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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템왕-184화 (184/350)

184화 흑풍단 (2)

보기도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고…….

수성에 참여할 유저들에게 잘 봐달란 뇌물의 의미도 있었는데, 외형이 더 멋져진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 많은 망토를 염색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돈도 나가겠지만, 그에 반해 장점이 더 많을 것 같았다.

“검은색이라…….”

“드로 님? 가뜩이나 이번 수성은 유저들이 길드에 가입한 채로 참여하는 공성전이 아니라면서요?”

“네, 맞아요.”

“물론 망토를 드리려던 것부터가 외형을 통일하려는 의도셨겠지만, 색까지 같으면 유저들이 더욱 일체감을 느낄 거예요. 적들이 타겟팅하기에도 조금이라도 더 헷갈릴 거 같고요!”

핑크래빗도 나와 마음이 통했는지, 같은 의견을 전해왔다.

사실 난, 어지간하면 적의 원딜러들이 우리 측 원딜러들을 공격할 사정거리에 접근도 못 하게 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1시간이란 공성전 타임은, 짧은 것 같으면서도 제법 긴 시간.

분명 어느 순간부터는 난장판이 돼버릴 게 뻔했다.

'보나 마나 개떼처럼 몰려올 테니까…….'

그래서 아이디는 가릴 순 없겠지만 장비라도 같은 망토로 가리게 되면, 타겟팅이 조금이라도 분산될 거란 계산이 깔려있었다.

한데 그조차도 검은색으로 도배된다면, 핑크래빗의 말대로 타겟팅을 집중하는 게 훨씬 더 까다로울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란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언제나 큰일은 알고 보면 사소하고 디테일한 부분에서 좌우된 경우가 많았다.

“흠……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멋진 그림이 나올 것 같네요!”

“와, 정말요? 그럼 이럴 게 아니라, 넘겨드린 거 도로 저한테 주세요.”

“네? 왜요?”

“제가 전부 염색한 다음에 다시 드릴게요. 드로 님은 바쁘실 텐데, 이런 잡일은 저한테 맡기세요!”

“아…… 이건 제가 할 일인데요…….”

“아이, 어서요! 그리고 공성 날까진 저도 계속 도와드릴 테니까요, 필요하신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드로 님 덕분에 번 돈이 얼만데 이 정도는 해야죠! 업데이트 때 도움도 못 돼드렸는데요.”

“래빗 님…….”

물론 그녀가 나를 통한 빛마석 사재기로 큰돈을 번 건 맞다.

허나 그렇다 해도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유저를 만나는 건 힘든 일이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번 공성전이 참 힘들 거라고 나름 궁지에 몰린 상태였는데, 그녀의 이런 호의가 무척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와서 이런 말씀 드리기엔 좀 늦었지만…… 혹시 괜찮으시다면 래빗 님께서는 길드에 가입하실 생각은 없으세요?”

“네? 저가요?”

“네. 길드 없이 장사만 하시기엔 어려울 일도 많으실 것 같고…… 만약 저희 길드에 들어오신다면 당장 길드 창고를 이용하실 수 있으니, 염색 작업도 더 편하게 하실 수 있을 거고요. 나중에 장사하실 때 저희 길드원들이 도와드릴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드로 님……. 설마 지금, 제가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있는 건가요? 소수정예만 뽑는다는 그 버닝스타한테서요?”

태성과의 전쟁만을 위해 길드를 운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지만, 그렇다고 친목 길드는 아니었기에 아무나 받진 않았다.

그 때문에 최근에 가입 받은 대탐험시대와 기파랑만 해도 둘 다 360레벨이 넘어가는 랭커급의 고수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일을 이렇게나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그녀를, 언제까지나 필요할 때만 찾을 순 없었다.

그건 일방적으로 내 편의만을 위해 이용해 먹는 거나 다름없다.

싫다고 직접 밝힌다면 모를까, 은근히 가입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지금쯤 한 번은 여쭤보는 게 도리 같았다.

“네, 맞습니다. 래빗 님은 저희 길드에 꼭 필요하신 분 같네요.”

“……제가 가입해도 괜찮을까요? 전 이제 막 230레벨에…… 사냥은 거의 안 하고 장사만 주로 하는데요……. 별 도움은 못 돼드릴 거예요…….”

“지금도 다른 방면으로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신데요, 뭘. 어떠세요? 가입해 주시겠어요?”

“그럼요! 성길! 그것도 버닝스타한테 스카우트 제의받는 건데 누가 마다하겠어요! 더구나 유명한 유저들과도 가까워질 기회잖아요! 당장 가입할게요, 드로 니…… 아니, 길마님!”

현중이를 제외하면 가장 처음 인연을 맺었던 핑크래빗.

첫인상부터 상냥했던 그녀는, 그렇게 우리 길드의 열 번째 멤버가 되었다.

