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아베르 수성전 (4)
콰광!
전장에 울려 퍼지는 거대한 굉음.
당연한 일이지만, 격돌은 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10 대 3.
각각 3기 이상의 막아서야 하는 우리로선, 놈들의 집중 공격을 방어하기도 버거웠다.
심지어 놈들과 근접전을 벌이게 되자, 피해를 우려한 흑풍단의 원딜 공격 또한 옅어졌다.
하지만 또한 그 덕분에, 눈앞의 녀석과 짧은 대화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건방진 자식, 오늘에야말로 네 놈을 죽여버리고 말겠다!”
“항상 넌 그렇게 말해왔지만…… 결국 죽은 건 누구였더라?”
“닥쳐!”
특유의 삼연격 스킬로 공격해오는 데이네스.
하지만 굳이 맞상대에 정신 팔리기보단, 지금 내가 해야 할 역할에만 집중했다.
놈들이 최대한 전진하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에!
[심판의 전진!]
콰광!
슬쩍 몸을 빼며 다리우스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곁에 있던 타이탄을 상대로 전진기를 사용했다.
그러자 나와 부딪힌 2대의 타이탄이 한꺼번에 넘어져 버렸다.
당당검이 화려한 패링 컨트롤을 자랑하며, 혼자서 막아서던 놈들이었다.
퍼퍼퍼펑!
그러자 잠시 주춤했던 흑풍단의 원거리 공격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공성 시작 전부터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넉백당한 타이탄을 최우선 공격 목표로 지시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상태 이상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대상만큼이나, 원딜러들이 일점사하기 쉬운 표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하여간 약삭빠른 짓은…… 어차피 나도 너 따위와 실랑이할 생각은 없었다! 슈마허, 지금이다!”
하지만 그 순간.
작은 빈틈을 본 데이네스가, 나를 비껴가며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몇 발자국을 떼기가 무섭게 곧바로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녀석이 탄 데이네스의 고유 스킬, 리프 어택인 ‘절망의 울림’이었다.
휘우우- 쿵!
그대로 수십 미터를 날아가 성벽 위로 떨어진 칠흑의 타이탄.
워낙 빽빽하게 뭉쳐있던 터라, 이 스킬 한 방에 무려 100명이 넘는 흑풍단이 넉백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으아악!”
“갑자기 뭐야!”
타이탄 수십 기가 소환되어 얽힌 것만으로도, 기존의 상식을 뒤엎는 공성전인데…….
여기에 로드급 타이탄이 가진 특수한 전진기까지 발휘되자, 공성 경험이 적은 일부 흑풍단은 순간적으로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슈슈슈슝!
또한 데이네스와 함께 다시금 공중에 모습을 드러낸 태성의 비행 부대도, 슈마허의 지휘 아래 모두 동시에 날아들었다.
마치 수백 기의 기마 부대가 공중에서 랜스 차징을 하듯이!
“태성의 창들이여! 이 오합지졸에게 자비를 베풀지 마라!”
다시금 역전의 용사로 빙의한 다리우스가 뭐라 오글대는 멘트를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는 다급히 놈을 쫓아 되돌아가는 대신, 옆에 남아있는 타이탄들을 막아서며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다리우스야…… 우리가 괜히 성 밖으로 뛰쳐나왔겠냐?’
데이네스란 타이탄이 무슨 전진기를 갖고 있는지 얼마나 잘 알고 있는데, 아무 생각도 없이 이렇게 뛰쳐나왔을 리 있을까?
“거기까지다, 다리우스!”
번쩍! 챙!
데이네스가 난장을 피우던 성벽 위에서, 갑자기 소환 마법진 특유의 빛이 솟구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모두가 데이네스의 공격을 저지한 타이탄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검을 가로막은 건 신창 ‘룬 페이서’를 닮은 거대 장창.
타연에 처음 공개되는 세 번째 로드급 타이탄, ‘테라투스’였다.
“이렇게 검을 맞대는 건 오랜만이군?”
“누구냐 넌!”
“설마 몰라서 묻는 건 아니지? 로드급 타이탄을 얻을 만한 유저가, 나 말고 또 누가 있지?”
“……카이저!”
은은한 암녹색 갑옷으로 뒤덮인 강철 기사.
같은 로드급 타이탄답게 루이투스나 데이네스와 비슷한 크기와 외형이었지만, 검 대신 묵빛 창을 쥐고 있다는 점이 달랐다.
