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아베르 수성전 (1)
매달 둘째 주 일요일마다 벌어지는 공성전.
지난 한 달을 마무리 짓고 새로운 한 달이 시작하는 날이니만큼, 이 하루를 위해 게임에 몰두하는 유저들 또한 많았다.
일명 ‘공성쟁이’, 혹은 ‘공성꾼’이라 불리는 사람들.
다만 이들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유저들은 공성전을 그저 TV 방송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일정 규모 이상의 길드 정도는 되어야, 운 좋게라도 오벨리스크 파괴 단계까지 다가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성을 점령한 길드, 일명 ‘성길’만이 경험해볼 수 있는 수성전을 오늘만큼은 일반 유저들도 얼마든지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사실 이제는 이판사판이야. 흑풍단이 대성공할지, 처참히 망할지…….’
처음엔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장사꾼 길드와 금전적 이득이 있을 생산직 유저들로만 수성하려 했다.
하지만 무려 ‘라인’까지 만들어서 쳐들어올 작정인 놈들을 상대하려면, 어지간한 숫자로는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다.
즉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난 불확실한 모험을 해야만 했고, 결국 시도했다.
공성 시작 5시간 전.
저녁 6시에 시작되는 수성전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지만,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은 수성전이었기에 벌써부터 여러 유저들이 성을 찾기 시작했다.
“자, 드로야. 여기 오늘 공성에 참여할 길드원들이다. 다들 인사드려라. 버닝스타의 길마이자 내 동생, 산드로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번에 뵀었죠?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먼저 지옥불 형님이 데려온 50여 명의 성기사들이 방문했다.
그중에는 여러 공성전과 전투 때 마주쳤던, 눈에 익은 몇몇 유저들의 모습도 보였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수성은 무척 치열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렇게 피닉스도 아닌 남의 성을 지키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버닝스타가 왜 남인가요? 저희 피닉스와 한 식구나 마찬가지죠. 이곳이 뚫리면 저희 길드원들도 공틈에서 사냥하기 힘들어질 테니, 필사적으로 지키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난 제국의 침공 이후, 6성을 유지 중인 피닉스.
그때 붙은 성장세가 아직까지 이어져서, 어쩌면 단일 깃발 아래 가장 많은 유저를 보유한 건 피닉스로 추측될 만큼 대형 길드가 돼버렸다.
하지만 그건 다시 말해 지켜야 할 것 또한 많다는 뜻.
그 와중에 이렇게 성기사 50명을 빼줬다는 건, 정말 고맙고도 고마운 일이었다.
“340레벨 이하는 한 명도 없다. 50명밖에 안 되니까 큰 도움은 못 되겠지만, 그래도 믿고 맡길만한 애들만 뽑아왔으니까 뒤통수칠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다.”
“뒤통수라뇨, 형님. 그리고 50명도 충분히 많습니다! 사실 형님도 지켜야 할 성이 많은데, 이렇게나 많이 보내주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옥불 형님에게 부탁한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성벽 위의 우리 원딜러들에게 버프를 주고 구심점이 되어 줄 유저를 요청했다.
파티의 최대정원은 16명이고, 공격대의 최대정원은 96명인 건 익히 알려진 기본 상식.
이 중 단 한 명의 유저가 나머지 95명의 공격대원에게 다중 버프를 줄 수 있는 특별한 직업이 있었다.
바로 성기사.
‘오라’라는 특수 버프는 시전자와 일정 거리 내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수와 상관없이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때문에 일정 공간에 모여 제자리에서 원딜 공격만 날릴 우리 흑풍단에게는, 최소의 투자로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직업이었다.
“자, 그럼 다들 저희 핑크래빗 님 앞으로 가셔서 망토를 수령해 주세요. 한 분당 96벌씩 받아가시면 됩니다.”
“와, 많이도 준비하셨네요!”
“역대급 수성전이 되고 유저분들도 기꺼이 도와주시는데, 저희도 이 정도 투자는 해야죠! 그래도 많이 힘들긴 했습니다, 흐흐.”
길드원 전원이 어비스 수치를 탈탈 털어 마련한 총 5천 벌의 망토.
차례차례 공격대원으로 들어올 일반 유저들에게 이 검은 망토를 나눠줄 역할은 피닉스의 성기사들이 맡았다.
또한 그들은, 공성전이 한창 진행되는 동안 우리 버닝스타의 지휘를 원활히 전달할 소통 창구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한 명당 일반 유저 100명의 버프를 책임지는 한편, 전투 지시를 하달할 ‘백부장(百夫長)’ 역할을 부여받은 셈이었다.
공성 시작 4시간 전.
피닉스에 이어, 맨 처음 수성을 약속했던 단체도 찾아왔다.
“와! 일찍 와서 한가할 줄 알았는데, 성안은 벌써부터 북적북적하네요?”
“하하, 그런가요? 잘 오셨습니다, 알바 님. 약속을 지켜주셔서 감사드려요.”
호박 마켓의 길드 마스터 알바마스터와 그의 직원, 그리고 몇몇 생산 유저들이었다.
