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득템왕-183화 (183/350)

183화 흑풍단 (1)

거창하게 라인까진 아니더라도…….

이게 정말 현실로 이뤄진다면 그에 못지않은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었다.

먼저 선을 긋고 편을 가르려 들었다면, 그 선 밖의 유저들을 전부 적으로 돌릴 각오 또한 해야 하는 게 정상.

한데 넌 일반 유저들의 저항을 우습게 생각했을 테니 굳이 라인을 만든 거겠지?

그러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리라!

‘무시할 만도 하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척살 걸고 통제랍시고 무차별 PK를 해도…… 대다수는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당하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과거와는 상황이 다르단 걸 계산에 넣었어야지. 그때와 달리 지금은, 너희한테 직접 맞서고 소리 높일 구심점이 생겼잖아. 바로 나, 산드로라는!’

조직력과 단합력에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할 태성 라인.

이 싸움이 길게 이어질 거란 예감이 들었지만, 당장은 모레 있을 공성전 준비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산드로: 다들 접속해 계시네요! 밤새 많은 일이 있었죠?]

[무적살라딘: 이게 무슨 일인지.... 태성 말고도 다른 길드 내에 지인이 몇 명인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네..]

[산드로: 괜찮습니다. 뭐, 변한 건 없어요. 그냥 싸워야 할 적이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뿐이죠. 그래서 말인데요, 다들 부탁드릴 게 있으니 지금 성으로 모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채팅을 남기기가 무섭게, 길드원들 전원이 차례차례 성안으로 집결했다.

“다들 온 거 같은데? 부탁이란 게 뭐야, 드로야?”

“사실 이대로는 인원이 많이 부족하잖아요? 그래서 제가 대안으로 생각해 본 게 있습니다. 일반 유저들을 더 포섭해서 수성에 참여시키는 거죠. 시공의 틈새에서 사냥 중인 원딜 유저들로요…….”

알바마스터의 제안을 들은 후, 시공의 틈새에서 사냥 중인 유저들의 레벨과 성향, 길드 가입 여부 등등에 대해 싹 훑어보았다.

그 결과, 조금의 불안 요소는 있어도 충분히 가능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남은 것은 그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고 포섭하는 일.

그리고 그건, 나 혼자 하기에는 벅찬 일일뿐더러 그럴 필요 또한 없었다.

지금 나에겐, 어느새 믿음직하고 유능한 여러 길드원들이 많이도 생겼으니까!

“아하! 그러니까 드로 네 말은, 계속 필드를 돌아다니면서 유저들을 꼬셔달란 소리지? 지금처럼 공틈에서 계속 사냥하려면, 자기 손으로 수성해야 가능할 거라고?”

“네, 축볼 누나. 누나도 원딜이니까, 저보다는 더 잘 설득하실 수 있을 거예요. 같은 곳이라도 시간대에 따라 유저들이 뒤 바뀜 되니까 지금부터 시작해야 할 겁니다.”

“드로야. 네가 저번에 말한 ‘그’ 장비는 어떻게 할 거냐? 이렇게 됐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구해야 할 거 같은데.”

“어떻게든 마련해 봐야죠, 축빙 형님. 그 정도 보상은 주어져야 유저들 입장에서 참여할 맛도 나고, 그리고 저도 부탁드릴 만도 할 테니까요.”

“그래도 너 혼자 짐을 다 짊어지려고 하진 마라. 너한텐 우리가 있잖아? 우리가 일주일간 왜 빡세게 시공에서 사냥했을 거 같아? 수성전을 위해 전원 다 어비스 수치는 단 1도 바꾸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놨다.”

“네?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축빙 형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맞아, 드로야. 너만 모으고 있는 줄 알았지? 우리도 눈치가 있어. 그러고 보니 너가 제일 눈치가 없었네, 이걸 몰랐으니?”

“누나…… 아니, 다들 정말이에요? 무살 형님, 대탐험 님, 당당아 너도……?”

“네, 드로 형. 이런 건 진작 말씀하셨어야죠.”

“드로 형님. 레벨업 따윈 조금 늦어져도 돼요. 저희가 언젠 레벨이 높아서 태성과 싸우기로 했나요?”

“맞다. 여긴 이제 우리의 성이기도 해. 근데 너만 희생할 필요는 없잖아?”