여하튼, 내가 후방을 믿고 이렇게 성 밖으로 뛰쳐나올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카이저 형님이 이번 수성전을 돕고자, 몸소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형님? 여긴 어쩐 일로……?
-이번 수성전이 무척 힘들어 보이더구나. 네 덕에 7신기를 얻은 거나 다름없는데, 가만히 지켜만 볼 순 없었다.
-그래도 줄곧 중립을 유지해 오셨잖아요. 저희 측에서 수성하시면 다신 중립을 표방하실 수 없으실 텐데…….
-누구의 간섭도 없는 상태로 게임 하고 싶은 마음이야 지금도 굴뚝같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건 너와 나, 그리고 타연 유저라면 이젠 누구나 다 알고 있지 않나? 타연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적과도 손을 잡고 라인을 결성한 놈들인데, 앞으로 중립 따위를 인정할 리가 없지.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국의 군단장이신데 공성전에 참여하실 수는 있으세요?
-하하! 난 유저가 아니었던가? 제국 소속이라고 매달 열리는 공성전에 곁다리라도 참여할 수 없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다행히 조금도 상관없다.
-형님…….
-드로 오빠, 이럴 땐 그냥 고맙습니다, 하면 되는 거예요! 지금껏 저희가 그래왔던 것처럼요!
그렇게 찾아온 카이저 형님과 라푼젤은, 지금껏 은신 망토를 뒤집어쓴 채 공성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지금과 같은, 회심의 카운터 펀치를 먹이기 위해서!
“그동안 얌전히 지켜만 봐줬더니, 이제 와서 너도 날 방해하겠단 거냐! 당장 꺼져라!”
육중한 거체를 이용해 검을 튕긴 다음, 눈앞의 카이저 형님 대신 후방의 흑풍단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다리우스.
[단죄의 창!]
하지만 테라투스의 고유 공격 스킬이 펼쳐지자, 창이 마치 단검과도 같은 빠른 속도로 휘둘러졌다.
데이네스의 삼연격과 비슷한 스킬.
덕분에 다리우스가 휘두른 후속 공격은, 또다시 창의 궤적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감히 날 앞에 두고 딴짓할 생각을 해? 그게 가능할 것 같나, 다리우스?”
“이익!”
쾅! 쾅!
열이 뻗힌 녀석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는데, 놀랍게도 카이저 형님은 그 모든 공격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블로킹해 버렸다.
역시나 당당검이나 지옥불 형님에 못지않은, 뛰어나고 화려한 컨트롤 실력이었다.
“멍 때리지말고 우리도 다리우스 좀 쳐!”
“그래! 죽이면 마신검 나온다!”
그러는 사이, 넉백당했던 흑풍단이 주변 유저들과 함께 반격을 시작했다.
자살 특공대마냥 달려든 150기의 비행 부대가 있었지만, 그들만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는 흑풍단을 흩트리기엔 역부족.
따라서 눈 깜짝할 사이에 데이네스의 처지는, 방금 전 혼자 광장에 떨어졌던 제독의 신세와 다름없게 되었다.
“침묵의 방패!”
갑자기 돌변한 분위기에, 기세 좋게 들어왔던 녀석이 황급히 방어 스킬을 시전했다.
그러면서도 용케도 흑풍단을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지만, 전부 카이저 형님에게 막혀 그저 시간만 끌릴 뿐이었다.
“도망치십쇼, 군주님!”
“일단 본진으로 복귀하세요!”
쿠궁!
그런 다리우스의 곁으로 티에스 나이츠 2기가 다가와 쏟아지는 원딜 공격을 대신 맞아주었다.
달려든 그리폰 라이더 중, 타이탄을 보유한 길드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제기랄!”
이제는 공격마저도 완전히 포기한 채, 방어와 피 관리에만 급급한 다리우스.
녀석은 결국 부하들의 블로킹 아래서 시간을 번 다음, 마침내 쿨타임이 돌아온 리프 어택을 다시 사용했다.
이번에는 공격용도가 아닌 생존용으로.
녀석이 점프를 해왔던, 성벽 바깥의 언덕을 향해!
휘이잉잉- 쿵!
유독 길게 느껴진 점프 끝에 녀석이 착지했다.
공교롭게도 여전히 놈의 부하 타이탄과 투덕거리고 있던 내 바로 옆으로.
“오, 다리우스! 어디 갔다 온 거야? 바빠 보이네?”
“도대체 언제 카이저까지 끌어들인 거냐! 그리고…… 아니?”
