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페어리 퀸 (2)
[축복받은무빙: 뭐? 정말이야? 그곳에 정말 있었던 거야?]
[산드로: 네. 눈앞에서 그곳으로 입장하는 놈들을 확인했습니다. 위치(!). 다들 어서 이곳으로 와주세요!]
[당근당근단검: 안 그래도 축굴이 형한테 전해 듣고 달려가는 중이에요. 먼저 들어가지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안 그래도 혼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모험을 마다하진 않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기 때문.
그리고 와순이만으로는, 사람들을 이곳 정상까지 전부 옮기기엔 힘들어 보였다.
척!
가장 먼저, 기파랑과 함께 다른 곳을 수색 중이던 라챤이가 도착했다.
“정말이에요? 여기에 누군가 나타났다는 게요?”
“그래. 투명 계단을 밟고 사라졌다. 바로 저곳으로.”
아마 50미터쯤.
놈들은 낭떠러지에서 허공을 밟으며 이리저리 방향을 꺾으며 올라가더니, 한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와! 역시 대탐이구나! 설마설마했는데 예상했던 그대로라니! 근데 정말로 공중정원을 먼저 발견해서 들락날락하던 놈들이 있단 사실이 더 충격적이네요!”
“누군지 직접 봤다면 더 놀랐을걸?”
“누구였는데요?”
“올림푸스. 그것도 전원 대도 부츠를 착용한 채 은신이 가능한 놈들로만 구성된…….”
“네에?”
그간 올림푸스에 대한 몇 가지 의혹이 있었다.
함께 합병해서 신화국을 건국한 고조선은,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올림푸스와 동급의 길드였다.
그렇다 보니 최근 급성장한 피닉스와 달리 두드러지는 활약을 보이지 못하던 올림푸스가, 고조선을 일방적으로 흡수해서 거대 길드가 된 것 자체에 의견이 분분했다.
고조선이 합병을 원했다면, 굳이 올림푸스를 택할 필요 없이 피닉스나 태성에 붙는 편이 더 나은 선택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갑자기 등장한 100여 마리의 페가수스 비행 부대 또한 장안의 화제였다.
누가 봐도 올림푸스가 획득 루트를 독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타연 속 필드 어디에서도 그와 관련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한데 이곳에 그 비밀이 있었다면……?’
방금 들어간 놈들의 행적으로 보아, 눈에 띄지 않게 이만저만 조심하며 이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저 한 명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서마저 그 정도라면, 지금까지 이 비밀 장소에 관한 정보를 철저히 통제하는 데 충분히 성공할 만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철저함이 뜻하는 바는 당연히 하나밖에 없었다.
이 숨겨진 장소에 엄청난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가치는 당연하게도 올림푸스를 최강의 비행 부대 길드로 만들어준, ‘페가수스’일 게 분명했다.
“파랑아, 일단 이곳을 혼자 지키고 있어 줄래? 라챤이와 난 길드원들 좀 태워서 데려올게.”
“넵! 곧 새로운 필드에 들어갈 수 있다니 기대되네요. 빨리 다녀오세요!”
혼자라면 당장 들어가 봤겠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내게는, 나보다 더 유능한 멤버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 * *
“대박이네. 이런 곳이 정말로 실존했을 줄이야!”
“제가 괜히 탐험가 소리 듣는 게 아니죠? 제 말이 딱 맞았잖아요!”
투명 계단에 올라 오르락내리락하는 현중이를 보며 대탐이가 말했다.
오랜만에 전 길드원들이 한자리에 모인 터라, 삭막하던 눈 덮인 정상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근데 어디까지 올라가야 해요? 직진은 아니라고 그러셨죠?”
“어. 허공에서 방향을 막 몇 번이나 꺾던데? 얼핏 들리기론 자기들도 떨어질 수 있다고 한 걸 보면, 발걸음 숫자를 외우기라도 한 모양이야.”
“그럼 우리도 수십 번은 떨어져 봐야 끝까지 도착하려나요? 조심스럽게 발을 뻗으며 이동한다 해도, 떨어질 것 같은데요.”
“허공에 훼라리와 와순이를 띄운 다음에 천천히 이동해보든가 해야겠다.”
길드원들은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이 보이지 않는 길이 정말 보이지 않는지부터 실험해 보았다.
덫 설치를 해서 연막을 피워보고 각종 마법이나 스킬을 허공에 뿌려봤지만, 바람에 금세 휘날리거나 어떠한 피격 효과도 나타나지 않았다.
분명 무언가 있는 게 분명한데도, 마법은 전부 통과돼버렸던 것이다.
“잠깐만요. 제가 한 번만 살펴볼게요.”
결국 하는 수 없이 그냥 떨어져 보면서 이동해야 하나 싶은 순간, 당당이가 암석 위 허공 위로 올랐다.
