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변화의 바람 (1)
(지옥불: 결국 지켜냈구나!)
(나: 성공입니다, 형님! 고생 많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지옥불: 고생은 무슨. 너야말로 이번 수성전으로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텐데, 수고 많았다.)
생각지 못한 지옥불 형님의 위로와 격려에, 순간 조금이지만 울컥했다.
처음 성을 먹겠다는 생각을 할 때만 하더라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라서, 형님의 말대로 모진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레이드에 써먹을 NPC 병사와 전용 사냥터만 마련해보려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타연 전체를 뒤흔든 공성전을 치뤘다.
우리 측 흑풍단과 피닉스 길드원을 합치면 거의 1만여 명.
그리고 정확하진 않지만 태성 라인에서는 족히 그 2, 3배가 넘는 병력이 참전했다.
근 20대 가까이 소환됐던 타이탄은 차치하더라도, 타연이 서비스된 이래로 단 한 개 성에서 이토록 많은 유저들이 전투를 벌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데 그 치열했던 전투에서,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승리를 거두고 만 것이다.
여러모로 드래곤이나 군단장 레이드에 성공했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감동이 밀려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뭐 해?”
“그러게? 혼자 뭐 하고 있어, 안 들어오고?”
여전히 내성문 앞에 외로이 서 있자, 성 안에 있던 길드원들이 다가왔다.
“정말 이 성을 지켜냈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아서요. 다들 못난 길마 둔 덕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잠시만요!”
“어? 어디 가게? 공성도 끝났는데?”
“저희 말고도 고생하신 분들께, 먼저 감사 인사를 드려야죠!”
난 다시 훼라리를 소환해 외성 마을로 향했다.
마을 안은 역시나 조금 전 공성 구역에서 추방당한 유저들로 인산인해였는데, 태성 측은 바로 빠졌는지 검은 망토를 둘러쓴 유저들이 대부분이었다.
난 그대로 광장 상공으로 훼라리를 몬 다음, 시공 포탈 위에 멈춰선 채 외쳤다.
“흑풍단 여러분! 덕분에 여전히 아베르 성의 성주로 남게 된 산드로입니다! 오늘 정말로 수고 많으셨습니다!”
“와아아!”
내 갑작스러운 등장과 인사에, 훼라리가 나타났을 때부터 올려다 보던 유저들이 함성을 터트렸다.
“태성의 공세 아래 이 성을 지켜낸 건, 이 마을에 있는 시공의 틈새도 지켜냈다는 의미입니다! 다들 고생하신 만큼 앞으로도 마음껏 아베르 성의 서비스와 포탈을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안에서 함께 싸우신 흑풍단 여러분…… 정말 너무 멋졌습니다. 그리고 또……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산! 드! 로!”
“산! 드! 로!”
검은 망토 일색인 광장 안 유저들이 갑자기 내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초에도 10개가 넘는 귓속말이 들어와 도저히 읽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채팅창이 넘어갔다.
(뮌헨걸: 저희야말로 감사해요! 제가 감히 태성을 상대로 승리하는 날이 오다니요!)
(가을하늘2: 정말 이렇게 재밌고 짜릿했던 경험은, 타연하면서 첨이었어요. 흑풍단 포레버!)
(쏘맥헌터: 우리 싼드로.. 오늘 디지게 멋졌다잉? 앞으로도 힘들 땐... 불러만 줘어..!! 알긋지!?)
(기가커피: 흑풍단주 만쉐!)
……………………
기존에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기분이 남달랐다.
지금 환호하고 한 마디씩 인사를 전하는 유저들이, 나와 함께 전장에서 같은 적을 상대로 싸웠던 전우였기에!
‘세상 일이란 건, 정말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구나. 나조차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누구는 아무 유저들이나 데리고 태성을 상대로 수성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비웃었고.
누구는 보나 마나 유저들이 파투 내고 도망칠 거라고 시작도 하기 전부터 초를 쳤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 달랐다.
그간 공성에 일절 참여하지 않던 실력자들이 찾아와 합류했고, 태성에 깊은 원한을 가진 유저들도 생각 이상으로 많았다.