순간 발끈하던 다리우스가 무슨 소식이라도 전해들은 듯 멈칫했다.
그리고는 말했다.
“산드로 너 이 자식, 지옥불과 함께 이따위 약은 짓을……!”
“하하! 그게 니가 할 말이야? 듣자 하니 이번 공성전을 준비하려고 전국을 돌아다녔다던데? 그나저나 설마 쪽팔리게 이대로 물러서는 건 아니지?”
콰각! 부지직!
다리우스를 도발하는 한편, 상대하던 3기의 타이탄 중 마지막 놈의 몸통에 검을 쑤셔 넣었다.
그러자 결국 체력이 다했는지 역소환당해버리고 말았다.
“이런 개자식이…… 정말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나서 내 앞을 자꾸……!”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놈은 내게 달려들지 못했다.
어느덧 난장판이 돼버린 전장이라 원거리 공격이 처음의 반도 날아오지 않았지만, 두 번의 점프 동안 체력의 대부분을 소진한 것이다.
앞으로 한 번만 더 죽으면 무조건 마신검을 드랍한다!
머릿속에 온통 이 생각만 가득할 놈이, 계속 과감하게 덤벼들 리 없었다.
풀피 상태에서 비행 부대와 함께 난입한 것만으로도, 녀석으로선 무척이나 살 떨리는 모험이나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하지만 난 너와 다르지. 근본적으로 말야!’
나도 분명 무척이나 조심하며 플레이하던 시절이 있었다.
신검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창기.
혹여나 재수 없게 머더러와 마주칠까 봐 신검은 창고에 모셔둔 채 레벨업을 했고, 안전이 보장되지 않으면 절대 필드 사냥터에 나오지 않았다.
허나 지금의 난, 어느샌가 그때와는 많이 변하게 되었다.
죽어도 된다?
그런 생각이나 마음가짐은 지금도 없다.
하지만 만약 죽게 되더라도 끝이 아니라는 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시절의 ‘강지환’이 아니라, 지금은 날 도와줄 많은 동료와 다른 좋은 장비들도 갖추고 있는 ‘산드로’라는 점이 나를 과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아니, 그렇게 용기를 북돋아 나를 더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게 녀석과 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이었다.
“꺼져라! 이 자리에서 한번 더 나한테, 뒈지고 싶지 않다면!”
펑!
그 말과 함께 내 루이투스가 터지듯 사라졌다.
그간 태성 측 원거리 공격에 장시간 노출된 탓에, 나 또한 1분도 안되는 사이에 체력이 전부 소진된 것이다.
그래도 곧바로 데이네스에 뛰어 올라타며 외쳤다.
“죽기 싫으면 꺼지라고! 여기 우리의 성에서!”
푹! 푹!
수많은 태성 유저들 앞에서 오랜만에 타이탄 킬러로서의 위엄을 아낌없이 보여줬다.
집중 회피와 빠른 이동 속도로 인한 피격 최소화.
거기에 그나마 공격을 맞출 수 있는 광역 스킬 대부분은 마법 공격이라, 내 무지막지한 마법 방어력이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반면 내게 집중적으로 공격받는 다리우스의 상황은 달랐다.
수많은 부하 유저들이 바로 뒤에 있었지만, 힐링 스킬이 먹히지 않는 타이탄 상태인지라 내 모든 공격을 그대로 맞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0여 초.
결국 버티는 걸 포기한 녀석이 자신의 본진 깊숙한 곳을 향해 도망치듯 후퇴했다.
난 그런 녀석의 타이탄에서 뛰어내린 후, 가장 앞 열에 있는 탱커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회전 베기!]
[연속 베기!]
놈들은 한꺼번에 소환된 타이탄들의 블로킹 아래, 어느덧 성벽 바로 앞까지 전진한 상태.
이대로 뒤편의 본진이 계속 밀고 온다면 내성문도 뚫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나로선 할 수 있는 데까진, 최대한 막아봐야 했다.
타겟팅을 피하기 위해 단 0.1초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고, 최대한 집중력을 발휘해 최적의 동선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혼자 공성군과 수성군의 최접전에서 고군분투하던 어느 순간!
[번스타인 성의 오벨리스크가 점령당해 공성전이 종료됩니다.]
[‘피닉스’ 길드가 번스타인 성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습니다.]
모두의 눈을 의심케 하는 전체 알림창 하나가 모두의 눈앞에 떠올랐다.
