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아베르 수성전 (2)
공성 시작과 동시에 내성 위로 날아올랐다.
“투쟁의 오라!”
그런 우리 뒤로 성벽 곳곳에 자리 잡은 성기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투쟁 오라 특유의 붉은 빛이 우리 흑풍단 전체를 은은하게 감쌌다.
[‘태성’ 길드가 당신에게 공성을 선포했습니다.]
[‘올림푸스’ 길드가 당신에게 공성을 선포했습니다.]
[‘태성02’ 길드가 당신에게 공성을 선포했습니다.]
[‘레미제라블’ 길드가 당신에게 공성을 선포했습니다.]
……………………
주르륵 떠오르며 눈앞을 어지럽히는 수많은 길드들.
성을 점령한 길드 마스터만이 볼 수 있는 메시지창이었다.
직접 공성 선포를 받는 입장이다 보니, 선포할 때와는 미묘하게 달랐다.
칼젠 성도 직전에 넘겨줬던 터라, 실제 수성전에서 이렇게나 많은 길드가 전쟁을 선포하는지는 몰랐다.
‘아니야. 어쩌면 단일 성으로 이렇게나 많은 선포를 받아보는 건, 이번이 최초일지도…….’
덕분에 전장엔 잠시 짧은 적막이 이어졌다.
하지만 마침내 라인 소속 길드 전부가 선포를 마쳤는지, 조금씩 전진하기 시작했다.
“온다 온다!”
“와우! 오늘에야말로 내 손으로 태성 놈들을 족친다잉! 오기만 해 봐!”
“오예! 나 오늘 방송 타는 거야?”
성벽 위 수많은 흑풍단으로부터, 숨길 수 없는 긴장감과 설렘이 전해져왔다.
대충만 살펴봐도 최선두에 선 탱커들은 전부 고레벨에 좋은 장비들을 착용한 것처럼 보였다.
반면 우리 흑풍단은 레벨도 장비도 제각각으로 모인 일반 유저들이 대다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진형을 잘 갖춘 성벽 위 원딜러란 이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일단 넓게 포진한 다수가 한정된 비탈길을 올라오는 상대적 소수를 공격한다는 ‘진형’적 이점이 있었고.
높은 성벽 위에서 언덕 아래를 공격하기에 놈들보다 사정거리가 더 길다는 ‘지형’적 이점도 있었다.
이런 대규모 병력이 맞붙는 건 타연에서도 이번이 최초.
놈들도 우리의 화력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이라도 하겠다는 듯, 전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우리의 사정거리 안에 선두의 탱커들이 진입하는 순간!
“공격!”
공중에 낮게 떠 있던 나는 큰 소리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그 신호에 맞춰, 무수한 화살 비와 마법이 성벽 밖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피피피핑! 콰쾅!
제멋대로 쏘아진 원거리 공격들.
논타겟팅 게임인 타연이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냥 눈감고 허공에 쏴도 누군가는 맞을 만큼, 적은 넘치고 넘쳐났기 때문에!
역시나 전면에 배치된 2, 3천 명에 가까운 흑풍단으로부터 대규모 원거리 공격이 쏟아지자, 위력이 어마무시했다.
‘미쳤네. 아무리 나라도, 저건 못 버틴다! 크크!’
미리 쳐뒀을 쉴드와 보호막은 단 0.1초 만에 터져나갔고, 가장 앞줄에 있던 수십 명의 탱커들 또한 1초도 버티지 못한 채 쓰러졌다.
아니, 보호막이 터지는가 싶더니만 동시에 죽어버린 느낌이었다.
“죽었다! 내가 죽였어!”
“대박! 일점사 미쳤네, 크크!”
“이게 우리 흑풍단이다, 이 태성 쪼다들아!”
문자 그대로 미친 화력.
우리들이 다들 감탄사를 내뱉을 수 있었던 건, 우리의 공격에 놀란 태성 놈들이 본능적으로 전진을 멈춰버렸기 때문이었다.
