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아베르 수성전 (3)
군단장의 채찍을 얻은 이후, 이런저런 테스트를 해보다가 찾아낸 활용법.
이 ‘낙사 유도’ 또한 와순이를 탄 라챤이를 상대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비장의 무기였다.
유저는 본인이나 동료의 펫에서 타고 내리는 등 옮겨 탈 수 있다.
마찬가지의 원리로 채찍에 내장된 스킬을 사용하게 되면, 페가수스와 라이더 둘 모두가 끌려오는 게 아니었다.
확인해 보니, 시스템상 오직 ‘적중’된 대상만이 ‘포획’ 판정을 받았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나는, 일부러 이 방법을 공개하지 않은 채 더 높은 공중으로 놈들을 유인했던 것이다.
그것도 제독이 잘 따라오도록!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으아아!”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뜻밖의 일이라서 다들 어어 하는 사이.
그는 다른 라이더들이 반응도 하기 전에 밑으로 쑥하고 떨어졌다.
“구해드려!”
“그리폰들 뭐 하고 있어, 태우지 않고!”
같은 라이더라도 올림푸스는 1인용인 페가수스만 타고 있었다.
따라서 제독을 낙사로 구할 수 있는 건 2인 탑승이 가능한 그리폰만 가능했는데, 그들 또한 잠시 얼을 타다 타이밍을 놓친 건 매한가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플레이는 타연에 지금 처음 등장한 것이라, 상황 판단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난 강하하던 훼라리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추락 중인 제독의 뒤를 쫓았다.
‘나라면 그냥 죽고 말 텐데…… 아마 분명히 꺼내겠지?’
그는 무적 스킬이 있는 성기사도, 추락 직전에 쓸 수 있는 블링크나 그밟 같은 순간이동류의 이동기도 없는 ‘기사’ 캐릭.
하지만 그는 랭커이자 한 국가의 국왕이었고, 무엇보다 얼마 전 내가 넘겨준 생존 수단이 있었다.
그걸 사용한다면 이 낙사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
“티에스 나이츠 소환!”
번쩍!지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 역시나 다른 방법이 없던 제독은 공중에서 타이탄을 소환했다.
마치 내가 칼젠 성을 혼자 먹던 당시를 연상케 하는 광경이었다.
콰앙!
육중한 강철 거인이 착지하자 거대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안타깝게도 우리 아베르 성 내성 광장 안에!
“하하하! 이게 웬 떡이냐!”
“신화국은 역시 이름값 하네. 겁도 없이 국왕 혼자서 성안에 쳐들어오다니!”
“깡 존나 세네! 크크크!”
여전히 소강상태였던 전장.
덕분에 지상에 남아있던 태성 라인과 내성 안의 흑풍단들은, 다들 번외 경기를 보듯 우리의 공중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제독이 떨어진 장소는 공중 바래 아래였던 우리 내성 안일 수밖에 없었다.
피슈슈슛! 퍼펑!
누가 원딜러들 아니랄까 봐, 공격 지시가 떨어지기도 전에 공격이 쏟아졌다.
그리고 낙하 데미지에 손상입은 타이탄으로선, 몇 발자국도 떼기 전에 이 어마어마한 일점사를 버티지 못하고 부서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산드로 이 개자식 때문에…….”
퍼퍼펑!
역소환으로 잠시 모습을 드러낸 제독이 뭐라 지껄였으나, 금세 집중 공격에 파묻히고 말았다.
모두의 앞에서 이루어진, 타연 거물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라스트챤스: 하하핫! 꼴 좋네요, 제독!]
[축복받은얼굴: 그러게 말야. 고작 페가수스 좀 몇 개 있다고 거만 떨더니만, 고만 똑하니 떨어져 버렸네? 잘 좀 타고 있지ㅋㅋㅋ]
[축복받은무빙: 그래도 다들 방심하진 말자. 우린 계속 공중을 엄호하고 있을 테니까 지상을 부탁한다!]
[무적살라딘: 넵, 형님!]
운이 좋았는지 제독은 어떠한 아이템도 드랍하진 않았다.