뜨거웠던 전장의 공기가,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얼어붙은 것만 같은 충격이었다.
“뭐야! 지금 뜬 알림창 다들 봤어?”
“이게 무슨 소리야! 피닉스가 번스타인을 쳤다니?”
“친 거로도 모자라 이미 먹혔다잖아! 우리 번스타인이!”
이 자리에 있는 유저들 중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소식.
타연에서 가장 유명한 성인 번스타인이 피닉스에게 점령됐다는 청천벽력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반쯤 공격을 멈추었다.
“라인 하나 만들었다고 타연 다 먹은 줄 착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너무 방심들 한 거 아니었냐고요?”
그 새를 틈타, 급히 램보를 소환해 성으로 복귀하며 적군을 향해 소리쳤다.
놈들이 라인을 형성한 것.
중립이나 길드전과 상관없이 플레이했던 유저들에게는 분명 태성이 서버를 먹겠다는 의도처럼 느껴졌을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우리 버닝스타가 놈들의 공세에서 아베르 성을 지켜낼 뿐만 아니라, 피닉스가 태성의 메인 성인 번스타인을 먹게 된다면?
분명 유저들은 아직은 태성에 대항할 세력이 남아있다는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라인에 대항할 대적자로, 우리와 피닉스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게 분명했다.
피닉스가 번스타인을 치기로 결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고생하셨습니다. 피해는요?”
“그 한 번에 대략 300명쯤 전사했어요.”
“역시…… 그래도 생각보다는 피해가 경미했네요.”
“호박 마켓 분들이 많이 애써주셨어요. 심연 망토의 보호막도 나름 톡톡히 제 역할을 했고요.”
다시 성벽 위로 안착한 내 곁에, 핑크래빗이 다가오며 브리핑해왔다.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 전장의 흐름을 주시하겠다고 자처한 그녀는, 처음인데도 완벽하게 그 역할을 수행해내고 있었다.
“확실히 10중첩에 이르면 한방은 버틸 수 있는 템이니까, 도움은 된 모양이네요. 알겠습니다. 혹시 다른 사항은요?”
“방금 기습 때 몇몇 꼬장 유저가 본색을 드러냈지만, 살라딘 님께서 잘 처리해 주셨어요.”
“역시 그랬군요. 별일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공성이 시작된 지 절반이 훌쩍 넘어서야 시작된 첫 총공세를, 이만하면 수월하게 막아냈다.
하지만 10대의 타이탄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다.
팽팽히 거리를 유지했던 저지선이, 결국 성벽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것.
심지어 적의 원딜러들의 공격이 이제는 우리 성벽 위까지 닿기 시작해, 이대로는 흑풍단들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아직인 건가……!’
피슈슛! 펑! 펑! 콰앙!
양옆, 그리고 내게도 간간히 날아와 터지는 화살과 마법들.
활도 들 수 없는 나로서는, 성벽 위 흑풍단들에게 적중되는 공격들을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 할 게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전장에 있었다면 볼 수 없었던 풍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베르 성은 내가 지킨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을란다!”
“척살당했던 그날 이후로, 오늘이 제일 통쾌한 날이구나!”
망토로 생성된 보호막이 다 벗겨져 체력도 얼마 없으면서, 피하기는커녕 활을 한 번 더 당기는 궁수…….
날아오는 화살에 양옆의 유저들이 죽는 와중에도, 마법 캐스팅을 멈추지 않는 마법사…….
장비나 레벨은 다소 낮을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 흑풍단은 여느 백전노장 못지않은 투혼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잘 싸워줄 줄이야…….’
기대 이상.
아니, 상상했던 것보다 더 처절하고 치열하게 전투 중인 유저들의 모습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쩌면 이번 수성전 참가를 부탁했던 나는 그저 계기였을 뿐…… 그동안 일반 유저들의 가슴속에는 활활 불타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간 태성이 거행했던 폭정에 숨죽여왔지만, 무척이나 맞서고 싶었던 투쟁 본능이!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들의 공세는 매서웠다.
모든 성기사가 지탱의 오라로 변경하며 최대한 서포트해주었지만 별 의미는 없어 보였다.
역시나 거리가 좁혀지자, 탱커와 힐러도 없는 원딜러 부대만으로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토록 기다렸던, 한 줄기 빛과 같은 귓속말이 눈앞에 떠올랐다.
(지옥불: 다행히 아직 내성문이 뚫리진 않았구나. 이제부터 뒤는, 우리 피닉스에게 맡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