“처음 인사드리네요. 테팔로 공방의 수장 ‘테팔로’입니다. 이번에 알바 님 따라서 아베르 수성전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엇? 테팔로 님? 와, 안녕하세요! 설마 이런 식으로 만나 뵙게 될지는 몰랐네요. 반갑습니다, 저도 한창 테팔로 공방에서 나온 템을 착용했었어요!”
“오, 그러세요? 저도 지난 보름간 이 성에서 이런저런 혜택을 많이 봐서요. 아마 이번 수성전에 성공하면 정식으로 스토어를 하나 임대해서 공방을 옮길까 생각 중입니다. 물론 그럴 생각으로 참여하게 된 거지만요.”
“하하! 얼마든지요! 테팔로가 이곳으로 옮기신다면 저희 아베르 성에 유저들이 더 붐비게 되겠네요!”
단테리오의 팔찌를 착용하기 전까지 쭉 착용했던 유니크 액세서리, +9 테팔로 공방의 마력 팔찌.
골드로 구입했던 그 템을 만든 당사자가, 진작부터 우리 성으로 와서 활동 중인지는 몰랐다.
확실히 여러 재료템과 완성템들을 쉴 새 없이 사고팔며, 여러 수수료도 자주 지불해야 하는 생산 유저들에겐 우리 성이 제법 매력적이었나 보다.
“며칠 전에 말씀드린 인원보다 더 많이 참여하게 됐습니다. 산드로 님께서 올리신 글과 태성 라인의 탄생, 방송 등등 때문에 더 많은 분들이 참가하고 싶다고 연락 주셨거든요.”
그가 밝힌 인원은 무려 200명 이상 증가한 600명.
전반적으로 브랜드 소속 장사꾼이나 생산 유저들은 풍족한 골드만큼이나 장비 수준이 좋은 편이라서, 평범한 동 레벨의 유저들보다는 훨씬 정예들이라고 봐도 상관없었다.
한데 그런 그들이 600명이나 참여하다니…….
전체 인원에 비하면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승리할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단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덕분에 흑풍단이란 아이디어도 생각하게 됐는데…… 정말 고맙습니다.”
“흑풍단이요? 그게 뭐죠? 아…… 설마?”
“네, 맞아요. 이번에 참여하실 일반 유저분들이에요. 알바 님도 나중에 오실 분들 망토, 지금 받아가세요. 검은색인데, 이게 아주 멋져요!”
“네? 아, 네 네…….”
공성 시작 3시간 전.
이번에는 오늘 공성전을 촬영할 방송팀 중 하나가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김석용 아저씨. 오늘도 직접 오셨네요?”
“그럼요. 오늘은 일도 일이지만 직접 너무 보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다들 같은 마음인지, 5개 방송팀 전부가 이곳에 와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항상 인터뷰만큼은 저희 타이토닉과 독점으로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뭘요. 저도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일단은 배려해주신 대로, 내성을 돌아다니며 카메라 위치 좀 살펴보겠습니다!”
“네, 얼마든지요.”
공성 시작 2시간 전.
대략적인 준비가 끝나자, 우리는 마침내 내성문을 열고 일반 유저들을 성안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리 망토를 수령하고 자리를 배치받은 피닉스의 성기사들이, 하나둘씩 유저들을 공격대에 받아들이며 성벽을 채워나갔다.
“유저분들이 생각보단 침착하게 잘 따라주시네?”
“엄선해서 선정했으니까요. 한 분 한 분 다 체크하면서 들여보내는 거니까, 이래 봬도 다들 게임 좀 하시는 분들이에요.”
내성문 앞에서 수고하는 우리 길드원들을 내려보며, 걱정이 많으셨던 축빙 형님의 마음을 달래줬다.
공성전의 유명한 규칙 중 하나.
그건 공성전이 시작되어 전쟁을 선포하려면, 해당 성 지역 안에 단 한 명의 길드원이라도 들어가 있으면 안 된다는 점이었다.
미리 해당 내성 안이나 주성 안에 잠입해둔 상태로 공성을 진행하는 편법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 규칙에는 또 다른 부가 효과도 있었다.
동맹이나 중립 유저들이 우호적인 성길의 수성전을 도와줄 수 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굳이 2군, 3군하며 길드 정원이 꽉 차면 하위 길드를 만들어 수를 늘릴 수 있었던 이유도, 이렇게 성안에서 미리 자리를 잡고 수성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 유저들을 공성 시작 전에 성벽에 왕창 배치해 두는 것.
이것 역시나 이런 시스템적인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공성 시작 1시간 전.
이제 모든 준비는 거의 다 마무리됐다.
참여하기로 한 인원들은 전부 빠짐없이 찾아왔고, 5천 명에 달하는 일반 유저들의 배치도 모두 끝마쳤다.
여차하면 소환될 타이탄의 동선 또한 체크를 마쳤다.
성벽 위를 빼곡히 메운 검은 물결.
