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랭킹 1위 (2)
랭킹 1위에 등극한 후,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전화를 받았다.
-축하해요, 형님! 이젠 정말로, 명실상부한 타연 지존이네요!
-축하한다 드로…… 아니, 지환아! 함께 길드를 만들 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나 보다.
-축하해, 지환아! 근데 이런 날은 좀 만나야 되는 거 아니니? 그리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어서…… 당일 직전에야 알게 만들래!
같은 버닝스타 길드원들 진심어린 축하.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차례 통화 폭풍이 지나가자, 생각지도 못한 분들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정말 자랑스럽구나, 아들! 랭킹 1위면 한국에서 1등이란 소리 아니니?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할 때 혼내지 말 걸 그랬구나!
-고생했다! 기왕 고생하는 거, 조금만 더 해라! 젊은 날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바로 어머니와 아버지.
랭커라고는 말씀드렸어도, 아이디는 알려드리지 않았었는데…….
역시나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계셨던 모양이었다.
하긴 일반 유저 중에서 급격히 두각을 드러내 랭커가 된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
거기다 아무리 커스터마이징을 했다곤 해도, 체격과 인상이 비슷했으니 못 알아보시는 게 더 이상할지 몰랐다.
‘그래도 생전 타연에 관한 거라곤, 하나도 모르시던 분들이었는데…….’
이 정도를 알아내시는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셨을 터.
연락도 거의 없으시고 내색을 전혀 안 하셔서 관심이 없으시나 했는데, 오히려 정반대였다.
이렇게 랭킹이 바뀌자마자 칼같이 연락을 주신 걸 보면.
“알겠지, 지환아? 사람들이 너한테 얼마나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지?”
“그러게. 그냥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오게 됐네.”
“태성을 잡으려는 목표를 달성하려면, 랭킹 1위 정도는 원래 당연한 거 아니었어?”
“맞지. 그리고…… 내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도 했고.”
사실 신검을 얻고도 조용히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허나 난 그 기회를 그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그걸 활용해 복수하기로 마음먹었다.
성공 가능성이 희박할 뿐만 아니라 상당히 위험하기까지 했던 발상.
이유는 대상이 타연에서 가장 크고 막강한 길드이자, 현실에서도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태성’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당연히 시작할 때부터, 게임 속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이뤄질지 모를 보복을 염려해야만 했다.
첫 등장부터 사람들 앞에서 공개 선언을 하며 존재감을 알리고.
종종 유저들을 향해 이벤트도 하고.
드문드문 방송에 나와 인터뷰도 했던 일들 전부가.
모두 사람들 머릿속에 ‘산드로’라는 인물을 각인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했던 행동들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려도 아무도 모르고 보잘것없는 그런 존재가 아닌, 사람들이 항상 관심을 갖고 행적을 궁금해 하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 최종 목적지에 도달했다.
바로 통합 랭킹 1위.
‘랭커’란 위치도 타연 0.001%에 속하는 극소수에 연예인급 관심이 집중되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180명이나 됐다.
하지만 타연 No.1이라는 자리는 단 하나!
무명 아마추어 가수쯤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가 오디션 프로에 나가 1위를 차지하게 된다면 아무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하물며 수천만 명이 매일 접속하고 전 세계적으로 흥행하고 있는 타연의 1위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젠 난…… 더 이상 놈을 겁내지 않아도 될 위치에 서게 됐다..
그러니 앞으로는, 이런 홀가분한 마음으로 놈을 더욱 거리낌 없이 마음껏 짓밟아주는 일만 남았다.
현중이와의 짪은 회포를 마치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랭킹 1위를 달성했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내일도 다시 레벨업에 매진하고 선두를 유지하려면 이까짓 작은 성취에 만족해선 안 됐다.
-드로야, 이대로 승리했다고 지만하지 마라. 다리우스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악랄한 놈이니까……. 오늘 공성전에서마저 패배한 지금의 녀석이라면, 앞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도 모른다.
잠들기 전 문득, 아베르 수성전이 끝나던 당시, 제독이 내게 다가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기도 무슨 짓을 당했다던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젠 놈도 날 건들 생각은 하지 못하겠지? 이제 난, 타연의 랭킹 1위니까!’
* * *
-라라 랄라라.
장엄한 로그인 풍경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타이탄 연대기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모험이 되길 바랍니다.]
늘 한결같은 웰컴 메시지도, 식상하긴커녕 반갑게 느껴졌다.
모든 게 감사하고 즐거운 기분.
하지만 이 기분은 잠시를 이어가지 못하고 금세 식었다.
[업적 ‘전설을 만들어 가는 자’를 획득했습니다.]
갑자기 한 것도 없이 새 업적을 얻었다는 메시지까지는 괜찮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보나마나 랭킹 1위 달성 보상으로 제공된 것 같은 이름이었기에.