* * *

(지옥불: 그래.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니, 정말 그렇게 준비해두겠다. 대신 정말 믿음직하고 강한 놈들로만 골라보마.)

(나: 항상 너무 감사드립니다, 형님. 정말 형님이 안 계셨다면 제가 지금 어떻게 겜하고 있을지 상상이 안 되네요.)

(지옥불: 별것도 아닌 걸로 왜 그러지? 앞으로 태성에 맞서려면, 우리도 더 뭉쳐야 할 테니 괜히 부담 갖지 마라.)

(나: 네, 형님!)

나 대신 길드원들이 공틈의 원딜팟을 포섭해주기로 해서 시간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지옥불 형님으로부터 공성과 관련된 몇 가지 진행 상황을 체크받은 후, 곧바로 로그아웃했다.

공성전까지 남은 기간은 단 2일.

가상현실을 ‘오프라인’이라고 하기엔 뭐하지만, 직접 필드를 돌아다니며 대면하는 오프라인만큼이나 온라인에서의 활동 또한 중요했다.

언론 플레이.

흔히 ‘언플’이라고 말하는 행동을 삼가는 나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공식 홈페이지와 올타 게시판에 글을 적었다.

-[모집] 저희 버닝스타와 함께 수성전에 참여하실 분들을 모십니다!

작성자 ID 산드로.

혼자 태성을 상대로 무한 필드전을 선포한 이후로, 두 번째로 올라온 공식 글.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 발제 글은 올라오자마자 수많은 관심과 추천을 받으며 순식간에 인기 게시글로 등록됐다.

-크아! 버닝스타가 아베르 성을 어떻게 지키려는가 싶었는데, 첨부터 이럴 생각이었구나!

└길드원이 몇 명인데 지키긴 뭘 지켜ㅋㅋ 이런 글 올린다고 누가 참여할 거라고!

└└전 5분 봅니다. 공성 시작하고 태성이 아베르 먹기까지ㅋㅋㅋ

-산드로 돈 좀 벌더니 손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네? 어떤 멍청한 놈들이 남의 성을 지켜주겠어?

└또또 글 제대로 안 읽고 댓글 다는 놈 있네. 와서 활만 당겨달라잖아. 보답으로 템도 줄 거라고 쓰여있고.

└└혹시 뭐 준다는 지 아는 사람 있음? 갔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 싼 거면 좀 깨는데

└└└남의 공성전 한 번으로 팔자 고칠 작정이심?ㅋㅋㅋ

그리고 내 글엔 언제나 그랬듯이, 태성 라인으로 보이는 유저들의 부정적인 방해 글과 악플들도 많이 달렸다.

하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다.

-산드로가 돈 많이 번 건 사실이지만, 아베르 성에서 번 건 없을걸? 거기 세금도 한 푼 안 받고 있잖아

└세금이 없는 성도 있어? 와, 그럼 나만 이제까지 비싸게 거래소를 이용하고 있었던 거야?

└└이거 아직도 모르는 사람 있었네ㅋㅋㅋ 아베르 성에 괜히 사람 넘쳐나는 게 아님!

-걍 재미 삼아서 한번 참여해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죽어도 한번 죽으면 땡이라잖아!

└맞음. 나도 공성전은 겜하면서 한 번도 참여 안 해봤는데... 이건 좀 솔깃함.

└└우리 싼드로와 함께 공성하는 날이 오다니.....요건 무조건 필참이다...!!

└└└태성 이 잡것들이 아베르 성 먹는 꼴은 못 보제! 시공은 내 손으로 지킨다잉!

└└└└이런 아재들과 함께 수성해야 하는 거임? 아.. 그건 좀 :(

-꼬장 유저나 라인네 스파이가 껴 들어가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지?

└그래서 원딜러만 받잖아. 몇십 명 들어와도 종이 몸들로 뭘 하긴 힘들걸?

└└ 몇십 명이 들어올 수가 없지. 되도록 300렙 이상의 유저들만 지원해 달랬는데, 이 레벨대 유저들 중에 스파이가 많을 수가 없잖아.

적극적으로 나를 옹호해주는 유저 또한 많았던 것.

또한 어느 유저의 말 그대로, 단 1개의 캐릭터밖에 플레이할 수 없는 타연 안에서 스파이짓을 하기란 보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애초에 뒤통수 칠 용도로 캐릭을 키운 게 아니라면, 성장 과정에서 배후 길드와 얽힌 정보가 조금이라도 노출될 수밖에 없었고.

아이디 변경은 저레벨 때나 가능한 일이기에, 한번 밝혀지면 그걸로 캐릭터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300레벨이 넘도록 키운 캐릭을 그렇게 버릴 유저는 많지 않을 것.

꼬장 유저의 아이디 또한 지원 과정에서 걸러질 테니, 결국 돈으로 매수될 소수의 유저 정도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았다.

-뭐가 됐건 난 지원해볼래! 아베르 성에서 한 달간 꿀 빨았던 거, 이렇게라도 갚아줘야지!