“이런…… 괜히 부담드리고 싶지 않았는데…….”

우리가 시공의 틈새에 진출하게 된 얼마 후.

나는 그곳에서 우리가 공성전 당일, 수성 확률을 높일 수 있는 또 하나의 수단을 찾아내게 되었다.

어비스 수치를 바치면 시공의 틈새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장비와 교환해 주는 NPC, ‘로퍼스’로부터.

-지환아, 이거 확인해 봤냐? 레어 장비치고는 상당히 괜찮은 템 같은데?

-응? 지금 나한테 레어 템 확인해 보라는 거냐? 레전더리가 있어도 볼까 말까인데?

-그게 아니라, 형님 말 좀 듣고 링크건 거 읽어 좀 봐. 생각보단 쓸모 있을 것 같으니까.

어비스 수치는 전부 경험치로만 교환하던 일주일 전.

현중이의 조언으로 한 아이템의 옵션을 확인해 본 나는, 그 후로 지금까지 단 1포인트의 어비스 수치도 사용하지 않고 모아왔다.

수치 전부를 ‘이’ 아이템으로 교환할 일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심연의 망토(레어, 망토)>

* 방어력: 130

* 체력 +5, 마력 +5

* 최대 HP +500

* 착용 시 ‘하급 심연의 보호막’ 생성

-하급 심연의 보호막: 30초마다 1000의 피해를 흡수하는 보호막을 생성합니다.(최대 10회까지 누적)

* 로퍼스의 연구를 통해, 심연의 특수한 성질이 부여된 망토입니다.

레어답게 옵션도 몇 개 달려 있지 않고, 그것마저도 보잘것없는 망토였다.

이젠 300레벨도 고레벨 소리를 못 들으 정도로 상향 평준화된 타연.

한데 고작 1천 데미지 흡수 정도의 옵션은, ‘역시 레어급답다’란 소리가 절로 나올 만한 하찮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 번만 다시 살펴보면, 결코 그렇게 무시당할 만한 옵션은 아니었다.

이유는 무려 ‘10중첩’이나 된다는 점 때문.

30초마다 생성되는 보호막이 10중첩까지 된다는 부가 효과는, 비록 레어 템이라 할지라도 타연에 처음 등장하는 옵션이었다.

물론 평상시 솔플을 하거나 파티 사냥을 할 땐 거의 의미가 없을 만한 보호막이 맞았다.

하지만 그와 다른 상황에서 착용하게 된다면?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유니크급 이상의 활용도 가능할 만한 아이템이었다.

-현중아, 네가 말한 그 망토 진짜 괜찮더라. 아무래도 이거 수성전에 참여하는 장사꾼들과 생산 유저들한테 나눠줘야겠다. 레전더리를 차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성벽 위에서 원딜만 날릴 유저들한테 이만한 템도 없을 것 같아.

-응? 그걸 전부 다 나눠준다고? 너 혼자?

-어. 많아봤자 한 300명쯤 될 테니까…… 어떻게든 혼자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주 현중이와 나눴던 대화.

이 템은 다른 길드원들과 상의할 겸 공유하긴 했지만, 녀석이 나 혼자 마련한다는 얘기까지 전한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다며 만류했지만, 다들 시간이 없다며 붙잡을 새도 없이 흩어졌다.

“휘유…… 다들 한마음 한뜻이구먼? 그럼 나도 이만 가본다!”

“현중아. 오늘 좀 바쁘겠지만, 수고 좀 해줘라. 너도 이제 나름 유명하니까, 유저분들이 귀담아들으실 거잖아.”

“어허 어허? 어디 이게 부탁하는 사람의 태돈란 말인가? 좀 더 정중하게는 못할꼬?”

“아 쫌! 나도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아서 장난 칠 시간 없어! 아무튼 부탁 좀 할게!”

정말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현재 우리 버닝스타 길드내에서 나 다음으로 유명한 유저는 현중이었다.

훨씬 일찍부터 랭커였던 무살 형님이나 당당검은 물론, 심지어 대탐험시대 님보다 오히려 인지도가 더 높아졌다.

여기에는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

성기사 랭커로 발돋움하는 동안, 공성전과 레이드 등에서 몇몇 인상 깊은 플레이를 한 것이 기사화됐던 것.