그런 그들이 보여준 투쟁심.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흑풍단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보여줬던 협동심.
그게 기적을 일으켰다.
보란 듯이 그 수많았던 방구석 ‘누구’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준 것이다.
내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흑풍단원 한 명 한 명에게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리라.
더 커지고 강력해진 거대 길드와 풀뿌리 같았던 일반 유저들의 첫 싸움.
그 결과는 모두의 예상과 반대로, 이렇게 유저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 * *
『안녕하십니까, 시청자 여러분! 이미 다들 소식 들으셨겠죠? 역대급 전투가 펼쳐졌던 오늘의 공성전! 그 자세한 소식을, 지금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칙! 칙!
함께 고생하며 싸운 우리 길드원들과 카이저, 지옥불 형님 등과 충분히 인사를 나눈 뒤, 다같이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현중이와 함께 각각 캔맥주를 따며 TV 앞 소파에 앉았다.
“이럴 땐 좀 아쉽긴 하네. 오늘 같은 날은 집구석에서 이럴 게 아니라, 전부 밖에서 모여서 회포라도 풀면 좋을 텐데 말야.”
“언젠가는 전 길드원들이 다 모이는 그런 날이 오겠지. 원년 멤버들끼리만 모이는 게 미안도 하잖아. 일단 아직은 좀 무린 것 같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현중이처럼 아쉬움이 컸다.
기쁨을 나누고 슬픔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는데, 그걸 현실에서 이루기엔 아직 조심해야만 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래, 그렇긴 하지. 제독이 너한테 경고도 했다매. 그게 좀 꺼림칙하긴 하더라. 심지어 공성 초반에 죽었던 사람이 그렇게 나오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마라. 언제는 우리가 박태후가 어떤 놈인지 모르고 싸워왔냐? 그 형은 하던 대로 재수 없게나 굴지, 갑자기 그따위로 나와서 사람 맘을 뒤숭숭하게 만들고 그러네.”
알고 보면 세상에 악인은 드물고, 사연 없는 무덤도 없다지만…….
먼저 나와 선을 긋듯 갈라선 제독이, 갑자기 마지막에 그렇게 말한 의도가 무엇인지 감이 오질 않았다.
제독의 돌아서던 뒷모습에서, 불현듯 잊고 지냈던 히든캬드가 생각난 것도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 와서 뭘 어쩔 건데? 단순하게 생각하자. 적이면 적, 아군이면 아군. 이렇게만……!’
이런 내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TV속 프로그램에서는 오늘 있었던 주요 뉴스들이 차례차례 명료하게 방영됐다.
『그렇게 라인을 결성한 태성은, 그간 중립 길드였던 ‘화랑’과 ‘피스메이커’의 두 성마저 점령하면서 총 25개의 성 중 17개를 점령하게 됐습니다. 이로써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세력이 되었는데요. 양민아 앵커, 이에 우려를 표하는 유저들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높다고 하더군요. 사실인가요?』
『네, 맞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고조선과의 합병으로 신화국을 건국한 올림푸스가, 태성의 새로운 견제 세력이 될 거라고 예상하셨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레미제라블, 아틀란티스 등등의 명문 길드들과 함께 같은 편에 서게 됐죠! 사실 전체 이용 유저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비율이긴 하지만…… 그 분들이 타연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 봤을 때, 우려가 되는 부분이기는 해요.』
『하지만 역시나 괜히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태성 길드에서도 그만큼 위협을 받아서 나온 대책이었다는 지난 분석대로, 이번 공성전에서 버닝스타 길드와 피닉스 길드가 펼친 활약이 대단하더군요! 피닉스 길드는 그간 태성 길드의 메인 성이었던 번스타인을 뺏는 쾌거도 있었죠. 아베르 성 수성에 성공한 버닝스타는 말할 것도 없이요.』
『아, 맞네요! 김석용 아나운서님은 현장에서 직접 구경하셨죠? 정말 부러워요…… 전 줄곧 성 밖에서만 있어서…….』
『이런 말씀드리긴 죄송하지만, 정말 대단했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도 잠시 저희가 준비한 영상을 보시면서 치열했던, 아베르 수성전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이후, 우리가 전쟁을 벌였던 아베르 수성전의 풍경이 다양한 구도의 영상으로 송출됐다.