하지만 이 많은 유저들 앞에서 비참한 죽음을 선사해 주었으니,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태성 라인의 등장으로 결국 우리가 얼마 대항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 거란 예상들을 많이 내놓았다.
허나 그 후 치러진 공식적인 첫 전투에서, 태성과 합류한 올림푸스란 거대 길드의 수장을 죽였다는 건 상당히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5천 명이 넘어가는 우리 흑풍단뿐만 아니라…….
이 소식을 들을 수많은 유저들의 머릿속에, 우리가 여전히 태성과 맞서 싸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평가를 심어주게 될 테니까!
“다들 보셨죠? 신화국의 국왕, 제독이 죽는 모습을요!”
“네에에!”
“네!!”
온성이 떠나가라 외쳐대는 수천 명의 응답 소리.
전 방향의 성벽 위를 빼곡하게도 메운 터라, 마치 내성 안이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히 폭발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모자란 수준.
그 한가운데 자리 잡은 광장 상공에서 주위를 둘러보자, 다들 흥분되고 고조된 표정이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그러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벅찬 감동이 밀려왔다.
‘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와줬다니……!’
엄밀히 따지자면 우릴 돕겠단 선한 의도로 모인 건 아니었다.
성을 지켜 세금 혜택을 사수하고, 좋은 사냥터에서 계속 사냥하고 싶은 마음에…….
죽어봤자 한 번뿐이니 기분전환 삼거나 재밌을 것 같아서…….
친구가 가보자고 보채니까, 혹은 레어 망토 하나를 공짜로 준다고 하니까 등등…….
제각각의 이유로 이곳에 뭉친 사람들.
하지만 내 눈엔 모두가 똑같은 복장을 한 우리의 식구, 조력자들로밖에 안 보였다.
그러니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고, 문득 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제대로 된 출정식(出征式)도 하지 않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저 소리쳤다.
“이렇게 다들 수성전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힘을 합쳐 오늘 이 아베르 성을 지켜보도록 합시다! 저희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전 놈들의 전진을 저지하고, 제독을 죽인 것처럼 말이죠!”
“와아아아!”
더 차오를 수 없을 것 같은 수준까지 사기가 오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뒤로한 채, 다시 공중에 있는 태성 라인의 비행 부대를 향해 날아올랐다.
우리 성 상공엔, 다신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 * *
공성전이 시작된 지 30분.
모두의 예상대로 공성전은 초반부터 치열하게 이뤄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한데, 잠시 간만 보려던 공중전에서 제독이 어이없게 죽어버리자, 잠시일 것만 같던 소강상태는 벌써 공성전의 절반이 지나도록 이어지고 있었다.
[축복받은얼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지... 화끈하게 싸울 줄 알았는데 이게 뭐야? 우리랑 눈싸움하려고 모인 건가?]
[축복받은무빙: 설마 저 많은 인원이 모아놓고 이대로 끝나겠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곧 쳐들어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 길드 내에서도 이럴 정도니, 일반 유저들은 더욱 그러했다.
기껏 끌어올린 사기도, 어느샌가 싹 식어버렸다.
(나: 형님, 아직 별다른 소식은 없었나요?)
(지옥불: 그래. 예상대로 놈들은 우리 피닉스의 성은 한 곳도 쳐들어오지 않았다. 자잘한 길드 몇몇이 선포를 걸긴 했는데, 별건 아니었지. 아니, 잠시만!)
(나: 네?)
(지옥불: 방금 연락이 들어왔다. 태성이 라켄 성과 오펠 성에 집결 중이라는구나!)
(나: 역시! 모든 게 저희가 추측했던 그대로네요!)
라켄과 오펠 성.
이 두 성은 나름 명문으로 이름 높은 화랑 길드와 피스메이커 길드가 각각 1년 넘게 점령 중인 성이었다.
필드전과 세력 다툼에 관심 없는 고레벨들은, 이 두 중립 길드에 가입하는 경우가 많아 생각보다 강력한 곳이었다.
거기에 그들은 각각 단 한 개 성만 차지하고 더는 욕심부리지 않았기에, 굳이 태성이나 다른 4강 길드도 이들과 척질 필요 없어 두고만 보고 있었다.
