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랭킹 1위 (1)
“와! 아침에 잠시 뵀던 것 같은데…… 아직도 사냥 중이시네요? 대단하세요, 정말! 화이팅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님도 열렙하세요!”
스치듯 지나가며 인사를 건네는 유저 하나.
“피닉스에게 공개한 공중정원이 원래 산드로 님이 발견하신 거라면서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목표가 생겼어요!”
“별말씀을요. 어서 렙업하셔서 하루빨리 페가수스를 얻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또다시 말을 인사를 건네오는 유저 둘.
시공의 틈새.
공틈에서의 사냥은, 항상 이렇게 끊임없는 마주침의 연속이었다.
사실 처음엔 이런 유명세가 귀찮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하나하나 직접 조작하느라 힘든 가상현실 속 사냥에서, 이런 짧은 대화 하나하나가 활력소가 되는 기분.
이런 걸 보면, 간혹 날 보고 관심종자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듯싶다.
[3,200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2,800의 어비스 수치를 획득했습니다.]
“이쯤이면 다 됐으려나? 이젠 몹들이 잘 안 보이네. 공틈에 사람이 너무 많아졌어…….”
군단장 베르몬을 잡고 얻었던 업적, ‘심연과 조우한 자’.
이 업적에 붙어있는 심연 몬스터 한정 추가 데미지 덕분에, 공틈에서의 사냥은 다른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흠이라면, 이제는 유저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서 몹을 구경하기 힘들 지경이라는 점이었다.
운 좋게도 연달아 심연의 파편 조각을 잡아내고 주변을 둘러보자, 페가수스 2마리가 나란히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에 타고 있는 라이더에게서 길드 마크가 보이지 않는 거로 봐선, 일반 유저로 보였다.
‘이제는…… 제법 눈에 많이 띄네!’
공틈만의 특수성 때문에 중레벨들도 많이 찾는 곳이긴 하나, 기본적으로 이곳은 고레벨 사냥터였다.
그러니 여길 찾는 유저들 중에 페어리 퀸 퀘스트를 통해 페가수스를 얻은 유저가 보인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한데 태성 라인이 콘틀랑 정상을 포기한 지 채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많은 라이더들이 보이는 건 참 감회가 새로운 일이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50기는 넘는 라이더들을 봤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일반 유저 입장이라도…… 획득 루트가 공개됐다면, 만사 제쳐두고 저것부터 얻으려 들었겠지.’
기존 그리폰 알의 시세가 갑자기 똥값이 되어, 일부 장사꾼들의 원망 섞인 귓속말을 받긴 했으나…….
그보다는 감사 귓속말을 수백 배는 더 넘게 받았다.
잠시 귓속말 수신 레벨 제한을 350까지 높여두었는데도 이 정도였으니, 거의 웬만한 일반 고레벨 유저들은 한 번씩 전부 귓속말을 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앞으로 타연이 어떻게 흘러갈는지…….’
천계와 마계의 업데이트와 새로운 직업.
태성 라인의 등장과 그에 대항한 유저들의 첫 봉기.
그리고 대규모 비행 탈 것의 등장…….
타연의 앞날과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한 치 앞이 예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확했다.
(지옥불: 드로야, 오늘이 맞지? 시간이 다 돼 가는 것 같아서..)
(나: 아, 형님! 맞습니다. 아마 오늘 가능할 거예요. 잊지 않고 귓말 주셨네요.)
(지옥불: 그간 고생이 많았다. 형이 부담을 줬는데도, 불평 없이 잘 해내 줘서 고맙고)
(나: 고생이랄 게 있나요? 다 제가 잘되는 일인 건데요. 형님 덕분에 마음도 다잡고 열심히 할 수 있었습니다.)
(지옥불: 그래. 아무튼 이 형도 로그아웃해서 함께 기다려 보마. 그동안 수고 많았다!)
(나: 수고는 뭘요. 감사합니다, 형님!)
그건 바로 레벨업.
언제나 새로운 과실과 막대한 보상을 얻는 건, 최선두에서 앞서나가는 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난 태성을 무너뜨려야만 했기에, 놈들보다는 무조건 앞서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무엇보다, 줄곧 랭킹 1위의 상징이었던 다리우스를, 그 자리에서 꼭 끄집어 내려오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 시간도 다 되어가고 주변에 딱히 사냥할 몹들도 보이지 않아, 호라이즌 마을로 복귀했다.
그리고는 마을 중앙에 있는 NPC를 찾아갔다.