그리고는 자신의 바로 앞에 무언가를 꺼내서 떨어뜨렸다.
달칵.
녀석이 꺼낸 것은 최상급 체력 회복 물약.
잠시 떨어지던 물약은 발밑 허공에서 멈췄는데, 그 모습이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 이건 먹히네요. 이런 식으로 물약 먼저 떨구고 따라서 올라가면 될 것 같아요.”
“캬! 역시 당당이네. 이 생각은 못 해봤는데!”
확실히 물약 몇 개가 허공에 떠 있자, 절벽에 투명 계단이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됐네! 놈들이 들어간 지도 제법 됐는데, 이제 들어가 볼까요? 대탐아, 앞장서 봐!”
“네, 그럼 입장하겠습니다!”
본인이 찾은 거라고 우기기도 하고 자처하기도 해서, 입장은 대탐이가 먼저 하기로 했다.
대탐이는 차분하게 허공을 밟아나가며 물약으로 길을 만들어 나가다가, 잠시 후 놈들이 없어진 지점에서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대탐험시대: 와! 이거 뭐죠!]
[산드로: 어때? 안은 안전해?]
[대탐험시대: 아무도 없어요. 다들 얼른 들어오세요!]
“자, 다들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에 나를 필두로 전 길드원들이 허공을 밟고 올라섰다.
[가트웰 산맥의 콘틀랑 정상, 페어리 퀸의 공중정원에 도착했습니다.]
쑤욱.
포탈을 통과할 때와 비슷한 느낌으로 다른 공간으로 들어간다고 느끼는 순간.
이미 다음 발자국은 계단이 아닌 다른 곳을 밟고 있었다.
가트웰 산맥 특유의 험악한 절벽과 계곡이 보이던 투명했던 발밑이, 어느새 파릇파릇한 잔디로 변해있던 것이다.
“헉!”
“오옷!”
“뭐야!”
그리고 내가 느끼는 감정 그대로, 뒤따라온 길드원들이 연달아 탄성을 터뜨렸다.
‘이곳이 페어리 퀸의 공중정원?’
공기부터가 달랐다.
가상현실임에도 차갑고 쌀쌀하게 느껴지던 고산 지대의 칼바람이, 봄날의 훈풍처럼 따뜻하고 상쾌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와! 오스타그의 장미 정원은 저리 가라네요.”
“산 정상 위 허공에, 이런 곳이 있었을 줄이야…….”
어지간한 광장보다 큰 공간에 온갖 꽃들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는데, 그 사이를 반짝이는 무언가가 분주하게 떠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페어리였는데, 그 수만 어림잡아도 수백 마리가 넘어 보였다.
정원 한복판에는 온통 덩굴로 둘러싸인 원형의 성벽이 하나 보였는데, 우리가 서 있는 가장자리 너머로는 온통 하늘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늘에 떠 있나 봐요. 이곳은요.”
“맞아. 전에 한번 운영자들이 있는 곳에 소환돼서 가봤는데, 거기도 이곳과 비슷한 곳이었어.”
우리가 방금 통과한 곳에는 세로로된 마법진이 있었는데, 그곳 너머로 우리가 있던 콘틀랑 산의 정상이 보였다.
하늘을 떠다니던 로스트 캐슬과 달리 이곳은, 허공에 숨겨진 채로 고정되어있는 필드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훼라리로 접근할 수 없던 상공 부근에 위치해 있는 것 같았다.
“와! 여기 너무 이뻐! 저건 무슨 꽃이야? 완전 처음 보는 꽃들투성인데?”
“그러게요? 특이한 게 많아 보이네요!”
네모난 장미부터 어지간한 가로수만 한 크기의 튤립까지.
정원은 현실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꽃들로 인해 신비스럽기 그지없었다.
“다들 너무 방심하진 마세요. 아직 적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 모르니까요.”
“맞아요. 축굴이 말대로 여기엔 올림푸스가 들어와 있습니다. 일단 여기까진 무사히 들어왔으니 여기서부턴 도둑들이 앞장서서 전진해보겠습니다. 당당아, 무살 형님!”
“그래. 가자.”
언제나 정찰은 도둑의 몫.
우리 3인방은 들어온 입구부터 정면을 향해 나 있는 길을 따라 은신을 쓴 채 이동했다.
허공을 날아다니던 페어리들을 지나칠 때마다, 은신 상태인 우리가 보이는 듯 반응하거나 돌아봤지만 공격은 하지 않았다.
지상의 필드에서 어쩌다 마주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설정상 ‘몬스터’가 아닌 종족인 것이다.
특별히 넓고 큰 곳은 아니었기에 우리는 금세 성벽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덩굴로 뒤 덮인 초록 성벽은 어른 키 정도로 낮은 편이었는데, 방어 목적이 아닌 정원과 경계를 나누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싶었다.
