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요정왕의 서클릿 (1)
나의 자신만만했던 외침과는 달리, 길드원들은 영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당당이는 물론이고 함께 지목한 무살 형님 또한, 우려의 목소리로 말했다.
“드로야. 한번 들어가면 일주일 후에나 가능한데,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하는 건 어때?”
“무살 형님. 혹시 저와 들어가는 게 싫으신 건 아니죠?”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 근데 너야 마흡으로 무한 사냥이 가능해도, 우리 둘은 피를 회복할 수단이 없잖아. 힐링 스킬이 있는 대탐이나 축빙이 형, 둘 중 하나는 포함하는 게 낫지 않을까?”
“대신 두 분한테는 물약과 집중 회피가 있잖아요. 이번 한 번만 저를 믿고 따라주세요. 제 감이 말하고 있어요. 이번 인던에서는 이 조합이 최고라고.”
“흠…….”
여전히 시큰둥한 무살 형님과 달리, 당당이는 뭔가 눈치챈 기색이었다.
“왜 그러시는지 알 것 같네요. 알겠습니다. 전 드로 형 뜻대로 할게요. 파티 초대 주세요!”
“뭐? 너까지 왜 그래. 말려도 모자랄 판에!”
“형님도 믿어보세요. 드로 형이 언제 우릴 실망시킨 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드로 형은 저희의 하나뿐인 길마님이잖아요. 헤헷!”
어느새 다른 길드원들에게도 살가워진 당당이 덕분에, 굳이 계속 무살 형님을 설득할 필요는 없어졌다.
결국 참여하기로 한 형님과 당당이과 함께, 짧게나마 브리핑을 마쳤다.
“……자, 다들 이해됐죠? 방금 말씀하신 대로만 하면 됩니다?”
“그래. 이제 들어가자. 듣고 보니 네 말대로 이게 가장 좋은 조합이 될 수도 있겠다.”
“하하! 그렇죠? 그럼 입장 누르겠습니다!”
[인스턴트 던전 ‘요정계 수호 결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ES]
“그대들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버닝스타 도둑들 화이팅!”
“드로야, 믿는다! 최고 보상!”
아련하게 들리는 페어리 퀸과 길드원들의 음성과 함께, 우리 셋은 인던 안으로 공간이동됐다.
도착한 곳은 설정상 다른 차원인 요정계의 경계.
우리가 소환된 뒤쪽으로는, 마치 거대한 벽과도 같은 높고 푸른 반원형의 장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앞으로는 각종 들꽃이 피어있는 초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아직은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결계인데?”
“호라이즌 마을을 지키는 장막의 대형 버전이네요. 종족은 달라도 마법은 다 비슷한 건가 봐요.”
“아, 그렇구나? 예전 시네마틱에서 봤던 데스라의 고대 도시를 지키던 장막도 이거랑 같은 거였지!”
잠시 상황 좀 파악하는 도중에, 알림창이 떠서 이 인던이 기록 경신용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페어리 퀸의 마력이 부족하여, 이곳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10분으로 제한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시야 우측 상단 부근에 시간이 표시되며 카운트 다운됐다.
퀘스트 창을 열어 정보를 확인해보니, 확실히 재입장 가능 시간이 7일이라고 명시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면 다시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시작됐네요. 그럼 앞장서겠습니다!”
“버닝 도둑팀, 출동!”
알림창과 함께 없어진 투명 벽 너머로, 재림 버프를 사용하며 달려나갔다.
이곳에 왔을 때부터 이미 우리 눈앞에서는, 페어리들이 마계의 몹들과 전투 중인 상태였다.
그렇다 보니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곧바로 몹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크르르…….”
가장 많으면서도 먼저 눈에 띈 것은 케로베로스.
이미 지난 지하도시 인던에서도 상대해봐서 익히 알고 있는 마계의 마물이었다.
물론 이놈만 있는 게 아니라, 에르곤이라는 고르곤의 약화 버전이나 서큐버스 등의 모습도 보였다.
앞서 이곳을 겪은 현중이로부터 들었던 그대로.
그렇기에 놈들을 향한 내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다 죽었어!”
띠딩, 띠딩, 띵띵!
연달아 울리는 어그로 감지음.
마계 몹들 특성상 비선공 몬스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말인즉슨, 내가 앞장서 나가면 이놈들은 전부 날 우선적으로 바라본다는 뜻이었다.
[매직 미사일!]
거기에 멀리 떨어져서 페어리와 전투 중인 놈들마저도 마법을 사용해 끌어왔다.
그 결과, 내 몸은 순식간에 20여 마리가 넘는 마계 몹들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마나 쉴드가 2,112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마나 쉴드가 3,568의 물리 피해를 흡수합니다.]
……………………
높은 레벨과 공격력을 자랑하는 마계 몹들답게 만만찮은 피해량이었으나 상관없었다.
[회전 베기!]
반경 3미터 안의 모든 몹들에게 공격력의 130%를 먹이는 8성 광역기.
이 회전 베기 한 방에 곧바로 풀 마나로 가득 차 버린 것이다.