└그러게요. 중립 원딜러라면 참가들 해보세요. 지켜만 보다가 나중에 태성이 전 성 통일해서 망섭된 다음 후회하지 말고!

└└말만 하지 말고 님부터 참여하세요. 왜 바람만 잡고 있음?

└└└하고 싶은데 전 도둑이라서요ㅠㅠ

‘그러고 보니 도둑 캐릭들은 나한테조차도 관심 밖이었구나.’

하지만 이런 대접은 도둑을 선택한 자들의 운명.

사람들의 반응을 조금 더 살펴보다가, 이윽고 글에 적은 모집 시간이 다가와 다시 타연에 재접속했다.

한 명 한 명 수성에 참여할 유저들을 직접 선정하기 위해!

* * *

“모두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기분은 좋네요!”

“고생이야 길마인 네가 가장 많이 했지. 보니깐 내성 앞에 찾아온 유저들을 일일이 다 만나주더만.”

“하하! 제가 생각한 아이디어니까 제가 책임져야죠. 그래도 그리 힘들진 않았어요. 글들로만 보던 사람들을 직접 얼굴 맞대고 보니까 좀 색다르더라고요. 뭔가 연예인이 된 느낌이었다랄까요?”

“얼핏 봐도 아재들만 득실대…….”

“축굴이 너 안 닥칠래?”

물론 특정 층의 비중이 높았던 건 사실이지만 오히려 더 좋았다.

아재들은 특성상 의리를 강조하고 배신은 극혐했으니 말이다.

“모인 김에 다들 이거 한 번 입어보세요.”

“응? 그냥 심연 망토 아냐? 이걸 굳이 왜?”

“일단 입어보세요! 이건 때깔이 다르거든요, 때깔이!”

모두에게 핑크래빗이 준비한 검은 심연의 망토를 건네주자, 하나둘씩 착용했다.

그러자 곧 다들 얼굴만 드러난 검은 동상과도 같은 비슷한 외형으로 변했다.

“와! 이거 괜찮은데요? 망토가 길어서 몸을 전부 가리는데 온통 흑색이라, 멀리서 보면 누군지 구분이 쉽지 않겠어요!”

“괜찮죠? 오늘 가입하신 핑크래빗 님 아이디어예요.”

이미 한차례 인사를 나눴지만 여전히 쑥스러운 듯, 핑크래빗은 구석에서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에 응답했다.

“근데 최소 수천 명은 모일 것 같은데, 이름 같은 거 안 붙이실 거예요? 유저들, 장사꾼 멤버들, 계속 이렇게 부르긴 좀 그런데…….”

“그러네? 라챤이 말대로, 전략적으로도 명칭 정리가 필요할 거 같은데?”

축빙 형님까지 이렇게 말씀하시자, 다들 이런저런 의견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암흑 유저들…… 아냐, 까마귀들…… 오! 이거 괜찮다. 깜둥이들 어때요? 왠지 귀엽고 정감 가지 않아요?”

“드로 너, 미쳤냐! 때가 어느 땐데 그딴 이름을 붙여? 그런 구린 거 말고 내 건 어때? 블랙 나이트, 혹은 다크 나이트! 캬! 간지 나는데?”

“넌 진짜 패션 센스만큼이나 네이밍 센스도 구리구나. 나이도 젊은 게 왜 그렇게 올드한 감성을 지닌 거냐?”

“그럼 네가 좀 말해 봐! 깜둥이보다야 훨씬 낫구만!”

별거 아닌 거로 또 투덕거리기 시작하자, 보다 못한 축빙 형님이 중재에 나섰다.

“이것들아 쓸데없는 걸로 시간 낭비하지 좀 마라. 이건 어떨까? 드로야, 너 여기 아베르 성의 NPC 기사단 이름 알고 있지?”

“네. 검은 폭풍이잖아요. 그거 때문에 이 성에 오게 됐는데, 잊어먹을 수가 없죠.”

“그래. 그러니까 그 이름을 따서 짓자. 검은 폭풍 기사단이니까…… 흑풍단 어때? 마침 너희가 강조한 검은 망토와도 어울리고 의미도 있고. 딱 적당하지 않아?”

이곳 아베르 성을 수호하는 단 하나뿐인 기사단.

그 기사단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니, 왠지 시작도 전부터 수성에 성공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습니다, 형님! 역시 축굴이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센스세요!”

“형! 한자 말고 영어는 어때요? 다크 스톰! 와, 이게 진짜 제대론데?”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현중이었으나, 선택은 길마인 나의 권한이었다.

흑풍단(黑風團).

한때의 작은 이슈 같은 이벤트로 끝이 날지, 아니면 타연 역사에 길이 남을 역사로 기록될지…….

분명 둘 중 하나로 기억될 단체의 이름은 이렇게 정해졌다.

그리고 이틀이 지나, 마침내 공성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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