하지만 랭킹 1위에게 준비되어 있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업적 ‘제국 제일의 인재’의 숨겨진 효과가 적용됩니다.]
‘뭐냐 이건?’
내가 가진 모든 업적 중에서 가장 좋은 업적.
S급 중에서도 특S급인 이 업적이 더 좋아질 리 없다.
서둘러 업적 창을 열어 옵션을 살펴보자, 아니나 다를까 우려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업적: 제국 제일의 인재(S)]
* 자신의 재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성장 속도가 빨라집니다. (경험치 획득 시 +20%)
* 제국 황실 기사단의 입단 시험을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클리어한 업적입니다.
* 이 업적은 기록이 경신되더라도 사라지지 않지만, 효과는 다소 감소하거나 사라질 수 있습니다.
(* 이 업적은 더 이상 후발주자가 아니게 될 시, 효과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다시 후발주자가 될 시, 그 즉시 효과는 재적용됩니다.)
새롭게 추가되어 있는 괄호와 메시지.
그 안에는 내 초고속 성장의 밑거름이었던 효과가 끝났음을 알리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아…… 이러면 너무 아쉬운데!”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까 입맛이 썼다.
사실 그동안, 이 업적을 얻은 이가 통합 랭킹 1위를 달성한 일은 없었다.
내가 타임 어택에 세워놓은 절대 깨지 못할 업적.
지금은 ‘통곡의 벽’이라고 불리는 내 기록이 나타나기 전까진, 워낙 타임 어택의 순위가 경신에 경신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냥 다른 유저가 1위 효과를 갖지 못하는 정도로만 만족해야 하려나……?”
이제 막 99레벨에 머물러 있는 유저가 날 따라잡을까 싶다만.
막상 나만 해도 반년 만에 1위가 되었으니 세상 일은 모르는 거였다.
아무튼, 잠시 기분이 다운됐으나 새로 얻은 업적을 보니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았다.
[업적: 전설을 만들어 가는 자(S)]
* 이 업적은 타이탄 연대기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업적입니다. (모든 스탯 +20)
* 업적 효과로 쉽게 죽지 않는 신체를 갖게 됩니다. (물리 및 마법 방어력 +10%, 회피율 +10%)
* 이 업적은 다른 이가 새로 얻게 된다 하더라도 효과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역시 그럼 그렇지, S급 업적이라니! 일루전도 뺏기만 하기엔 양심에 찔렸나 보지? 그나저나, 다리우스 자식은 늘 이런 사기 효과를 누려왔다는 건가?”
-직접 확인해 보지 그래? 이젠 너도, 그걸 얻게 될 날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말야.
잠시 랭킹 1위를 차지했던 카이저 형님에게서 힌트처럼 들었던 업적.
사실 게임 속 통합 랭킹 1위라는 것보다 더한 ‘업적’이랄 게 존재할 수 있을까?
과연 그에 걸맞게, 랭킹 1위를 달성하면 주어지는 효과 또한 S급.
이렇게 로그인과 동시에 내 기분은,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했다.짧게 길드원들과 아침 인사를 마치고, 일과처럼 시공의 틈새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의 행보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원…….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은 없었는데. 아오, 더 늘어났네!”
아는 척을 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훨씬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런 거야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는 일.
문제는 일전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진 ‘꼬장’ 유저들이 재등장했다는 것이었다.
“왜? 왜? 약오르냐? 그럼 그냥 죽여!”“네까짓 게 뭔데 랭킹 1위야? 이게 말이나 돼?”
‘말이 안 되는 건 또 뭔데?’
죽일 듯이 달려드는 도둑과 전사들.
어림잡아 십여 명은 넘는 인원이 날 쫓아다니며, 계속해서 사냥을 방해하고 있었다.
내가 공틈에 모습을 드러낸 그 직후부터 계속!
“그만들 좀 하시고 가시죠?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피차 피곤하게.”
“아니, 난 하나도 안 피곤한데? 오히려 경험치도 잘 오르고 개편한데?”
“그러게. 진작부터 산드로만 쫓아다닐 걸! 이 좋은 걸 이제야 알게 됐네!”
“이렇게 꿀빠는 사냥터니까 1위를 뺏은 거겠지! 이 양아치 새끼, 그것도 이젠 끝이다, 끝!”
내가 사냥하는 심연의 파편 조각들을 함께 공격하는 유저들.
덕분에 발견하기도 힘든 녀석의 경험치 절반을, 고스란히 꼬장 유저들과 나눠먹어야만 했다.
사실 예전에도 필드 사냥에 나서면 이런 유저들이 간혹 하나둘씩 붙었다.
하지만 이곳은 공틈.
흑풍단이 발에 치이는 이곳에서 내 사냥을 방해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단 하루 만에 이렇게나 많이 생기다니…….