거기에 최초의 드라코닉 풀 세트와 디바인 방패라는, 유저들이 가장 부러워할 만한 장비의 소유자라는 것.

마지막으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녀석이 정말로 여성 유저들에게 수없이 회자될 만큼 인기가 많다는 점이었다.

-아이디 값하는 성기사! 차세대 탱커 지존은, 분명 축복받은얼굴이 될 거야!

└걔 비율도 좋아서 슈트 핏 죽여주지 않아? 커스텀도 얼마 하지 않은 것 같던데, 왠지 현실에서도 쩔 거 같아!

허구한 날 구박했던 패션 센스는 의외로 녀석의 인기요소 중 하나였다.

크고 화려한 방패 ‘레벤다스’와는 지독히도 언밸런싱한 흰색 롱코트는, 심지어 녀석 특유의 마스코트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알겠다, 알겠어. 아무튼, 너도 열심히 돌아다녀야지. 네 말 한마디면 충성을 다 바칠 팬들이 있잖아?”

“아 짜식이 진짜!”

어쨌든 녀석이 인기를 얻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서의 일.

첫 등장부터 ‘관종’ 소리를 들을 만큼 화려하게 눈도장을 찍은 나는, 수많은 악플러들 만큼이나 많은 팬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팬’이란 사람 중에는, 유독 특정 계층의 유저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우리 싼드로가 또 용대가리를 확 따부렀다고 했냐잉? 태성 이 쉬이부럴 것들 모가지도 시언하게 함께 따부리고? 옴마야! 역시 내 원한을 풀어주는 건 우리 싼드로밖에는 없구먼!

-참~나! 접때 싼드로 혼자 뭐하것냐고 무시하던 것덜이~ 이젠 허벌나게 아벨 성에 들락거린다 카데? 그땐 디지게 섭섭했을텐디... 느그덜이 염치가 있는거냐 없는거냥? 내라면 시공인지 뭐시껭이서 쪽팔려서 사냥 안해분다! 퉤퉤!

-우리 드로.... 시방 많이 힘들겨... 적이 또 허벌나게 늘어났응게.... 제독이~ 니가 그럼 안되제! 다리우스랑 맨날 뒤져라 파이트하다가.... 이게 시방 뭔 뒤통수냐고? 요런 고약한 노옴..!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나와 관련된 글들이 올라올 때마다, 꾸준히 등장해 나를 옹호하고 걱정해 주는 사람들.

일명 ‘휴먼아재체’를 구사하는, 40대에서 60대를 아우르는 중장년의 남성 유저들이었다.

-산드로 여전히 아재들한테 인기 많은 것 좀 봐라ㅋㅋ 진짜 개웃기네 ㅋㅋ

└딴 게시글에서는 한 명도 안 보이는데, 유독 산드로 글에만 귀신같이 출몰하는 게 완전 내 웃음벨ㅋㅋ

└└오죽하면 산드로가 아재들 로망이라는 분석 기사도 나왔겠냐? 트로트까지 잘 불렀음 아마 전국 통일했을 듯ㅋㅋㅋ

스페셜 원이라는 첫 별칭 뒤에, 오랜만에 새로운 별명도 하나 생겼다.

아재들의 대통령.

도대체가 한 번이라도 어필했던 적도…… 그런 의도조차 한 번도 가져본 적 없건만!

어느새 난 이 특정 계층의 열렬한 우상이 돼버린 상태였다.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수성 인원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할 것 같으니까, 공성 날까지 서둘러야 할 거다. 그럼 난 이만, 진짜 시공의 틈새로 가본다! 라챤이와 함께 돌려고!”

“그래. 부탁한다!”

아무튼 뭐가 됐든지 간에, 지금은 단 하나의 손길이라도 도움이 절실한 때.

현중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뭐라도 마다할 상황이 아니었다.

* * *

“오랜만에 뵙네요, 핑크래빗 님. 저 때문에 갑자기 많이 바쁘셨죠?”

“뭘요, 산드로 님. 부탁받은 지 일주일밖에 안 지났는걸요. 돈도 풍족히 찔러주셔서 어렵지 않았어요.”

떠난 길드원들에게 대략의 플랜과 참여할 유저들이 주의할 사항까지 전한 다음, 핑크래빗을 찾았다.