“내게 어비스 수치를 건네준다면, 순수한 에너지로 치환해서 자네에게 되돌려주도록 하지. 물론 나로서도 힘이 드는 일이니, 조금은 내 몫을 챙기겠네.”
[입력하신 5,512,660 어비스 수치를 경험치와 교환하시겠습니까?]
[YES]
[어비스 수치가 그에 상응하는 경험치로 환산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텔파스.
녀석에게 어비스 수치를 건네자, 특유의 모션과 함께 묘한 아지랑이들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봐왔던 아지랑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부피가 컸는데, 곧바로 내 몸속으로 전부 다 흡수되어 사라졌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심연의 망토를 구매하느라 어비스 수치를 탈탈 털어 넣은 아베르 수성전 이후.
난 단 한 번도 경험치로 바꾸지 않고 모든 어비스 수치를 모아왔다.
그래서 그런지, 절반도 채 되지 않던 경험치 바는 순식간에 전부 다 채워져 레벨이 올라버렸다.
‘드디어 395렙!’
지난 업데이트 이후.
여러 사건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았지만, 그래도 레벨업만큼은 소홀히 하지 않고 틈틈이 챙겼다.
남들 잘 거 다 자고 놀 거 다 노는 시간에도, 없는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사냥터를 찾았다.
-뭐야, 언제 일어나서 접속했냐? 어제도 나보다 늦게 로그아웃하지 않았냐?
-이제 일어났냐? 깨우다 귀찮아서 먼저 들어왔다. 너도 얼른 사냥이나 해라. 잠 좀 줄이고!
-와…… 이 지독한 새끼. 진짜 어디에 이런 근성이 숨어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네!
하지만 불만은 조금도 없었다.
보잘것없고 평범한 유저였던 내가 지금 같은 위치에 서게 된 건, 신검이란 운과 더불어 이런 숨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니까.
지지리 운도 없던 당시, 한 번만 운이 찾아오면 최선을 다해보겠다는 그 결심을……
아직도 난 잊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산드로: 저는 이제 그만 로그아웃합니다. 다들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당근당근단검: 어? 벌써 주무세요?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오늘은 일찍 들어가시네요?]
[축복받은무빙: 그러게? 요즘 바짝 달리더니 좀 지쳤나 봐?]
[축복받은파볼: 아이, 드로가 좀 쉴 수도 있지, 뭘 그래요? 그래, 낼 봐~]
[산드로: 하하!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좀 있으면 랭킹 업데이트될 시간이잖아요]
누가 타연 폐인 길드 아니랄까 봐,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원 풀 접속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런 길드의 길마로서 가장 먼저 나가는 건 좀 겸연쩍었지만, 오늘은 내 타연 인생에서 기념비적인 일이 있는 날이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무적살라딘: 뭐야, 그럼 너 설마?]
[산드로: 네, 맞아요. 좀 전에 찍었습니다. 395레벨!]
* * *
“아직 인챈터랑 악마 사냥꾼 랭킹 1위는 250렙을 못 찍었네? 갭이 줄어들려면 한참 지나야겠는데?”
“그래도 신규 유저들은 죄다 그거 하더라. 제법 밸런스도 좋고 스킬 등도 희귀해서, 파티에서 귀족 대접받나 보더라고.”
“아, 그래?”
강남의 야경이 잘 보이는 거실.
나와 현중이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자정이 되기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새롭게 2개의 직업이 늘어 18개의 직업이 된 타연.
공식 홈페이지에 각 직업당 10명씩 명시되는, 총 180명의 유저를 우리는 랭커라 부른다.
그리고 여러 직업 게시판의 최상단에는, 각 직업 목록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목록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다.
바로 ‘통합 랭킹’ 게시판.
랭커 중의 랭커.
소위 ‘탑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타연에서 가장 높은 랭킹을 자랑하는 10명이 명시된 목록이었다.
“아무튼 간에…… 와! 이 자식이 여기에 올라오는 날이 오다니…… 역시 사람 인생은 모르는 거구나!”
“넌 맨날 나만 보면 그 소리더라. 나야말로 신기하다 이놈아. 내 친구 현중이가 랭커라니? 물론 내 덕이 컸지만!”
“어쭈. 그게 왜 니 덕이야? 내가 피똥 싸가며 열렙한 결과지!”
“알겠다, 알겠어. 전부 다 네가 잘한 거니까 오늘은 그만하자. 나 지금 좀 많이 떨리니까.”
