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일인자의 무게 (1)
[축복받은파볼: 드로, 너 요즘 바쁜 건 알겠는데.... 너무 따로 노는 거 아니니? 가끔은 좀 비효율적이더라도, 함께 사냥도 하고 인던도 가고 그러자~ 응?]
[축복받은무빙: 넌 우리 길마한테 도움은 못 줄망정 무슨 소리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
[축복받은얼굴: 에이, 누나가 서운할 만도 하죠~ 이젠 다리우스보다 2렙이나 높으니까 좀 쉬엄쉬엄해도 괜찮을 텐데... 통 그러질 않으니까요.]
오늘 자정에 랭킹 게시판을 통해 또다시 경신된 내 레벨을 본 길드원들이, 조용히 있다가 갑자기 한마디씩 했다.
랭킹 1위를 달성한 지 어느새 열흘.
로만과의 스폰 계약 건은 잠시 시간을 갖기로 결론지은 후, 그간 난 한계돌파와 함께 단둘이 사냥에만 몰두했다.
-와! 전 진짜 이렇게 지독하게 사냥만 하는 사람은 처음 봐요! 저도 나름 초고속으로 렙업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드로 님한테는 쨉도 안 되겠네요!
-미쳤다, 미쳤어! 암만 미친 장비와 사기 테크라고 해도…… 이런 레벨업 속도가 말이 되는 거예요? 이건 뭐, 다른 사람들한테 말해줘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데요? 아…… 이미 커뮤니티에선 또 버그 쓰는 거 아니냔 말이 퍼지고 있긴 하던데, 크크.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서로 농담도 주고받을 만큼 상당히 친해졌다.
아무래도 아무도 없는 외딴 바다 한복판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씩 붙어서 사냥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하루 10시간이 한계.
끝내 아이디 값은 하지 못한 그의 플레이타임 덕분에, 그나마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대에는 혼자 시공의 틈새로 가서 경험치를 쌓았다.
그런 치열한 노력 끝에, 1레벨 차이였던 다리우스와는 2레벨 차이로 벌려놓을 수 있었다.
‘오늘 드디어 400레벨을 찍는 건가……!’
원래도 사냥에 집중하는 편이긴 하지만, 요 며칠 더 몰두한 이유.
그건 역시, 어느덧 목적지가 코앞에까지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산드로: 다들 죄송합니다! 그래도 제가 400렙 찍으면 바로 도와주실 일이 쏟아질 테니, 좀만 참아주세요! 아마 오늘 밤이면 가능할 겁니다!]
[당근당근단검: 네? 드로 형, 벌써 레벨업하는 게 가능해요? 어제 399렙 찍었던 거 아니셨어요?]
[무적살라딘: 그러게... 아무리 사냥이 빨라도, 이게 가능한 일이야?]
[산드로: 열흘간 다시 틈틈이 모은 어비스 수치가 제법 되거든요. 그래서 오늘은 밤새야 할지도 모르니까, 다들 쉬시려면 지금 쉬고, 오후에 재접속하세요!]
금지 수중왕국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이곳 바다는, 정말 환상적인 사냥터였다.
업데이트 이전에 존재하던 다른 어떤 필드 사냥터보다 고레벨 몹들이 등장할 뿐만 아니라, 죄다 선공에다 감지 범위도 넓어서 몰이꾼이 필요 없었던 것이다.
“벌써 또 들어가시는 거예요? 좀만 더 쉬고 들어가시죠?”
“구슬 효과가 다 떨어지기 전에 렙업하려면 시간이 없어요. 그럼, 다시 버프 주세요!”
“에휴, 알겠어요. 인챈트 엘리멘탈! 인챈트 아머!”
훼라리 위에 앉아 MP를 채우던 한계돌파.
그가 다시 일어나 버프를 걸어주자, 검과 갑옷에 마법 효과가 스며들었다.
다른 버퍼들과 달리 인챈터는 본연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게 아니라, 장비에 특수 효과가 적용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좋은 장비를 착용할수록 더욱 고효율인 구조라, 나와는 최고 궁합인 직업이나 다름없었다.
풍덩!
벌써 수천 번은 족히 반복했을 잠수.
하지만 지금은 처음 잠수하던 당시와 사뭇 달랐다.
심해 머맨 전사들이 십수 마리 수준이 아니라, 얼핏 백 마리도 넘어 보일 만큼 떼거리로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물속이라 궁병이 없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할수록 나한테 기가 막히게 최적화된 사냥터였다.
사실 이곳에서 한참을 사냥하고 나니, 금세 몹들에 대한 갈증이 심하게 느껴졌다.
마나 웨폰을 통해 마나 흡수가 풍족히 이뤄지자, 몹들이 충분히 몰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냥이 너무 평탄했던 것이다.
그마저도 엊그제 한계돌파가 새롭게 인챈터 아머를 배우고 곧바로 5성을 찍게 되자, 사냥은 말도 못하게 순탄해졌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내가 강구한 수단은, 바로 ‘심연의 구슬’이었다.