‘마계 몹들……. 거기다 대형 몹이기까지 한 놈을 대상으론, 내 마흡 효율이 몇 배는 더 높아지니까!’
자신만만하게 올 도둑으로만 멤버를 구성한 이유.
그건 내게 마계 놈들의 천적인 신검, 그리고 마나 쉴드와 마흡 반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필드 보스인 고르곤을 혼자서 잡아내면서, 이 미친 효율은 충분히 체감했다.
그런 내게 있어 이곳은, 힐러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몹들을 빠르게 정리할 딜러가 훨씬 효율적이었다.
“케켕! 켕! 켕!”
“끼잉, 끼잉……!”
광역 스킬에 이어 빙그르 돌며 멀티 히트까지 먹이자, 놈들의 어그로가 내게로 단단히 고정됐다.
그러자 뒤따르던 당당이와 무살 형님이 각각 나눠서, 날 공격중인 케르베로스와 에르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와! 이게 진짜 먹히는 거야?”
“암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어그로를 못 뺏어오는 건, 자존심 좀 상하는데요?”
마족이 아닌 마물 따위의 잡몹들에겐 대부분 광역기가 없다.
상당한 맷집과 공격력을 부여한 대신, 나름의 제약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함께 몹들을 사냥하는 당당이와 무살 형님은, 물약 하나 먹을 필요조차 없었다.
“기록 경신용 인던에서 마계 몹들이 나온다고? 이걸 1등 못 하면 나가 죽어야지! 우하하하!”
“드로 쟤, 왜 저러냐?”
“모르긴 몰라도 신날 만하겠죠. 놔두세요, 형님.”
맨 처음 마주친 마물들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남은 시간은 9분 30초.
단 30초 만에 20마리를 잡아버린 것이었다.
‘이 멤버라면 충분히 가능해. 첫 도전으로 올림푸스의 지난 기록을 깨버리는 게……. 그리고 어쩌면 이 인던의 끝을 보는 것도?’
이따위 잡몹들 정도로 이 인던이 S급 퀘스트일 리는 없었다.
분명 이곳 어딘가에는 고르곤이나 마왕군 군단장급에 필적하는 ‘보스’ 몹이 있을 테니 S급이라는 높은 난이도로 책정됐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인던의 정원은 고작 3인뿐.
절대 못 잡을 엄청난 녀석으로 배치해 놓았을 가능성 또한 낮았다.
“머뭇댈 시간이 없어요! 바로 따라오세요, 이번엔 더 많이 끈 다음에 잡겠습니다!”
“알았다!”
다들 파티를 맺은 상태라, 내 MP가 풀로 채워진 상태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가 왜 극딜 조합만으로 이 퀘스트에 도전했는지 모를 수가 없는 상황.
다들 군소리 없이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퍼엉!방금 머문 곳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가자, 화염구가 날아와 터졌다.
지옥의 불길이라는 익숙한 광역 마법.
하급 마족인 ‘데몬의 추종자’가 사용한 스킬이었다.
“아까 브리핑했던 대로, 저 자식은 정예 급이니까 혼자서 잡을게요! 나머지 잡몹만 좀 맡아주세요!”
“그래!”
준 필드 보스급에 필적하는 마족 몬스터가 대여섯 마리의 졸개들과 함께 앞을 막아섰다.
예전에 잡을 때도 버겁기는 해도 혼자서 잡을 만한 녀석이었는데, 지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연속 베기!]
[재빠른 몸놀림!]
퍼펑! 펑! 펑!빠르게 휘둘러지는 평타 때문에, 신검의 옵션인 빛 속성 피격 효과가 쉴 새 없이 번쩍였다.
그래도 상당한 맷집을 자랑하는 놈인지라, 어느덧 당당이와 무살 형님이 마물들을 처리하고 다가와 후방 데미지를 먹이기 시작했다.
‘역시 알아서들 잘해주는구나.’
어그로만 철저히 관리된다면, 후방에서 공격하는 도둑보다 높은 DPS를 유지할 수 있는 딜러는 없었다.
즉, 시간제한이 있는 인던에서 이런 준 필드 보스를 다수 잡아내기에는, 올 도둑이 최고의 조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건방진 인간 녀석들! 뜨거운 맛을 보여주마! 지옥의 불길!”
하지만 역시나 이런 광역 공격 만큼에는 취약했다.
죽어가기 시작하자, 녀석이 최강의 공격 스킬을 갑자기 사용한 것이다.
“뭐, 뭐야? 이 미친 공격력은?”
“한 방에 피가 2만 가까이 빠졌어요!”
나완 다르게 태생적으로 체력과 방어력이 약할 수밖에 없는 도둑.
따라서 둘은 후속타를 염려해 곧바로 뒤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데 대체 수단으로 활을 꺼내 들어 공격하는 무살 형님과 달리, 당당이는 들고 있던 당근을 던져 원거리 공격을 먹였다.
던지고, 던지고, 또 던지고.
녀석이 들고 다니는 두 당근 단검 중 하나의 정체는, 알고 보니 내가 얼마 전에 구입했던 테네시의 바람 단검이었다.