“역시 떨리긴 하지? 하긴 나도 내 일이 아닌데도 떨리는데 오죽하겠냐? 흐흐.”
“다리우스 자식, 설마 오늘 레벨업한 건 아니겠지?”
“그 자식 394렙 찍은 게 이틀 전 아니었어? 너처럼 어비스 수치 탈탈 털어 넣은 거 아니라면 절대 불가능할걸?”
“흐흐, 그렇겠지? 내가 그럴까 봐 애써 모은 거니까!”
처음 랭커에 진입한 지도 어느덧 두 달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급속도로 랭커급에 도달했던 것과 달리, 랭커 이후부터는 확실히 단계를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다른 랭커들도 놀고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
랭커급과 달리 랭커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막강한 서포트를 받으며 레벨업에 몰두하는 이들이었다.
각종 물약과 음식을 아낌없이 먹거나, 힐러들을 대동하며 사냥하는 등.
최고의 레벨업 효율을 내기 위해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유독 우리 길드원들만 그러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랭커 순위는 쉽게 올라가지 않았다.
그런 레벨업으로 가장 유명한 놈은 역시나 다리우스.
힐러와 버퍼, 그리고 몹몰이 꾼 등등.
녀석은 필드 사냥을 할 때, 다른 랭커들과 달리 최소 대여섯 명 이상을 대동한다고 들었다.
파티를 맺지 않은 채 몰이꾼들이 몰아오는 몹을 쉴 새 없이 잡으며 사냥하는 녀석의 사냥법은, 초호화 ‘귀족 사냥법’으로도 유명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 년을 이렇게 사냥하는 건, 알면서도 따라 할 수 없는 일.
워낙 훌륭하고 많은 인재풀을 자랑하는 놈의 길드원들과 막강한 재력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래도 솔플로 그런 자식을 따라잡은 거라니…… 대단하긴 대단해. 역시 네 마쉴 도둑은 신검과 최적화된 테크트리였다.”
“더불어 놈이 사냥하던 시공의 틈새를 빼앗은 게 컸지. 그게 아니었다면 따라잡기 쉽지 않았을 거야. 놈한테도 마신검이 있으니까…….”
“야, 잠만! 시간 다 돼간다. 정신 차리고 확인해보자!”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키 오키.”
놈과 잡담을 나누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11시 59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갑자기 더욱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새로 고침을 연타하자…….
-1위 다리우스(Lv.394)
-2위 산드로(Lv.394) ↑1
-3위 테이커(Lv.393) ↓1
……………………
팟!
-1위 산드로(Lv.395) ↑1
-2위 다리우스(Lv.394) ↓1
-3위 테이커(Lv.394)
……………………
아무리 새로 고침을 눌러도 변화가 없던 게시판의 글자들이, 갑자기 자리를 변동했다.
그리고 그 최상단에는 내 이름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떴다! 1위! 아자아자!”
“…….”
“와하하! 떴다고 이 자식아! 뭐라고 말 좀 해봐, 뭐 하는데?”
“…….”
“뭐야, 왜 이래. 막상 1위 찍으니까 별로냐? 안 기뻐?”
“……기쁘지 않냐고? 그럴 리가 있겠냐?”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냐?
태어나 처음으로…… 1등이란 거는, 난생처음 해보는 건데!
“졸라 기쁘다, 이 자식아! 우아아아아!! 내가 1위다 1위! 타연에서 내가 1위라고!”
“아이고, 깜짝이야! 조용히 좀 해! 산드로가 여기 살고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날 일 있어? 얼른 목소리 좀 낮춰!”
“푸흐흐, 현중아. 푸흐흐흣, 현중아!”
“이 자식이 술도 안 마셨으면서 취했나, 왜 이래? 왜? 뭐 땜에 부르는 건데?”
“너 내가 누군지 아냐?”
“누구긴 누구야, 내 친구 강지환이지! 타이탄 연대기 지존!”
“맞다, 자식아! 역시 잘 아네! 크흐흐흐! 오늘부터 타연 지존은 나다 나! 강지환!”
그동안 신검을 얻은 이후로 겪었던 모든 일들이 갑자기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힘들어도 이를 악물며 억지로 사냥했던 일.
배신당해 괴로웠던 일.
혹은 가슴 졸이며 도전했던 일.
통쾌하게 복수했던 일.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감동받았던 일까지…….
모두 타연을 하면서 특별한 순간들로 남겨진 기억들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또 다른 기억으로 오랫동안 생각날 것 같았다.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오며, 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