성벽 위를 검게 뒤덮었던 흑풍단과 끝없이 이어졌던 태성 라인의 전진 모습, 그리고 타이탄들이 맞부딪혔던 전투 등이 박진감 넘치는 음악과 함께 멋지게 편집됐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집중 포커싱을 받았던 건, 역시나 홀로 내성문 앞을 지켰던 내 모습이었다.
도대체 힐링이나 보조도 없이 혼자 저렇게 버티는 게 가능하냐란 주제를 가지고, 진행자들끼리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였다.
『흑풍단이라고 불리죠? 이들의 활약도 정말 눈부셨는데, 이런 발상을 떠올린 버닝스타 길드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간 일루전 사에서 공성에 관심 없는 유저들의 참여 유도를 위해 여러 업데이트와 편의를 제공했던 것으로 아는 데요.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버닝스타를 통해 참여도가 확 올라가게 되겠군요!』
『타연은 계속 서비스되고, 공성은 매달 벌어질 테니까요……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점차 공성전의 규모가 커지지 않을까요? 어떻게 되든 타연은 계속 재밌고 흥미진진하게 되겠네요!』
『2.0 업데이트에 관한 내용도 아직 밝혀진 게 거의 없지 않습니까? 변화가 계속될 타연 속에서 과연 최후에 웃는 자가 누가 될지,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도 함께 지켜봐 주시길 바랍니다!』
총 1시간이라는 긴 방송 시간이 끝나자, 새삼 내가 오늘 이룬 것들에 대한 실감이 났다.
처음에는 그저 운 좋게 신검을 획득한 특이한 방송 소재로만 다뤄졌다면, 지금은 방송 분위기상 거의 태성과 동급의 수준으로 대우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이거 한 번 읽어볼래? 공성 끝난 지 몇 시간 안 됐는데도, 타연에선 벌써 많은 일이 있었나 본데?”
타이토닉이 끝나가자 폰을 꺼내보던 현중이가, 그새 올타에 올라온 게시글 몇 개를 보여줬다.
-공틈은 이제 흑풍단이 다 점령한 거 알고들 있음?
└너도 가 봤냐? 뭔 원딜팟마다 죄다 검은 망토 두른 애들밖에 없더라
└└왜 그렇게 많은 거임? 산드로가 망토를 그렇게 많이 뿌렸나?
└└└그게 아님. 딱 봐도 자기가 직접 사고 염색해서 입은 애들 투성임.
-흑풍단으로 길드 만들어보려 했는데 개어려움ㄷㄷ
└나도 해봤는데 흑풍단01부터 99까지 이미 다 만들어졌더라ㅋㅋ
└└벌써 마을마다 흑풍단 모집하는 애들이 서 있어. 개빠름ㅋㅋㅋ
재미를 추구하는 게임 유저들답게, 벌써부터 다양한 반응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수성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단조로웠던 일반 유저들에게 재미나고 특별한 이벤트였던 모양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넌 잔머리 하나만큼은 진짜 대단한 자식이야. 솔직히 이런 것들까지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인지는 몰랐다.”
“응? 뭔 소리야?”
“흑풍단이라는 조직을 만든 거 말야. 유저들이 한 번만 참여하면, 그 후에 이렇게 알아서 커질 거란 걸 노렸던 거지? 그래서 복장도 검은 망토로 맞춰서 나눠준 거고? 와, 난 이 짠돌이 새끼가 템을 엄청나게 뿌리기에 진짜 변한 건가 놀랐었는데…… 알고 보니 다 계산된 거였다니!”
“응? 내가 무슨 계산이 있었다는 거냐고?”
이번만큼은 정말 순수한 의도로 벌였던 일인데, 도대체 이 자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자발적으로 심연 망토를 사서 검게 염색해서 입고, 이제 수성도 끝나서 흩어졌는데 자체적으로 흑풍단이란 이름의 길드를 만들어서 모집 중이라잖아?”