한번 설치하면 24시간 동안 몬스터들을 끌어당기는 특수한 아이템.
50만 어비스 수치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만큼, 한 번 설치한 이상 뽕은 있는 대로 다 뽑아내야 했다.
“끄륵! 꾸루륵!”
“키룩! 꾸륵!”
놈들의 시체가 사라지며 남겨진 아이템들.
반사 데미지를 신경 쓰지 않고 광역기와 멀티 히트를 남발하다 보면, 어느새 주변은 이렇게 놈들이 드랍한 템들로 반짝거렸다.
[머맨의 단단한 비늘(1)을 획득했습니다.]
[머맨의 단단한 비늘(1)을 획득했습니다.]
[빛나는 마력석(1)을 획득했습니다.]
……………………
‘오! 또 나왔네?’
이곳이 최고의 사냥터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이유.
그건 이곳이 경험치 외에도 벌이도 쏠쏠한 부자 사냥터였기 때문이었다.
아직 사용처를 모르는 재료 템은 논외로 하더라도, 무려 빛마석이 드랍됐다.
타이탄 소환 재료로 빛마석이 사용된다는 사실이 알려진 후, 이제는 부르는 게 값일 정도로 빛마석의 몸값이 높아진 상태.
워낙 드랍률이 낮기로 소문난 이 빛마석이, 이곳에서는 시간당 하나씩은 드랍될 정도로 쏟아져 나왔다.
‘사실 혼자서 수십 명이 사냥하는 것보다 많은 몹들을 잡고 있는 셈이니까, 드랍률이 높다고 볼 순 없는 건가? 아무튼 지금 시세가 하나에 4천 골드니까…… 시간당 40만 원씩 벌고 있는 거네?’
이제는 골드 따위야 얼마를 벌든 크게 상관이 없는 수준인데도…….
그리고 자꾸 골드를 현실 돈과 연관 짓지 않으려 해도…… 한 번씩 이렇게 자동으로 계산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경험치뿐만 아니라 골드도 쓸어 담으면서, 어제 설치한 구슬의 지속 시간이 끝나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사냥했다.
* * *
“최소한 한 달은 걸릴 거로 생각했는데…… 역시 드로 형님은 괴물이세요.”
“맞아. 랭킹 1위인 자식이 나보다 더 레벨업이 빠르단 건, 진짜 말도 안 돼! 사람들이 버그 악용하는 거 아니냐고 욕하는 게 이해가 간다니까?”
“그나마 사람들은 드로 형님이 타임 어택 경험치 버프를 먹고 있는 줄 알고 있잖아요. 근데 그것도 없는데 이 정도란 걸 알게 되면…… 밸런스 패치하라고 진짜 폭동이라도 일어날걸요?”
곁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라챤이와 현중이.
얼마 전 랭킹 1위를 달성하던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전 길드원들과 함께 호라이즌 마을의 텔파스를 다시 찾았다.
온종일 레벨업에 매진한 결과, 레벨업까지는 고작 20%만 남겨뒀기 때문이었다.
“자자, 조용! 그럼 바로 바꾸겠습니다!”
[입력하신 2,130,800 어비스 수치를 경험치와 교환하시겠습니까?]
[YES]
[어비스 수치가 그에 상응하는 경험치로 환산되었습니다.]
솨아아!
익숙한 방법으로 수치를 바치자, 곧 내 몸 주위로 환한 빛무리가 쏟아졌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됐다!”
“오! 경험치 계산 철저했네! 이제 400……”
“쉿! 현중아, 조용조용!”
레벨업 이펙트 때문에 주변을 돌아다니던 유저들도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상황.
어차피 자정이 지나면 내 레벨업 소식을 알게 되겠지만, 굳이 당장 시선을 끌 필요는 없었다.
지금 우리가 일부러 이렇게 모인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으니까!
[산드로: 400렙 찍었으니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대탐험시대: 얏호! 드디어....!]
[축복받은무빙: 그래. 다들 다시 은신 쿨 돌리자!]
그간 레벨업에 매진하는 동안, 400레벨을 찍으면 해야 할 목록들을 하나씩 정리해두었다.
이것저것 시도해 볼 것들이 많았지만…… 가장 최우선은 역시나 이것일 수밖에 없었다.
[산드로: 그럼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환영의 마탑까지!]
바로 천계 입장 관련 퀘스트.
그 키를 쥐고 있는 주나스를 찾아보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이었다.
다들 은신이나 은신 망토를 쓴 채, 조용히 주나스가 있는 환영 나무로 이동했다.
이곳의 위치는 아직 극소수밖에 모르기 때문에, 다행히 마탑 안에는 다른 유저들의 모습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대는 이곳과 본토를 연결한 모험가, ‘산드로’로군? 어쩐 일로 이 누추한 곳을 다시 찾았는가?”
