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변화의 바람 (2)
큰일을 치러서 오랜만에 푹 잠드나 싶었는데, 어김없이 꼭두새벽에 잠을 깼다.
다시 잠을 청하기도 뭐해, 간단히 세수만 하고 곧바로 타연에 접속했다.
-라라 랄라라.
대규모 업데이트가 진행됐지만, 여전히 처음 접속하던 그날과 다름없는 로그인 테마곡.
마치 최면과도 같은 이 정령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익숙한 타연 속 세상으로 빠져들었다.
“어라? 일찍 접속하셨네요?”
“래빗 님, 뭐예요. 설마 안 주무셨어요?”
이제는 내 집만큼 익숙해진 아베르 성의 주성 안.
아무도 없을 시간대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을 지키고 있는 길드원이 한 명 있었다.
“아…… 이것저것 살펴보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는지도 몰랐네요.”
“아니, 뭘 그렇게 살펴보셨길래요?”
“사실 그동안은 제가 설마 성길의 일원이 될 거라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이곳의 모든 게 다 신기하네요. 그동안은 바빠서 제대로 살펴볼 시간이 없었던 걸, 공성이 끝난 김에 다시 확인해보고 있었어요.”
“확인이요?”
“네. 생각보다 NPC들을 통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 보이더라고요. 성벽이나 내성문 강화, NPC 병사들 무장 및 훈련, 관공서를 통한 임대 등등요. 근데 이것도 좋아 보이던데요? 퀘스트 생성이요.”
“아하, 그런 것도 있었죠? 성에서 자체적으로 퀘스트를 만들어 유저들에게 제공하는……. 비록 퀘스트마다 돈이 드니깐 대부분 봉인하고 있는 시스템이지만요.”
“네. 근데 이걸 활용하면 특정 템을 모으는 게 참 쉬울 것 같더라고요. 가령 저희가 매입했던 빛마석 같은 경우도, 템을 가져오면 보상을 주는 퀘스트를 설정해 두었으면 편했을 것 같더라고요.”
“아, 그러네요? 가뜩이나 저희 성엔 유저들이 넘쳐나는 상황이니까, 그렇게 활용할 수도 있었겠어요.”
확실히 핑크래빗은 장사꾼이다 보니, 사고방식이 일반 유저들과는 제법 달랐다.
만약 우리 성에 빛마석을 구해오면 한 개당 3,000골드를 보상으로 주는 퀘스트를 만들어 둔다면?
종일 거래소 앞에서 매물이 올라오는지 체크하는 수고나, 혹은 내가 최저가를 구매함으로써 시세가 뛸 게 우려된다든지 하는 단점 등이 사라지게 된다.
‘만약 우리 성에 도움 될만한 퀘스트를 걸어두고, 보상으로 검은 심연의 망토를 걸어둔다면……?’
지금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흑풍단의 숫자가 더 많이, 그리고 꾸준히 늘어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물론 망토를 둘러쓴다고 전부 다 흑풍단이 되겠냐는 의문은 들지만…….
현중이의 말대로 어느새 검은 심연의 망토는 흑풍단의 상징이 되었으니, 그걸 착용한 유저가 부정한다 한들 다른 사람들이 믿어주지도 않을 것이다.
선착용, 후가입.
어제 나눈 현중이와의 대화가 생각나 즉흥적으로 떠올린 아이디어였지만, 나름 괜찮게 느껴져서 한 번 시도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요 길마님…… 앞으로도 계속 쭉 이 성을 지키실 생각이시잖아요? 맞나요?”
“그럼요. 그러려고 시공 포탈도 여기에 설치했는걸요.”
“그럼 제가 이 성의 캐슬 시스템도, 한 번 책임져보면 안 될까요? 길마님의 투자 아래, 제가 생각해둔 루트로요.”
“네? 그게 무슨……?”
“사실 제가 예전부터 경영 시뮬레이션이나 디펜스 류의 게임을 즐겨 했거든요. 타연에서도 동적인 것보다는 여전히 정적인 방법으로 플레이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그런지 이 성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에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혹시…… 안될까요?”
캐슬 방어 시스템.
타연에 존재하는 모든 성은 그 성에 존재하는 총관, 행정관, 경비대장, 이 3명의 NPC를 통해 성의 방어를 강화할 수 있었다.
그것도 성마다 보유한 NPC 병사의 종류나 지형, 건물의 특징 등이 전부 달랐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건축 같은 경우에는, 특수 재료 등을 사용하면 외형이나 성능 등을 특별하게 꾸며나갈 수 있었다.
즉 유저가 투자하기에 따라 ‘나만의 성’, 혹은 특정 공격에 ‘특화된 성’ 등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 유명한 몇몇 성을 제외하고는, 이 방어 시스템 강화를 최소로 하거나 거의 방치해 두는 수준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돈’ 때문이었다.
업그레이드 하나하나마다 막대한 골드가 투입됐는데, 그 결과물은 투자한 것에 비해 형편없었다.
그뿐이면 그냥 한 달 세금 없는 셈치고 투자할 성길도 많았을 텐데, 그마저도 드물었다.