“크아아! 그분께서 너희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금세 재가 되어 사그라지는 데몬의 추종자.
곧바로 다른 놈들을 잡으러 이동해야 했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야? 당당이 너, 당근 중 하나가 테네시 단검이었어?”
“네. 이거 아마 제가 타연 최초로 획득한 거일 걸요?”
“뭐? 살신이 아니라 네가 최초였다고? 왜 형한테 한 번도 말 안 했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안 했죠. 굳이 제가 나서서 템 자랑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그, 그렇긴 하지만…… 와, 하여간 이 자식 템빨 어마무시했네? 내가 그걸 얼마나 주고 산 건데, 한 번도 티를 안 냈다니! 아무리 쓸 일이 없었다지만…….”
다른 한쪽 당근이 벼락이 서린 로베티움 단검이라는 제작 무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무려 레전더리면서 3강화까지 된 상당한 고가의 무기.
그래서 나머지 한쪽도 당연히 같은 제작 레전더리 템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전혀 다른 단검을 들고 있었다.
둘 다 당근으로 외형 변경을 하고 있어서 착각한 일이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한 가지 봉인했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테네시 바람 단검이 2자루……. 이러면 내가 구상해본 게 먹히는지, 당장 확인해 볼 수도 있겠는데?’
난 그대로 내 인벤토리 창에서 스위칭용으로 갖고 다니는 테네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당당이 앞에 드랍한 뒤 말했다.
“당당아, 이거 주워서 로베티움 단검 대신 바꿔 들어 봐. 쌍 테네시면 어떤가, 어디 한 번 구경 좀 해보자.”
“혀, 형……? 이게 무슨?”
“뭐 해, 안 먹고? 시간 없으니까 형은 다시 앞장선다? 들고 따라와!”
“네? 아, 네 네!”
평소였다면 아무리 그래도 쉽게 받지 않았겠지만, 내가 무기를 드랍하고 바로 떠나자 당당이도 어쩔 수 없이 단검을 주웠다.
그러자 곧, 근처에 있던 서큐버스를 정리하는 내 뒤편에서 무언가가 날아와 꽂혔다.
픽!
서큐버스 몸통에 박히는 당근.
그리고 당근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곧바로 고풍스러운 모양의 단검이 날아와 꽂혔다.
픽! 픽! 픽! 픽!
정확히 0.8초 간격으로 번갈아 가며 꽂히는 단검 2자루.
바람 회수를 통한 ‘무한 투척’이, 극대화된 단검 던지기였다.
“미, 미쳤네요! 어떻게 이런 일이!”
“뭐야, 한 번도 생각 안 해본 거야? 테네시가 2자루면 이런 게 가능할 거란 걸?”
“전 그냥 가끔씩 보조 원딜로만 사용했죠. 근데 테네시를 2자루 찬 도둑이 되니까, 이거 대박이네요?”
레전더리라 2강화까지 안전 강화된 테네시 바람 단검의 바람 회수 쿨타임은 2초가 아닌 1.6초.
2자루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면 정확히 0.8초 간격으로 무한 단검 투척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재림 버프를 쓴 상태로 휘두르는 것보다는 공속이 느린 편이었지만, 공격력만큼은 더 뛰어났다.
그냥 쏘는 활과 달리 무기 던지기 스킬의 추가 데미지 효과가 적용되기 때문!
만약 무기 던지기를 5성까지 찍게 되면 투척 데미지가 무려 200%였다.
분명 이 스킬 자체가 근접 딜러들이 어쩌다 한 번씩 던지는 용도로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높은 계수가 책정됐던 것이다.
‘근데 이걸 주력 스킬로 사용하는 캐릭이 나오게 될 줄이야, 꿈에도 몰랐겠지?’
소드 마스터리, 심지어 약점 포착의 후방 데미지까지 전부 적용되는 탓에 한 방 한 방의 데미지가 궁수의 화살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날아가 박히는 시간이 있어서 아주 먼 곳에서는 최고 효율을 내기 힘들어 보이네요. 0.8초 간격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대략 18미터 정도가 한계…….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좋긴 하지만요!”
“그걸 벌써 계산했어? 역시 당당이구나?”
몇 번 던져보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당당이는 벌써 최적 거리를 찾아낸 상태였다.
이쯤 되자, 멍하니 우리의 모습과 대화를 지켜보던 무살 형님도 한마디 거들었다.
“미친 산드로 자식…… 세상에 원딜 도둑이라니? 가뜩이나 사기인 당당이 놈을, 아주 개사기 캐릭으로 만들어 버렸잖아!”
“하하! 그러네요? 전에 구상 한 번 해봤다 저는 신검 때문에 포기한 컨셉인데…… 당당이라면 완전 제대로 소화해 내겠는데요?”
극강의 컨트롤과 전투 센스를 자랑하는 당당이.
녀석이 검을 든 자들의 숙명이었던 근접 공격에서 벗어나, 갑자기 ‘원딜러’가 되어버렸다.
그것도 도둑 직업의 장점들은, 여전히 간직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