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페어리 퀸 (1)
“뭐? 투명 절벽? 타연에 그런 게 있다고?”
“일단 말이 그렇단 거예요. 절벽일지, 커다란 암석일지…… 아니면 다리 형태일지 등등은 만들어 놓기 나름이니까요.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장치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죠.”
“흠…… 과연 그런 게 있을까? 뜬금없이 산꼭대기에?”
“드로 형님, 혹시 레던에 가보셨어요?”
“당연하지. 내 볼포와 폴보를 테이밍한 곳도 거기였는 걸?”
“맞다, 그러셨죠! 그럼 거기를 누가 최초로 발견했는지도 혹시 알고 계세요?”
“아니? 뭐야, 설마 너였어?”
“네, 저예요. 퍼스트 어드벤처, 대탐험시대!”
지금도 수많은 유저들에게 인기가 높은 레인젤 던전.
그곳을 발견해서 대중에게 오픈한 사람이 대탐이였는지도 모르고, 여태껏 들락날락했다.
“지하실에 있는 그곳 입구도, 처음에는 마법으로 감춰져 있었어요. 막혔던 벽도 기관장치를 찾아내서 한번 더 해제했어야 했고요. 대마법사의 던전이라는 설정다운 모습이었던 거죠. 그러니까 마법 종족인 페어리…… 그것도 퀸이라면, 제 이런 생각도 가능성 있지 않을까요?”
“흐음……. 듣다 보니 솔깃한데?”
“맞아요, 형님. 그런 게 없을 거란 보장도 없잖아요? 이곳 타연 안은 용과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니까요.”
차츰 설득돼가고 있는 도중에, 라챤이도 대탐이의 의견에 힘을 보탰다.
사실 대탐이의 말이 워낙 생각지도 못했던 거라 거부감이 먼저 든 것이었지, 마땅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진 않았다.
라챤이 말대로 이곳은, 현실의 기준이 통용되지 않는 판타지 세계관 속이었기 때문이다.
“드로야, 나도 가능성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환상 마법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특수 광물이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페어리 퀸이라면…… 자신의 보금자리를 숨기기 위해 그런 장치를 걸어뒀다는 설정이 있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이고.”
“나도 동감이야. 사실 대도 부츠를 가진 사람이 이제 한두 명도 아니고, 비행이 가능한 유저는 또 얼마나 많아졌냐? 근데 그 공중정원이라는 게 대놓고 존재했다면, 지금까지 미발견 상태로 남았겠어? 분명 숨겨져 있던 거니까 누군가 먼저 발견하고 나서도, 거북이 님 말처럼 몰래 독식하고 있었던 거지!”
“맞아요, 축굴이 형! 사실 하늘에서 제대로 살펴본 건 처음이지만, 이 산맥 전체에 있는 봉우리만 해도 족히 100개는 넘겠더라고요. 근데 올라가기 힘든 봉우리나 절벽들을, 기를 쓰고 전부 올라가 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잖아요? 여기가 무슨 등반가 업적이 주어지는, 하늘 산맥 같은 곳도 아니니까 말이죠.”
이쯤 되다 보니 나도, 확실히 그냥 무시할 만한 추측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샅샅이 뒤져봤는데 허탕을 친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무언가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뒤져보죠? 이번엔 직접 봉우리 정상을 하나씩 하나씩 밟아보면서!”
“그래. 안 그래도 요즘 전투와 사냥만 하느라 지겨웠는데…… 간만에 게임답게 모험 플레이 좀 해보자!”
계획을 재정비한 우리는, 다시 훼라리와 와순이를 소환해 각각 두셋씩 나눠탔다.
“야, 뭐야! 난 어디 타라고? 설마 이번에도 나만 빠지라고?”
“형도 안타깝지만 어떡하냐? 탈 자리가 모자라니까, 넌 여기 남아야지. 디바인 템 착용한 상태로 혼자서 필드 돌아다닐 자신 있어? 그냥 여기서 베이스캠프 역할이나 하고 있어.”
“뭐?”
“하하! 그러지 말고 이번엔 나 대신 타고 가라. 축굴이도 애써 여기까지 왔잖아? 형은 은신이 있으니까 혼자서 도보 등반 루트가 있는지 뒤져볼게.”
“와! 감사합니다, 무살 형님!”
무살 형님이 현중이에게 탈 자리를 양보하시고는, 곧바로 마을 북쪽을 향해 은신을 쓰고 떠나셨다.
“축굴아. 넌 언제쯤에나 비행 펫을 마련할래? 이렇게 얻어만 타려고 라이딩 스킬 배운 건 아니었잖아?”
“인마, 매물이 나와야 살 거 아냐! 거래소 같은 곳엔 죽어도 안 올라오는 걸 내가 어떡하냐? 테이밍 몬스터가 배우고 싶다고 배울 수 있는 스킬도 아니잖아!”
