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아베르 수성전 (5)
(나: 오셨군요, 형님!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지옥불: 하하! 녀석, 잘 버으면서 엄살은.)
드디어 구세주가 찾아왔다.
번스타인 성을 점령하자마자 달려온, 어느새 내가 타연에서 가장 의지하게 된 존재가!
“힘내세요, 흑풍단! 마침내 피닉스도 참전했습니다!”
“와아아아!!”
반가운 소식에 바로 훼라리에 올라타 공중을 맴돌며 소리치자, 흑풍단이 이에 응답하며 소리쳤다.
정면의 흑풍단이 전사하는 대로 측면과 후면 성벽에 있던 흑풍단이 보충됐지만, 사실 진영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조만간 내성문이 뚫릴 것만 같자, 슬그머니 귀환이나 로그아웃하는 유저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반가운 소식은, 그런 그들조차 로그아웃 대기를 취소하고 다시금 활을 들게끔 만들었다.
“정말이다! 태성 후방에 피닉스가 나타났어!”
“미쳤다, 미쳤어! 오늘 내가 이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니!!”
“그 역사에 졌다고 기록될 생각은 아니죠? 말할 시간에 어서 한 방이라도 더 갈겨요!”
어느새 내성문 앞까지 빼곡히 전진한 태성군.
그들이 대기 중이던 언덕 아래에서 불사조 문양의 길드 마크를 단 새로운 병력이 나타났다.
족히 2, 3천 명은 넘어가는 대군(大軍)이었다.
[축복받은얼굴: 타이밍 대박이구나....]
[라스트챤스: 저 방금 지렸잖아요 형님... 지금껏 게임하면서, 이 정도 전율은 느껴본 적이 없어요!]
[대탐험시대: 대체 얼마나 모인 거죠? 피닉스에 인원이 저렇게나 많았어요?]
[산드로: 지옥불님이 전체 병력의 거의 절반을 끌고 오셨어요. 남은 시간 동안의 수성은 반포기하시고요.]
이번 달 공성 전략은 진작에 세워졌다.
하지만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까 실시간으로 확인해야 할 사항들이 있었다.
과연 태성 놈들이 시작과 동시에 우리 성에 총공격해올 것인지?
혹은 간만 보다가 후반부에나 쳐들어올 것인지?
그에 따라 대처할 방법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놈들은 우리의 예상대로 먼저 중립 소속의 성부터 공략했다.
이런 놈들의 행동은 이번 공성전에선 피닉스의 성은 끝까지 가만 놔두겠다는 자백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지옥불 형님이 중립 성 2곳이 공격받는다는 소식을 듣자, 주저 없이 수성 중이던 병력을 차출해서 번스타인을 친 것이었다.
싸우던 적들과 죄다 같은 편이 되다 보니, 설마하니 피닉스가 쳐들어올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던 태성 놈들.
그 상태에서 갑자기 대규모의 피닉스군이 들이닥쳤으니, 조금 전 다리우스가 깜짝 놀랐던 게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철통같던 번스타인을 손쉽게 빼앗은 형님은 바로 이곳으로 달려오셨다.
남은 시간, 우리 아베르 성의 수성을 돕기 위해서!
“진격해! 진격! 어차피 죽는다고 생각하고 달려들라고!”
“이대론 내성문을 뚫고 전진하는 게 맞아! 여기서 막히면 다시 이 앞까지 올 수 없다고!”
콰광! 쾅! 쾅!
피닉스의 참전을 확인한 놈들의 공세가 더욱 거칠어졌다.
하지만 상황은 뒤바뀌어, 공성 내내 우리 성 앞에서만 터지던 폭발음이 놈들의 후방인 언덕 밑에서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초반에 나타났다 자취를 감춘 타이탄들도, 놈들의 후방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공성 타임 내내 쭉 아껴두었던, 다섯 기가 넘는 리버스 나이츠의 등장이었다.
쉬이익! 쉬이익!