따라서 그동안은 그들 중립 길드의 성을 탈환하기가 쉽지 않았다.
‘놈들이 이런 기회를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하지만 며칠 전, 태성은 라인을 구축하면서 타연에 존재하는 모든 성의 2/3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제 놈들 라인에 속하지 않은 성은 피닉스 소유의 6개 성, 그리고 우리 아베르 성을 포함한 중립 길드 소유 3개 성으로 총 9개뿐.
애초에 놈들은 대대적으로 우리 아베르 성에 올인하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피닉스를 제외한 나머지 중립 길드부터 점령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타연에 나머지 성길이라곤, 피닉스와 우리 버닝스타밖에는 남지 않게 될 테니까!
(나: 아마 바로 점령되겠죠?)
(지옥불: 그럴 거다. 우리 애들이 대략 살펴보니, 거의 대부분 성에서 수성 병력을 절반 넘게 뺀 모양이더구나. 아마 너희 성 앞과, 나머진 각각 라켄과 오펠 성에 가 있는 거겠지.)
라인을 형성했다는 것.
그건 같은 라인끼리는 견제할 이유가 없으니 병력에 여유가 생긴다는 걸 의미했다.
또한 놈들 라인에 속하지 못한 길드들은, 점차 수적 열세로 인해 각개격파될 운명이란 것을 암시했다.
그러니까 순서의 차이였지, 우리 아베르 성과 같이 다른 중립 성이 놈들에게 당할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 그럼 작전대로 가야겠네요. 형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옥불: 그래. 이제부터 진짜 공성전이 시작되겠구나. 건투를 빈다!)
(나: 넵!)
그래서 세운 작전.
그건 피닉스가 우리 아베르 성 수성을 돕는 대신, 오히려 역으로 태성이 점령 중인 성을 치는 것이었다.
그것도 각종 시설을 투자하고 세금이 가장 많이 걷히는 성, 번스타인을!
-놈들은 기세등등하겠지? 대형 길드들이 전부 뭉쳐서 쳐들어올 테니, 수성에 급급할 거라고 말이지.
-아마 그렇게 생각하겠죠, 형님. 가뜩이나 피닉스는 수성을 돕던 아틀란티스도 빠진 상태니까요.
-그러니 드로야, 우리 한 번 역발상을 해보는 건 어떨까? 이번 공성전에서 반대로 우리가 놈들을 치는 건?
-네?
-대대적으로 너희 성이나 다른 성들을 치려면, 그만큼 수성 병력이 빠질 수밖에 없지. 한데 놈들이 우리 피닉스를 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쳐도 공틈을 갖고 있는 너희를 먼저 점령한 다음에야 칠 테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수성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그렇네요! 아마 피닉스가 다시 7성을 먹을 거란 생각도 못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면 다시 제국의 침공을 받게 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맞다. 하지만 7성이 된다 한들, 가장 필요 없는 성을 버리면 그만이지. 어때? 이번 공성전에서 우리 피닉스가 번스타인을 먹는다면!
-최곱니다. 역시 공성은…… 많이 해본 사람이 잘하는 법이네요!
-뭐라고? 하하!
라인이 탄생했단 소리를 듣고 지옥불 형님과 나눴던 의논.
그 결과, 우리는 이번 공성전에서 함께 또 한 번의 모험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자고로 공격은 최선의 방어이기도 한 법.
수세에 몰렸다고 막기에만 급급하다 보면, 어느새 외통수에 빠져있기 십상이었다.
오히려 놈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줄 수 있는 공격을 한다면 녀석들과 치를 장기전을 조금 더 유리하게 풀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라켄 성의 오벨리스크가 점령당해 공성전이 종료됩니다.]
[‘태성’ 길드가 라켄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오펠 성의 오벨리스크가 점령당해 공성전이 종료됩니다.]
[‘올림푸스’ 길드가 오펠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떠오른 전체 알림창.
그건 역시나 태성 라인이 두 중립 길드 소속의 성을 점령했다는 메시지창이었다.