“안 되겠다. 형님이 괜히 형님이겠냐? 시간 내서 동생 자가용부터 하나 마련해 줘야겠네. 이놈, 다 키워놓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영 손이 많이 가네.”
“그럼 내가 진짜 뻥 안치고, 너한테 형님이라고 한 번 불러준다.”
“오케이, 접수 완료! 그럼 이제 출발해 볼까? 라챤이와 파랑이는 북서쪽으로 가. 우린 북동쪽부터 확인해 볼게!”
“넵!”
“알겠습니다!”
“자! 그럼 다시 또, 이랴!”
정말 타연을 하며 항상 느끼는 일이지만…….
랜덤 보상으로 테이밍 스킬이 떴을 때 버리지 않고 배운 것은, 지금껏 내가 한 선택 중에서 손꼽힐 만큼 잘한 일이었다.
이렇게 날지 못했다면…… 이 많은 산봉우리 하나하나를, 전부 걸어서 올라가 봐야 했을 테니까!
* * *
“으아악! 살려줘!”
"포획!"
휘리릭! 척!
순식간에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현중이를, 가까스로 들고 있던 군단장의 채찍을 휘감아 끌어올렸다.
이미 몇 번이나 이런 일이 반복된 탓에, 무기는 진작부터 스위칭해 놓은 지 오래였다.
“인마, 조심 좀 하라니까! 우리 셋 중에서 너만 자꾸 떨어지잖아!”
“아…… 쏘리 쏘리! 이럴 줄 알았으면 아무 창이라도 하나 들고 올걸. 검으로 일일이 확인해 보려니까 빡셔 죽겠네!”
“자신만만하게 데려가 달랄 때는 언제고? 역시 지금이라도 무살 형님을 모시고 오는 게 더 나으려나?”
“아냐. 이제 감 잡았어. 찾아보니까 아무리 봐도 대탐이 말이 맞는 거 같다. 진짜로 이곳 어딘가에, 투명 다리가 있을 것 같아!”
“오냐오냐. 아무튼 내가 계속 잡아준단 보장은 없으니까, 낙사해도 원망은 마라? 그래도 내가 레벤다스만큼은 어떻게든 주워줄게.”
“아주 죽으라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냐? 형한텐 무적 스킬이 있어서, 떨어져도 낙사는 안 당하거든?”
“아아, 그렇구나. 근데 그런 분께서 방금 전엔, 왜 그렇게나 비명을 질렀을까나?”
가트웰 산맥 전반에 걸쳐 삐죽 빼쭉 솟아있는 봉우리들.
그곳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대도 부츠가 없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훼라리라는 비행 탈것을 이용해서, 벌써 30개가 넘는 봉우리의 정상을 샅샅이 살펴봤다.
비록 절벽 끄트머리에서 허공을 향해 무기들을 휘두르다가, 현중이는 몇 번이나 떨어질 뻔하긴 했지만.
“하하! 두 형님께선 왜 그렇게 맨날 티격태격이세요? 사실은 영혼의 파트너시면서!”
“대탐아, 누가 이따위 놈과!”
“축굴아, 잠깐! 조용히 좀 해봐!”
“왜 갑자기 쑥쓰럽냐?”
“아니, 그게 아니라 누가 보여! 닥치고 좀 빨리 숨어 봐!”
“뭐……?”
내가 진지한 말투와 함께 은신을 시전하자, 그제서야 분위기를 감지한 현중이도 은신 망토를 뒤집어썼다.
사실 지금 있는 봉우리 정상의 면적만 해도 제법 큰 놀이터 크기만 했다.
덕분에 봉우리 아래에서는 위쪽인 이곳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반대로 나는 건너편 산을 오르고 있는 유저들의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전원 은신 상태로 절벽 위를 올라가고 있는 5명의 유저.
그들은 놀랍게도, 깎아지는 듯한 절벽을 성큼성큼 수직으로 걷고 있었다.
“뭐야…… 어디에 있다는 건데?”
“전부 은신 상태야. 네 눈엔 안 보일 거다.”
보유한 간파 스킬을 줄곧 활성화 상태로 유지해주는 레전더리 템, 제사장의 신묘한 머리 장식.
이 희귀한 투구 덕분에, 은밀하게 이동 중인 그들을 먼저 발견해 낼 수 있었다.
“혀, 형님, 전 어떡할까요! 여긴 숨을 데도 없는데요!”
바닥에 바짝 몸을 엎드린 채 작게 속삭이는 대탐이.
은신 망토가 있는 현중이와 달리 녀석은, 그저 평범한 성기사에 불과했다.
이대로 놈들이 더 올라가다 보면 우리의 존재 또한 들킬 수 있는 상황.
허나 다행히도 최후의 수단이 하나 남아있었다.
“그냥 로그아웃해!”
“아, 맞네요! 로그아웃!”
순식간에 사라지는 대탐이의 흔적.