정면에 있는 성벽만으로는 이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 전 방향의 성벽이 전부 검은색으로 도배됐다.
바리케이드 따위는 내성문 앞에도 없고, 오벨리스크 앞에도 없었다.
골키퍼까지 오직 공격수로만 채운 축구팀처럼, 무모한 전략과도 같은 이번 수성전.
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우린 이 인원을 가지고 1시간의 공성 시간을 버텨볼 작정이었다.
* * *
“긴장되냐?”
“긴장은 무슨……. 근데 떨리 건 어쩔 수가 없네.”
“떨린다고? 긴장한 거 맞네, 뭐.”
“그런 게 아냐. 이 많은 사람들이 애썼는데, 혹여 실망하면 어떻게 될까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그래? 그럼 답 나왔네. 실망할 일 따윈 만들지 않으면 되겠네.”
내성문 바로 위 성벽 위.
몇 분 남지 않은 공성 시작을 기다리는 내게 현중이가 말을 건네왔다.
녀석이 물은 건 다름 아니었다.
내가 바라보는 방향에 태성 라인.
이번 공성전에 우리 성을 치기로 작정한 적군이 모습이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대략 살펴봐도 약 1만여 명.
아베르 성은 비탈길을 올라와야 하는 언덕 구조였는데, 덕분에 놈들은 언덕 아래서 우글대며 대기 중이었다.
“많이도 몰려왔다. 번스타인 성도 단일 세력이 저 정도로 몰려간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미친 거지. 저 정도면 원래 지켜야 할 성들에서 수성 인원을 절반 정도씩은 뺀 것 같은데 말야…….”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태성 라인에서 보유 중인 모든 비행 탈것이 이곳에 몰려온 듯, 놈들 상공에는 수많은 페가수스와 그리폰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올린 게시글의 조회 수가 이미 천만을 훌쩍 넘었으니까…….’
그건 다시 말해 태성 라인 놈들도 오늘 수성전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를 수가 없다는 뜻.
놈들도 그에 대한 나름의 준비를 해왔을 게 분명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하늘’인 모양이었다.
펄럭펄럭!
얼핏 봐도 100여 기가 훌쩍 넘어가는 페가수스의 수.
거기에 기존의 태성이 자랑하던 그리폰 라이더 50기까지 더해져 온통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히야……. 어느새 타연에도 비행 탈것이 엄청 늘어났네요.”
“그렇긴 한데, 올림푸스의 페가수스만 100기가량 되잖아. 놈들 말고는 페가수스를 타고 다니는 유저들이 없으니까, 늘어난 거에 비해 자주 보긴 힘들더라. 아무튼 오늘은 여기 다 모였나 보네. 쩝…….”
내 뒤에서 공중을 살펴보던 라챤이와 축빙 형님이 나직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페가수스의 깃털이라고 했지? 그것도 연구 좀 해봐야 할 텐데……. 자기들만 철저히 독식하고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양옆으로 돋아난 날개가 순백의 몸체와 어우러져 무척 아름답고 멋진 페가수스.
하지만 그 크기는 일반 유저들이 이동용으로 타고 다니는 소환 말과 얼마 차이 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단점 하나가 있었다.
바로 페가수스는 일인용 비행 탈것이라는 점.
몸집이 큰 그리폰이나 와이번은 2명, 심지어 내 훼라리엔 총 3명을 태울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전략적으로 크게 아쉬운 점이었다.
괜히 지난 드래곤 레이드 당시에 뒤에 궁수를 태우지 않고, 라이더인 탱커 캐릭들이 직접 활을 쐈던 게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오늘 일어날 공성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또 활을 들고 있구나.’
내성문으로 향하는 길이 한정적인 것과 달리, 공중에서는 아무런 동선 제약도 없었다.
따라서 150기에 달하는 유저들이 원딜을 집중해 일점사한다면, 가장 외곽에 자리 잡은 흑풍단이 조금씩 죽어 나갈 것이 분명했다.
이 많은 원딜러들이 있는 곳으로 공중 침투하겠다는 건 자살행위.
그래서 놈들 또한 그저 원딜로 우리의 수성 병력을 조금씩 깎아 먹을 작전인 게 분명했다.
다른 수성 인원과 달리 우리의 흑풍단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채워지지 않을 일회용 병력이었으니까.
“준비되셨죠, 형님? 라챤이 너도?”
“넵!”
“그래.”
그렇기 때문에 이 2명을 내 훼라리 뒤에 태웠다.
놈들의 그런 의도가 뻔히 보이는 데, 우리가 놈들이 그렇게 하도록 가만히 놔둘 이유는 없다.
무려 3명까지 탑승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지상 포함, 현존하는 모든 펫들 중에 가장 HP가 높으면서 이속도 빠른 레드 드레이크.
난 훼라리만의 이 메리트들을 십분 활용할 작정이었다.
하늘에 떠 있는 저 비둘기와 참새들을 대상으로!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빠빰! 빠빠빰!
그리고 마침내, 가슴 뛰게 만드는 트럼펫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