문도 없는 입구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과 달리 건물은 보이지 않고 작은 호수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순백의 원형 파고라(pergola)가 있었는데, 수십 마리의 페가수스가 그 주변에서 물을 떠먹거나 호수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무적살라딘: 역시 이곳이 페가수스 둥지였구나!]
[당근당근단검: 잠시만요, 사람이 보이는데요?]
파고라 안.
신비스런 하얀빛이 번뜩이는 그곳에는, 당당이의 말대로 열 명 정도의 유저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보나 마나 올림푸스 길드원들.
생각보다 적은 수였기에 곧바로 길드원들을 불렀다.
수백 명이 넘는다면 모를까, 저 정도 숫자라면 조심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산드로: 다들 들어오세요! 바로 치겠습니다!]
[축복받은얼굴: 오오, 전투다 전투!]
입구에 있던 나머지 길드원들이 입구를 통과하자 은신을 풀었다.
그리고 다 함께, 놈들이 자리 잡고 있는 파고라 안을 향해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뭐, 뭐야? 누가 왔잖아!”
“총무 이 자식, 뭘 달고 온 거야!”
“버닝스타다! 전부 다 몰려왔어!”
금세 우리를 발견한 놈들이 소리치기 시작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바로 각종 버프를 걸며 전투에 돌입하려는 순간, 뉴요커가 밖으로 나오며 소리쳤다.
“자, 잠시만요!”
“……뭐죠?”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먼저 반갑습니다, 산드로 님. 여긴 도대체 어떻게 발견하신 겁니까?”
“당신들도 발견한 곳인데, 저희라고 발견하지 못할 건 없지 않아요? 근데 올림푸스는 태성 라인이 되신 거로 아는데, 전투 안 하세요?”
“구, 굳이 싸워야 하겠습니까? 여기가 시공의 틈새 같은 곳도 아닌데…… 기왕 버닝스타도 발견하신 김에, 여기에서만큼은 저희와 함께 평화롭게 지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계시죠? 이미 선을 넘은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평화는 무슨 평홥니까?”
“자, 잠시만요! 이곳에 대해 잘 모르시지 않으세요? 저희가 정보 공유도 해드릴 테니 조금만 더 시간…….”
“됐고요! 이곳이 확실히 꿀은 꿀인가 보죠? 그렇게나 협상하시려는 걸 보니? 정보 같은 건 저희가 직접 알아볼 테니 이제 그만하죠. 그럼…… 다들 공격!”
간곡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가려는 뉴요커의 말을 끊으며 공격을 명령했다.
그리고 우리 버닝스타는 전원 파고라 안을 향해 뛰어들며 각종 스킬을 시전했다.
[투쟁의 오라!]
[파이어볼!][파이어 볼!]
[그림자 밟기!]
순식간에 적들 사이로 파고든 우리는, 금세 피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한데 엉겨 붙어 공격을 주고받았다.
“으악! 뭐가 이리 아파!”
“이 자식들 전부 랭커잖아!”
“이 데스 나이트는 뭐야! 뭔데 이리 쎄!”
이곳에 있던 올림푸스 놈들도 평범한 유저는 아니었다.
전부 수년간 각종 전투와 레이드에 이름 높았던 길드 내 간판 유저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우리 버닝스타와 견주기에는 부족했다.
당당이나 무살 형님뿐만 아니라 축복받은 패밀리도 이제는 랭커급.
무엇보다 우리 길드원들의 장비는 타연 내에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슈우우, 슈우우.
하나둘씩 잿빛이 되어 사라지는 올림푸스 길드원들.
결국 놈들 중에는 금세 뉴요커 한 명만 남게 되었다.
“여기를 발견한 이상, 우리 길마님이 당장 이곳에 찾아올 거다.”
“제독이 이곳에 와준다면 저야 고맙죠. 어서 와달라고 하세요. 이번엔 낙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죽여줄 테니까요.”
“건방진 자…… 읔!”
마지막까지 한마디 하려 하는 그에게 검을 찔러 넣어 말을 끊었다.
“지들이 먼저 뒤통수치고는 피해자 코스프레네요. 아무튼 다 정리된 건가요?”
“어. 올림푸스도 별거 아니네.”
“우리한텐 제가 있었잖아요. 헤헤.”
“뭐? 하하! 그렇다고 치자.”
축빙 형님과 짧게 전멸시킨 감상을 나누는 사이, 먼저 파고라 안으로 들어간 라챤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들어와 보세요! 여기에 페어리 퀸이 있어요!”
그리고 바로 뒤따라 들어가자, 놈들이 있던 파고라 한복판에 어떤 존재 하나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범한 페어리보다는 조금 더 커 보이는 크기.
끝이 찢긴 두 쌍의 날개를 가진 페어리 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