다행히도 서로 실루엣 정도나 겨우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던 상태라, 그들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변함이 없었다.
“정말이야? 은신 상태로 산을 오르는 유저들이 있다고? 저길 어떻게?”
“진짜야. 수직으로 걷고 있어. 파티 전원이 대도 부츠를 착용한 모양이다.”
“대박! 그럼 저 사람들이……?”
“그래. 공중정원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그 패거리일 확률이 높겠지. 아무튼, 지금 한가하게 대화 나눌 시간이 없다. 넌 다른 길드원들한테 연락해서 이쪽으로 조용히 불러 줘. 난 놓치기 전에 바로 쫓아가 볼게!”
“옥케이! 들키지 않게 조심해라!”
필드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조합과 템 수준.
그것도 몹이나 채집물도 없는 절벽뿐이라 유저 한 명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 파티 상태로 이동 중인 그들이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난 몸을 날리듯 점프해서 밑으로 빠르게 내려간 뒤, 놈들이 오르고 있는 절벽으로 넘어가 곧바로 뒤쫓아 올라갔다.
그러자 곧, 실루엣으로만 보이던 그들의 아이디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아이디 앞에 있는 그들의 길드 마크가 더욱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 자식들…… 전부 올림푸스였잖아!’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예상도 못했던 길드.
한때 같은 편으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적으로 돌아서버린 신화국이 바로 이 뜬금없는 도둑들의 정체였다.
혼플장인, 0주당0, 막장씨프 등등…… 전부 올림푸스 내에서도 제법 명성이 높은 네임드 유저들이었다.
새롭게 합병한 고조선 길드 출신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익히 아는 아이디도 한 명 섞여 있었다.
바로 올림푸스의 랭커 전사이자 총무를 맡고 있는, 뉴요커였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등반하기가 쉽네요. 어제는 눈이 와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쉿, 다들 조용히 해! 도착 전까진 대화 금지인 거 잊었어?”
“에이, 언제 그렇게 철저히 지켰다고 그러세요. 이 정도면 충분히 멀리 왔는데요.”
전원 대도 부츠 착용에 심지어 은신 망토까지 가진 유저가 있었다니…….
보면 볼수록 올림푸스의 저력이 놀라웠다.
생각해 보면 드래곤 레이드 당시에도, 대도 부츠를 착용했던 근접 딜러들이 상당히 여럿 참여했었다.
나를 따라 투 메르타스의 등 위에 올라타, 함께 딜을 먹였던 유저만 해도 대여섯 명은 넘었던 것이다.
제법 많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대도 부츠는 인던이 아닌 필드 보물상자에서 나오는 레전더리 템.
지금 눈앞의 유저들도 전원이 착용할 정도라면, 어쩌면 타연에 풀린 대도 부츠의 대부분은 올림푸스에 넘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정도로 많은 길드원들이 착용하고 있으려면, 전 길드 차원에서 필사적으로 구했어야 가능했을 텐데……. 역시 그 이유는 이곳 때문에……?’
레이드 당시에도 상당히 많이 보유하고 있길래 살짝 놀라긴 했지만, 설마 그게 어떤 ‘목적’을 위한 필요 조건이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놈들의 목적지는 보나 마나, 지금 대화 중인 ‘그곳’일 테니 말이다.
“아…… 펫에도 은신이 함께 적용되면, 우리가 이 고생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지금도 충분히 꿀 빨고 있는 거니까 배부른 소리는 그만 해라. 그런 얘긴 들어간 다음에 떠들든가.”
“넵. 이제부터 입은 다시 봉인하겠습니다!”
“됐다. 이미 다 왔다.”
혼플장인에게 핀잔을 주는 뉴요커의 목소리와 함께, 마침내 그들이 정상에 도착했는지 시야에서 사라졌다.
서둘러 뒤쫓아 올라가니, 어느새 맞은편 끄트머리를 향해 이동 중인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여느 산과 똑같은 모습인 눈 덮인 정상.
다만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대저택이 들어가고 남을 만큼 평평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자, 간다! 잘 따라와라. 저번처럼 혼자만 떨어지지 말고!”
“하핫, 알겠슴다!”
여전히 은신 상태를 유지 중인 채 벼랑 끝에 선 그들이, 한곳에 뭉치듯 모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 바로 앞에 뭔가 특별해 보이는 형태의 하얀 바위가 놓여 있었다.
저벅저벅.
앞장선 뉴요커가 그 바위를 밟더니, 절벽 바깥을 향해 천천히 걸어나갔다.
계단을 오르듯이, 낭떠러지인 허공을 밟으며!
‘미, 미친! 대탐이의 추측이 진짜였다니!’
그런 뉴요커의 뒤를 다른 길드원들이 마치 줄이라도 매단 듯 딱 달라붙어서 따라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맨 앞에 있던 뉴요커를 필두로 차례대로 하나하나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투명한 포탈을 통과한 것처럼,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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