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7신기의 해방자 (1)
“와, 드로 이 자식 진짜 대단한 놈이야 하여간. 그 많은 피를 혼자 다 깎았네!”
“축굴아, 다른 길드 분들 계신 곳에선 말조심하랬지? 아무리 친구라도 길마님은 길마님이야.”
“앗! 네, 축빙 형님. 주의할게요……”
한두 명 되살리니 금세 전원이 일어나 떠들썩해졌다.
처음 들어온 생소한 인던을 단번에 퍼스트 클리어했으니, 사실 타연 유저라면 누구나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15명이나 전멸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적 같은 승리였다면 말이다.
“괜찮아요. 여긴 다 가족 같은 분들 밖에 안 계시는걸요. 그나저나 다들 업적은 받으셨어요?”
“부활하니까 바로 업적도 받아졌던데? 이건 인던 참여자 전원이 받을 수 있는 종류였나 봐?”
“다행이네요. 역시 예상했던 대로, 이곳에서 얻는 업적에 중요한 옵션 하나가 붙어 있었거든요.”
[업적: 엔젤 슬레이어(A)]
* 타락 천사를 소멸시켰을 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모든 능력치 +15)
* 업적 효과로 천계의 NPC들이 호의적으로 대합니다.(추가 출입 가능 지역: 테터리욜)
* 타락 천사를 추가로 소멸시킬수록, 이 업적은 더욱 뛰어난 효과로 거듭나게 됩니다.
생소한 이름의 지역 테터리욜.
뭐가 됐건 ‘추가 출입 가능’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모험한 대가로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로. 다들 부활했는데 이제 루팅을 해보지? 훗, 인던이라고 너무 여유 부리는 거 아닌가?”
“네? 아…… 다들 구경 좀 하시라고, 헤헤. 그럼 바로 줍겠습니다!”
파티장 획득 제한 상태라 필드처럼 먹자를 염려하지 않아도 돼서, 부활을 기다릴 겸 거꾸로 꽂힌 검도 구경할 겸 루팅을 늦게 했다.
늘상 착용하는 장비라도, 필드 위에 떨어진 모습은 구경하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었으니 말이다.
[산드로: 드랍 아이템 목록, 줍는 대로 링크 걸어볼 테니 자세히 읽어보세요!]
[산드로: <천사의 눈물(레어)>, <천사장의 눈물(유니크)>, <권능을 잃은 천사의 날개(레전더리)>, <회색 날개 깃털(퀘스트 아이템)>, <로파미엘(디바인)>]
“와! 많다!”
“헐! 디바인 템도 있잖아!”
다들 채팅창에 공유된 아이템 정보 때문에, 차례차례 탄성을 내질렀다.
“분명 방패를 들고 있었으니, 그것도 드랍할 보스 같았는데…….”
“하하! 아무리 퍼스트 클리어라도 이 정도면 인던치곤 엄청 많이 드랍한 건데요? 다음에 드시죠, 지옥불 님.”
뭔가 아쉬운 듯 작게 혼잣말하는 지옥불.
하지만 레벤다스만 드랍했던 지하 고대 도시 인던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도 대단히 많은 보상이 주어진 것이었다.
특히나 ‘로파미엘’이라는 이름의 디바인 장검의 설명에는 타이탄을 소환할 수 있다는 정보마저 친절히 적혀 있었다.
“근데 다들 맞은편 벽을 보셨나요? 다들 아이템에만 정신 팔려 있는 것 같아서요.”
“응? 뭐가요?”
당당검의 말에 다들 뒤돌아보자, 파미엘이 서 있던 중앙 건너편에 어느새 에랄루실이 나타나 있었다.
어차피 템은 다 주웠기에,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자 준비된 멘트를 읊기 시작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파미엘이 수족들과 뭉치지 못하게 이곳에 가두는 데 성공했지만, 그가 점차 힘을 되찾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거든요. 그대들이 아니었다면 이대로 도네타의 봉인이 풀렸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대들의 눈부신 분투와 희생에…… 조그마한 보답을 하고 싶군요…….”