그건 아무리 많은 업그레이드를 해놓는다 해도, 만약 성을 뺏기게 되면 방어 관련 시설은 전부 다 리셋되었기 때문.
따라서 타연의 성길들 끼리는, 대부분 성벽과 내성문에 기본적이고 간단한 업그레이드만 해두는 것이 불문율이나 마찬가지였다.
“흠……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나 또한 이번에 경비대장을 통해 병사들 무장을 ‘냉기 화살’로 업그레이드한 것을 끝으로, 방어 시스템에는 더 이상 투자하지 않으려 마음먹었다.
총 100명의 NPC 병사들 무장에만 근 200만 골드라는 거금이 들어갔기 때문.
물론 나빴던 건 아니지만, 역시나 투자한 금액에 비해 큰 효과가 있었다고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핑크래빗의 설명을 듣고 나니 왠지 계속 투자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됐다.
무엇보다 이 캐슬 방어 시스템의 끝을 본 길드가 없다는 게 관심을 끌었다.
“태성의 메인 성이었던 번스타인만 해도 몇 달 전 올림푸스한테 뺏겼다가, 어제 다시 피닉스한테 또 뺏겼죠? 그러니 제대로 된 캐슬 시스템의 위력을 확인해본 길드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아마 한 길드에서 가장 성을 오래 보유했던 건 로젠타스 성이 갖고 있는 연속 8개월의 기록일 걸요?”
그 지형적 이점을 가진 로젠타스도 태성이 첨탑마다 마법사 부대를 배치하기 전까지는 주인이 자주 바뀌었다.
그 후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특별히 강화 투자를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방어 체계를 자랑했고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3년이란 시간 동안 이 캐슬 시스템을 최고 수준까지 업그레이드해본 성은 없었다.
즉 다시 말해 우리는, 여태껏 일부분만 해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각 방어 시스템을 극대화하게 되면 분명 그 시너지 효과가 나올 거예요. 지금까지는 단편적인 업그레이드 후에 효율이 좋지 않다고 평가하고 버려둔 거고요. 그게 아니더라도 투자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앞으로는 비행 부대도 나오고 타이탄도 더 많이 참여하게 될 텐데요!”
“……좋습니다, 래빗 님. 어차피 저한테 남아도는 게 바로 골드인데, 투자해볼게요. 그럼 생각해두신 것부터 좀 말씀해 주시겠어요? 바로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와! 역시 우리 길마님! 항상 시원시원하시다니까요!”
각 업그레이드마다 최소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 달 가까이, 다양한 시간이 소요됐다.
그래서 기왕 할거면, 일찍 시작하는 게 좋았다.
어차피 믿고 맡기기로 한 이상, 골드와 제작은 내가 하고 업그레이드 방향은 핑크래빗의 구상을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럼 성벽은 그렇게 하시고요, 내성문 강화에는 이걸 추가로 넣어주세요.”
“어? 이걸 그냥 주신다고요? 이건 래빗 님 템 아니에요?”
한창 대화를 나누다 말고 창고에 다녀온 핑크래빗이 재료 아이템 하나를 건네주었다.
우리가 드래곤 레이드 당시에 획득하기도 했던, 바로 ‘세계수 가지’였다.
“축빙 님이 쓰시는 스태프의 재료 템이기도 하죠? 예전에 거래소에 하나 올라온 적이 있길래 고민하다가 구매했어요. 나중에 되팔면 비싸게 팔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니…… 그럼 그렇게 되파셔야지, 왜 이걸 내놓으세요?”
“제 의견대로 길마님이 통 크게 골드를 투자하시는데, 저도 이 정도는 해야죠. 그리고 이왕 제대로 업그레이드해보기로 했는데, 그냥 하면 다른 성들과 다를 게 없잖아요. 이렇게 레전더리라도 넣어봐야, 다른 성들과 차별화되지 않겠어요?”
아닌 게 아니라 고작 성문 강화에 레전더리 재료 템을 넣어본 길드가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 감당하기엔 너무 큰 금액이라 골드를 넘겨주려 했으나, 핑크래빗은 끝까지 극구 거절했다.
“이미 길마님 덕분에 골드를 많이 벌었는걸요. 그리고 버닝스타에도 받아주셔서, 벌써부터 절 찾는 고렙 유저분들도 많이 늘어나 더 벌게 될 거고요. 그 보답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헤헤!”
확실히 내 씀씀이가 커졌다는 게 이럴 때 느껴졌다.
별로 대단한 걸 해준 것 같지도 않은데,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쩌다 조금만 베풀어도 크고 아쉽게만 생각했던 궁핍했던 시절이 생각이 나, 스스로가 대견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우리 함께 최고의 성으로 성장시켜 봐요! 다음 업그레이드 때가 되면, 바로 알려주시는 겁니다. 알겠죠?”
“네에!”
“마이 로드 산드로 님이시여! 지시한 대로 내성문의 강화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완료까지는 총 14일이 필요하겠습니다.”
