 카이저 형님?”

“이런 건 보통 파티장이 하는 거다. 드로, 네가 직접 해봐라.”

“흠……. 알겠습니다.”

편하게 대하려 하는데도, 자꾸 사람들 앞에서 위신을 세워주려는 카이저 형님이었다.

“여보세요……? 에랄루실 님?”

“찢긴 날개가 아닌 인간이 이곳에 오다니…… 드디어 바라왔던 그 날이 온 건가요……?”

하늘거리는 로브를 걸친 백금발의 미녀.

정말 미의 화신이라는 엘프족의 설명 그대로, 눈부신 미모의 NPC는 에메랄드빛 눈망울을 빛내며 대꾸해 왔다.

“여긴 어떤 곳이죠? 그리고 여기에 왜 있는 거예요?”

“……천 년, 그건 영생을 사는 저에게도 기나긴 세월이었습니다…….”

“아니, 딴소리 말고 제가 물은 거에 대답을 좀?”

“푸하! 드로야, 넌 뭐 그렇게 대충 물어보냐? 질문에 키워드가 없잖아, 키워드가!”

하지만 내 질문이 어설펐는지, 제대로 된 정보 대신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 에랄루실이었다.

그에 보다 못한 당당검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대신 물었다.

“제가 해볼게요, 형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곳은 ‘천계’와 어떤 연관이 있죠? 12영웅인 ‘도네타’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허락할 틈도 없이 연신 쏟아낸 질문이 제대로였는지, 마침내 에랄루실은 우리가 원하던 궁금증을 풀어주기 시작했다.

“제 이름은 에랄루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 마더 트리 ‘세계수’가 부러지던 시절 굵은 열다섯 가지 중 하나를 담당하던 하이 엘프입니다…….”

“이곳은 도네타의 봉인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곳……. 전 줄곧 중간계의 평화를 위해, 그녀의 봉인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천계의 존재라고 부르기 힘든 그들로부터…….”

“헐?”

그리고 그녀가 쏟아낸 정보에 모두는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타연 최고의 선두 주자들이나 마찬가지인 카이저, 지옥불, 당당검, 대탐험시대 등등…….

그들로서도 방금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이 엘프라고? 그리고 세계수가 예전에 부러졌었어?”

“도네타의 봉인을 지키고 있었다는 건 뭔 소리야? 이곳이 안식처가 아니라 봉인한 곳이었어? 영웅을 왜?”

“천계의 존재가 아니란 소리는 또 뭐야……. 아, 머리 복잡해지네.”

우리 길드원들은 대부분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심지어 현중이는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역시……. 황제가 이곳에 도네타를 봉인했던 거였군.”

“네? 그게 뭔 소리예요, 카이저 형님?”

“흔하다면 흔한 이야기다. 제국의 건국 신화를 살펴보면 제논 가이룩스의 업적이 무척 대단하게 묘사되어 있지. 한데 유저라면 어디를 가도 흔히 접할 수 있는 그 이름과 별개로, 건국 영웅들의 이름은 들어보기 힘들다. 심지어 도네타는 같은 신마전쟁의 12영웅인데도 말이지.”

“……?”

“카이저 님의 말씀은 그가 도네타를 정리했다는 뜻이군요. 왕이 정적을 제거하듯이 말이죠.”

“맞습니다 지옥불 님. 역사에 지나치게 은폐돼버린 것은 일부러 숨겼다고밖에 볼 수 없었죠. 전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점점 황제가 자신과 맞먹는 건국 영웅들을 제거했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스토리상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암시가 있었죠.”

제국과 관련된 퀘스트를 중점적으로 해오다 보니, 확실히 알고 있는 것도 그렇고 생각하는 것도 남다른 면이 있었다.

게임 스토리는 단순한 게 최고라는 내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스타일인데, 확실히 지금과 같은 플레이에서는 카이저 형님같은 스타일이 훨씬 더 적합한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잡아야 할 놈이 도네타라는 거예요, 아니란 거예요? 보스 몹이 누군데요!”

“……찢긴 날개들이 부러진 날개에 도달하는 것을 막기 힘들었는데…… 마침 신의 계시처럼 그대들이 찾아온 것 같군요……. 부디 부탁이온데…… 부러진 날개를 물리쳐 도네타의 봉인이 풀리지 않도록 이곳을 지켜주세요…….”

띠링!

[퀘스트 ‘부러진 날개의 소멸’을 획득했습니다.]

“어라?”

“뭐야? 바로 퀘스틀 받았어요? 대박!”

“하하! 그래그래, 가끔은 단순한 게 짱이지!”

하지만 타연은 게임.

스토리를 모르더라도, 이곳까지 찾아온 유저들이 퀘스트를 못 받아내게 만들어 뒀을 리 없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내 반문에 키워드가 들어있었는지, 금세 이 인던의 메인 퀘스트를 부여받게 되었다.

[부러진 날개의 소멸: 일회성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A

* 12영웅 도네타의 안식을 깨우려는 존재가 있습니다.

* 이 안식처를 수호해 중간계의 평화를 지키려면, 부러진 날개 ‘데아 파미엘’을 소멸시키십시오.

* 퀘스트 클리어 조건: 데아 파미엘의 소멸

* 퀘스트 클리어 보상: 타이탄의 소유권 획득(최초 보상)

“와! 타이탄이다!”

“뭐야? 진짜네?”

다들 동시에 퀘스트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의 탄성을 질렀다.

최초 보상, 타이탄.

레벤다스를 얻었던 때와 같은 엄청난 보상이 퀘스트 설명에 제시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인던 거지라고 했던 사람 어디 갔냐? 이게 어딜 봐서 거지야. 초대박이지!”

“최초 보상일 뿐이니까 거지는 맞지. 아무튼 천계로 가기도 전에, 한 건 제대로 했네요.”

“깨는 게 문제죠. 보상이 좋을수록, 그만큼 클리어가 힘들긴 하더라고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자신이 있었다.

레벤다스를 잡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한 멤버들이 모인 지금.

우리가 깰 수 없다면 누구도 이 인던을 클리어할 수 없었다.

설사 태성의 최고 정예 멤버들이 모인다 하더라도!

“자, 퀘스트도 얻었으니 바로 갑시다!”

“고고고고!”

다소 루즈해지는 분위기였는데, 보상을 확인하자 다들 불타올랐다.

덕분에 천사병을 사냥하고 인던을 개척하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복도가 좁아지며 미로 같은 구간이 나타났지만, 머릿속에 상세한 지도라도 그린 듯한 대탐험의 인도 아래 손쉽게 통과했고.

천사병이 수십 마리씩 뭉쳐있던 회랑 지역도, 대도 부츠를 활용한 내 덕에 별 피해 없이 정리했다.

그렇게 인던의 끝,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여긴가 봐요……. 보스 룸이.”

“벽화 내용으로 봐선, 이곳에 도네타가 봉인되어 있는 것 같네요.”

“다들 풀 피와 풀 마나니까 바로 들어가 보죠!”

쿠쿵!

거대한 문이었지만 손을 가져다 대자 스르릉 열렸다.

그러자 거대한 보스 룸 안에 있는 한 존재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다.

<부러진 날개 데아 파미엘>

높이 6미터의 장검과 방패를 든 천사.

지금까지의 천사병들이 날개가 잘렸던 것과 달리, 그의 등 양쪽으로는 회색 깃털의 날개가 돋아나 있었다.

힘없이 부러진 채 꺾여 있는!

&공&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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