띠링!
[업적 ‘하이 엘프의 축복’을 획득했습니다.]
[업적: 하이 엘프의 축복(B)]
* 타이탄 연대기 속 극소수에 불과한 하이 엘프로부터 축복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이동 속도 +5%)
* 업적 효과로 엘프 종족으로부터 선제공격 당하지 않습니다.
“와! 업적을 또 받았어!”
“대박이네! 이속 증가, 그것도 5%면 개 쩌는 건데!”
“희귀 옵션 업적을 받았네요.”
다들 이 뜻밖의 보상에 놀라워하는 순간에도, 카이저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다는 듯 에랄루실을 향해 말을 건넸다.
“굵은 가지 에랄루실 님이시여, 궁금한 게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영웅의 전당’이 아닌지요? 도대체 이곳에 왜 ‘도네타’가 ‘봉인’되어 있다는 것인지요? 그리고 봉인을 풀려는 ‘천사’? 부러진 ‘날개’? 등등은 다 무엇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속사포처럼 궁금해하던 것들에 대해 물어본 카이저.
그에겐 일단 인던의 클리어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지금껏 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참아온 듯싶어 보였다.
‘근데 형님…… 엄청 진지하게 물어보시네? 마치 진짜로 하이 엘프를 만난 것처럼 대하고 계시잖아……?’
타연에서 흔히 말하는 빙의충, 컨셉충 등을 나름 비웃어왔던 나지만, 카이저 형님의 진지한 태도에 도저히 웃음이 나오진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는 타연 속 스토리 진행 및 퀘스트 진척도에서 명실상부한 최고 선두 주자.
이 모습이 그의 플레이 방식이라면, 그간 내가 해왔던 플레이가 잘못된 것이고 이거야말로 제대로 된 정석(standard) 플레이일 거란 생각마저 들었다.
게임 속 역할에 대한 몰입감 및 진지함 등등…….
그간 쿨한 척 굴었던 내 장난스러웠던 말투와 행동들이 어쩐지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곳은 원래 도네타의 안식처가 아니라 봉인처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영웅의 전당이 된 것은 제논이 죽고 난 후의 일……. 저는 그 직후, 이곳에 들어온 것이니 후세의 일은 잘 모르겠군요…….”
“……지금으로선 회색 날개에 대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어쨌든 업데이트 초반이라 그런지, 설명을 아끼는 에랄루실이었다.
“흐음…… 회색 날개라……. 역시 그들은 황제와 관련 있었던 건가?”
하지만 그 작은 정보에서도 뭔가를 추측해내는 듯한 카이저의 모습이었다.
“비록 부러진 날개는 소멸했지만, 이곳의 봉인을 풀기 위해 다른 회색 날개들이 다시 찾아올 겁니다……. 그러니 전 계속 이곳을 지키면서, 그대들이 이 참혹하고 기나긴 전쟁을 끝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런저런 다른 키워드를 꺼내며 물어보았지만, 에랄루실은 이후로 같은 말만 반복했다.
“흠…… 이제 이곳에서 볼 일은 다 끝난 것 같군. 일단 돌아가서 남은 연계 퀘스트부터 마저 진행해 보도록 할까?”
“아무래도 이곳만으로는 천계 루트가 열리진 않는 것 같죠?”
“그래. 뭐, 이런 인던 하나 클리어했다고 이번 같은 대규모 업데이트의 중심 지역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얻은 단서가 메인 스토리와 연관된 건 확실해 보이니 소득은 있었다. 산드로, 여전히 수배 중인 상태라 나와 함께 오스타그 황궁에 가지는 못하겠지?”
“네? 아…… 네. 도시라면 모를까, 황궁은 무리일 것 같아요. 워낙 은신을 감지하는 병사들이 많아서…….”