“그니까 그게 나랑 뭔 상관이냐고? 유저들이 유행따라가고 잠깐 핫한 일에 관심두는 게, 어디 하루이틀이야?”
“이 자식이 계속 모른 척이네. 너 지금 그거 맞지? 나한테 니가 세운 계획, 모르는 척 떠보고 확인해 보는 거? 대단하다니까! 니 의도가 제대로 먹힌 걸 인정한다고!”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계속 아니라고 하기도 뭐 해서 대충 그렇다고 맞장구쳐줬다.
그러자 녀석이 그 이유에 대해 알아서 설명해 줬다.
“애초에 네가 도와달라고만 했다면, 무슨 팬클럽마냥 이렇게 뭉쳤을 리 없겠지. 근데 넌 태성에 대항할, 그것도 수성이라는 수동적인 포지션으로 그들의 결집을 유도했어. 반대로 수성이 아니라 공성을 도와달라고 모집 글을 올렸으면, 분명히 아무도 오지 않았을걸?”
“오, 제법인데……? 계속 해 봐.”
“원래 뭐든지 처음 시작이 어렵고, 뭉치기가 어렵잖아? 근데 어쩌다보니 수천 명이 뭉치고 싸운 조직이 이미 결성된 거야. 그런 그들이 오늘 느낀 감동을 또 느껴보고 싶어할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근데 현중아. 그들이 우리 길드원들도 아닌데 앞으로 계속 도와주겠어? 아무 이득도 없을 텐데?”
“이 자식이 끝까지 떠 보네? 이름부터가 흑풍단을 달고 있는데, 앞으로 네 도움 요청을 가만히 지켜만 볼 수 있겠어? 애초에 재미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네 취지에 공감하고 너한테 호감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던 거잖아. 분명 이대로 흑풍단은 자체적인 생명력을 갖고 알아서 세를 늘리게 될 거야. 안 그래?”
“어? 어 어. 그렇게 되겠지!”
“결국 그들은 우리와 함께 태성과 싸울 든든한 지원군이 되겠지. 물론 변수는 있겠지만, 애초에 흑풍단이 탄생한 목적이 있었으니 우리 뜻과 상충된 조직으로 발전되진 않을 거고……. 타연에 그 거대한 씨앗을 의도적으로 뿌리고 심었다니! 이젠 인정한다, 이 형님도 이번만큼은 너한테 진심으로 감탄했다!”
짝짝짝!
열변을 토하다 맥주마저 내려놓고 박수치는 현중이.
분명 이번 수성전은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던 상황에서 임기응변으로 나왔던 건데, 녀석은 거기까진 떠올리진 못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들어보니 현중이의 예상이 전혀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상당히 그럴싸하게 들렸다.
분명 흑풍단이 이대로 커지다보면 문제가 발생할 여지는 있었다.
분탕이나 분란을 목적으로 흑풍단에 가입한 뒤, 본색을 드러낼 유저가 보나마나 존재할 테니까.
그리고 어떤 이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다보니, 어쩌다 생길 이권이나 고생 앞에서 뿔뿔이 흩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떻단 말인가?
벌써부터 그걸 걱정한다는 건 정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번 수성전에서도 99명의 순수한 목적 속에 1명 정도의 불순분자가 껴 있었지만, 실제로는 대세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애초에 모두가 평등한 권한과 고만고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이다 보니, 물 양동이에 잉크 한 방울 떨어진 것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묻혀버린 것이다.
또한 정말로 흑풍단이 계속 커진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모두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라인으로 똘똘 뭉쳐 타연을 집어삼키려는 태성에게, 그나마 일반 유저들도 대항할 수 있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
“짜식, 제법인데? 형 따라다니더니 많이 컸어? 이젠 말도 꺼내기 전에, 형 맘을 다 알아주네."
"이 정도는 해야지 않겠냐? 이젠 나도, 엄연히 타연 랭커인데!"
그렇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능성을 알려준 현중이를 칭찬하며,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