[산드로: 대박이네요. 성공이에요!]
[라스트챤스: 이게 될까 싶었는데, 되네요! 그것도 아주 잘ㅋㅋㅋ]
[축복받은파볼: 광역기까지 함께 날아가니까 답이 없어. 이걸 어케 뚫겠어ㅋㅋ]
문득 로젠타스 성이 떠올랐다.
4개 첨탑에 마법사들만 배치해뒀더니 다리를 넘어오지 못한 것처럼, 이곳은 사이즈만 더 커졌을 뿐 같은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바리케이드나 다른 조합 없이, 오직 원딜러들로만 수성 병력을 구성한 게 제대로 먹혀들었다.
‘뚫으려면 뚫을 수 있겠지. 수백, 수천 명이 죽어 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한다면……!’
하지만 그건 초반부터 나올 전략이 아니었다.
아무리 공성전 사망 시 템 드랍 확률이 낮다 하더라도, 경험치까지 낮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목숨을 버려가며 시도하는 건, 다른 걸 시도한 다음 진행해 봐도 늦지 않았다.
오늘 태성 라인의 공성 지휘를 누가 맡았는지 몰라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잠시 사정거리 바로 코앞에서 멈춘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어? 움직입니다, 형님! 페가수스와 그리폰이요!”
“그래? 음…… 이번엔 하늘이구나.”
패시브 스킬과 영약 복용 덕에 시야가 좋은 라챤이가, 놈들의 다음 움직임을 먼저 포착했다.
‘역시 공중전을 시도해보겠다는 거지?’
놈들은 마치 철새의 V자 비행처럼, 나름의 비행 편대를 짠 채로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리고는 우리가 탄 훼라리보다 훨씬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간 상태로 다가왔다.
“저 자식들, 뭘 하려고 저러는 걸까?”
“특별한 게 있겠어요? 원딜러들이 성벽에 자리 잡고 있으니까 자기들은 더 위에서 쏘겠다는 심산이겠죠, 뭐.”
축빙 형님의 물음에 답변하기가 무섭게, 한데 뭉친 놈들은 바로 화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기사가 쏘는 화살이라 스킬 따윈 전혀 섞여 있지 않은 평범한 평타 공격.
그래서 정말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비’와 같았다.
피핏! 핏!
한데 그 ‘비’는 우리가 탄 훼라리의 곁을 스쳐 성벽 위로 내려꽂혔다.
“으악! 뭐야!”
“저 자식들, 왜 이렇게 사정거리가 길어!”
성벽 위에서 아래로 쏜 원거리 공격이 언덕 아래에서 성벽으로 쏘는 공격보다 멀리 날아가는 건 상식.
그와 마찬가지로 공중에 떠 있는 놈들에게까지 흑풍단의 사정거리는 닿지 않지만, 공중에서 날린 놈들의 화살 공격은 성벽 위 아군에게 닿았다.
물론 평타 공격이라 크게 아프진 않았지만, 150명이 넘는 숫자가 날리는 공격이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로 원딜러들답게 체력과 방어력이 약한 터라, 이미 운 나쁘게 집중 공격받은 몇몇은 벌써 잿빛으로 변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놈들은 흑풍단을 노릴 게 아니라, 진작부터 공중에 떠 있던 우리부터 노렸어야 했다.
“드레이크 하나만 홀로 떠 있어서, 이게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바로 가겠습니다!”
“그래, 후딱 잡자!”
“야호! 다 죽었다, 이 자식들아!”
제자리에서 홰만 치고 있던 훼라리는, 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쏘아진 포탄처럼 놈들을 향해 순식간에 솟구쳐올랐다.
그리고는 내 조종에 따라 가장 가까이에 있던 페가수스를 향해 몸통 박치기를 하듯 돌격했다.
“산드로다! 피햇!”