“그렇군. 그럼 혹시 내게 방금 얻은 퀘스트 템을 건네줄 수 있겠나? 그걸 토대로 연계 퀘스트를 찾아보고 싶군.”
<회색 날개 깃털(퀘스트 아이템)>
*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지는 신비한 존재의 깃털입니다.
* 가이라 제국의 역사학자 도리스(!)를 찾아가십시오.
인벤토리창에 들어와 있는 유일한 퀘스트 아이템.
소유권을 얻은 유저라면 누구나 이 아이템을 토대로 신규 퀘스트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지만, 제국과 관련된 퀘스트 진척도에서 카이저를 따라갈 유저는 없었다.
따라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 카이저 형님에게 드리는 게 옳은 결정 같았다.
[산드로: 흠.... 다른 템 분배에 앞서, 카이저 님께 회색 날개 깃털이란 퀘템의 우선권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지옥불: 버닝스타분들은 반대하시지 않을 것 같으니, 피닉스 대표인 저만 말씀드리면 될 듯싶군요. 찬성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좋은 인던에서 업적도 얻게 되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카이저: 두 길드 마스터분들의 양보 감사드립니다. 답례로 다른 아이템들은 깔끔히 포기하겠습니다.]
“으헥! 형님? 그게 무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이가 나올까 봐 굳이 채팅창으로 물어봤는데, 뜻밖의 카이저 형님 말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사실 템을 확인하던 도중에 뜬금없이 에랄루실이 나와서 흐름이 끊기긴 했지만, 지금 이곳에 서 있는 모두들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 원인은 다름 아닌 ‘로파미엘’이라는 템 때문!타이탄 획득만으로도 엄청난 보상인데, 갑자기 그에 연관된 디바인 무기까지 나와버렸으니 사람이라면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드로, 네가 아니었다면 당분간 잡지 못했을 보스 몹이었다. 실제로 전멸 상태에서 너 혼자 잡아낸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지옥불 님?”
“맞습니다. 사실 저희 피닉스는 인원만 채운 것이나 마찬가지지, 클리어의 대부분은 버닝스타 길드원분들이 한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저희 피닉스도 분배에 관여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내 생각은, 오롯이 나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들어보니 카이저 형님과 지옥불 님은 오히려 내가 무조건 템을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신 모양.
애써 내 역할과 우리 길드의 역할을 강조한 두 분의 말로 보아, 이곳에 흐르던 미묘한 기류는 나 대신 서로가 소유권을 주장할까 봐 견제하느라 생긴 것이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도 좋은 기회로 만나 뵀으면 좋겠군요. 그럼 이만!”
“드로 오빠, 그리고 버닝스타 여러분. 오늘도 즐겁고 재밌었어요. 다음에 또 봬요!”
재촉하는 카이저 형님께 퀘템을 넘겨드리자, 곧바로 라푼젤과 함께 짤막한 인사만 남긴 채 귀환했다.
숨 막혔던 전투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이별 분위기가 되자, 이 틈에 줄곧 곁에서 서성이고 있던 꿈틀이도 말을 건네왔다.
“그럼 저도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산드로 님. 얼떨결에 따라왔는데 별 도움도 못 드리고 떠나서 죄송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제가 초대해서 오신 건데요!”
“아닙니다. 덕분에 정말 귀중한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업적도 얻고 인던의 퍼스트 클리어 순간도 함께 해보고……. 덕분에 앞으로 타연을 하는 내내 기억 남을 추억을 만든 것 같네요.”
인던을 공략하는 내내 조용했던 꿈틀이.
하긴 어느 길드에도 소속되지 않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사람이 십수 명이나 되는 파티에서 말을 꺼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저야말로 이렇게 흔쾌히 참여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꿈틀이 님을 초대했는지는 알고 계시는 거죠?”
“당연히 모를 수가 없죠! 제가 하루빨리 천계에 들어가도록 도와주시는 대신, 그곳에서 채취할 채집물들을 판매해달라는 뜻이잖아요. 제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요?”