“주나스 스타시커 님. 다름 아니라, 지금 본토는 온갖 불길한 ‘예언’ ‘마계 침공’의 징조들로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자격’도 갖췄다고 판단되었기에, 이렇게 ‘천계’로 향할 방법에 관해 여쭙고자 찾게 되었습니다.”
“보아하니 그대는 이제 자격을 충분히 갖춘 것 같군. 천계라…….”
뭔가 얘기해 줄듯 새로운 멘트를 날린 주나스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역시나 일루전.
불친절한 플레이 방식으로 유명한 특징이, 여기서도 다시 한번 드러났다.
충족 레벨을 달성했음에도, 퀘스트만큼은 쉽사리 전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산드로: 자, 다들 시작하세요!]
[축복받은얼굴: 천사장 잡은 거 얘기해봐!]
[당근당근단검: 형, 고레벨 콘텐츠 위주로 말해 보세요. 공중정원이나 페가수스요!]
“‘천사장’과 ‘페어리 퀸’을 만나봤음에도 방법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페가수스’가 연관되었습니까?”
“보아하니 그대는 이제 자격을 충분히 갖춘 것 같군. 천계라…….”
몇 차례 키워드를 반복해 보았는데도, 여전히 깜깜무소식인 주나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 길드에는 이런 퀘스트 해결에 가장 특화된 길드원이 존재하고 있었다.
[대탐험시대: 형님. 엘프나 세계수에 관해 말해보세요.]
[산드로: 응? 그거랑 천계랑 무슨...?]
[대탐험시대: 제가 시공의 틈새에 오기도 전에 주나스의 존재를 예상했던 것도, 전부 그것과 관련 있었거든요. 분명 반응이 있을 거예요.]
“주나스 님. 혹시 ‘엘프’나 ‘하이 엘프’. 혹은 ‘에랄루실’ 님을 아세요? 아니면 ‘세계수’에 가보신 적은 있나요?”
“산드로……. 그대는 어떻게 굵은 가지 중 하나로 이름 높은 ‘에랄루실’ 님을 알게 된 건가?”
“나이스! 맞췄다!”
대탐이의 말대로 키워드를 이것저것 던져보자, 드디어 처음 보는 반응이 나왔다.
그리고 이어진 주나스의 설명을 들어보니, 결국 ‘영웅의 전당’을 먼저 찾았었던 게 헛된 발걸음이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다.
“그대들이 알려준 바에 따르면 이미 본토는 천년의 세월이 흐른 곳……. 세계수가 건재하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고 들었네. 하지만 세계수의 은혜로 인해 지상에 마나가 풍부하던 시절과 지금은 다를 수밖에 없지……. 따라서 지금의 내게는, 천계로 향하는 포탈을 열어줄 마력이 충분하지 않네…….”
“네? 그게 무슨……?”
“하지만 다른 방법은 알려줄 수 있지……. 에랄루실 님을 만나 뵌 걸 보면, 그대는 역시 마계에 대항하는 자. 그러니 믿음을 갖고 알려주겠네. 또 다른 굵은 가지 ‘메치아실’ 님을 찾아가 보면 방법을 알려줄 걸세. 이것을 가지고 생명의 숲으로 들어가 보게.”
띠링!
[퀘스트 ‘천계를 향하여’를 획득했습니다.]
[주나스의 편지(퀘스트 아이템)를 획득했습니다.]
[세계수 뿌리(퀘스트 아이템)를 획득했습니다.]
주나스의 길고 긴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퀘스트 템과 퀘스트를 획득했다.
[천계를 향하여: 연계 퀘스트]
* 클리어 난이도: B
* 생명의 숲 어딘가에 있는 ‘메치아실’과 조우하라.
* 퀘스트 클리어 조건: 굵은 가지 ‘메치아실’과의 만남
* 퀘스트 클리어 보상: ?
이어서 주나스가 준 퀘스트 아이템들도 살펴봤다.
‘편지야 만나면 전해주는 용도일 테고…… 세계수 뿌리는 생명의 숲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인 건가?’
게임답게 여러 단계로 꼬아져 있는 퀘스트.
연계 퀘스트의 시작이 B급으로 다소 높은 걸 보면, 천계로 향하는 최종 퀘스트는 분명 메인 퀘스트에다 S급 수준일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길드원들과 퀘스트에 관해 의논을 나누던 중.
퀘템 확인을 위해 잠시 열어둔 인벤토리 창 안의 뭔가가, 변해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응? 설마?’
평소 무게 게이지 때문에 온갖 잡동사니를 전부 다 갖고 다니던 탓에, 인벤 한복판에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던 템.
‘미완성 스킬북’이 자리 잡은 칸 테두리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맞다! 이게 있었지!”
드래곤 투 메르타스가 드랍한 희귀 아이템.
하지만 어떤 퀘스트나 힌트도 존재하지 않아, 기약 없이 활성화될 날만을 기다려왔던 템.
그간 어떤 용도일지 추측에 추측만 거듭해오던 이 템이, 드디어 조건을 달성한 모양이었다.