“이미 늦었다, 이 자식들아.”
쉬이잉!
물론 훼라리는 부딪히지 않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난 그사이 훼라리에서 점프해, 페가수스에 라이더의 등 뒤에 올라탔다.
푹! 푹!
대도 부츠로 몸을 단단히 고정한 상태로 들어간 후방 공격.
“제, 젠장! 연속 베기!”
당황한 상대는 기특하게도 재빨리 검과 방패로 스위칭한 뒤 반격해왔지만, 안타깝게도 탱커의 공격력이라 그런지 닳는 MP보다 흡수되는 MP가 더 많았다.
쾅!
또한 그런 상대의 몸이 순간 경직될 정도로, 다른 강력한 공격도 날아와 박혔다.
바로 라챤이가 쏜 파워 샷이었다.
“뭐야? 이 말도 안 되는 데미지는…….”
스르륵.
연이은 단일 타겟 스킬 공격과 라챤이의 연계를 버티지 못하고, 올림푸스 소속 라이더는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페가수스도 역소환되어 사라졌다.
[그림자 밟기!]
허나 내겐 허공에서도 이동이 가능한 생존기가 남아있었다.
곧바로 근처에 있던 다른 라이더의 등 뒤로 옮겨탄 나는, 역시나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후방 공격을 쑤셔 넣었다.
“뭐 하는 거야! 다들 이 자식부터 좀 공격해!”
“씨앙! 말이 돼? 저렇게 움직이는 자식을 어떻게 맞춰!”
내 앞에 있는 기사의 고함도, 그 소리에 대꾸하는 누군가의 투덜거림도.
전부 충분히 이해되는 상황이었다.
원래 원거리 공격은 아무리 타겟팅 보정 효과가 주어진다 한들, 제대로 적중시키기 어려웠다.
한데 공중에서 이리저리 이동 중인 날 맞춘다는 게 쉬울 리가 없었다.
[마나 쉴드가 1,222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1,064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
또한 애초에 기사 캐릭이 쏘는 화살 데미지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한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내 공격뿐만 아니라 라챤이의 공격도 감내해야만 했다.
공중 한복판에서 타연 최강의 근접 딜러와 원거리 딜러의 합동 공격을 버텨야 한다니…….
오히려 지상에 뭉쳐있을 때보다, 이렇게 공중에 하나씩 떠 있는 지금이 각개격파하기엔 더욱 수월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신성한 보호막!”
“그레이터 힐!”
전략적인 가치상, 페가수스 라이더와 그리폰 라이더 중에는 힐러가 거의 섞여 있지 않았다.
대부분이 탱커거나 원딜러.
그 때문에 적들 입장에서는 막대한 데미지를 잠시라도 버틸 힐이 모자랐지만, 반대로 열심히 활질 삼매경인 라챤이의 체력은 풀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이유는 당연히 축빙 형님 때문.
데미지를 나눠받는 영혼 연결을 건 채 끊임없이 버프와 힐, 광역 힐 등을 걸어주는 사제와 궁수의 조합은 마치 랭커급 탱커처럼 단단했다.
기본적으로 기사들의 활질로는, 빠르게 비행 중인 훼라리 위의 두 사람을 맞추기 어렵기도 했고 말이다.
“빌어먹으…….”
또 한 명의 기사가 죽었지만, 공중엔 아직도 먹을거리가 넘쳐났다.
활로는 답답했는지, 원래 주무기인 검과 창 등으로 스위칭한 라이더들이 내가 있던 곳으로 몰려왔던 것.
덕분에 밟고 있던 페가수스가 사라졌지만, 아래로 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와! 이거 개꿀인데?”
놈들의 비행 펫들 사이를 껑충껑충 뛰어다니며 공격을 먹이다가, 곁을 스쳐 가는 훼라리로 도로 옮겨탔다.
그리고는 무기를 스위칭한 뒤, 나도 원거리 공격을 시전했다.