“뭐야? 태성이 라켄을 먹었어? 그럼 중립인 화랑을 쳤다는 거야?”
“그뿐만이 아냐! 올림푸스가 오펠 성도 먹었잖아! 이거 미쳤네!”
“라인이 생겼단 소식 듣고, 내 이럴 줄 알았다 알았어! 결국 타연에 중립 길드라곤 씨가 마르게 되겠네!”
전체 알림답게 주변의 흑풍단들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그만큼 이 소식이 의미하는 바는 파급력이 컸다.
하지만 그건 나중에 찬찬히 생각해볼 바.
지금 우리에게 이 메시지창은, 이제 다음 차례로 우리를 쳐들어오겠다는 신호와 다름없었다.
[산드로: 자, 다들 백부장들한테 전달해 주세요. 이제 두 성을 점령한 태성 놈들이 이곳으로 넘어와 공격해 올 거라고요.]
[축복받은파볼: 응!]
[대탐험시대: 넵!]
명령은 순식간에 전 흑풍단에게 하달되었고, 나른해진 분위기는 삽시간에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건 적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와아아!”
거리가 제법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갑자기 적진 한복판에서 함성이 들려왔다.
첫 전진 당시에도 보이지 않았던 반응.
그 이유는 금세 알 수 있었다.
<다리우스>
사정거리가 닿지 않는 태성의 최선두.
그 앞에 익숙한 얼굴과 아이디의 소유자가 등장했기에.
“가장 맛있을 이곳에 앞서, 나머지부터 정리하느라 늦었습니다. 다들 오래 기다리게 했군요.”
거만한 표정만큼이나 오글대는 말투.
태성 길드의 수장 다리우스는, 예전과 여전히 변함없는 모습 그대로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비굴했던 모습의 당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제 제가 왔으니, 이 아베르 성도 바로 접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데이네스 소환!”
번쩍!
놈의 외침과 함께 오랜만에 데이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런 데이네스 양옆으로 비슷한 크기의 빛줄기가 연달아 솟구쳤다.
쿵, 쿵, 쿵, 쿵!
육중한 발 구름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타이탄들.
총 9기의 티에스 나이츠와 신화 나이츠가, 데이네스를 가운데 두고 나란히 소환됐다.
“와아아아!”
놈들은 마치 다 잡은 먹잇감을 둔 것처럼 진격 대신 가만히 서 있었고,
이 놀라운 위용에 감탄한 태성 측 진영의 함성은 끝없이 높아져만 갔다.
[당근당근단검: 10기나 꺼내다니.... 그새 많이도 준비했네요.]
[산드로: 아마 저것도 다 꺼낸 건 아닐걸? 아무튼 이번엔 제대로 올 테니까 우리도 나가봐야겠다. 축굴아, 당당아 준비됐지?]
[축복받은얼굴: 항상 하는 말이지만, 옥케이다!]
[당근당근단검: 그럼요!]
원딜러가 아무리 많더라도, 저 타이탄 부대의 전진까지 막진 못한다.
그러니 나중을 위해 아끼려다간, 자칫 내성문이 바로 뚫려 버릴 수 있었다.
서둘러 훼라리를 조종해 축굴이와 당당이를 태우고, 내성문 앞으로 비행했다.
그리고 공중에서 역소환 시키며, 각자 자신의 타이탄을 소환했다.
번쩍! 번쩍! 번쩍!
10기에 맞설 우리 쪽 3기의 타이탄.
루이투스, 레벤다스, 그리고 특별히 컨트롤이 뛰어난 당당이에게 빌려준 강화된 가이라 나이츠의 등장이었다.
“무적 태성이여, 전진하라!”
그런 우리의 모습에 다리우스가 전진을 명했고, 저 밑 마을까지 꽉 들어찬 태성 라인의 병력들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흑풍단 전원! 공격!”
그에 맞서 나 또한 루이투스의 검을 치켜들며 공격을 명령했다.
순간 머리 위가 어두워질 정도로, 화살 비와 마법이 쏟아져 나왔고…….
우리 셋은 그걸 지붕 삼아 다가오는 타이탄들을 향해 맞서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