저 멀리 일렬로 선 채, 긴 리치의 검과 창을 활용해 멀티 히트를 먹이는 타이탄들.
그 모습이 마치 풀을 베는 농부의 낫질과도 같이, 호쾌하고 거침없었다.
“후방은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도대체 이 냉기 화살은 뭔데? 이것 때문에 돌아버리겠네!”
수많은 동료의 희생 끝에, 마침내 내성문 앞까지 당도한 태성의 탱커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건, NPC 궁수병들의 냉기 화살과 아직 체력과 소환 시간이 여유로운 카이저 형님의 테라투스였다.
솔저급보다 4배는 많은 체력과 2배가 넘는 방어력, 그리고 방어 스킬.
덕분에 아무리 일점사가 쏟아져도 제대로 지속되지 않는다면, 로드급 타이탄을 역소환시키기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단죄의 창!]
가뜩이나 빙결 상태로 다가오느라 힘겹게 다가온 탱커들을, 테라투스가 공격 스킬로 반겨줬다.
그리고 형님께서 저렇게 고생하시는데, 나도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아베르 성의 마지막 방어선은, 오벨리스크가 아니라 눈앞에 있는 내성문이었으니 말이다.
[재빠른 몸놀림!]
[약점 포착!]
[연속 베기!]
막 축빙 형님이 걸어주신 버프와 현중이의 오라, 그리고 쓸 수 있는 모든 자버프를 다 사용한 뒤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상대를 가리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카이저 형님과 처음으로 함께 하는 PVP.
하지만 미리 연습이라도 한 듯이, 어디 하나 동선이 겹치지 않았고 조금의 딜 로스도 없는 합동 공격이 이어졌다.
“하하! 드로야, 수성도 나름 재미있구나!”
슈슈슈슛!
덕분에 탱커들이 죽여도 죽여도 계속 밀려왔지만, 내성문만큼은 계속 사수할 수 있었다.
‘로드급 타이탄과 나. 그리고 흑풍단들……. 이 조합을 잠시라도 버틸 수 있는 건 오직 로드급 뿐일 거야!’
솔저급 타이탄 정도는, 타이탄 킬러로 불리는 내가 순삭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성 측의 로드급은 이미 소진된 상태.
그 말인즉슨 형님과 내가 버티고 있는 한, 놈들이 내성문까지 도달하기란 요원한 일이라는 뜻이었다.
“산드로 좀 어떻게 해봐!”
“무슨 유저 주제에, 옆에 있는 타이탄보다 더 아프면 어쩌자는 거야?”
내성문 앞으로 내려와 탱커 및 근접딜러들에게 딱 달라붙은 다음부턴, 오히려 마나를 관리하는 게 더욱 쉬워졌다.
[마나 쉴드가 1,882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1,555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속박의 손길’에 저항했습니다.]
……………………
마치 폭풍 속의 고요라 할까?
주변과 머리 위에는 아직도 적과 흑풍단이 주고받는 원거리 공격들이 수없이 날아다니는데, 오히려 내게는 거의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논타겟팅으로 쏘아질 화살의 궤적은 이미 같은 편의 탱커들에 막혀버렸고, 그나마 들어오는 건 범위 스킬이나 마법 등의 광역 데미지뿐이었다.
거기에 공격력이 약한 탱커들의 마나를 뺏어먹고 있다 보니, 혼자 수백 명에게 둘러싸인 위태로운 모습과는 달리 내 MP는 80% 이하로 떨어지질 않았다.
‘아프다고 난리들이지만, 난 내 공격력이 왜 이렇게 부족한 것만 같냐?’
허나 사람은 누구나 하나를 가지면 하나를 더 갖고 싶어진다던가?
이런 말도 안 되는 활약을 벌이고 적들은 계속 사기 소리를 외쳐댔지만, 나로선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아니, 오히려 타는 듯한 목마름에 더욱더 갈증 났다.
그건 바로 ‘공격력’.