“하하! 너무 직접적으로 말씀드리긴 뭐해서 일단 인던 먼저 돌았는데……. 역시 실력만큼이나 눈치도 빠르시네요.”
“뭐, 와보니 워낙 쟁쟁한 분들이 모여 계셨어서 모를 수가 없었죠. 아무튼 저도 당분간 더 빡세게 숙련도를 올려야겠네요. 요즘 드래곤 레어에 사람들이 늘어나서 좀 시들해졌는데.”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조만간 루트가 뚫리면, 다시 아무도 없는 채집 천국에서 쭈욱 독점하실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릴게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흐흐!”
그렇게 꿈틀이마저 떠나 보내자, 인던 안에는 피닉스와 우리 버닝스타 길드만 남게 되었다.
템 분배도 하기 전에 다들 욕심 없이 떠나다니…….
정말 예전의 내 기준으로 보자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파미엘(디바인, 한 손 무기)>
* 공격력: 2010
* 모든 능력치 +70
* 암 속성 몬스터 및 악마 계열, 언데드 몬스터에게 물리 데미지 +2010
* 장검 관련 스킬 레벨 +1
* 빛 관련 스킬 레벨 +1
* 공격 성공 시 5% 확률로 ‘그레이터 힐’ 발동
* 타이탄 ‘로파미엘(!)’ 소환 가능
* 이 아이템은 신의 가호를 받고 있어, 강화에 실패하더라도 가호가 다 하기 전까지는 파괴되지 않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가호 수치: 1)
* 이 아이템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생명의 신 텔로라가 그의 천사장 중 하나 ‘파미엘’에게 하사한 검입니다.
* “사악한 마계의 피조물들이여! 거룩하신 텔로라 님의 대신하여, 신벌의 무서움을 직접 느끼게 해주리라!” - 신실한 푸른 날개 파미엘 -
‘이 템의 설명을 읽고 나서도…… 그냥 포기할 수 있다고?’
신검을 들고 있는 나조차도 놀라버린 아이템.
모든 능력치 추가, 각종 스킬 레벨업 효과와 마법 발동, 타이탄 소환까지!
심지어는 신검에만 있던 안전 강화 효과, ‘신의 가호’마저 붙어 있었다.
최상위 디바인 템이라는 7신기가 아닌 탓에 교환마저도 가능한 이 템은, 현금으로 판매했을 때 수십억을 호가할 미쳐버린 템이나 다름없다.
한데 전혀 미련을 갖지 않고 떠나다니…….
꿈틀이나 라푼젤은 몰라도.
카이저 형님만큼은 이 인던을 최초 발견했기에, 소유권을 강조해도 무리가 없었는데……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흠……. 아무래도 저희 피닉스도 4명이나 참여했으니, 템을 하나 정도 나눠 받을 수 있을까요? 길마로서 수고한 길드원들에게 보상을 좀 나눠주고 싶군요.”
“그럼요, 지옥불 님. 혹시 원하시는 템이 있나요?”
“잘은 모르겠지만 ‘천사장의 눈물’? 그거면 될 것 같군요. 천사의 눈물은 사냥하면서 몇 개 얻었으니 말이지요.”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지옥불 님. 항상 도움을 요청드릴 때마다 흔쾌히 힘을 보태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과 함께 지옥불의 앞에 다가가 교환을 걸었다.
그리고는 교환창에 천사장의 눈물과 함께, 템 하나를 더 얹어서 올렸다.
“……산드로 님? 이게 무슨……?”
“받으세요, 지옥불 님.”
“아니, 이건 받을 수 없습니다!”
늘 평온한 지옥불 님이 소리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건 내가 나머지 템으로 ‘로파미엘’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지옥불 님이 애써 얻으신 마신검을 잃어버리신 것에 대해…… 그간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이건 진작부터 저희 길드원들과 상의가 됐던 일이니까, 흔쾌히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