픽! 회수, 픽! 회수.
2초마다 무기 투척을 가능케 하는 테네시의 바람 단검!
라챤이가 공격하던 궁수를 향해 단검을 몇 번 던지자, 곧 감당할 수 없었는지 리타이어당하고 말았다.
“잡아, 좀! 한 새끼한테 너무 휘둘리고 있잖아!”
“한 새끼가 아니라, 세 놈이잖아!”
“씨앙! 그냥 좀 닥치고 치라고!”
자신들도 이런 상황이 황당하고 열 받았는지, 뜬금없이 소리를 치며 싸우는 녀석들도 나타났다.
퍼엉!
그런 놈들을 향해 훼라리의 화염구 브레스를 먹인 후, 다시 점프해서 올라탄 뒤 직접 검을 먹여주었다.
“내전은 내려가서 하시든가요. 우릴 두고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아이디가 낯익었다.
지난번 투 메르타스의 레어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던 라이더 중 한 명.
하지만 이번만큼은 살아남지 못했다.
“크아악!”
허공에서 잠시 머뭇댄 대가는 컸다.
자버프를 쓴 덕에 3기의 페가수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
정신 차린 놈들이 내가 옮겨탈 수 없도록 흩어지자, 난 그림자 밟기를 사용해 또다시 훼라리로 복귀했다.
“미쳐버리겠네! 저걸 어떻게 잡아!”
“그냥 드레이크를 치자! 그게 더 낫겠어!”
“아까부터 존나게 치고 있었거든요? 근데 피가 도대체 몇이야, 저 펫은?”
우릴 둘러싼 녀석들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우리 세 명 만으로 150기에 달하는 비행 부대가 지상 공격을 못 하고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듯 큰 소리로 외치며 다가오는 한 유저가 있었다.
“방금 산드로의 그림자 밟기가 빠졌다. 쿨타임일 테니 지금 전부 달라붙어! 어떻게든, 지금 지상으로 낙하시켜야 한다!”
“넵!”
말 한마디로 혼란에 빠진 놈들을 다시 일사불란하게 되돌린 리더.
바로 페가수스 라이더 중의 한 명으로 이곳에 있던 제독이었다.
“오호라, 제독 님도 여깄었네요?”
“지금 여유 부릴 때가 아닐 텐데!”
아닌 게 아니라, 명령 때문인지 이번만큼은 전부 사력을 다해 훼라리를 향해 달라붙었다.
그런 놈들을 피하기 위해 더 높은 상공을 향해 솟구쳐 올랐지만, 넓게 포위하듯 각을 좁히며 다가와 쉽게 벗어나긴 힘들어 보였다.
그렇게 지상의 성과 병력들이 조그맣게 보일 만큼 높이 올라갔을 때, 나는 갑자기 훼라리의 방향을 꺾으며 강하를 명령했다.
“몬스터 라이딩!”
그리고는 이속 80%를 높여주는 스킬을 사용해, 따라 올라오던 놈들 곁을 반대로 뚫고 지나갔다.
“잡아!”
‘잡긴 뭘 잡아! 내가 오히려 잡아주마!’
순간적으로 내 집중력은 최고조에 이르렀고, 스치는 페가수스들 사이로 줄곧 염두에 두고 있던 한 페가수스를 놓치지 않고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제독이 탄 놈!
그리고 다음 순간, 왼손의 검을 군단장의 채찍으로 스위칭하며 외쳤다.
“포획!”
일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채찍의 궤적.
그리고 채찍은, 펼쳐질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되감겨져 내 손으로 돌아왔다.
바로 ‘제독’이라는 선물과 함께.
“뭐, 뭐야!”
“뭐긴 뭡니까, 이대로 낙사지!”
그리고 훼라리에 타기엔 정원 초과에다 대도 부츠도 없던 제독은,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져 버렸다.
공중에 자기가 타고 있던 빈 페가수스만을 남긴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