타연 최고의 무기를 2자루나 들고 있는데도, 눈앞의 적을 팍팍 쓰러뜨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보유한 고유 스킬마다 데미지 극대화에 특화된 도둑 캐릭.
덕분에 올마력 스탯과 방어 스킬 위주의 테크트리에도 놀라운 공격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최강의 딜러 직업과 최고의 무기들이 조합된 것치고는, 아쉬운 공격력이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마나 쉴드나 올마력 스탯만의 장점을 포기할 수는 없잖아?’
휙! 휙!
마치 장판파의 장비처럼, 이렇게 성문 앞에서 타이탄 이상의 탱킹력을 자랑할 수 있는 지금의 장점도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루티안의 축복.
내게 이런 고민을 안겨준 아이템에 대한 상념을 애써 묻으며, 다시금 이 치열한 전장에 어울리는 최적의 동선과 딜 계산에만 집중했다.
“뚫, 뚫렸다!”
“드가자!”
그러던 도중, 결국 내성문이 뚫리고 말았다.
아무리 카이저 형님과 내가 분투했다 하더라도, 지속적으로 날아온 태성 원딜러들의 공격에는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나를 비롯한 테라투스와 흑풍단에 대한 공격 비중을 줄이고, 내성문만 집중적으로 공격하도록 지시했던 모양.
탱커들은 내성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무작정 돌격을 시도했다.
“어딜!”
그걸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내가 아니었지만, 탱커가 괜히 탱커는 아니었다.
뒤가 막혔을 때야 맨 앞의 녀석이 빠져나갈 구석이 없어서 잡을 수 있었지만, 죽는 것도 불사한 채 전진하자 도저히 저지할 수가 없었다.
‘치잇!’
그렇게 몇 명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수백 명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공격해도 날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놈들이, 나를 철저히 무시한 채 내성 안으로 내달린 것이다.
신검을 들고난 후, 처음 겪어보는 굴욕 아닌 굴욕이었다.
“으아악!”
“이게 뭐야! 완전 포위됐잖아!”
하지만 그렇게 지나간 탱커들은 당연히 풀피로 입성할 수 없었다.
그 상태에서 들어간 내성 안.
그곳엔 내성문과는 다른, 또 다른 철벽이 쳐져 있었기에…….
“파워 샷!”
“파이어 볼!”
“윈드 커터!”
안에서 내성문을 중심 삼아 반원을 그리고 서 있는 원딜러들.
탱커나 근접 딜러 하나 없이 이루어진 이 특이한 바리케이드로부터, 가까스로 내성에 진입한 태성군들을 향한 공격이 쏟아졌다.
‘겨우 탱커가 좀 진입한다고…… 우리 흑풍단이 가만히 당할 줄로만 알았어?’
피닉스가 참전하자 후방에 있던 흑풍단들은 조금씩 병력을 나눠 광장 안에 진형을 갖추었다.
바로 지금과 같이, 내성문을 뚫고 들어올 태성군을 맞이해주기 위해!
힘겹게 들어간 곳인데 온 사방에서 공격이 쏟아지면 어떤 기분일까?
뭔지는 잘 몰라도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닐 게 분명했다.
“천상의 방패!”
그 와중에 몇몇 태성의 성기사는 무적 스킬을 써가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흑풍단에게 달라붙었지만.
퍽! 퍽!
무적 상태가 끝나기도 전부터 달라붙은 무살 형님과 당당검, 기파랑의 데스 나이트 등으로 인해 흑풍단이 동요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카이저: 이제 곧 역소환이다. 난 이만 뒤로 빠지마.)
(나: 네, 형님. 수고하셨습니다!)
마침내 테라투스의 체력이 다해 내성 안으로 후퇴하자, 내성문 앞 지상에는 오직 나만 남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난 계속 입구에 남아, 계속해서 스쳐 지나가는 태성군들을 한 대라도 더 치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마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고, 만약의 경우 페리엘의 망토라는 또 하나의 생존 수단이 남아있었기에 겁나진 않았다.