총관을 통해 내성문에 세계수 가지를 통한 업그레이드 지시를 내리고 나자, 나도 기대가 되었다.
과연 레전더리를 바른 성문은 어떻게 강화될지?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업그레이드를 멈추지 않다 보면, 우리 아베르 성이 어떤 성으로 거듭나게 될지!
* * *
성 강화를 마치고는 곧바로 시공의 틈새를 찾았다.
수성이라는 큰 어려움을 해결했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은 멀었기 때문.
오히려 태성의 세력은 예전보다 더욱 커지고 강해졌기에, 더욱더 강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나 레벨업이 최우선.
특히나 천계와 마계라는 대규모 콘텐츠를 선점하려면, 400레벨 달성이 시급했기에 한시라도 쉴 틈이 없었다.
“와! 여기를 혼자서 사냥 중이시네요? 정말 대단하세요!”
“역시 흑풍단주네! 우리의 대장이 될 자격이 충분하고도 넘쳐욧!”
그렇게 사냥을 시작한 지 5시간째.
이른 새벽부터 사냥해왔지만, 마주치는 유저들마다 같은 반응을 보여왔다.
“하하! 감사합니다, 다들 조심히 열렙하세요!”
검은 망토를 둘러쓴 20여 명의 원딜러들.
일명 ‘원딜팟’이라 불렸던 그들이, 이제는 전부 ‘흑풍단’으로 변해있었다.
직접 이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본 결과, 정말로 올타의 게시글 그대로 시공의 틈새는 단 하루 새에 흑풍단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수성에 실패했다면 그대로 폐기처분됐을 망토였겠지? 새삼 이미지란 게 얼마나 중요한 건지 실감 나네…….’
검은 망토.
이건 하루아침에 태성으로부터 승리한 흑풍단의 상징이 돼버렸다.
그리고 다음 달 공성전과 그 후의 공성전에서 거듭 승리할수록, 그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질 게 분명했다.
허나 반대로 만약 한 번이라도 패배하게 되면, 그들은 언제라도 바로 망토를 팔아버릴 수도 있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이런 점들을 충분히 염두에 두면서, 앞으로의 전략을 신중히 세워나가야 했다.
그렇게 많은 흑풍단들과 인사도 하고 함께 사냥도 하는 도중, 반가운 귓속말이 들어왔다.
(지옥불: 벌써 접속해 있었구나.)
(나: 형님 또 어제 너무 달리신 거 아니세요? 곧 있으면 점심 먹을 시간인데요ㅋㅋ)
(지옥불: 하하! 그랬나? 아무튼, 잠깐 볼 수 있을까? 할 얘기가 있는데...)
(나: 그럼요, 누가 찾는 건데요! 그럼 당장 듀메인으로 가겠습니다!)
(지옥불: 아니, 거기가 아니다. 번스타인으로 와다오^^)
(나: 네? 아하하! 알겠습니다!ㅋㅋ)
타연에서도 알짜 중의 알짜 성이라고 널리 알려진 번스타인 성.
여태껏 태성의 메인 성으로도 유명했던 그 성은, 어제부로 피닉스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지옥불 형님도 그곳에 가 계시는 게 당연했다.
슝!
[번스타인 외성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와! 오랜만이구나.”
인생역전이 이뤄졌던 이곳에 몇 달 만에 찾아왔지만, 변한 게 없이 그대로였다.
여전히 유저들로 번화한 거리를 지나 성으로 향하자, 익숙하고 커다란 주성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나와 기다리고 계시던 지옥불 형님이 나를 반겨줬다.
“금방 왔구나. 어서 와라, 우리의 새로운 메인 성에.”
“역시 번스타인이에요. 듀메인 성도 괜찮았지만 역시 여기에는 비할 수 없네요! 근데…… 옆에 계신 분들은……?”
“아! 미리 말해놓지 않았지. 인사드려라. 화랑 길드의 마스터 ‘국선’ 님과, 피스메이커 길드의 마스터신 ‘유머스트다이’ 님이시다.”
“안녕하세요, 산드로 님!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드로 님. 그동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내게 인사를 건네오는 전사와 기사 캐릭.
두 사람은 바로 어제 태성에게 성을 뺏기게 된, 타연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두 중립 성길의 마스터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저도 두 분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기에 두 분이 먼저 와계신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여기에는 어쩐 일로……?”
“아하, 그건 내가 설명하지. 드로 넌 어제 공성이 끝나고 곧바로 로그아웃했지?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갑자기 두 분으로부터 동시에 연락을 받게 됐다.”
이어진 지옥불 형님의 설명.
그건 역시나, 두 사람을 보자마자 내 머릿속에 스친 생각 그대로였다.
“형님의 말씀대로라면 앞으로 이 두 분…… 아니, 이 두 길드는…….”
“그래. 우리와 함께 태성 라인에 대항해 함께 싸우시기로 뜻을 모으셨다.”
“나이스! 대박입니다! 두 분 모두, 큰 결심 해주셨네요!”
태성 라인에 대항할, 이른바 ‘피닉스 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