원래 수성에 참여할 일반 유저들의 망토는 혼자 책임지려 했었기에, 그녀에게 부탁해둔 게 있어서였다.

“그럼 몇 개나 구해놓으신 거세요?”

“지금까지 전부 255개요. 주신 돈 한도 내에서 구하느라 많이는 못 구했네요. 생각보다 망토를 파는 사람도 얼마 없더라고요…….”

“와, 무슨 말씀을요? 많이 구하신 것 같은데요? 워낙 시세도 없는 거라, 200개면 많이 구하신 걸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녀에게 했던 부탁.

그건 로퍼스 옆에서 어비스 수치를 장비로 교환하는 유저에게 망토를 구매하는 일이었다.

부탁과 함께 맡긴 금액은 20만 골드였는데, 확실히 예전 몬테나 주머니로 돈을 벌던 장사꾼이라 그런지 이 일에는 찰떡이었다.

‘원래 300벌 정도에서 모자라면 내 어비스 수치로 채워 넣으려 했던 거였지.

물론 이제는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게 돼버렸지만…….’

지금으로선 유저들이 얼마나 참여하게 될지 미지수였지만, 태성 라인이 쳐들어올 걸 감안하면 5천 명도 많은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구해야 할 망토는 최소 5천 벌.

돈으로 구하기에도 무척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문제는 돈으로도 구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유저들이 망토를 팔질 않아요. 고레벨 사냥터라 그런지 대부분 경험치로 바꾸거나, 장비로 바꾸려는 유저들도 죄다 유니크급으로 바꾸려고 모으고 있거든요. 정말 돈이 급한 유저들이 아니라면 레어급은 안 바꾸더라고요. 로퍼스 옆에서 쭉 좌판을 깔고 있었는데도요.”

“물론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다들 바꾸려 들겠지만…… 가뜩이나 세금도 나오지 않는 성을 지키자고 더 많은 돈까지 투자하긴 힘들겠네요.”

“여러모로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보니까 태성이 라인을 만들었단 소식으로 떠들썩하던데…….”

“네. 아마 저희 성 마을에 있는 시공 포탈 때문에 뭉친 거겠죠.”

“힝……. 힘들게 얻어서 설치하신 건데…… 이대로 뺏기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절대 쉽게 넘겨줄 생각은 없습니다. 래빗 님, 일단 창고로 가셔서 망토부터 넘겨 주시겠어요? 오늘 아무래도 무척 바쁠 것 같아서요.”

“네! 다행히 망토는 천이라서, 많이 무겁진 않더라고요.”

255개나 되는 망토는 수도 수였지만 무게도 제법 나가는 터라, 한 번에 건네받을 수 없었다.

각종 템과 업적 등으로 근력과 체력 수치가 제법 높다지만, 평소 착용하고 다니는 장비와 스왑용 템들 때문에 무게 게이지의 제한을 받고 있어서였다.

그렇게 창고 앞에서 두 번에 걸쳐 망토를 건네받는 도중, 내 눈에 특별한 망토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라? 이건 뭐예요? 색이 다른데요?”

“아, 방금 올린 거요? 돈 때문에 교환해 판 게 아니라, 직접 착용 중이던 걸 판 유저가 있었거든요. 그 유저가 판 거예요. 검은색으로 염색만 한 거지, 다 똑같은 템이니 걱정마세요.”

원래 심연의 장비들은 시공의 틈새에서만 제작되는 템이라, 다소 생소한 외형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모양도 모양이었지만, 특히나 색에서 가장 호불호가 갈렸다.

모든 장비가 은은한 무지갯빛을 띠고 있어, 좋게 말하면 화려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알록달록해 조잡해 보였던 것이다.

한데 직접 착용해보자, 그저 색만 바꿨을 뿐인데도 훨씬 고급스럽게 보였다.

“오! 멋진데요? 그 유저가 괜히 검정으로 염색했던 게 아니구나. 하긴 순정은 색이 너무 과하긴 하더라고요?”

발목까지 길게 내려오는 긴 망토.

덕분에 내가 찬 장비는 거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생각보다 멋진데? 아니, 그러고 보니 기왕 뿌릴 거면 색을 통일하는 게 낫겠다. 알록달록해서 정신없는 것보단, 같은 편이란 걸 확실히 구분할 수 있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