쉭! 쉭! 쉭쉭!
그렇게 몇 분이나 계속해서 공격했을까?
정신 놓고 공격에만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어? 뭐지?’
내성 안으로 미친 듯이 뛰쳐 들던 태성 놈들이 조금 줄어드는 것 같긴 했는데, 갑자기 다들 멈춰 선 것이다.
그리고 그 멈춘 인원들 사이에서 한 유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진짜 대단하구나, 드로. 일반 유저들을 모집한다는 글을 봤을 때 코웃음을 쳤었는데…… 이게 정말 먹힐 줄이야. 역시 내가 타연을 너무 쉽게만 생각하고 있었나?”
“전쟁 중에 이게 무슨 일이죠, 제독 님?”
그는 다름 아닌 제독.
공성 초반에 죽은 부활 후유증이 끝나자마자, 다시 이곳을 찾은 모양이었다.
“전쟁이라니……? 설마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거야? 이제 공성이 끝나기까지 3분도 남지 않았다. 다리우스도 진작에 포기하고 이미 귀환해 버렸다고. 귓말은 차단해둬서 잠깐 대화나 해보러 나왔다.”
“네?”
철저히 혼자 적들 사이에 고립된 채, 오직 전투에만 몰입해 있어서 몰랐다.
어느새 공성이 끝나가는 시점이라는 걸.
“뒤도 피닉스에 가로막혀 죽은 병력들이 합류하지도 못했고, 지금 성 앞에 남은 병력으로는 오벨리스크…… 아니, 내성 안으로 진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다. 드로, 오늘 공성은 너의 승리라고.”
“어라?”
그의 말 그대로, 주변에 그토록 쏟아지고 퍼붓던 원거리 공격들도 어느새 잦아져 있었다.
태성군이 쳐들어오던 걸 멈추고 다들 이대로 공성이 끝난다는 것을 직감하자, 서로 공격을 자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있었던 모든 전략은, 전부 지옥불 님이 아닌 네 생각이었겠지? 정말 대단하구나.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오는 녀석이야, 넌.”
쌍욕을 하며 헤어졌고, 방금 전 내게 굴욕적으로 죽이는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제독은 쿨한 척 나를 칭찬해왔다.
하긴 게임이 가진 장점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점일 것이다.
“겉멋 부리려고 이 앞까지 나온 건 아니실 테고……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예요?”
“원래는 니가 내 제안을 거절하고 선택한 결과를 비웃어 주려 했는데, 솔직히 감탄했다. 이쯤 되니 나야말로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지경이니 말이야.”
계속 말을 하며 천천히 내 앞까지 다가온 제독.
그가 내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드로야, 이대로 승리했다고 자만하지 마라. 다리우스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랄한 놈이니까……. 오늘 공성전에서마저 패배한 지금의 녀석이라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었다. 지난번의 추태는 사과하마.”
“네? 뭐라고요?”
갑자기 태도를 바꾼 제독의 낯선 모습에 반문했지만.
그는 빠르게 말을 마친 뒤, 그대로 뒤돌아 태성군 사이로 복귀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든 공성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아베르 성의 공성전이 종료되어 모든 유저는 내성 안에서 추방됩니다.]
[아베르 성의 점령 길드원이기에 추방당하지 않습니다.]
[아베르 성 수성에 성공하여 길드 업적치 150,000포인트를 획득했습니다.]
마침내 끝을 알리는 알림 메시지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유저들로 가득 찼던 성안과 밖의 유저들이 모두 마을로 튕겨져 버렸다.
우리 버닝스타 길드원들만 남긴 채.
“드디어 끝났구나!”
“네, 끝났어요. 저희가 이겼습니다!”
성벽 위에서 라챤이와 축볼 누님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우리 버닝스타와 피닉스의 협력, 그리고 본인 성처럼 열정적으로 수성에 참여한 흑풍단 유저들의 노력 끝에…….
결국 우리는, 태성 라인으로부터 아베르 성을 무사히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