서로 간에 내 위치를 공유하며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간 짓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운 좋은 줄 아세요. 예전 같았으면 싹 다 죽였을 텐데.”
“그러니까, 말만 그러지 말고 죽여보라니까? 천하의 산드로가 왜 이제 와서 사릴까나?”
죽여봤자 머더러 신세.
특이하게도 이곳 심연의 몹들은 아무리 잡아 봤자 머더러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런 놈들은 죽여봤자 계속 부활해서 쫓아올 게 뻔했다.
즉, 이렇게 내가 어딨는지 훤히 드러난 상태에서는 이 자식들을 떨쳐내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그래 그래! 니들이 이겼다! 떠나줄게! 여기서 사냥 안 해. 안 한다고!”
“뭐야, 도망이냐? 지존 맞아? 이것도 못 버티고 도망치게?”
“맘대로 생각하세요. 1위 찍은 첫날부터 이게 뭐야? 진짜 태성 자식들 야비한 건 여전하네!”
그 길로 곧장 시공 포탈을 타고 본토로 돌아왔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타연 최고 레벨에 도달한 상황.
괜찮은 경험치를 먹을 만한 필드 사냥터는,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젠 추가 경험치 버프도 없어서 인던은 좀 그런데…… 아, 그렇구나! 거기가 있었지!’
다시 영웅의 전당 인던이나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순간, 가 볼 만한 곳이 생각났다.
조심스럽게 은신 상태로 마을을 빠져나온 후, 아무도 없는 곳에서 훼라리를 타고 동쪽을 향해 비행했다.
그렇게 잠시 후 도착한 곳.
바로 업데이트 당일, 벨루타 해안가에서 찾아냈던 ‘금지’였다.
“오! 역시나 사람이 없구나! 하긴, 운 좋게 찾아냈더라도, 여기서 누가 사냥하겠어?”
해안가에서 제법 떨어진 바닷가 한복판.내 눈에만 금빛으로 빛나는 이곳은, 역시나 여전히 찾아낸 유저가 없는지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난 금지 상공으로 이동한 후, 훼라리를 제자리에서 정지 비행 모드를 시키고 바닷속으로 뛰어들었다.
띠딩! 띠딩!
연달아 울리는 어그로 감지음.탁해진 시야 너머로 해변가 머맨들보다 덩치가 큰, ‘심해 머맨 전사’들이 빠른 속도로 몰려오는 게 눈에 띄었다.
현재 내 MP는 가득 찬 상태.
겁낼 필요가 없던 지라 곧바로 달려들었고, 놈들의 반사 데미지는 익히 잘 알고 있는 터라 약점인 배 부근만 골라서 공격했다.
‘생각보다 몸빵이 센데?’
놈들의 공격력과 특징은 잘 알지만, 전에 찾았을 때는 길드원들의 원거리 지원 공격으로 다소 수월하게 정리했다.
한데 혼자서 찾아오자, 생각보다 사냥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반사 데미지 때문에 광역 공격이나 멀티 히트를 먹이지 못하는 반면, 놈들은 최소 열 마리 이상이 둘러싼 채 단체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결국 난도질과 다른 버프들을 사용한 끝에 처음 몰려든 10마리는 정리할 수 있었지만, 서둘러 그림자 밟기로 공중에 떠 있는 훼라리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1차로 몰려든 놈들이 죽어가는 것과 동시에, 2차로 다른 놈들이 우르르 몰려와서였다.
“히야! 몹은 넘쳐나는데 내가 버티지 못하는 사냥터가 타연에 아직 남아있었네? 근데 이걸 어쩐다?”
몰아서 사냥한 탓에 경험치가 상당히 많이 들어왔다.
2.0 업데이트와 연관된 곳인 만큼, 놈들의 레벨도 상당히 고레벨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단지 문제는 이렇게 훼라리에서 피 타임을 가지며 쉬엄쉬엄 사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뿐이었는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던 찰나, 뜻밖의 연락을 하나 받게 되었다.
(로만전자: 안녕하세요, 산드로 님.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혹시 대화 괜찮으실까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숱하게 들어오는 귓속말들.
하지만 쉬는 시간이기도 하고 낯익은 단어가 보이기도 해서, 다시 한번 아이디를 자세히 살펴 보았다.
마검사, 로만전자.
비록 카이저 형님에 밀려 만년 랭킹 2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그는 수차례 우승 경력을 자랑하는 정상급 프로게이머 출신의 유명 랭커였다.
그런 거물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는데, 그냥 무시할 순 없었다.
(나: 네? 아.. 물론 가능합니다!)
(로만전자: 바쁘실 테니까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많은 제의가 들어오셨을 거라고 예상되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 차 여쭤볼게요. 산드로 님, 혹시 기업 스폰 받아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